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는 해랑 열차 여행기(끝내기)

BY SS8000 ON 5. 19, 2009

 

오늘은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여행기를 풀어야겠다. 웬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친구와 돈암동 점쟁이 골목을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산통을 흔들든 점쟁이 양반이 내 사주에‘천역과 역마살’이 잔뜩 끼었다며, 평생을 소처럼 일만하고도 손에 남는 게 별로 없을 것이며 그것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지를 돌아다닐 상이라는 것이다.

 

뭐 솔직히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었고, 일이 안 풀릴 때마다‘그 놈의 점쟁이 말이 맞는가보다’라며 自嘲(자조)하곤 했는데, 그 보다는 점쟁이의‘역마살’이 끼었다는 얘기는 정말 공감이 가는 대목이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아직도 사방을 바쁘게 굴러다니니 그 점쟁이가 족집게는 족집게 인가보다.

 

나의 역마살이 어느 정도 였는지, 이제 나이60이 넘어 숨길 것도, 쪽 시러워 할 것도 없다. 난 청소년기 정말 문제아 였던 것이다. 중학교2학년까지는 우등생에 타의 모범이 되고 품행이 방정한 아이였는데, 중3으로 올라가며 가정적으로 큰 문제없었음에도 빗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디어 고등학교 때는 무단가출을 자주 했었는데, 자질구레한(?)가출은 빼고, 그 중 한 번은 제주도로 도망을 가 신축공사장 잡역으로 또는 서귀포 귤 농장에서 세월을 보내고5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와 유급이 됐다거나, 또 한 번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강원도 삼척으로 달아나‘삼척산업(지금 동부기업의 모태이자 전신)’이라는 곳에서3개월(그 해에도 또 유급을 했다.)정도 직공으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사건이라든가. 물론 그때마다 죽지 않을 만큼 치도곤을 맞지만 나의 그런 역마살을 빙자한 무단가출은 고쳐지지 않았고, 그런 나의 跛行(파행)들은 군입대를 하며 조직 생활의 지배하에 놓이고 강제에 의한3년 간의 出家(출가)를 겪으면서 고쳐졌던 것이다. 지금 이 썰을 풀며 지난날을 反芻(반추)해 보면 나 자신이 나를 이해 못할 과정들이 주마등이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에고! 아버지! 어머니! 그땐 이놈이 우째 그랬는지…..???많이 힘드셨쥬????-.-;;;ㅠㅠㅠㅠ….(변명: 그래도 나는 직공이나 막노동을 해가며 생활했다.)

 

암튼 삼척산업이라는 곳에서 직장생활(?)할 때이다. 그때 나 보다는 두세 살 많은 직장동료이자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의 집이‘추암’이라는 곳이다. 옛날엔 달력에‘추암 촛대바위’로 유명했던 그곳이다. 주말이면 선배네 집으로 놀러가 조그만 무동력 어선을 저어 촛대바위 근처에서 고기를 낚거나 뱃놀이를 즐겼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찍어 둔(촛대바위를 배경으로 한)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이곳에 올리려고 아무리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아이고! 이게 무슨 여행기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자전적‘썰’로 둔갑했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이다. 생생 이벤트 라이브공연을 즐기며 몇 잔 걸친 포도주 기운과 함께 룸으로 돌아와 기분 좋게 잠들었나 했더니 새벽4:30분 쯤 일행을 깨우는 장내방송이 있었다. 오늘 가장 중요한 행사는 해돋이(일출)보기라는 것이다. 겨울과는 달리 일출이 빨라지는 관계로 서둘러 달라는 것이다. 드디어 아직도 未明(미명)인 새벽5시에 우리 호텔은‘추암역’에 도착했다. 추암, 이게 정말 얼마만인가? 40년도 넘어서야 이곳을 다시 찾았다.

 

지난주엔 친 형수도 아니면서 어머니처럼 내게 살갑게 대해 주시던(다른 친척들은 인간 안 될 거라고 제껴 놓은 나를 언제나 따뜻하게 보살펴주시던…)친척 형수님이 위암이 재발하여 돌아가셨는데, 그때 어릴 적 보고 못 보았던 친인척을 만났다. 서로 먹고살기 바쁘다보니 不知不識間(부지불식간)많게는 50년 또는 40년 이상 보지 못했던 그들을 만나며 내가 뱉은 말“히야!너희들 못 본 게50년이 넘었다니…남북이산가족50~60년도 그리 요란 떨 것 없다. 그거나 이거나 다를 게 뭔가?”였다. 누가 방해하거나 制裁(제재)하는 것도 아닌데, 반백 년 이상 교류가 없다는 것은 서로 간 무심하기도 했겠지만, 세월의 빠름이 가져다 준 부산물(?)일 것이다.

 

그렇듯, 20이  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역마살에 부대끼며 무심결에 발길 닿았던 삼척 땅(지금은 동해시 추암동으로 바뀌었음)하고도‘추암 촛대바위’를 40여 星霜(성상)을 보내고야 다시 찾았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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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 해변의 절경. 아쉬운 것은40여 년 전엔 작은 포구로 한가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번에 가 보니‘추암 해수욕장’이라며 동네가 온통 팬션 이니 숙박시설로 요란하다. 山川(산천)이 依舊(의구)한 게 아니고 桑田碧海(상전벽해)했고, 인걸(친구)또한 찾을 길 막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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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사위 속에서 얼마를 기다리니 점차 먼동이 터온다.

