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인(貴人) 1부.

 

 

귀인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 또는 조선시대 내명부 후궁에게 내리던 종일품(從一品)의 품계로 빈(장희)의 아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자신이나 주위의 대상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삶을 살아가는 방향 제시 또는 그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썰을 풀고자 하는 오늘의 귀인은 내게 생명의 은인 같은 존재다.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요즘은 새벽 2시도 못 되 깨고 만다. 그래도 이번 폭우로 인한 피해를 입기 전까진 새벽4시 좌우에 깨어나 하루를 시작했는데, 산사태와 침수로 인한 피해망상이 이리 오래 갈 줄, 내가 이리 나약하지 않았는데…. 나이 탓인가?

 

이미 이번 장마에 대한 피해망상(被害妄想?)을 표현한 적이 있지만, 그날(2일) 새벽은 도대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새 빗줄기는 지붕을 때렸고 홈통을 통해 거센(?)빗물이 밤새 요란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느꼈고, 무엇보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번개를 동반한 뇌우(雷雨)때문이라도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도, 썰을 다 풀고 입력을 마치자마자 뇌성벽력(聲霹靂)소리보다 더 큰 굉음(轟音)과 함께 무엇인가 밀려옴을 느낌이 든다. 일종의 동물적 감각 같은 거였다.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비상용 랜턴을 들고 현관을 나서자, 그 장대 같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칠흑의 어둠 속에도 홍수가 쓸려오는 게 보였다. 아! 이런 게 수해(水害)니 재난(災難)이니 하는 거구나.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쏟아지는 물줄기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아 급히 돌아 나와 급히 가방에 몇 가지의 옷을 챙기고 마을회관(약500~600m떨어진…)으로 달렸다. 생쥐가 되어 도착해 보니 그 시각에 이미 몇 분의 이웃이 불안한 얼굴로 앉아들 계신다.(나의 썰 재난(災難)에서도 배울 건 있다. 에서…)

 

그날의 위기를 위와 같이 표현 했지만 사실 그 위기에서 나를 살린 한 인물이 있었다. 굉음을 듣고 팬티바람으로 랜턴을 들고 집히는 곳(울안을 가로지르는 건천(乾川))으로 달려가려는데 그쪽을 향하여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보이며 누군가가 폭포처럼 덮쳐오는 물속에서 금방이라도 떠내려 갈 것 같이 비틀거리며 무엇인가 열심히 던지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나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소리를 질렀다.“엄 서방! 얌마! 너 미쳤어? 빨리나와!”를 몇 차례나 외쳤지만 그는 의연(毅然)하게도 그 작업을 계속했고 드디어 막혔던 철망이 뻥 뚫리며 폭포수는 제 물 길을 찾아 대형 하수구로 흐르기 시작했으며 순식간 반쯤 잠긴 뒷마당의 침수(浸水)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그 건천은 도로의 하수구처럼 대형철망뚜껑이 있다. 그런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급물살과 함께 각종 비닐(농사용)이나 나무들의 잔가지가 쓸려 내려오다 그 철망을 막았기에 그것을 그는 1차 위험을 무릅쓰고 더듬어 가며 버렸던 것이다.

 

물길이 트이는 순간 그와 나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은 채로 늦은 인사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돌아섰는데, 그가 돌아간 지 10분이 채 되었을까? 장대 같은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때리기에 옷을 갈아입은 그대로 다시 그곳으로 나가려고 하니 데크 밑이 이미 발목까지 잠기는 것이었다.

 

70을 넘게 살았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다고 맨날 큰 소리 쳤지만, 즉 늙은이 빨리 죽고 싶다는 그 말은 역시 헛소리인 게 틀림없다. 더럭 겁이 나며 오히려 생에 대한 애착(?) 아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그런 걸 미련이라고 하나? 집이 이러다 폭삭 주저앉기라도 한다면 아니면 무너지기라도…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핸폰을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엄 서방! 또 막혔나봐! 이젠 물이 데크까지 차 넘쳐오네 이거 어쩌지???”, 다른 말없이 그는 “네! 알았어요! 형님!”, 전화를 끊은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저쪽에서 그의 자동차 라이트 불빛이 보인다.

 

그는 도착하자마 이미 강물이 되어 흐르는 곳을 향하여 올라가려 했지만 발걸음을 떼지 못할 정도로 물살은 급해진 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아까처럼 외쳤다. “엄 서방! 얌마! 너 미쳤어? 빨리나와! 죽으려고 환장 했냐? 빨리나와~아!!”, 그런데 그 외침과는 반대로 그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결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았다.(참..이제와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얍삽한 놈인지 추미애처럼 자괴(自愧)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의연하고 강인 했던 그도 더는 어찌할 수 없는지“형님! 안 되겠어요! 일단 빨리 피합시다.”그러는 그의 말은 이미 명령이고 강제집행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갈아입을 옷가지 몇 점 가방에 쑤셔 넣고 마을회관으로 달렸던 것이다.

 

이미 밝혔지만 귀인(貴人)은, 사전적 의미 외에 일반적으로 자신이나 주위의 대상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삶을 살아가는 방향 제시 또는 그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썰을 풀고자 하는 오늘의 귀인은 내게 생명의 은인 같은 존재다.

 

“엄 서방”솔직히 그는 이번 사태 전까지 내게 천대(賤待)를 받았던 인물이다. 어쩌면 천대를 받았다는 것 보다는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며 인연(因緣)을 끊으려고 작정을 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엄 서방이 내게 귀인으로 다가올 줄이야…..

 

‘엄 서방’ 사실 그는 아래 마을에 사는 내 동서(同壻)다. 그것도 손위 동서.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이놈 저놈’하며 함부로 말을 까고, 그는 오히려 내게‘형님’이라며 꼬박 공대(恭待)를 하는 사연을 이제부터 하려는 것이다. 계~~속.

 

 

덧붙임,

사실 어제부로 이번 장마 피해복구는 완전히 끝났다. 오물의 잔재를 면 정부에서 (의용)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완벽하게 청소를 해 주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면장님과 면직원 그리고 새마을회 부녀회 기타 모든 관계자 분들에게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 Comments

  1. 데레사

    2020년 8월 14일 at 7:45 오전

    이번에 정말 큰일날뻔 하셨군요.
    처형께서도 그곳으로 가셨다고 하드니 그분의 남편인가
    보군요.
    사람이란 큰일이 났을때 그 존재를 알아보는거지요.
    참 고마운 분이군요.
    오히려 평소때 잘하다가 큰일때 외면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 ss8000

      2020년 8월 16일 at 8:14 오전

      네, 누님! 맞습니다.
      저는 이번에 그 사람에게 큰 도움을 받았고
      또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천대하고 배척한 것에
      크게 후회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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