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소학교 6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혁명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친구들과 청계천엘 처음 갔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자연 그대로의 개울이었다. 이름 그대로 물이 맑았고 군데군데 아줌마들의 빨래하는 모습과 빨래방망이 소리도 제법 들렸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런 청계천에서 송사리도 잡고 미역도 감았다는 사실이다. 그만치 깨끗한 청계천이었다.
내가 위에 (서울)친구라고 했던 것은, 난 경북상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지방법원 말단 주사로 계셨는데, 625전쟁이 끝나고 복직이 된 관계로 아버지 홀로 먼저 서울에 계셨기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혼자 12열차를 타고 상경하여 아버지와 약 한 달을 보내는 동안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여름에도 그런 경험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419혁명이 일어나던 다음해 516혁명이 일어난 그해 중학교1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했던 것이다. 서울에 처음 정착한 곳은 종로 안국동이었다. 전학 온 때가 가을학기였기에 청계천에 가 볼 기회가 없었고 다음해 여름 지난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청계천엘 가 보았다. 물론 여차하면 미역도 한 번 감겠다는 생각도 하며….
그런데 1년 아니면 2년 만에 찾은 청계천은 내 생전 본적도 보지도 못한 아수라장 아니면 복마전을 방불케 했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청계천이 아수라장이고 복마전이었다. 천 양쪽으로 게딱지같은 하꼬방(판자촌)이 끝도 없이 줄지어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미역을 감고 송사리 잡던 그곳의 물은 검은 오수로 변했고 악취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최악의 개울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난민 아닌 난민들은 그곳을 향하여 꾸역꾸역 모여들어 지상(서울)최악의 장소로 변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최악의 현상을 두고 볼 수만 없었던 혁명정부는 청계천 복개(覆蓋)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복개사업을 추진하며 가장 큰 난제가 바로 판자촌에 거주하던 거주민들이었다. 그 때 박정희 정부는 한 가지 혜안(慧眼)을 발휘한 것이 난민들을 모조리 지금의 성남 땅으로 소개(疏開)를 시켰던 것이다. 당시의 성남은 민둥산 구릉이었던 것이다. 물론 소개된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분할해 주며 그렇게 안착(安着) 시킨 것이다. 지금 까지 썰을 풀었지만 성남시가 만들어 진 역사가 그렇다. 원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으로 기억 된다.
아~! 가장 중요한 걸 빼 버릴 뻔 했다. 당시 성남으로 소개 된 주민 90% 쩌~거 아랫녘 호남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자의 시각] 민선 성남시장 잔혹사
https://www.chosun.com/opinion/journalist_view/2023/01/28/BLESPT5BZRHVFJ2RETN4R7WY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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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사”라기 보다는 그 땅의 지기(地氣)가 그랬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