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윗사진이 밤의 전경…그리고 아래사진 두개는 그의 부분
몇 년 전 국제갤러리에선가
문성식의 연필 드로잉이 지닌 한없는 수사력에 몰입한 적이 있다.
그의 그림, 그의 드로잉 앞에서 나는 나의 인생을 반추하고 반추해냈다.
알지도 못하는 젊은 남자의 그림이
그가 그린 자신의 이야기가
어쩌면 이렇게 내 주변의 이야기와 흡사한 건지…
마치 내 속 깊이 가라앉아서 나도 모르게 잊혔던 기억들을
깊게 휘젓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의 외할머니 앞에서 나는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렸고
입을 크게 혹은 까맣게 벌리고 노래하는 사람 앞에서
혼자 밤길을 걸을 때 불렀던 아주 젊었던 시절의 노래…
거의가 나를 슬픔에 잠기게 하던 맑은 노래들이 떠올랐고
더 어린 시절로 가면 아주 깜깜한 밤길
대여섯 살 난 딸의 손을 잡고 가는 젊은 여인이었던 엄마의 찬송가 소리도 들려왔다.
어린 딸이야 엄마와 함께 하니 무슨 무서움이 있었을까,
단지 졸다 깨어나 걷던 차디찬 밤공기가 싫었을 뿐이다.
그러나 젊은 여인은 그 깜깜한 밤
별빛 만 깜박이던 어두운 밤이 많이 무섭지 않았을까.
기억도 세월의 무상을 견디지 못하는가….
그의 드로잉처럼
나의 기억들도 모두다 무채색이라는 것을 소스라치게 경험했던…..
문성식의 그림이 두산갤러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벼르며 갔던 날이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별러 마지막 날 갔다.
운동화를 신고 지하철을 탔는데
갑자기 성식이 아제 생각이 났다.
각시할메의 아들 성식이 아제.
한동네 살아서 그렇지 외가 쪽으로 아주 먼 뻘 친척이었다.
각시할메의 할아버지는 언제 봐도 무서운 곰보….어른이었다.
성식이 아제 형은(이름이 기억나지 않네)
술을 먹고 기찻길을 베고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고
지금 각시할메는 파파할메가 되어 그것도 치매가 극심하여
장가 안간 혹은 못간 성식이 아제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정말 세상은 얼마나 얄궂은 일 투성이인가,
문성식의 그림 전시회 이름도 다.
그는 나무와 숲 그리고 밤을….좋아하는 화가이다.
그가 그린 숲의 내부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자리한다.
그런데 그나무…들이 나무라기보다는 이파리 하나를 확대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전혀 세밀하지 않는 그러나 너무나 세밀한 묘사.
나무의 재현이 아닌 것 같은데도 너무나 진지한 나무
뼈를 들어내듯 가지를 몽 땅 내보이는 형국,
현실을 극명하게 재현하면서 오히려 낯설게 하는
그래서 더욱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미묘한 간극이 그의 나무에서 보인다.
넒은 갤러리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와 은
워낙 커서인지 작년부터 올해 까지 그린 작품이다.
마치 샴쌍둥이처럼 보인다.
어둑신한 숲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어두운 밤에 벌어지는 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둘 다 산이 깊고 숲이 깊은 탓이다.
마치 세상처럼 그 안에서는
생명의 죽음과 생명을 죽임이 횡행한다.
붉은 피를 흘리며 찢기는 삶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 곁에서 즐거운 삶을 누리는 동물도 있다.
산양을 노리는 표범과 그 표범을 잡고 시린 손에 불을 쬐는 사람도 있다.
그 연기가 금방 사라져버리고 말 연기가
지나치게 뚜렷하고 선명하다.
아름답기조차 하다.
“좋은 그림은 내가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올 때”라고 그는 자신의 글에서 썼다.
“화면은….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만나는 곳” 이라고도 했다.
그는 연기를 그리며….엄청나게 커다랗게 그리며
연기가 지닌 소멸성과 …
그 소멸성 속에 현존하는 정신과 물질이 부딪히는 발화점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골 깊은 산위의 밤하늘은 정말 밤이라도 되듯 까맣다.
요즈음 들어 그림 속에서 그런 지독한 깜장색은 처음 보는 듯…
그리고 깜장 하늘위에서 별은 하얗게 눈부시게 반짝여
숲보다 밤보다 더 유구하게 살아나온 밤하늘이 지닌
어둠에 대한 존재감을 거침없이 들어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밤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밤을 빛으로 몰아내고
밤을 희부옇게 만들며
밤이 아닌 밤 비슷한 시간을 밤이려니; 보내고 있다.
어디 저런 밤 같은 밤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그런데
그가 그렸던 연필….
흑백의 드로잉이 주던 그 서정은
강렬한 채색 앞에서 오히려 바래버린 듯 여겨졌다.
여전히 삶에 대한 수많은 서사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아무도 응시하지 않던 세밀한 곳을 작가의 눈은
여전히 깊은 눈으로 살려내고 있었지만
그의 그림 속에 감돌던 ‘적막’과 ‘고요한 서정’은
마치 채색이
도시의 소음이라도 되듯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림은 그림이어야 한다는 것,
그림이 문학이 될 수는 없으므로,
서사를 제하기 위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프라까지 이용하여
그림 속 존재들을 고립시키지만
서사를 담은 그림이 주는 감동이 깊다면야 얼마든지 차경할 수 있는 부분 아닌가.
그러나 그림 속 서사가
그림보다 더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관자가 그림보다는 먼저 서사에 눈이 먼다면….
그 또한 얄궂은 세계 일수도 있겠다.
숲의 내부 전경과 그 부분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
작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