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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 심장 위를 걷다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고향집 서재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토지’가 꽂혀있습니다.

세로쓰기 본, 가로쓰기 본, 이 출판사, 저 출판사,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토지’는 출간됐고,

제가 꽤나 자랐을 때 완간이 되었지요.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들을 뽑아다 읽었습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간 권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주인공 서희에 끌렸습니다.

오만하고 당당한,

미인에다 영리한,

여주인공에 매료되었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와 비교하면서

서희가 나오는 부분만 쏙쏙 뽑아 읽었습니다.

좀 더 자라고 나니

서희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용이와 월선의 서글픈 사랑,

차마 자식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어머니에 대한 최치수의 애증,

평생 딴 여자에게 마음을 준남편 때문에 속 끓이다 죽고 마는 강청댁,

바람기 많지만 원시적인 건강함을 지닌 임이네 등등…

한 때는 용이와 월선이가 나오는 장면만 골라 읽었고,

한 때는 기생이 된 봉순이가 나오는 부분만,

또 한 때는 용이의 손녀인 상의가등장하는 일신여학교 부분만빼서 읽기도 했고,

한 때는 봉순이의 딸 양현이가 나오는 부분만 발췌해 읽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여러 번 ‘토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번에 쭉 훑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양이지만

부분 부분 읽어가며 짜깁기를 해 보니

어느새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더군요.

(물론 놓친 부분도 많습니다)

기억에 남는장면들이 많습니다.

어린 서희가 엄마 데려오라고 소리치며 실꾸리를 집어던지면서 발작하듯 우는 장면,

(작가가 ‘이 집념의 덩어리같은 아이’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용이가 어릴 때 홍역으로 죽은 누이를 회상하는 장면,

서희가 연모했던 상현이 길상의 밥그릇 위에흙먼지 묻은 감을 떨어뜨리는 장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강가에서 우는 양현을 백정의 아들인 영광이 바라보는 장면,

광복을 맞은 서희가 나무가지를 움켜쥐고 자신을 옭아맸던 사슬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장면 등…

이 모든 장면들과 함께

특히나 잊혀지지 않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최참판댁 여종이었던 귀녀의 죽음을 서술한 문장입니다.

‘왕후장상에 씨가 있을소냐’했었던 만적처럼

신분제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귀녀는

김평산, 칠성이 등과공모해 삼끈으로최치수를 교살한 후

최치수의 아이를 가진 것처럼 위장해 최참판댁의 재산을 차지하려 합니다.

이 계략은 결국윤씨 부인에게 발각되고

옥에 갇힌 귀녀는아이를 낳은 후 죽고 맙니다.

마지막 순간에 귀녀는 자신에게 순정을 바쳤던 강포수라는 사내에게잘못을 뉘우친다고 털어놓지만,

어쨌든

누구보다도 세상에 많은 한을 품었을 것 같은 여인의삶을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어 작가를 직접 뵙게 된다면

귀녀의 죽음을 그 문장으로 표현한 까닭을 꼭 묻고 싶었는데

다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네요.

제 고향 인근과 고향을 무대로 벌어진 이야기들을,

익숙한 고향 말로 적어준 작가가

먼 세상으로 가 버렸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강포수, 손."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손."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놓고 있었다.

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

조그마한 손, 손아귀 속에서 바스라질 것 같은 손이다.

"마, 마.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이, 이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포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 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러바서 그, 그랬소.

포전 쪼고 당신하고 살 것을, 강포수 아, 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 으흐흐흐흐…."

밖에 나온 강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쳐박고 짐승같이 울었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

오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박경리, ‘토지’ 중에서-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sophiaram로 이사합니다.

8 Comments

  1. 김수연

    2008년 5월 7일 at 1:48 오후

    소식 듣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언제나 우리곁에 머물러 계실줄 알았는데요…
    이제는 고인이 남기신 책으로만 만날 수 있겠지요.
    완간까지 읽어보진 못했지만, 앞으로 읽을 나날들이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2. 하경희

    2008년 5월 7일 at 3:35 오후

    가가람씨,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멋진 분이 가셨군요! 같은 고향이라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군요.   

  3. 곽아람

    2008년 5월 7일 at 5:32 오후

    김수연님> 저도 소식 듣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나마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4. 곽아람

    2008년 5월 7일 at 5:32 오후

    하경희님> 안녕하세요? 혹시 저와 같은 고향이신가요. 진주 하씨이신지 궁금하군요.   

  5. 김성현

    2008년 7월 4일 at 4:14 오후

    북스나 와이면의 좋은 기사도 블로그 때로 업데이트 해주세요~   

  6. felements

    2008년 7월 5일 at 11:37 오후

    오래 글이 없어 안부차 글을 보냅니다. 저는 그 동안 프랑스 파리와 아비뇽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원자력에 관게된 일을 하고 있어 프랑스 원자력청 초청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처음 가보는 프랑스에서 오르세, 루브르, 퐁두피 등 미술관을 가 보았고, 피카소 미술관은 마침 휴일이라 갔다가 헛걸음만 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퐁두피에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작품 많이 보아서 감동이었고 행복했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7. 곽아람

    2008년 7월 6일 at 5:44 오후

    김 선배> 이제 할라구요 ㅋㅋㅋ   

  8. 곽아람

    2008년 7월 6일 at 5:45 오후

    felements님> 오르세, 루브르는 저도 8년 전에 가 보았어요. 즐거운 경험이었지요. 퐁피두는 못 가봤는데 언젠가 가 보고 싶군요. ^^; 아 이제 활동을 재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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