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師道)의 길은 만만한 게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뒤덮고, 포악한 나치의 군대가 유럽을 유린하고 있을 때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마을 학교에 갑작스럽게 독일군이 들이닥쳤다. 어린 학생들과 교사는 깜짝 놀랐다. 특히 학생들 중 가슴에 별 표시를 달고 있는 유대인 아이들은 공포에 질렸다.

 

나치가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아이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독일군은 어린 유대인 학생들을 거칠게 끌어냈고,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울부짖었다.

 

그러자 ‘코르자크’라는 선생님이 총을 든 독일군을 밀치며 달려와 울고 있다. 학생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다. “당신 뭐야! 너는 유대인이 아니잖아. 방해하지 말고 저리 비켜.”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을 아이들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거칠게 붙잡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독일군에게 저항하며 단호하게 말했다.“나도 아이들과 함께 가겠소!”

 

그리고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말했다.“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과 함께 가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가스실에 도착한 코르자크 선생님을 독일군은 다시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내 학생들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선생님은 무서워하는 학생들의 손을 꼭 잡고 아이들을 위로하며 가스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나치에게 학살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 세운 ‘야드 바쉠’ 박물관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자들을 두 팔로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이 있다.

 

이상은 전해 들은 얘기이니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런 것까지 어떤 개자식처럼 아가리만 벌리면 거짓말로 꾸밀까? 사실 확인은 독자 제위께서 하시면 될 일…

 

초등교사 또 비극… 같은날 2명 극단 선택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3/09/01/SYTCJCZMGNGSRO3CNWMSQSHCDE/

 

정말 왜들 이러시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기로 선생은 선생의 길이 있고 학생은 학의 길 더하여 학부 형의 길이 따로 있다. 참…정말 공교육이 개차반이 되었다. 교육은 국가백년지대계 (國家百年之大計)라던데…우리 오늘을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동안의 교육이 지탱해 온 것인데.. 하~!! 정말 답답하다.

 

쌍둥이 손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은, 이 나라의 교육제도 때문이다. 제 아비가 하던 사업이 지지부진… 솔직히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사업자금으로는 내 생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 의식주는 얼마든지 해결해 줄 수도 주기로 했는데, 그놈의 사교육비 쌍둥이라 감당이 안 됐다. 여기서 너와 딸아이의 견해 차이가 났다, “나는 너희 삼남매 사교육 단 한 번도 시킨 적 없지만 너희 나름 잘 먹고 잘살지 않느냐?”, “딸아이는 쾌쾌묵은‘라떼’말씀 소녀 심히 듣자옵기 민망하옵니다.”이래서 아니한 말로 부녀간에 이념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그랬던 딸아이가“저도 언니 있는 캐나다로 이민 갈래요!”라며 나올 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남들은 다 시키는 사교육(당시 초등 3년으로 문재인 손자와는 같은 반이었다.)을 시키지 못하고 두 쌍둥이만 자꾸 처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딸아이는 쌍둥이가 입학하면서 사교육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이미 이민 준비를 몰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딸아이는 인재는 아니지만 중국의 대학을 나와 영국에 3년 유학을 다녀왔기에 중국어와 영어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고 한 때는 캐나다 정부의 정책이 다른 주는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동부의‘퀘백주’만 허용하며 이민을 오더라도 5년간은 퀘백에 상주해야 한다는 조건이며 불어(퀘백주만 불어를 고집하며 또한 가끔 독립까지 요구하는 주임)시험을 쳐 합격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물론 이민을 오더라도 쌍둥이는 프랑스어 학교에 가야 한다는 조건이다. 결국 그렇게 3년을 준비한 딸아이와 쌍둥이는 퀘백주의 대도시인‘몬트리올’에 이민 허락을 취득한 후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진작 가 봤어야 했지만 코로나 팬덤이 한창일 때 이민을 갔고, 다시 팬덤이 풀려서야 금년 7월에 1개월여 쌍둥이 손녀들을 보러 다녀왔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 필요하거나 원한다면 매일 이라도 화상통화를 하면 되지만, 일주일 한 번은 꼭 통화를 하며 그곳의 사정을 듣곤 했다. 특히 사교육 때문에 이민을 갔으니 그곳의 교육제도에 늘 흥미를 가지고 쌍둥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민 첫해는 아이들이 1년간 프랑스어 연수를 했단다. 영어알파벳도 알지 못하던 아이들이 프랑스어라니… 쌍둥이 에게는 그 자체가 인고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학교는 가지만 눈만 멀뚱멀뚱. 그런데 같은 반 30여 명의 다른 아이들은(세계 각지의 이민자 자녀) 전부 영어를 했다는 것이다. 학업에 흥미가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고 학교인들 가고 싶었을까?

 

다른 아이들은 피부 색깔이 달라도 서로 재잘거리며 소통을 하는데 쌍둥이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한국으로 다시 가겠다고 쌍둥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기는 쌍둥이가 나와 통화를 할 때마다 기운도 눈초리도 멍해 보였다. 그러나 쌍둥이 엄마로서는 안 될 일. 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생활비 일부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꼭 생활비 때문이 아니어도 모든 뿌리를 몽땅 캐서 이민을 왔는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것이었다.

 

억지로라도 다그쳐 학교를 보냈는데 어느 날 교실에서 멍청히 밖을 내다보고 있는 쌍둥이에게 다가 온 담임 선생이“너희들 힘들지?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라며 두 아이를 수업 도중에 데리고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교정에서 잘 알지도 못한 불어로 다독여 주더라는 것이었다.

 

너무 얘기가 길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의 학습 태도가 180도 확 바뀌며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두 아이 5학년 때 쌍둥이 중 하나는 퀘백주 관광홍보 만화를 그려 우등상을 받았고 또 하나는 초등 졸업식 때 상(상 이름을 잊었음.)을 받았다. 쌍둥이는 금년 9월이면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는 덤으로 집에 돌아오면 저희들끼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쌍둥이 손녀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에 선생님이 늘 저희들 곁에 있다는 생각에 학습 태도를 바꾸고 불어는 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캐나다 교육이 우리처럼 대학입시 위주가 아니라 공부보다는 인성 지도 교육에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서두에 나오는 코자크 선생님의 얘기도,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우리네 교육제도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일 것이다.

 

과거엔 그래도 선생님이라면 권위가 있었고 그 권위를 학생이나 학부모가 감히 생채기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권위는 선생님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힘이 든다고 지병이 있다고 스스로 극단의 선택을 하는 선생님이 있는 한 선생님의 권위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전교조가 있는 한 학생들의 인성은 절대 변치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는데 빨갱이 사상은 아비도 스승도 없고‘어버이 수령’ 한 놈뿐이니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무죄다. 말썽부리는 아니면 학습지진아 슬그머니 불러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그런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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