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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으로 수백억원 받아낸 사우디 왕자의 ‘숨겨진 부인’
소송으로 수백억원 받아낸 사우디 왕자의 ‘숨겨진 부인’
파흐드(2005년 사망) 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숨겨진 부인’이 지난달 파흐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41) 왕자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승소해 수백억원의 현금과 런던 중심가의 아파트 두 채를 거머쥐게 됐다. 압둘 아지즈 왕자는 항고할 생각이지만, ‘숨겨진 부인’은 “그러면 파흐드와 왕실의 비밀을 다 까발리겠다(to spill the beans)”면서 으름장을 놓고 있다. 파산 상태였던 그가 이번 소송으로 팔자를 펴게 됐다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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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흐드 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그의 ‘숨겨진 부인’ 하르브

‘숨겨진 부인’의 정체는 팔레스타인 출신 영국인 자난 하르브(67). 그는 “파흐드가 2003년 위자료 명목으로 1200만 파운드(약 205억원)와 런던 부촌(富村)인 체인 워크와 첼시의 아파트 두 채를 주기로 약속했다”면서 런던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에 사우디 왕실은 ‘국가 면제(State Immunity)’를 주장하며 재산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국가 면제’란 한 국가의 재산은 다른 나라 영토에 있더라도 그 영토국가에서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가간 협약이다.

하지만 수년간의 재판 끝에 이날 런던 법원의 로즈 판사는 “하르브의 주장에 대해 압둘 아지즈가 충분한 해명을 하지 않았으며, ‘국가 면제’라는 것도 파흐드가 살아있어야 주장할 수 있다”면서 지난 6월 10일 하르브의 손을 들어줬다. 하르브는 이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행복하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고 가디언 등 영국 신문들이 보도했다.map

사우아라비아 지도 /구글

‘아랍판 신데렐라’의 탄생

하르브는 스무살이던 1967년 9월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파흐드를 처음 만났다. 파흐드는 이미 아내가 있었고, 자녀가 아홉이었다(나중엔 11명으로 늘었다). 하르브는 팔레스타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시골뜨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음식점을 운영했다. 1967년은 하르브가 사우디에 막 정착했던 해였다.

아랍어와 영어를 잘해 그해 사우디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관의 통역관으로 취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사관 관계자들과 현지 사업가들이 모이는 파티에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유부남’ 파흐드의 눈에 띄었다. ‘아랍판 신데렐라’ 스토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사우디에서 남자는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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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브가 파흐드와 결혼할 시기의 모습 /맥스이미지

“파흐드는 약간 살이 쪄보였지만 턱수염이 깔끔하게 정돈해서인지 꽤 매력적이었어요. 혼자 연회장을 걷고 있는데, 키가 큰 한 남자의 눈이 저를 향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요. 파흐드는 사우디 왕자 중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이라 그 남자가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어요.” 하르브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흐드는 파티가 끝나고 며칠 뒤 하르브의 집에 찾아가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르브가 어느날 대사관 일을 마치고 서부 도시 제다의 자그마한 집에 돌아왔을 때 검은 리무진 한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르브는 이 집에 사촌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는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리무진의 운전사가 다가오더니 2만달러(2000만원)가 든 편지봉투 하나와 보석 상자를 건넸어요. 상자엔 터키석과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들어있었죠.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은(tough cookie) 여자였어요. 받은 걸 전부 다 돌려줬지요.”

파흐드는 다음날 다시 하르브의 집에 찾아가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고 한다. 하르브는 “‘왕자님을 대접할 만한 음식 종류를 집에서 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파흐드가 사라지더니 한 시간 뒤 뷔페 차량 7대와 함께 다시 나타났어요. 곧 비둘기 고기같은 중동(中東)식 별미에, 복숭아·석류 등이 순식간에 눈 앞에 차려졌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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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흐드가 1975년 7월 21일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기자들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 /AFP

그후 어느날 파흐드가 불쑥 하르브의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파흐드는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단 결혼식을 비공개로 올려야하며 하르브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사우디에서 무슬림은 비무슬림과 결혼해선 안 된다. 특히 파흐드는 국왕이 될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종교문제가 더욱 신경쓰였다. 파흐드는 또 사우디 여성이 아니라 아랍 세계에서 약자(弱者)나 난민의 민족으로 천대받는 팔레스타인인과 결혼한다는 것도 알리기 힘들었다.

