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舊)황희의 비리를 신(新)황희가 토로(吐露)하다.

세종9년(1427)6월17일, 세종은 당시 좌의정이었든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을 의금부에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서선의 아들이자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신창을 지날 때 고을아전 한 명이 자신을 보고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그냥 갔던 것이다. 이에 서달은 현직 형조판서의 외아들이자 좌의정의 사위인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하인들에게 그 아전을 잡아오게 하면서 정작 당사자가 아닌 다른 아전인 표운평에게 몰매를 가하여 죽게 만든다.

 

그러한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표운평의 처는 감사 조계생에게 고하지만 그는 서달이 황희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황희에게 그 사실을 고한다. 자신의 사위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것을 고민하던 황희는 오랜 동료이고 마침 사건현장 신창이 고향인 맹사성과 의논한다. 맹사성은 신창 현감에게 압력을 넣고, 서달의 아버지 형조판서 서선과 모의하여 사건의 수사를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복들의 과실이라고 마무리 짓고 범행을 사주하고 실행시킨 주범 서달을 방면시켜버린다.

 

이리하여 서달의 살인사건은 무사히 넘어가는 듯 했으나 보고서를 받은 세종은 석연치 않았는지 재수사를 지시하고 마침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황희와 맹사성, 서선을 포함한 관련자 전원을 의금부에 하옥시킨다. 그렇지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선 황희와 맹사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세종은 얼마 후 그들을 복직시킨다. 어쨌든 이 정도(?)는 사위를 아끼는 장인의 마음이라고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럴 여지가 상당히 어려운 것들이다.

 

서달의 사건이 일어난 지 바로 다음 해인 세종10년(1428)의 황희는 뇌물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오늘날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가 뇌물스캔들에 휩싸인다는 자체가 놀랍다.)1월에 첨절제사 박유가 청각(靑角)두어 말을 황희에게 건네다 걸려 파직되었고, 6월 어느 날, 역리였던 박용이 인수부 판관 조연과 시비가 붙어 박용이 조연을 두들겨 팼고, 이에 조연은 박용을 고을현감에게 넘기자 박용은 처에게 시켜 말 한 필의 뇌물과 함께 선처를 부탁하자 황희는 그 말을 받고 현감에게 청탁성 편지를 써 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와 황희가 억울하다며 사직을 청했기에 그냥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렇지만 세종12년 11월24일, 사헌부에서는 태석균이 제주 감목관으로 있었을 때, 말 천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여 그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한 태석균이 중신들에게 뇌물을 썼는데, 그 중에 황희도 있다고 고발할 때에는 세종도 어쩌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황희가 태석균의 죄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를 변론하는 간언을 했고 그 자리에 세종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종은 황희를 파직하게 되지만 아마도 팔 한 쪽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방금 잘라 낸 황희를 금방 복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서 세종은 묘안을 생각해 낸다. 조정의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전(前)좌의정 황희와 상의해서 처리를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를 따지는 중신들에게는 그러한 국법은 없다며 웬만한 대소사는 무조건’전(ex)좌의정 황희’를 언급하며, 그의 자문을 구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희를 쫓아낸 사헌부 관헌들은 속이 뒤 틀리게 된다.

 

그리고 세종이 이듬해에 다시 황희를 부르려하자 전 내섬주부 박도가 교하 현감으로 있을 적에 둔전을 황희에게 상납하고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제수한 일등을 비롯해 각종 비리를 고하게 되지만 황희에 대한 세종의 총애를 꺾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좌의정이던 그의 벼슬을 영의정으로 승차시켜 세종13년9월에 다시 정계에 복귀 시킨다. 사헌부 관헌들은 경악하여 황희의 영의정 제수에 관한 부당성을 주장하였지만, 세종의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마도 세종은 황희의 공직자로서의 의혹과 결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진 눈으로 바라봤던 그에게 조정중신이라고 예외가 있을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찰기관인 사헌부에서 연일 떠드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군왕의 입장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웬만한 것들은 대충 눈감아 주려했고, 그것이 그가24년 간 이나 재상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이상은 출처가 어딘지 기억이 안 나는 황희 정승에 대한 기록(?)이다. 위에서 언급 된‘황희와 맹사성’은 이 나라 청백리 표상의 으뜸가는 인물들임에도 그런 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황희가 청백리라고? 도대체 청백리의 기준이 무엇일까?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청백리라고 역사에 기록된 황희나 맹사성은 대를 이어 정승(영. 좌. 우)자리만 십 수 년씩 해 먹었다. 그때의 관원이나 지금의 공무원이나 녹봉(祿俸)이나 급료라는 게 있다.

 

황희와 맹사성이 관원생활 정(종)9품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중간급 관리자로 시작했을 것이고, 하급관리에 비하면 꽤 많은 녹봉을 받았을 텐데 지붕이 새는 집에 살았다든가 항상 의식주가 부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젊은 시절은 박봉에 시달렸다고 치더라도 세종에게 발탁이 되어 24년을 정승 자리에 있었다면 정승의 녹봉이 얼만지 모르지만 설마 13평짜리 아파트 하나 없었을까? 13평 잘 굴리고 10억 버는 놈도 있는데…그런데 황희의 삼시(三是)론을 보면, 종 두 년이 싸우는 걸 목격한 황희가‘너도 옳고 너 또한 옳다 그리고 부인도 옳소’했다고 쓰여 있으니 여종이 최소한 둘, 여종만 있을까? 마당쇠, 돌쇠, 먹쇠, 칠복이… 벌써 몇인가? 13평짜리론 대식구를 거느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출퇴근 시킬 리도 만무하고. 아니면 당시에 유니세프 또는 임란이나 호란이니 전쟁 고아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많은 녹봉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는 절대 청백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누군가가‘소설을 쓴 것’이다.

 

 

당직병을 범죄자로 몬 여당 “단독범 아닐 것, 철부지가 산 태워”

https://www.chosun.com/politics/assembly/2020/09/12/R734L7GDGJFALCJLKQG3XA7TAM/

공익제보자 실명 공개한 황희에 “秋 아들도 밝혀라” 비난 빗발

 

1)생긴 거 자체가 정말 느끼하게 생겨 처먹었다.(조폭 두목 같잖아?)

2)조국이나 이런 놈들은 정말 대가리에 든 거 없는 것들이 요상한 이름으로 세상을 놀린다.

3)결국 이런 놈들 때문에 옛 인물의 꾸며진 미담만 만천하에 드러나고 망신을 준다.

 

결론, 이런 놈들을(아류) 우리는 개x끼만도 못한 짐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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