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배(虛舟)의 교훈

빈배(虛舟) – 장자(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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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이제어하(方舟而濟於河):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유허선래촉주(有虛舟來觸舟): 빈 배가 와서 그의 배에 부딪치면

수유편심지인불노(雖有惼心之人不怒): 그가 아무리 성격이 나쁜 자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유일인재기상(有一人在其上 ): 그러나 그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즉호장흡지(則呼張歙之):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 이다.

일호이불문(一呼而不聞): 그래도 듣지 못하면

재호이불문(再呼而不聞):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어시삼호야(於是三呼邪): 더욱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즉필이호성수지(則必以惡聲隨之): 저주를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향야불노이금야노(向也不怒而今也怒):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향야허이금야실(向也虛而今也實): 만일 그 배가 빈 배라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인능허기이유세(人能虛己以遊世): 세상의 강을 건너가는 그대 자신의 배를

그대가 비울 수 있다면

기숙능해지(其孰能害之):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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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전략적 모호, 이준석계는 먼저 탈당…창당 양동작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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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린놈에게 너무 심한 것 같아 옛 시 하나를 들려주었다만……..

솔직히 너희 놈들이 정치를 알아???? 미친 하룻 강아지 색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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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金潤煥),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허주(虛舟)다. 부친은 오상고등학교 설립자이자 제4대 민의원을 지낸 매암(梅巖) 김동석(金東碩)이며, 동생은 제17·18·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태환(金泰煥)으로 3부자 국회의원으로도 유명하다.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부터 『영남일보』, 『대구일보』, 『동화통신』 기자로 활동하다가 1960년 3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1962년 조선일보사 주일 특파원, 1966년 주미 특파원을 거쳐, 1971년 3월 정치부 부장, 1974년 7월 편집국 부국장, 1975년 6월 편집국 국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79년 제10대 국회에 유정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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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창생으로,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국회에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제11대 국회에서는 외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일 의원연맹 간사장 및 부회장, 한·일 친선협회 중앙회 간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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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경상북도 구미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국회 통일외무위원회 위원, 신한국당 상임고문, 신한국당 나라회 고문직을 역임하였다. 1996년 7월에는 한·일 의원연맹 회장으로 재선되었고, 1996년 12월에는 과테말라에 대통령 특사로 방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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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자, ‘비영남 후보론’을 내세워 이를 적극 지원하여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시켰고, 1997년 10월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신한국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한나라당으로 합당하자, 한나라당 상임고문직을 맡았다. 1998년 4월부터는 한나라당 부총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동년 5월 6·4지방선거 한나라당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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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추진한 중진의원 청산 작업 과정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고, 이에 2000년 2월 이기택, 김광일, 이수성, 박찬종, 조순 등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과 연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 겸 대구 경북지역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경상북도 구미시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32%의 득표를 얻어 낙선하였고, 그와 함께한 어느 누구도 당선하지 못하고 결국 정계의 영원한 미아가 되어 쓸쓸히 정계를 떠났다. 이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며 이회창 후보의 반대편에 있다가 지지선언으로 입장을 철회했지만,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해가 서기 2003년 단기4336년 노무현 참여정부 원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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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킹메이커’라고 했다. 킹메이커라는 단어를 이 땅에 뿌리박게 한 선구자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여생을 보내며 보수 세력과 또 국가의 원로로 남아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잠시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당을 박차고 나가 새살림을 차렸으나 당은 물론이요 정권을 효암(梟岩)노무현에게 찬탈 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세월이 흘러 오늘날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린 효암의 잔당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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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로서는 억울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충분히 납득이 가고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 보았더라면 당시의 정국과 보수 세력의 입장도 고려했어야 했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추진한 중진의원 청산 작업 과정은 요즘으로 치면 당과 정치 혁신의 새로운 시도였었다. 개인 보다는 당, 당 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앞세운 참신한 시도였었다. 몇몇 늙다리 아니면 웰빙 정객들의 교체가 불가피한 시점이었다. 그 점을 간과하고 당을 박차고 나가 새살림을 차린 결과 자신들도 국가도 망국으로 치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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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얘기 하면 조디만 아플 거고, 빈 배(虛舟)선생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저 미친x들에게 불벼락을 내려‘빈배(虛舟)의 교훈’맛을 보여주어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미친x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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