하르브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숨겨진 부인’이 될 것이란 걸 알았지만, 정중히 청혼한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딸을 말리지 않았다. 결혼은 1968년 3월 사우디 왕궁에서 치러졌다. 이슬람의 예배인도자 1명, 왕자 1명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사우디 왕실은 하르브에게 왕가 이야기를 외부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둘 사이는 하르브가 임신하면서 삐걱거렸다. 하르브가 처음으로 임신했던 1968년, 파흐드는 애를 낳을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파흐드는 “어린 아라파트(팔레스타인의 지도자)가 사우디 왕실을 뛰어다니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르브는 이듬해 두 번 더 임신했지만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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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브(왼쪽)와 파흐드가 사우디 왕궁에서 함께 앉아 있는 모습.

1970년말 파흐드의 형제들은 갑자기 하르브에게 2시간 내로 사우디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의 옷가지는 레바논 베이루트 주재 사우디 대사관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가 선물 받은 보석, 파흐드와 찍은 사진, 결혼 증명서 등은 압수당했다. 하르브는 미국으로 망명을 원했고, 파흐드가 이를 허락했다. 3년만에 ‘숨겨진 부인’이 왕실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하르브가 규율을 고분하게 따르지 않은 것을 왕실이 문제삼은 듯 했다.

하지만 둘은 이후 런던에서 1번, 리야드에서 2번 만났다고 한다.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1974년 세번째로 리야드에서 만날 때 하르브는 “아이를 갖고 싶다. 레바논 기독교인 남자와 교제하고 있다”면서 이별을 고했다. 하르브는 이 레바논 남자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지만 몇 년 뒤 헤어졌다. 이후 하르브는 대출비를 제대로 갚지 못해 파산 신청을 해야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사우디 왕자의 마지막 선물

파흐드는 하르브에게 남자가 있는 걸 알면서도 전화를 종종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는 특히 1982년 국왕에 즉위한 이후엔 하르브를 중동·북아프리카 모처(某處)로 초대했다. 파흐드는 자신의 청으로 결혼했지만 왕실의 압력에 쫓겨난 하르브를 각별히 신경썼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위자료 성격으로 런던 첼시의 아파트 등의 부동산과 생활비 명목으로 총 1200만 파운드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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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흐드가 하르브에게 준 ‘마지막 선물’ 중 하나인 런던 첼시의 아파트.

하지만 국왕 왕이엄조선에서rks 파흐드는 관절염·당뇨를 심하게 앓다가 1995년 발작으로 쓰러졌다. 국가 장악력은 빠르게 약해졌다. ‘숨겨진 부인’에게 신경을 쓸 힘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2005년 사망했다. 하르브는 파흐드가 사망하기 전부터 왕실에 약속된 재산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최후의 방법으로 소송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산없는 게임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여자로서 특히 부끄러울 수 있는 사연들이 공개돼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런던 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행복하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라고 하기 전에 한 말이 “오랫동안 너무 힘들었다”였다. 그는 한창 소송을 벌이던 2007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우디 왕실은 여자를 무시합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도 싸울 겁니다.”

사우디 왕자의 ‘숨겨진 부인’이 됐다가 외출을 제한받거나 임신했을 경우 중절 수술을 강압받은 뒤 추방당하는 여성들이 하르브 외에도 여럿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입증 자료가 없거나 왕실의 위협으로 소송같은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르브 사건’ 이후 왕실은 이와 유사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왕자들의 연애문제를 엄격히 감시·관리하고 있다.

 

돌새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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