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와 런던에서는 쇼핑하는 마음가짐이 약간 다르다. 스코틀랜드에서 실용성이 별로 없어서 기념품에 가까울지라도 약간 독특한 물건들에 대한 기대를 했다면, 아무래도 런던에서는 더 쓸모있는 물건을 찾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번 글에 썼던 지팡이를 비롯해서 중절모, 가죽띠에 갈아 쓰는 면도칼 같은 물건들에 관심이 안 가는 것은 아니어서, 이번에 런던에 갔을 때 매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됐는지 페인트 냄새와 새집증후군 냄새가 가득한 Bates에 들어가 모자들을 잠깐 둘러봤는데, 실용성은 그렇다치고 265파운드라는 놀라운 가격 때문에 바로 내려놓고 나왔다. 모자 하나에 50만원! 이 가격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자신은 없지만 내가 지출할 수 없는 금액인 건 맞다.)
먼저 들른 곳은 리버티 백화점. 옛모습을 잘 살린 건물이 듣던대로 인상적이었고, 자체 제작하는 패턴이 인쇄된 천이나 문구류가 좋아보였다. 옷이나 액세서리의 경우엔, 대중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물건들이 많아서(남자 구두를 예로 들면 처치스나 크로켓앤존스 같은 곳들) 이것저것 골라 담는 재미를 느끼기는 조금 힘들듯 보였다.
그래도 그냥 나가기는 좀 아쉬워서 산 것이 지하 이발소에서 팔고 있던 KENT의 머리빗. Royal Warrant를 가진 영국의 켄트라 해서 머리가 갑자기 잘 빗어진다거나 헤어스타일이 급거 멋있어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작게 접을 수 있고, 이빨이 달려 있는 부분이 짧아서 머리의 일부분만 빗질하기 편한 점이 좋다.
런던에서 쇼핑하기 좋은 곳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Jermyn Street(저민? 제르민?)다. 남성복으로 더 유명한 곳은 Savile Row일지도 모르지만(숀 코너리가 제1대 제임스본드 시절 옷을 맞춰 입었다는 Anthony Sinclair, 넬슨 제독의 옷을 지었다는 Gieves & Hawkes 같은 곳들이 이곳에 있다지!) 며칠 여행하는 짧은 시간에 짧은 영어로 양복을 맞춰 입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보다는 좀 덜 부담스럽고,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하나쯤 살 수도 있는 곳이 좋다.
사실 여기도 비싼 물건은 매우 비싸기 때문에 맘에 든다고 이것저것 다 살 수는 없다. 아무래도 단가가 낮은 셔츠 같은 물건에 손이 더 간다. 비교적 덜 부담스럽고 대중적인 가게 중 하나인 Charles Tyrwhitt에 들어가서 셔츠를 샀다. 1986년 창립해 아직 30년을 못 채운 이 가게는 역사가 200년에 달하는 곳도 많은 이 거리에서 여러 모로 명함내밀기 힘들어 보인다.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가게 온라인 매장에서 뭔가를 산 일이 있는데, 그 뒤로는 가끔씩 바다 건너 한국까지 카탈로그를 보내주고 있다.
셔츠는 세일해서 4벌에 100파운드. 1벌에 5만원이 안 되니 국내 제품들과 비교해도 싼 편이다. 품질도 디자인도, 영국이라 해서 특출날 것은 없는 물건이다. 다만 영국에 와서 셔츠를 살 때 독특하다고 느끼는 것은 치수를 재는 방식이다.
3년 전 출장 때 이곳에 와서 셔츠를 사면서(그때는 T.M.Lewin이었다) 치수재는 법을 보고 놀랐다. 목둘레와 화장(깃고대 중심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는 이 말은 정체불명의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 ‘화’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일본을 통해 들어왔을 현장 용어가 그대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을 재서 치수를 찾아 준다. 매장 벽면에도 이 치수에 따라 셔츠를 진열해 놨다. (3년전에 쟀던 치수가 ’14인치 반/33인치 반’이었는데 이번에는 ’15인치/34인치’로 늘어서 기분이 썩 좋지않았다.)
한국에서는 셔츠 사이즈를 보통 L/M/S로 표시하거나, 100/95/90과 같은 수치로 표현한다. 이렇게 하면 서너 종류의 치수만 갖추면 된다. 반면 목둘레와 화장을 조합하는 방식은 사이즈가 훨씬 세분화된다. 이를테면 Charles Tyrwhitt의 홈페이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목둘레는 10종류, 화장은 7종류다. 이를 조합한 사이즈는 34종류가 나온다. (목은 매우 굵은데 팔은 매우 짧은 경우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사이즈까지 다 갖춰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7X10 해서 70가지 사이즈가 나오지는 않는다.)
한국보다 영국에서 셔츠 사이즈의 선택지가 훨씬 다양하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한국에서도 전에는 이런 방식으로 사이즈를 분류했었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고르시던 아버지 와이셔츠 사이즈가 이렇게 돼 있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였으니 아마 1990년대 초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셔츠 사이즈를 분류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때에 비해 퇴보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한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IMF라는 사건과 한국 남자들의 특징이 맞물린 결과라는 얘기였다. 한국에서도 전에는 화장과 목둘레로 셔츠 사이즈를 구분했는데, 이렇게 하면 더 다양한 제품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의류회사의 재고비 부담이 늘어난다. IMF 시절 의류회사들은 재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이즈 구분을 단순화하게 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기업의 편의를 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한 셈이지만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한국 남자들 사이에서 의외로 큰 호응을 얻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런던에서 셔츠를 고르면서 또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셔츠 안에 속옷을 입어도 되느냐’의 문제다. 이제는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 사람들도 꽤 늘었고, ‘셔츠 안에 속옷을 입은 사람은 구속시켰으면 좋겠다’는 식의 약간 오글거리는 표현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것은 아마도 영원한 떡밥이 아닐까 싶다.
7월 말은 런던에서도 여름이고 가장 더운 계절일 텐데, 덥긴 하지만 긴소매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입는 차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느껴졌다(야외에 오래 있거나 활동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와는 날씨, 또는 기후가 확실히 다른 만큼 셔츠 안에 속옷을 입는다거나 여름에 반팔셔츠를 입는다고 해서 ‘복식의 기본을 모르는 짓’이라고 해버리는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셔츠 안에 속옷을 입으면 안된다고 할 때 으레 따라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셔츠는 속옷의 개념이기 때문에 속옷을 안에 입으면 속옷을 두 벌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인데, 본인이 그게 편하다는데 속옷을 두 벌 입는다고 뭐라할 것까지 있을까 싶다. 다만 속옷을 두 벌 입는 것이 더 편해서 그렇게 하긴 하지만, 속옷을 두 벌 입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보이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셔츠(특히 흰 셔츠) 안에 입어도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는 속옷 제품류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Jermyn Street는 3년 전에 영화 시사 때문에 런던에 출장을 왔다가, 주말매거진용 기사까지 취재해 가야 했던 사정 때문에 지면으로도 소개했던 적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이 끝나갈 때쯤 이곳에 다시 와서 길 이름을 적은 표지판을 보니 뭔가 약간의 감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