 

드디어 완연한 일출을 보았다. 동행한 승무원 얘기로는 이런 정도의 맑은 일출은1년에 몇 차례 안 된다며, 여러분의 행운이라고 말한다. 수년 전 백두산을 등정했는데, 그때도 백두산 정상의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1년을 꼽아 일주일도 채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런 만치 여러분은 진짜 행운이라고 추겨 세우던 립서비스가 생각난다. 과연 나는 행운아였던가????그것도 역마살 낀 행운아???

 

<사진>

해 뜨기 전의 추암 해변의 바위를 찍어보았다.

 

마치 다정한 남녀(우리 부부일수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해에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뭔가를 渴求(갈구)하는 듯하다. 도대체 언제쯤 우리(나라)에도 黎明이 밝아올까?

 

일출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추암을 떠나 다시 삼척의 온천장으로 모셔져 간밤의 여독과 새벽기상의 피로를 씻었다. 온천장을 떠난 버스는 지정된 식당에서 우럭미역국(원래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데, 정말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식사 도중 여기저기서 찬탄과 호평의 소리가 들렸다. 특히 미국서 오신 정 선생은‘노하우’를 꼭 배우고 싶어 했으나, 안주인이 한사코 안 된다고 하여 머쓱해지고 말았다. 뭐, 영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살짝 귀뜸만 해 주었으면 좋았을걸…)에 조식을 마치고, 관광버스에 오른 우리는 중국의 무릉도원과 맞먹을 만큼 절경이라는 ‘무릉계곡’으로 향했다.

 

<사진>

계곡 입구에 들어서는데‘변강쇠 약수터’라는 간판이 서 있고…그 아래….

그 놈 참! 실허기도 하다. 저 놈은 평생 전립선에 문제가 없나보다.

 

<사진>

계곡도 계곡이려니와 산세가 정말 수려했다.

계곡입구에서 10여 분 올라오면 삼화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후삼국 때’왕건’이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절이다.

 

무릉계곡과 삼화사 경내를 관람한 후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동해역에 기다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일찍 서둘렀음인지 이제 아침9시가 좀 넘었다. 잠시 후 우리의 호텔이 미동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부드럽게 동해 역사를 벗어나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달린다. 통창으로 이루어진 차창 밖은 그것 자체로 한폭의 수채화이다. 그렇게30여 분을 달리다 호텔은 저 유명한 일출의 요람’정동진’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그곳에서 여러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워낙 개인적인 것이라 생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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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오른다는데….요즘 한나라당이 청와대가 그리고 나라 꼬라지가 저모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동진 산 정상까지 올라간 배 모양의 호텔.

 

정동진에서의 추억 만들기를 마친 우리들의 다음 행선지는 태백이다. 지난 날 광산촌으로 유명했던….태백까지 이동 중에 우리의 호텔은 가파른 강원도 산을 힘겨워 하면서 지그재그로 오르는 것이었지만, 수백 길 산 아래 마을을 바라보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그것 조차도 낭만인 것이다. 무수한 터널을 지나고 산꼭대기를 돌아 태백역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중식은 태백골 한우파티다. 강원도 한우의 맛이 일품이라는 것은 부연하지 않더라도 이미 정평이 난 것이고,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낙동강의 시발점이라는 황지 연못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사진>

낙동강의 원천이라 하여 대단한 줄 알았더니, 동네 한가운데 한가로이 놓여 있는 아담한 연못이다. 지난겨울 금년 봄 갈수기 때, 이 연못까지 마르고 인근의 주민들이 고생했던 뉴스를 자주 접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보다시피 해갈이 되어 있는 듯 없는 듯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사진>

낙동강 원천을 알리는 입석이 더 이채롭다.

드디어 정말 지루한(여행자체가 지루하다는 게 아니라 장황한 나의 썰이….)이번 여행기가 끝날 때가 된 것 같다. 황지 연못을 돌아 본 우리들은‘추전역’이 다음 행선지로 정해져 있었다.

 

추전역은 광물을 나르는 화물열차는 출입이 가능하지만, 일반 객차는 오를 수 없는 곳이다. 단지 해랑열차관광객에게는 VIP특전이 부여된 곳이다.

 

<사진>

추전역 뒷산 높은 고지에 무공해 풍력발전소가 있음을 보고 한 장 찍었다.

 

여러분! 지루한 저의 여행’썰’을 마치겠습니다. 어쩌면 되지도 않는 얘기로 일관하며 정말 썰을 푼 것을 끝까지 읽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아무튼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그 어떤 것보다 해랑열차 승무원들의 따뜻하고 정성을 다한 서비스에 가장 큰 점수를 주고, 기타 먹거리도 비교적 준수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제1부에서 피력한 것 같습니다마는 승무원들의 헌신적 봉사정신에 매료되어 올가을 단풍이 짙으질 무렵이나 내년 봄에 꼭 그들의 정성어린 서비스를 한 번 더 받아보고 싶습니다.

 

추전역을, 출발한 달리는 호텔은2박3일의 여정에 지쳤는지 아니면 헤어짐이 아쉬운지 출발할 때의 그런 힘찬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약5시간을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승객이 내리기 전 승무원 팀장의 목소리가 아쉬운 듯 흘러나왔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돌아가시라는 인사말과 함께 그는”회자정리(會者定離)”이지만,”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말에 더 역점을 주었습니다.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지만, 간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역사를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그들 앞에서 한마디했습니다..우리 부부는 언제고 해랑으로 꼭 돌아온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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