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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반성 리포트]나는 선죽교를 잊고 있었다. - 중동 천일야화
[반성 리포트]나는 선죽교를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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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나는 선죽교를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은 어제 2009년 8월 11일 밤 11시경 광화문 베를린 호프에서 확인됐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배는 여행전문기자로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는데, 이 날 밤 허름한 맥주집에서 여행의 중요성에 대해설파를 시작했을 때 였다. 골자는 ‘여행을 떠나 현장을 직접 오감하라’라는 것. 한 예로 자신이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혈흔을 목격했을 때 그 감명은 잊을 수가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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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 이야기가 많은 분이신 것 같다. 조선일보 10년 경력 여행 전문기자였던 만큼

이야기는 전세계를 넘나들고, 때로는 지극히 한국을 파고 든다.

이날 가지고 다니는 즉석 인화기로 사진을 뽑아주시는 센스를 선보이셨다. ^^

나는 모르면 몰라도 바로 물어보는 편인데. 선죽교에 대해 잘 모른다고 얘길 했고. 박종인 선배는 선죽교에 대해 원고지 3장으로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아, 내가 국사를 모르는 편은 아닌데,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스스로 할 부끄러웠다. 왜 선죽교를 대해 잊고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고등학교 국어시간 교실로 돌아갔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선생님의 선창을 따라 줄줄 외우던 시조의 주인공 정몽주의 가슴 아픈 죽음이 서려있는 선죽교가현상되는 필름처럼 떠올랐다. 하지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근 8년동안 선죽교를 들지도 보지모 못하고 않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 나는 국어 교과서, 국어 선생님 대신 인터넷을 통해 재학습했다.

선죽교 善竹敎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있어서 정몽주의 핏자국이라 전해진다. 원래 선지교 善地橋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북한 문화재로 지정됐다. 국모 문화유물 제159호.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

고려말 이성계(태조)가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세우려 할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이 정몽주선생을 포섭하려 했지만, 거절당했고, 거사에 방해를 줄거라 생각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철퇴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상 반성 리포트 끝

2 Comments

  1. 최희선

    2009/08/14 at 8:15 am

    선배허락은 받고 사진 올리는 거임? 역시 노석조. 술자리 도촬 전문. ㅋ   

  2. 노석조

    2009/08/14 at 3:48 pm

    허락받아야 겠지? ;; 그래도 멋지게 나온 사진인데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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