고흐… ‘나사로의 부활’이네.
부활時니까…..
어제 오늘 가만히 자주 바라본다네.
램브란트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모작이라 하는데
해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엔 거의 비슷하지도 않는 전혀 다른 그림이야.
그 몸의 형상이 조금 비슷한가….
물에서 솟아난 듯
땅에서 …그렇지 딱딱한 땅을 뚫고 여린 새싹이 솟구쳐 오르듯이 죽은 사람도….
희미한데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소멸된 채…이미 소멸을 향하여 가던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그 부분이 조금 비슷하기도 하네…
램브란트의 그림은
메시지에 충실한,
빛과 어둠까지 차용하여 너무나 강렬한 예수그리스도시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팔….에 주목한 것은
램브란트도 혹시 기적과 이적에 더 깊은 눈길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슬며시 생각이 들기도 해 닐까,
아 물론 정말이지 그분은 강하고 담대하고 굳으신 분이시지만,
어쩐지,
내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저 강렬한 팔이
그렇지 내용이야.
죽은 자를 살리시는 …
죽은 자에게, 죽어서 이미 냄새나는 자에게 나사로야 일어나라…하신거니까
그러니 그 힘과 에너지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지닐 수 없는 강함!!!! 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렘브란트의 팔 …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게 고하는 것 같은 웅장한 팔보다는
고흐의 그림 속 부활이 더 부활스럽다는 거지.
이제야 조금 생각되어지는데
모든 강한 것들은 천박할 가능성이 농후해,
아니 감히 램브란트의 그림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조금 그렇더라는 거지./
그러니 나는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성향을 말하는 거야.
강함이 지닌 매력이야 말할 수 없지.
천박한 강함도 사람을 매혹시킬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매력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근원 근간 근본에 대한 이야기야.
모든 순후한 것들이 순응이 순종이 부드러움이
예수그리스도와 더 가깝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고흐의 부활이 좋아..
저 노란빛…
원래 고흐는 노란빛을 즐겨 했지만
노랑….나는 노랑색을 놀랑색으로 표현하던 한 어린이를 알고 있어.
혀가 짧아서? 귀가 열리지 않아서??
아니 그 아무도 모르는 그 사이로 노란색에 대한 표현..놀랍다는…
해석이지,
노랑색은 부활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왜 아닐까, 봄이 오려는 길목에서 피어나는 시춘목, 산수유를 보라..
그 은은한 노란빛.
아니 이즈음처럼 만개한 산수유가 아니라
어두운 숲,
채 겨울이 물러가지 않는,
겨울의 잔영이 가득한 숲에서 살짝 먹음은 노란빛.
그럼 그럼 부활을 상징하고 말고..
그 애틋함은 사랑의 완전성을 보여주기도 해 .
그윽한 하나님의 임재를 형상화한 빛이고 말고….
여리고 부드럽고…
아, 얼굴을 덮었던 손수건을 드니
거기 고흐가 있네…. 나사로가 아닌 고흐….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체화된 신앙의 표현이네,
자신의 부활을 그리는 고흐…..
어려움 속에서 고난 속에서 짓누르는 삶의 고통 속에서
그는 얼마나 얼마나 부활을 꿈꾸었을까…
그래서 부활하는 나사로대신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걸까,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가,
나사로는..아니 고흐는…
죽음에서 살아난 것보다
그 강렬함보다
저 편안함이 오히려 더 부활의 정점이 아닌가…
그러네….고흐의 눈부신 저 노오란 그림은
놀랑색으로 그려진 저 부활의 그림은
정말 부활의 장면이네.
중얼거리며 기도하지 않아도
부활을 알려주는 ….
소식이 아니라
부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기도네.
데레사
2016년 3월 26일 at 4:17 오후
내일이 부활주일이네요.
푸나무님에게도 나에게도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푸나무
2016년 3월 30일 at 10:46 오전
데레사님 부활의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물론 저에게두요. 제 때 답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최 수니
2016년 3월 26일 at 4:55 오후
부활주일이네요.
부활의 생명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머니 그만하시지요?
평안하시길 빕니다.
푸나무
2016년 3월 30일 at 10:45 오전
답이 넘넘 늦었습니다.
엄마는 이제 병원생활에 적응을 많이 하셧어요.
다리도 조금 씩 좋아지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