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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이스라엘 모사드의 ‘제임스 본드’ 하라리의 부음 기사 - 중동 천일야화
이스라엘 모사드의 ‘제임스 본드’ 하라리의 부음 기사

이스라엘 모사드의 ‘제임스 본드’ 하라리의 부음 기사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제임스 본드’ 마이크 하라리(מייק הררי)가 지난 21일 텔아비브 자택에서 숨졌다. ‘자연사(自然死)’였다. 그는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테러리스트냐 국가의 요원이냐’는 논란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비밀조직원을 찾아내 소리없이 제거하는데 명수였다. 본인 스스로 너무 했는가 싶었는지 스스로 ‘자연사’하지 못하고 암살될까하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라리의 인생은 그림자(shadow)였다. 그는 2000여년만에 다시 세운 국가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킨다는 사명 아래 음지(陰地)에서 이름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의 존재는 1972년 독일 뮌헨 하계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팔레스타인 비밀조직 ‘검은 9월단(منظمة أيلول الأسود)’에 납치, 전원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드러났다. 모사드가 이 사건의 후속조치로 ‘신의 분노’라는 작전명으로 검은 9월단 핵심 인사를 하나 둘 암살하면서 이전보다 큰 국제적 이목을 받게 되면서 부터다.

 

PALESTINIAN GUERILLA.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난입한 검은 9월단 단원의 모습

 

‘신의 분노’는 다음과 같았다. 하라리는 모사드의 암살팀 ‘키돈(창·槍)’을 통해 ‘뮌헨 참사’를 계획한 인물에 대한 색출 작업에 착수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조직 ‘파타’가 검은 9월단과 연계됐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다. 1973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파타의 고위급 지도자가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결국 입수, 차례로 3명을 암살한다. 이후 6년간의 추적 끝에 검은 9월단의 간부 알리 살라메흐의 제거에도 성공한다.

 

“암살된 이들이 실제로 ‘뮌헨 참사’에 책임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보복 암살이란 방식이 옳다고 보느냐”라는 화살이 이스라엘에 쏟아졌다. ‘테러를 테러로 대응한다’면서 하라리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한참 뒤인 2012년 다비드 전 모사드 부국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작전의 목표는 그렇게 복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그들(팔레스타인 무장조직원)에 대한 위협의 의미가 더 컸다”고 말했다. ‘뮌헨 참사’의 실질적인 책임이 없더라고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압박함으로써 제2의 공격을 쉽사리 계획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정당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의 분노’작전은 유대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뮌헨(2005년)’이란 영화로 다뤄졌다.

 

‘뮌헨’은 암살 방식이 옳은가에 대한 하라리의 고뇌를 조명했다. 이 영화에서 하라리는 “조직의 핵심 인물이라고 해서 죽여봤자 금세 또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고 더한 악성의 분노가 생겨나지 않느냐”고 소리친다. 폭력으로 폭력을 막으려고 해온 모사드의 핵심 간부가 이것은 아닌 것 같다는 깨닫음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그의 팀이 1973년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의 무고한 모로코인 웨이터를 검은 9월단의 살라메흐로 잘못 판단해 총으로 쏴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자 큰 충격에 빠졌다. 모사드 요원 5명이 노르웨이 수사당국에 체포됐고, 이들의 신분이 국제적으로 노출됐다.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 골다 메이어가 거절했지만 하라리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고 한다.

 

하라리는 이후 다시 모사드에 충성을 바치고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폭력에 맞서 평화를 찾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모사드의 대(對)팔레스타인 정책엔 이견을 표출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때문에 그가 모사드에서 ‘제임스 본드’라 불릴 정도로 인지도가 높고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모사드의 수장으로는 못 올라갔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팔레스타인 조직이 납치한 민항기 내 승객을 구조하는데 성공하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54세이던 1981년 모사드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여전히 음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란의 핵과학자 암살 등에도 연루됐다는 설이 있다.

 

Mike Harari at a funeral in Tel Aviv in 1994.

1994년 텔아비브의 한 장례식에 참석한 마이크 하라리.

돌새 노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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