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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사’가 돌아왔다

다른 신문사에서 노동문제를 담당하는 한 친구는 영화 ‘인턴’을 보면서 요즘 한창 이슈인 임금피크제나 노년 일자리 문제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사무실에 사과모양 애플 로고가 난무하는 와중에 70세 인턴의 구식 피처폰에만 서글픈 삼성 마크가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어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솔직히 로버트 드 니로가 보여준 완벽한 스타일에 더 눈이 가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패션을 본다면 여주인공 앤 해서웨이에 주목하는 쪽이 좀더 일반적일 것이다. 개봉 직후에 몇몇 해외 매체들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후 해서웨이가 다시 한 번 스타일 아이콘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식의 리뷰를 냈다. 그도 그럴것이 극중 해서웨이는 의류 쇼핑몰 창업자인지라 시종 세련되고(화려하지는 않다) 감각적인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그에 비해 로버트 드 니로는 늘 비슷한 수트 차림이다. 스타트업의 남자들은 아무도 수트를 입지 않는다. 드 니로가 연기한 벤 휘태커는 아마 영화에서 유일하게 수트 차림으로 나오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출장길에 나이트가운을 챙겨가고 주말에도 면도를 하는 그는 브룩스브라더스 카탈로그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영화에 등장한 의상이나 소품의 브랜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어서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상당히 확신에 가까운 심증(?)이 든다. 넉넉한 선에 버튼다운 셔츠가 상당히 미국식이다.

특히 패턴 있는 타이와 셔츠를 함께 매치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서 흥미로웠다. 셔츠의 패턴이 클 때는 타이를 잔잔하게, 타이의 패턴이 도드라질 때는 반대로 셔츠를 솔리드에 가깝게 연출해서 조잡하거나 어지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감색 또는 회색의 수트여도 셔츠와 타이의 조합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의상 담당의 솜씨였을 것이다.

와이셔츠와 넥타이 모두 패턴이 들어있지만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수트에 버튼다운 셔츠여도 패턴이 달라지면 느낌도 새로워진다. 이미지는 모두 영화 공식 예고편에서 캡처.

와이셔츠와 넥타이 모두 패턴이 들어있지만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수트에 버튼다운 셔츠여도 패턴이 달라지면 느낌도 새로워진다. 이미지는 모두 영화 공식 예고편에서 캡처.

드 니로는 영화에서 ‘오래 입어 수트가 몸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사람’을 잘 표현해냈다. 이건 수트 디자인이나 핏이 좋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그런 면모는 그가 ‘손수건은 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장면이나, 완벽하게 꾸며진 드레스룸(스위치 누르면 돌아가는 넥타이 걸이는 좀 부럽다)에서도 드러나지만, 나는 벤이 보여주는 사소한 동작에서 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는 벤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가 수트 윗 단추를 잠그는 것을 볼 수 있다. 서 있을 땐 재킷 단추를 채우는 게 습관이 된 것이다. 시나리오에서 원래 이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의 의도였든 배우의 애드립이었든, 벤 휘태커라는 인물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디테일이었을 것이다. 벤은 경험과 연륜을 갖췄고, 자신이 일했던 공장을 인수해 회사를 차린 어린 상사를 존중할 줄도 안다. 이런 사람이 신사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남성복의 화두는 ‘클래식’이었고, 실루엣이 날렵하고 곡선을 강조하는 이태리식 스타일이 그 바람을 대표해왔다. 급기야는 ‘바지 밑위가 짧아야 클래식’ ‘밑단 통이 17cm면 클래식’이라는 식의 웃지못할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직선적이고 넉넉한 미국식 스타일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는 옷도 헐렁하게 입기 때문에 스타일은 별볼일 없다는 정도로 쉽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인턴’은 그런 대접을 받아왔던 ‘미국 신사’의 復權과도 같은 영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더블브레스티드 수트 차림으로 우산을 휘두르던 영국 신사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Intern_Icon_thumb인상깊었던 소품 한가지. 가방이다. 그가 들고다니는 가죽 서류가방(attache case)은 40년이나 돼서 낡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제품”(언제 산 거냐고 묻는 젊은 동료에게 가방을 소개하는 벤의 대사)이다. 비싼 가방을 사는건 돈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같은 가방을 40년씩 들고다니는 것은 아무나 못 한다. 오래된 물건, 함께한 세월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벤이 동료에게 제품 이름과 생산 연도를 말해주는 장면도 있는데, 실존하지 않는 브랜드인지 내가 몰랐던 것인지 얼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가방은 영화 공식 로고에 들어갔다.

첫 출근 장면에서 벤의 가방은 다른 젊은 인턴들과 대조를 이룬다. 젊은 친구들이 책상 위에 이어폰이며 USB 포트며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꺼내놓는 사이 벤의 가방에선 펜, 알람시계, 전자계산기 같은 물건들이 나온다. 그런데 시대착오적인 느낌은 아니다. 어쩌면 이런 물건들이란 우리가 그래도 인간적인 리듬에 맞춰 살던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 나가 일하고,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생활. 이제 직장을 취미로 다니고 있거나 남다른 의지가 있거나, 하다못해 ‘미움받을 용기’라도 있지 않고서는 그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린 터라 벤의 가방이 더 멋져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블루레이가 알려준 ‘007 시곗줄’의 정체 – 나토밴드의 기원을 찾아서

