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는 해랑 열차 여행기.(3부)

 

 

BY SS8000 ON 5. 16, 2009

 

해랑열차 여행기를 올리자 많은 이웃 분들께서 흥미로워 하신다. 특히 다정한 이웃 중 한 분이신‘새창(newwindow)님’께서 이런 표현을 해오셨다.“나도 기회가 되면 한 번 타보고 싶은데…가격대비 만족도가 괜찮은지 모르겠네요.”라고……….바로 이거다. 첫날1부에서 언급했지만, 2박3일에1인당100여만 원은 결코 낮은 가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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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여행 목적이 아닌 보따리장사 차 5대양5대주(아프리카는 未踏(미답)인 관계로…)를 다니며 수많은 호텔에 머물러 보았지만, 그 가격만큼의 서비스를 받아 본 경험이 없다.(물론 언어적 한계도 있었겠지만, 대개가 숙식을 제공하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설령 어느 곳에서든 그 어떠한 환대를 받았다 치더라도 요즘 시중에 한참 잘 나가는 어느 광고카피라이터처럼“집 나가면 개고생”인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열차여행’의 특성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덜컹거리는 객차 내에서의 잠자리는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것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열차 내에서 숙식(열차 내 식사는 어제 소개한 도시락 중식 제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하는 기차여행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얘기지만2박3일의 여행 중 지방의 온갖 특색 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담근 김치와 된장찌개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이 있었다.(결코 마누라에게 보내는 립서비스가 아니다. 여행의 목적은 먹고 마시고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행의 객체로부터 얼마만큼 서비스를 받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호텔리어(달리는 호텔인 만큼 승무원들을 호텔리어로 보아도 무방할 것임.)들의 근무 자세와 봉사정신이다. 해랑 호텔 근무자들의 서비스 정신은 타의 모범 그 이상의 점수를 줘도 모자랐다. 선남선녀로 구성된 호텔리어들은 부모님을 공양하듯 봉사를 넘어 헌신적으로 그들의 의무(?약간의 어패가 있지만..)를 다했다. 결론은 여행지가 좀 미숙(?)했지만, 그들의 봉사를 넘어 헌신적인 의무에 충분히 相殺(상쇄)가 되고 그 서비스만으로도 여행의 충분한 만족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나는 가을 단풍이 물들 쯤 아내와 그들의 서비스를 받으러 다시 한 번 더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이고! 낮잠을 너무 오래 잔 것 같다. 2부의 마지막 장면이 뭐였더라? 아! 그래!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을 청한 것이었지…사실 낮잠은 아무리 깊이 들어도1시간 이상을 잘 수가 없다. 더구나 덜컹거리는 열차내의 낮잠이라니,…..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하고 깨어보니 벌써 전라도 땅이다. 전라도 땅‘익산’이 지나고 또 알 수 없는 몇 군데의 역을 통과하자‘곧 광주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아나운서멘트가 흘러나오며 본격적인 전국일주 투어가 시작되는 것이다.

불과 수분 후에 우리의 달리는 호텔은 광주역에 멈추어 섰고, 우리 승객 모두는 승무원들의 지시(요구)에 따라一絲不亂(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광주역 앞에 대기한 관광버스에 승차를 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에 돌입해 보기로 하자!!@!!!!

 

서울역을 떠난 해랑열차는 거의 정확하게 4시간(오후2:30분)만에 빛고을 광주역에 도착했다. 설명이 부족했는지 모르지만, 열차여행이라고 하여 열차만 계속 타는 게 아니라, 어떤 명소에 도착하면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미리 정해진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열차로 돌아오면 열차가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형식이다. 광주역에 도착하여 광장에 대기한 버스에 오르는 동안 가장 흥분한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우리 마누라다. 광주는커녕 전라도 땅을 생애 처음 밟아 본다는 것이다. 하긴 뭐, 소시(?)적에 나 역시 업무관계로 전라도 땅을 밟은 것 외에는 이렇게 여유롭게 폼내며 전라도에 온 기억이 없다. 어쨌건 반갑다! 전라도야 광주야!!! 이곳도 내 나라 내 땅이 아니던가…..

 

일행21명을 태운 관광버스의 1차 목적지는 瀟灑園(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우리나라에 몇 남아있지 않는 옛 조선 전통의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 양산보(梁山甫)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양산보의 호가 소쇄인 관계로 소쇄원이라 하며 그는 이곳에서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고, 지금은 국가사적304호로 지정되어있단다.

