좃선일보와 연을 끊으며….(13,600여 꼭지를 삭제)

이 노릇(인터넷 중독)을 그만두어야하는데… .하는 식의 절망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노릇으로부터의 해방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질 수 없다. 솔직히 중독이라는 것은 한 인간의 의지로 쉽게 끊을 수도 무너지지도 않는 것이다. ‘썰’의 핀트가 어긋나지만, 사실 담배를 호기심일망정 고딩2년 때 배웠다. 단순한(?)그 호기심이‘바늘도둑이 소도둑’되듯 하루에2-3갑을 피우게 됐고, 그랬던 담배를 위암수술을 받으며 자연스럽게(그러나 결국 물리적이고 강제에 의한…)끊게 되었다. 담배는 그렇다 치고 음주 또한 만만치가 않다. 술 역시 청탁불문(淸濁不問) 두주불사(斗酒不辭)였는데, 암의 원인이 술. 담배라니 끊을 수밖에…근데, 술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지금도 잠자기 전 와인 한두 잔은 꼭 마시고 잔다. 중독이라고 하면 좀 섭섭하고, 약으로 삼고 저녁마다 그렇게 조금(?)마시지만, 사실 이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이다, 아전인수 격으로 억지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은 또 어떻고, 더 정확히‘컴’을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40후반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코딱지만 한 제조업을 벌이고 있었고, 하루도 빼 놀 수 없는 조국 소식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조선일보’를 정기구독하고 있었는데, 시공(時空)차이로 신문이 아닌 구문을 읽으면서도 우리 돈으로 5만 원 가까이를 들여야만‘조선일보’를 볼 수가 있었다. 그랬던 조선일보를 어떤 지인의 충고로‘인터넷’으로 들어가면 공짜(사실 당시 중국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았고, 인터넷 사용료가 엄청 비싸 오히려 인터넷 비용이 종이 신문 보는 것보다 훨씬 비쌌지만….밤낮으로 인터넷을 사용 하다 보면 어떤 땐 중국내 전화비가 우리 돈 100만 원을 넘을 때도 있었다.)로 신문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컴’을 접촉 했던 것이고, 그 때가 좌경 빨갱이 정권의 효시 김대중 임기 중이었다.

 

당시 더블클릭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내가‘조선닷컴’을 찾아 구문이 아닌 이런저런 따끈따끈한 신문기사를 공짜로 읽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치 않게 뭔가를 잘못 클릭한 관계로 전혀 예기치 않은‘조선독자마당’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친일문제를 두고 보수성향의 언론 특히 조선과 동아를‘친일언론’으로 매도하며 남쪽의 자생적 빨갱이들이 양 언론사를 초토화 시키는 모습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 두 자 게시판을 메워가며 자생적 빨갱이들과 논쟁(論爭)을 벌이며‘인터넷 중독’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나의 인터넷 중독이 얼마나 심각하면, 안중근 의사는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라고 하셨지만 오늘날의 나는 하루라도 이런저런 게시판에 썰을 안 풀면 입안에 가시는 고사하고 머리에 쥐가 오른다. 또 엄한 소리를 장황하게 널어놓았다.^^*

 

그런데 이런 게 있었다. 인터넷 하고도 게시판에 썰 푸는 마력(魔力)에 푹 빠져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을 만치 빨갱이들과 이전투구를 벌이며 보수언론의 호위무사를 자처할 당시 붉은 무리들은 조선. 동아. 중앙 종이신문을 화장실 밑 닦기 용도밖엔 쓸모가 없다며 폄훼를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당시 내가 개발(開發)해 냈던 반박(反駁)문의 내용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에라이~! 이 병x 새x들아!!!,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너희 놈들은 아직도 신문지를 화장지 대용으로 쓰냐? 지금 웬만한 가정은 모두 비데를 이용하여 세척을 하는 마당에 아직도 신문지를 들고 화장실을 간다는 꼬락서니가 상상이 된다. 남들 열심히 일 하여 잘사는 모습이 부럽지도 않니?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나 다짐은 않고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반항하는 빨갱이 짓을 하니 화장실에 비데는 고사하고 부드러운 화장지조차도 없이 신문지로 밑을 닦는 어리석고 게으른 빨갱이 새x들!!!” 뭐..이런 취지의 반박문이었다.

