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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알제리의 독립전쟁 투사들과의 만남 “앗쌀라무 알레이쿰” - 중동 천일야화
알제리의 독립전쟁 투사들과의 만남 “앗쌀라무 알레이쿰”

알제리의 독립전쟁 투사들과의 만남

"앗쌀라무 알레이쿰"

북아프리카 알제리 수도 알제 도심 한 호텔방에서 2013년 9월

노석조

2013년 여름 휴가로 알제리 여행을 할까라는 생각은 지난 7월초 이집트 쿠데타 사태를 취재하러 카이로에 갔을 때 했다.

당시 취재를 마치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은 알제리전투. 1950년대 알제리가 프랑스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였던 독립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알제리인들은 인종차별정책으로 통치하는 프랑스정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은 교육받지 못하게 하고 단순노동만 하게 했다. 허가없이는 집근처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대신 알제리에 넘어온 프랑스인은 이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특권층의 삶을 누렸다. 혈기왕성한 알제리 젊은이들은 분노를 억누를 수없었다.

분노는 민족해방전선이란 이름의 무장 지하조직을 탄생시켰다. 프랑스인들이 놀고먹는 카페에 폭탄을 설치해 터트렸다. 탄압하는 경찰들을 살해했다.

프랑스도 가만있지않았다. 맞불을 붙였다. 용의자를 잡으면 그 용의자가 사는 집근처를 조사할 것 없이 그냥 폭파해 집단 살해했다. 갖은 고문으로 취조해도 점조직을 해부하기 어려웠기때문이다. 보복성도 있었다.

그렇게 7년 4개월간 이어진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 군경과 주민 2만6000명이 사망하고 알제리인150만명이 사망했다. 1962년 전쟁은 민족해방전선 주동자들이 거의 체포 및 살해되며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전쟁은 기자들의 보도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흔들었고 프랑스 내부 정치에도 영향을 줘 결국 그해 3월 알제리를 독립시킨다.

2013년 9월 1일 오전 6시 알제리 수도 알제 도심의 스위스호텔을 나와 지중해를 향해 30여분을 걷다보니 알제리 전투의 현장인 카스바에 도착했다. 아침 바다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알리 암마르 등 독립전쟁을 이끌던 인물들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가슴위에 올려놓고 인사했다. "앗쌀라무 알레이꿈." 그렇게 알제리 여행 첫날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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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전선 리더였던 알리 암마르 사진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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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알제에서 머물던 호텔 스위스. 하루 숙박비가 6000~8000디나르다. 공식적으로 79디나르가 1달러로 환전되지만, 암시장에선 105~110디나르가 1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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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바로 가는아침 길에 조간을 보는 알제리 중년과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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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바 인근 전경. 프랑스 지배를 받던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 Comments

  1. 황성식

    2013/10/02 at 1:51 am

    알제리하면 Frederick Forsyth의 1971년작 베스트셀러 The Day of the Jackal 을 떠올리게 됩니다. 74년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2. 돌새 석조

    2013/10/02 at 9:10 am

    아…한번 찾아서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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