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와 중장비

 

 

옛날 옛적 네델란드의 작은 마을에 한스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한스는 용감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하루는 마을 앞에 있는 댐을 지나다 댐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나서 물이 졸졸 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구멍이 커져서 댐이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러면 마을이 물에 잠길게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스는 자기 팔로 구멍을 막고서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밤이 될 때까지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근처를 지나는 아이가 한스를 발견했고, 댐에 구멍이 났다는 걸 마을 사람에게 알려주었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댐의 구멍을 무사히 고쳤고 지금도 그 마을엔 한스의 동상이 서 있다는 ‘전설 따라 지구촌…..’안델센의 동화집에 나올만한 것이지만, 미국인의 창작 동화다.

 

지금도 그런가는 모르겠다. 발행한 어음이나 당좌를 해결하지 못해 1차 부도가 나면 금융거래를 하지 못해 그렇지 영업은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다 산 목숨이 아닌 것처럼 금융거래를 하지 않고는 사실상 폐업 아니면 파산이다. 원부자재 기타 운전자금을 모두 현금으로만 결재를 해야 하니 무슨 재간으로 사업을 하겠는가. 또 그럴 돈이 있었으면 부도도 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 2차 부도가 나면 3개월인가 유예기간(청산)을 준 뒤 부정수표단속법위반이라는 어마 무시한 죄목(罪目)으로 잡혀가거나 도망자가 되거나…. 그 뒤 문제는 개인(법인)의 능력에 따라 범털도 되고 개털도 되는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말처럼, 경사든 불상사든 매사엔 호 불호를 망라하여 징후(徵候)나 조짐(兆朕)이라는 게 있다. 그런 징후나 조짐이 보일 때 발 빨리 대처를 한다면 무사할 것이지만 그 반대인 경우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1차 부도를 내기 전, 그 해의 봄날은 비가 그렇게 많이 왔다. 특히 주말(半空日: 토요일)이면 비가 더 내렸다. 거짓말 같이 그렇게 그 봄을 맞고 보냈다. 제품의 특성상 우중(雨中) 출하를 할 수 없었고, 출고(出庫)를 할 수 없으니 선적(船積)역시 할 수 없어 창고엔 재고가 쌓여갔다.

 

자금이 원활하지 못한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무역금융이라는 제도가 있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신용장(L/C) 내도(來到)가 있고 그 금액의 한정에 따라 아주 저리(低利)로 운전자금을 대출해 주었지만 선적을 할 수 없으니 무역금융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쌓인 재고가 출하(선적)만 되면 숨을 쉴 수 있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렇게 두어 달 쌓인 재고를 출하하기 위해 마지막 점검(inspection)을 한 결과 모조리 부속에 녹이 쓴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긴급자금이 필요했다. 큰 금액이 아니었다. 은행 문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불가능 했고, 나 자신은 물론 마누라까지 동원 하여 친. 인척과 지인…. 특히 아버지에게 여차여차 하여 잠시만 본가를 저당 잡혀 주십사…역시 아버지다우신 말씀‘너 하나 빵에 가는 게 낫지 온 가족이 길거리 나 앉을 수는 없지 않느냐’…사실 말씀이야 합당하고 옳은 말씀이나 그 순간만 넘기면 탄탄대로는 아니더라도 무난히 순풍을 탈 수 있었을 것이다.(하기는 이마저도 순전히 주관적 판단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1차 부도가 나기직전의 상황은 네델란드의 소년영웅 한스가 댐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나서 물이 졸졸 새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과 다름 아니었다. 그 정도면 호미 정도면 충분히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2차 부도가 나고 유예기간을 거친 뒤 소위 경제사범이 되어 쫒기는 신세가 되고 인신구속을 당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아들놈을 감방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급한 대로 집이라도 잡히자는 것이었다. 철새는 날아가고… 그 땐 이미 그런 집 몇 채를 잡혀도 소용이 없었다.

 

매사(每事)는 시와 때 그리고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댐이 무너져 내린 다음에야…06이나 08짜리 중장비가 무슨 소용이겠으며, 한스가 외로이 팔뚝으로 댐의 구멍을 막고 있을 때 근처를 지나는 아이가 없었더라면 그 뒤가 어찌 되었을까?

 

혹 아비를 원망하는 자식 놈으로 비쳐질까 두렵지만, 아버지가 이 아들놈의 간절한 바람을 그 시간에 들어 주셨으면 패가는 물론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도움을 주셨더라도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버지 말씀대로 본가(本家)마저도 쑥대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의 판단은 옳으셨다. 패가망신을 하고 오갈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래도 자식이라고 긍휼(矜恤)이 여기신 아버지는 지하 차고에 방 두 칸을 만들어 당분간이라도 그곳에 거주하라시며 내 주셨으니 만약 덜컥 집이라도 잡혀 주셨고 운이 나빠 몽땅 날렸다면? 그 뒤는 상상조차도 싫은 부분이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많은 재산은 없지만 나 역시 자식 놈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사업자금은 절대불가 절대사절을 외치고 있다.

 

이 와중에…김두관 “北 개성공단 열고 금강산 관광 재개해야”

이 와중에..김두관 “평양-서울에 연락사무소 2곳 두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8/2020061801323.html

 

이런 자는 만약 전쟁이 터지면 제 처자식 데리고 가장 먼저 보트 타고, 철저히 반일을 외친 놈들이 그러하듯 가장 가까운 일본으로 튈 놈들이다. 지역구를 옮긴 걸 봐도 벌써 그런 기미가 보이잖아? 이 자의 지역구가 원래 전쟁이 터지면 접전구역인 김포든가? 암튼 그곳을 버리고 일본이랑 가까운 지역으로 옮긴 것만 보더라도 불문가지(不問可知)아닐까?

 

개성공단이고 금강산이고, 우리가 폐쇄한 게 아니잖아. 놈들이 행패(行悖)를 넘어 패악(悖惡)을 저지르며 철수를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전전 그리고 전 정권은 사과와 함께 재개(再開)의지만 보이면 언제라도 공단이고 관광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사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깡패집단. 그 깡패집단의 공갈협박에 허둥지둥 정신을 못 차리고 제 마누라들 속곳까지 벗어 줄 것처럼 깡패집단에 굴신(屈身)하는 남쪽의 허수아비 집단. 어느 쪽이든 호미로 막을 사안(事案)을 06이나 08짜리 중장비로도 막을 수 없으니 한심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