 

어쨌든 오늘부로 나 죽는 날까지‘조선일보’를 지운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절대 조선일보는 보지 말라는 유언도 남길 것이다.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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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2년 때이다. 그 때는 메이저 대표신문으로 동아와 조선뿐이었다. 동아는 석간 조선은 조간으로 나뉘어 있었기에 새벽 신문을 돌리고 등교를 하기 위해 조간인 조선을 택하며 연이 맺어진 것이다. 당시 나의 구역은 안국동 로타리에 있는‘안국동 지국’에서 관수동. 관철동 그리고 종로3가 일부지역이었다. 당시 한 달 구독료가 100원 이었다가 얼마 뒤 110원 그리고 다시 130원으로 인상된 것으로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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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그러구러 세월이 흐르며 그것도 인연이라고 조선일보 최애구독자가 되면서 지속적으로 구독을 하다가 중국으로 진출하며 하루 이틀 늦게 배달되는 조선일보를 현지에서 5만원(구독료 8천 원 할 당시)씩이나 주며 구독을 할 만큼 조선 사랑은 계속 되었다. 그 후 귀국을 하며 클릭만하면 공짜신문을 볼 수 있음에도 일부러 조선일보 종이신문을 여벌로 배달시켰고 심지어 황색에 가까운 스포츠조선까지 구독을 하다가 스포츠는 사절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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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부라도 조선일보에 보탬이 되라는 나 혼자만의 짝사랑은 계속 되었던 것이다. 보지도 않는 종이신문은 이곳 골짜기로 이주하면서도 구독을 했다. 물론 중국처럼 하루 이틀 늦게 배달되는 것이지만 구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시 조선 사랑 때문이었다. 한 부 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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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얘기지만, 박근혜 탄핵의 시발점은 조선일보가 시작했고 그 절정을 이루게 한 것은JTBC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당시 조선일보 구독사절운동이 들판의 불길처럼 일어날 때도 나의 조선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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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보다는, 나의 조선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2001년도까지 매월 구독하던‘신동아’를 접고 2002년부터 오늘까지 22년째“월간조선”을 구독(? 솔직히 근년에는 보지도 않으면 그냥 장서용으로 보관해 왔다.)하고 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20년 넘게 보관하다보니 조그만 책장하나로는 모자라 다른 책장에 따로 다시 새 책장을 구입하여 보관하고 있다. 금년4월까지 며칠 후면 5월 달 것이 배달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얘기하노라 좀 장황한 설명을 했다.

 

정말 의리라고는 점 박힌 파리 좆 대가리만큼도 없는 조선일보 색히들. 기사 아래 댓글 란에 댓글을 좀 과격하게 달았더니 몇 차례인가 경고를 주며 정지도 시켰다가 다시 풀어주고 그런 과정을 몇 차례 거치다가 아예“100자평 쓰기가 차단된 사용자입니다.”라며 접근조차 못하게 조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3년 후‘많이 후회하고 다시는 위배 되지 않게 100자평을 올리겠다.’며 담당자 놈에게 메일을 넣고 아양을 떨었지만 놈의 대답은 냉정하게“안 됩니다.”그 답을 받고 다시 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금을 안 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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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개자식들아! 내가 나라를 아니 조선일보를 팔아먹었냐? 아니면 방가들에게 소주병을 던졌냐? 아니면 내가 도둑질을 했냐? 살인을 했냐? 설령 그런 중범죄를 저질렀어도 햇수로 7년이다. 웬만한 죄인도 그 정도면 사면시키고도 남겠다. 개색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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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나름 애국한다며 열심히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 개 중에는 위정자나 관계자가 읽어보고 참고할만한 글도 게시한다. 쓸데없는 개소리는 꼬박꼬박 대문에 걸어주며 내 글은 왜 뺀찌를 놓냐? 피가되고 살이 되는 글도 가끔씩 있지 않더냐? 개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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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렇게라도 하소연을 하고나니 속이 좀 풀린다. 아무튼 오늘부로 나 죽는 날까지‘조선일보’를 지운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절대 조선일보는 보지 말라는 유언도 남길 것이다. 잘 처먹고 잘 살아라 좃선 것들아!!!

 

사족:

그동안 좃토마에 올린 썰이 2005년부터(이전에는‘시대유감’이라는 별도의 사이트가 있었다)13,600여 꼭지를 10시간 넘게 작업(?)하여 몽땅 지우고 나왔다. 개색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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