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치와 사모님.

漢고조 유방의 애첩인 척 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른 후 눈을 파버리고 귀를 지졌으며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말을 못하게 한 후 돼지우리에 던져 넣어 버렸다. 잔인하고 악랄함의 극치였다. 물론 척 부인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유방의 총애만 믿고 태자인 유영(劉盈)을 폐하고 자신의 소생인 월왕(越王) 여의(如意)를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유방을 볶아 댔고 실제 유방도 거의 척 부인의 등살에 넘어갔었다. 그러나 유영의 생모인들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극악하고 잔인한 사람인 유영 생모의 성은 여(呂)요, 이름은 치(雉)라고 했다. 여치(呂雉) 산동성 단현(單縣)사람이다. 한 고조 유방(劉邦)의 본처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황후에 봉해졌다. 강인하고 잔머리 굴리기와 임기응변의 계략에 능했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다. 유방을 도와 나라를 일으킨 개국공신들을 거의 주살했다. 특히 명장 한신(韓信)과 팽월(彭越)등 특급 개국공신을 잔인하게 죽인 것도 여치의 소행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아들 유영(劉盈:2대 혜제(惠帝))가 즉위하고 태후에 봉해진 후 권력을 독차지하며 시집인 劉씨 성의 여러 제후(諸侯) 잔인하게 주살하고 친정인 여 씨들을 제후(諸侯)에 봉했다.

중국 역사상 여 황제 즉 여류정치인을 언급하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떠올리지만, 한 고조 유방의 처 여치가 유방이 죽은 후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사기에 따르면 그녀의 실제 통치기간은 16년이나 된다고 한다. 모질고 간악한 여편네를 가리켜 여치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여치에게만 뒤집어씌울까? 안 될 말이다. 남편인 유방의 잘못이 더 크다 할 것이다. 더구나 고대엔 가부장의 시대가 아니던가. 남편이 흐리멍덩하거나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여편네가 더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대저 남녀가 만나 살아가다보면 짧으면 몇 달 늦어도 한두 해 상대방의 싹수를 알 수 있다. 피차 평생 데리고 살 거라면 상대방의 버르장머리 고쳐서 살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일찌감치 찢어져야 개인도 사회도 나아가 국가도 편안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망신살인가. 장군 그것도 별 한두 개도 아니고 이 나라에서 달 수 있는 최고의 별 네 개 4성 장군이 마누라 때문에 개망신을 당하다 못해 평생 쌓아올린 공든 탑을 스스로 뭉개버리듯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두고 단순히 아녀자의 부도덕한 행실로만 볼 것인가?

별이 네 개 아니라 열 개면 뭣하나. 마누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 참,,,입에 담기도 거시기한 불상사를 일으키고 평생을 군문에 바친 국방의 요직에 있던 지휘관이 하루아침에 주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쟁에 패한 장수 취급을 받고 있으니 제 스스로 택한 자충수가 아니던가. 더구나 전임 한민구 국방부정관시절 이미 그 아내의 갑질 내지 비행을 구두로 경고 했음에도 그녀의 갑질과 비행은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나 현실로 보나 유방이 우유부단 하지 않았더라면 또 4성 장군 박某가 마누라의 갑질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추측을 해 보지만, 결국 유방이나 박某 장군은, 여치와 아내의 악행이나 갑질을 보고도 만류하지 않은 것은 그런 속에서 어떤 대리만족 같은 것은 느낀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마누라 때문에 입은 엄한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정범(共同正犯)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누라 못 된 거 다리를 부르트려서라도 주저 앉혔어야 하는 건데…등 시인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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