 

여기서 잠시 여행순서를 바꾸어야겠다. 소쇄원을 향하던 관광버스는 우리 일행을 잠시 메타쉐콰이어 길로 안내한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측백나무과의 나무로 메타세쿼이아 속중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종이다. 수삼나무, 메타세콰이아라고도 부른다. 중국 쓰촨성, 허베이성이 원산지로, 성장이 빨라 가로수로 널리 심는다. 하지만 야생에 존재하고 있는 개체는5,000그루에 불과하며, 이에따라 특별보호 되고 있다.(네이버지식 in에서 따옴.)

 

그날 안내 설명사(버스를 갈아 탈 때마다 각 지방의 향토를 선전(?)하는 설명사가 버스에 동승하여 그 지방의 특산 또는 특색을 친절히 설명한다. 관광 안내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해설사는 지식in에도 없는 사실을 부연 설명해 준다. 세콰이어 앞에 붙은 메타(meta)는 이 나무가 1년에 1m씩 자란다하여 붙인 이름이라한다. 그러고 보면 담양 땅은 대나무를 비롯하여 속성으로 자라는 나무의 고장인가 싶다. 그날따라 휴일이라 또 다른 관광객이 넘쳐나는 관계로 메타세콰이어 숲길의 낭만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쯤 가로수를 벗어난 너른 논에 보라색 꽃의 향연이 널브러져 있다.

 

 

<사진>

紫雲英(자운영)이 아닌가. 거의 반백 년 전 중학교1학년 국어교과서에서 어떤 분의 수필인지 시인지 모르겠지만,‘자운영과 목매기(주; 아직 코를 뚫지 않은 1년 미만의 어린송아지)’가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문득 아스라니 그 대목이 떠올라 가까이가 카메라에 담는 모습을 보고, 해설사 아가씨‘저 꽃이 무슨 꽃 인줄 아십니까?’라며 퀴즈 아닌 퀴즈를 내기에, 얼른‘자운영아닙니까?’라고 아는 체 했다. 자운영은 중국 원산지인데 우리나라에는 비료를 만들 목적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뿌리혹박테리아가 있는 콩과 식물로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고정하여 스스로 질소비료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래서 겨우내 심어뒀다가 봄에 갈아엎어 비료로 사용하고, 요즘은 아예 농가에 자운영 씨앗을 공급하여 저렇게 기른다고 한다.

 

그렇게 메타세콰어 숲에서20여 분의 시간을 보낸 일행은 본래의 목적지인 소쇄원을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고, 약30분을 달린 버스는 우리를 소쇄원 입구에 토해 놓는 것이었다. 소쇄원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기 위해’네이버통합사전’을 뒤져왔다.

 

 

소쇄원은 소쇄 양산보가 귀양가는 스승 조광조를 따라 낙향하였다가 스승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거기에 충격을 받고 고향 담양에 조성한 것으로 4백70여 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別墅)이다. 특히 이 소쇄원에는 당대의 호남 사림들이 교유하던 장소로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를 비롯하여 정철, 고경명 등은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김인후가 쓴「사십팔영」은 소쇄원이 조성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시로, 소쇄원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소쇄원에 담긴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1755년에 판각된「소쇄원도」또한 소쇄원의 사십팔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린 소쇄원의 원형을 상고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높고 푸른 왕대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는 원의 입구 지역과 지치의 시대를 갈망하던 조선 선비의 이상을 조영시킨 대봉대의 동원지역 등 소쇄원 내의 건물과 곳곳에 마련된 조경물들을 시각의 이동에 따라 관련 문헌을 인용하거나 적절하게 사진을 배치함으로써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기존의 소쇄원의 수목을 중심으로 다루던 조경사 적 분석에서 벗어나 소쇄원이 조성되게 된 배경 및 각 공간에 내포된 숨은 뜻을 발견하게 한다.

 

<사진>

소쇄원 입구에 서있는 안내간판.

 

<사진>

해설사의 얘기에 심취되어 있는 우리일행들.

 

 

울창한 숲속의 정원도 훌륭하지만, 누각의 현판 글씨가 모두 양산보의 스승 조광조의 글씨란다. 내가 글씨를 알아볼 리 없건만, 그야말로 당대 진보적 정치인이 정치 쇄신을 일으켜 보려다가 반대파에 몰려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거짓 정보 한마디에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불귀의 객이 됐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다만 그가 남긴 筆跡(필적)이라니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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