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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장욱진 전에 가다. 한국 토종 모더니스트를 마주하다. - 중동 천일야화
장욱진 전에 가다. 한국 토종 모더니스트를 마주하다.

IMG_0840.JPG

20100123 السبت

여유로운 토요일 하루가 주어 졌다. 신문을 보고 식사를 하고 설거지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From Beirut to Jerusalem을 한 시간 읽는데불현듯 얼마전인상깊게읽은한 기사가 떠올랐다. ‘화가 장욱진’ 이었다.

급하게 샤워를 하고 청바지에 자켓만 챙겨 입고 머리에 왁스도 바르지 않은 채 부랴부랴 집이 나섰다. 다행히 서울대미술관까지 한번에 가는버스가 있었다. 신문 보면서 고개 떨구며 졸다보니 어느새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 다다랐다.

MOA에 들어 갔다. Museum of Art Seoul National University서울대미술관에는고 장욱진 화가의 그림 한장이 출력된 현수막이 칼바람 속에 걸려 있었다.그 안엔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서울대 학생예요?"

-아뇨

"삼천원 입니다."

-아, 네

MOA는처음인지라 두리번 거리며여백미를 살린 미술관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투박한 마감질을 한 것 같은계단을 비롯한 공간벽은 오히려정백한 느낌을 가져다 줬다.다소 차가운 느낌마저 들었지만 따뜻한 색깔의 그림 몇 점이 이를 상쇄시켰다.

장욱진 화가 전시실에 들어 섰다.발을 들이면서 내가 왜 이 곳에 오게 됐는지 잠시 떠올렸다…

신문기사를 통해 장욱진의 그림 한 점을 봤을 때난 두 명의 화가를 떠올렸다. 한국 화가 박수근 과 미국의 장 미쉘 바스키아 였다. 그림 소재와 질감은 박수근을,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자유로운 형상화 기법은 바스키아를 닮았던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불쑥 미대 서양화과를 부전공을 신청하고 바스키아를 추종하던 내가 그리고 표현하고 싶었던 그림이 고 장욱진 화가의 것들이었다. 과거선망의 대상이 우리나라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적잖게 날 흥분시켰던 것이다.

‘표현表現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자기自己의 진솔한 고백告白에서 표현表現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림을 통해 자신 내면의 모든 것을 토해내려고 한평생을 살았다는 느낌을 그의 작품 변화 추이에 따라 5구획으로 나뉜 전시회장을 돌며 느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Self Identity을 찾아 갔다. 찾아 가는 과정이 곧 그림이었다. 재밌는 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체성을 잡아 가면 갈 수록 그림은 단순simple해졌다. 그림 소재는 까치·나무·개·달·아이 같은 ‘일상’이었지만 형상화하는 표현은 어린아이 붓놀이마냥 ‘파격’이었다. 일상이었지만 파격이었다. 그게 장욱진의 삶이었고 장욱진이란 사람 그 자체였다.

그의 생전 몇 사진을 봤다. 마른 체격, 하회탈 웃음 주름살, 굵고 거친 수염. 실제 화가의 모습과 작품에 경계가 없었다.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소박한 그림이나 돈냄새라곤 들이대고 맡아도 나기는 커녕 봄날 얼었다 녹기 시작한 시골 흙냄새만 구수하게 날 것같은 장욱진은 하나였다.

말한마디 없이 전시회실을 돌고 나와 창백한 피부에 고리타분한 검은 정장 차림을 한안내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터벅 거리며 MOA를 나왔다. 숨을 들이쉬니 저녁 공기가 찼다. 나도 표현해야지. 노석조 나 자신의 진솔한 고백을.

지극히 차분하게 마음에 표현의 욕망과 사명을 새겼다. 장욱진의 그림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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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과 저 곳을 잇는 뉴스카라반, 돌새 노석조 ; Http://stonebir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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