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영부인 김건희 여사와 중국의 4대 미녀 그리고 에바 페론(1부)

 

(“쥴리”,“영부인”, “국모”)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르지만, 김대중 때의 일이다. 우리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아르헨티나여~날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노래와’에비타’라는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당시 그 영화와 노래가 어째서 이 땅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야했는지 지금에야 이해가 가지만, 이 땅에 소위 票퓰리즘의 서막이 당시 그렇게 열린 것이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하면 페론, 에비타, 페로니즘과 票퓰리즘 등의 부정적인(?)단어들이 연상 되지 않는가? 잘 나가던 나라가 일순3-4류 국가로 전락 했을 때 우리는 아르헨티나나 필리핀을 떠 올린다. 두 나라 공히 票퓰리즘의 망령을 떨치지 못해 그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票퓰리즘이라는 것을’민중주의’라고 옮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와전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민중’을 빙자하거나 사칭한 엉터리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票퓰리즘을 주도하는 자들은 언필칭 개혁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말만 개혁일 뿐 실제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고,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고 권력을 획득하면 소수의 지지자들과 자신들의 이득과 논공행상만 있을 뿐 이미 대중과 유리(遊離)되는 정치적 편의주의와 기회주의가 票퓰리즘의 본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수(魔手)를 창출(創出)해 낸 이가 바로 후안 페론과 그의 후처 에바 페론인 것이다. 각설하고…

 

<에바 페론 전기 요약>

1919년 5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가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영화배우라는 꿈을 키웠던 에바는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가서 5년 만에 연예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슬픈 듯 하면서도 호소력 짙어서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목소리는 우아한 미모와 함께 그녀의 큰 무기가 된다.

 

에바 페론은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초원지대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인근의 농장주인의 정부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농장주의 사이에 태어난 5명의 아이 중 4번째 사생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많은 아이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법적인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불우했으며 버림받은 에바는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대중잡지의 기사를 읽으며 도시로 나가 화려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연극과 연주회 등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 나이 15살 무렵, 과감히 가출을 감행했다. 고향 팜파스의 흙먼지를 떨치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시골의 소녀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에바 페론은 어린 나이부터 성공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에바는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 없이 떠났다. 그렇게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삼류 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살기 위해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비애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성공을 향한 불물을 가리지 않은 노력 덕분에, 그녀는 탱고 무용수를 비롯하여 삼류 연극배우부터 시작해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40년경 마침내 에바 페론은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44년, 에바는 당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한 이재민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있던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당시 첫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아가던 후안 페론은 에바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1945년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에바는 대통령 선거에 참가한 남편을 돕기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그녀의 얼굴을 알리고 에비타라는 이름도 얻게 된다.

 

이후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고 영부인이 된 에바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리고 본능적으로 그들을 이해하면서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친다. 그것이 곧 페론이 펼친 정책이라 하여 페로니즘(Peronism)이 되었고 뒷날 그 페로니즘이 票퓰리즘(Populism)으로 변칙 승화가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언필칭 票퓰리즘이라고 하지만, 이 票퓰리즘의 모태가 페론 즉 페로니즘인 것이다. 그 票퓰리즘을 시도하고 완성한 인물이 후안 페론과 에비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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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레콜레타 묘지(cementerio de la recoleta)

사방이 150m 규모로 역대 13명의 대통령 묘지와 유명인 다수 그리고 일반인도 묻혀 있다. 내가 갔던 에비타의 묘지는 나 같은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명소로 유명하다. 어제 올린 사진 상에도 보았지만 어찌나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지 그 내부를 찍을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나라 처녀(?)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애꿎은 방댕이만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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