007 시리즈 새 영화 ‘스펙터(Spectre)’ 티저 포스터가 지난주 공개됐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우연히 봤는데 반가웠다. 그저그랬다는 사람이 많았던 전편 스카이폴(Skyfall)도 나는 아이맥스로 두 번을 봤다. ‘BMT216A’ 오래된 애스턴 마틴부터 시작해 숱하게 등장하는 007 50년에 대한 오마주, 인터넷 시대에도 우리에겐 왜 늙고 지친 본드가 여전히 필요한지를 역설(力說)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포스터에서 우선 본드가 수트나 턱시도가 아닌 터틀넥을 입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몸에 착 붙어 가슴 근육을 자랑하는 터틀넥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을 비롯한 몇몇 전임자들도 영화에서 터틀넥을 입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터틀넥은 수트보다는 활동적이고 편안한 옷이다. 전편에서 존재 이유를 증명한 본드가 이번에 한결 화끈하게 돌아올 모양이라는 기대감을 들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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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 본드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곗줄이다. 포스터에서 본드는 왼쪽 손목에 검은색/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나일론 밴드(영어권에서 시곗줄을 뜻하는 말은 ‘band’보다는 ‘strap’인 듯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의 시계 애호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밴드’를 주로 쓰려고 한다)를 차고 있다. 포스터 안에서 금방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시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손목의 밴드를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이 밴드는 시계 애호가들이나 시리즈 팬들 사이에서 ‘007 나토밴드’로 불려왔다. 나토(NATO)군 보급용으로 만들어진 군용 시곗줄을 초대(初代)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가 1964년 시리즈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에서 차고 나와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껏 별 의심 없이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 포스팅을 쓰면서 좀더 조사해보니 사연이 약간 달랐다. 먼저 시기의 문제가 있다. 나토군 보급용의 ‘나토밴드’가 만들어진 것은 1973년이어서 1964년 영화에 나올 수가 없다. 이 시곗줄은 영국군용으로 생산돼 나토군에 공급된 것으로, 당초 영국군이 부여한 일련번호를 따라 ‘G10’으로 불리다가 나토군의 품목 분류번호(Nato Stock Number·NSN)를 받게 되면서 ‘나토’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지금 ‘나토밴드’는 직물(주로 나일론)로 만든 시곗줄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코너리가 ‘나토밴드’를 찼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토밴드’로 불려온 시곗줄의 원형이 1973년에 영국군용으로 나온 G10이라고 본다면 골드핑거의 시곗줄을 ‘나토밴드’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언급일 수 있다.

한 시곗줄 쇼핑몰(www.esprit-nato.com)에서 이런 내용을 정리하면서 영국 국방부(MOD)의 물자 규격 문서(DEF-STAN)를 첨부했다. 시계도 아닌 시곗줄일 뿐이지만 엄연한 군수물자인 만큼 요규 규격이 까다롭고 분명하다. 밴드 길이 280mm(해군의 잠수복 위에도 착용 가능한 충분한 길이), 두께는 1.2mm, 폭 20mm, 색상은 회색(Admiral Grey)의 단색, 시곗줄 끝과 구멍 부분에 열처리, 밴드를 여미기 위한 버클과 금속 고리 등이다. ‘골드핑거’에 등장한 시곗줄과는 여러모로 차이나는 디테일이다.

영국군의 물자 규격 요구문서 중 G10 시계용 밴드 관련 내용의 일부. 금속 고리 사이의 간격까지 꼼꼼하게 규정했다. 이 문서는 DEF-STAN 66-47/2로, DEF-STAN은 Defence Standardization이다.

영국군의 물자 규격 요구문서 중 G10 시계용 밴드 관련 내용의 일부. 금속 고리 사이의 간격까지 꼼꼼하게 규정했다. 이 문서는 DEF-STAN 66-47/2로, DEF-STAN은 Defence Standardization이다.

숀 코너리는 ‘골드핑거’ 도입부에서 잠수복 차림으로 ‘적진’에 침투해 폭탄을 설치하는데, 이 때 롤렉스(빈티지 서브마리너라고 한다)에 직물 밴드를 물려 손목에 찼다. 영국군이 G10을 만들면서 해군의 잠수복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이 장면에서 일반적인 브레이슬릿(bracelet)이 아닌 직물 밴드를 택한 것은 디테일에 상당히 신경쓴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말 그랬을까? 그보다는 잠수복에 찰 수 있는 시곗줄을  촬영이 임박한 시점에서 급히 수배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

자세히 보면 코너리가 차고 있는 시곗줄은 시계와 사이즈가 안 맞는다. 서브마리너의 러그(시곗줄을 부착할 수 있도록 시계 몸통에서 다리처럼 튀어나온 부분) 폭은 20mm인데, 코너리의 밴드는 그보다 폭이 좁다. 스프링핀이 노출된 모양을 보면 시곗줄 폭은 16~17mm 정도밖에 안 돼 보인다. 아마도 일반 시곗줄로는 잠수복 위에 시계를 찰 수가 없어서(잠수복 위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영화에 나온다) 나일론 밴드를 구했는데, 급하게 찾으려고 보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사이즈가 안 맞는 것을 그대로 화면에 내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골드핑거'의 제임스 본드가 침투할 때 입었던 잠수복을 벗자 안에서 턱시도가 나왔다. 시곗줄은 검은색/회색 줄무늬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왼쪽),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롭게 올리브 그린에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밴드였음이 드러났다(오른쪽 사진).

‘골드핑거’의 제임스 본드가 침투할 때 입었던 잠수복을 벗자 안에서 턱시도가 나왔다. 시곗줄은 검은색/회색 줄무늬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왼쪽),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롭게 올리브 그린에 가는 붉은색이 들어간 밴드였음이 드러났다(오른쪽 사진).

코너리가 찬 밴드는 줄무늬다. 언뜻 검은색과 회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골드핑거’ 블루레이판이 나온 뒤 드러난 색깔은 검은색 내지는 네이비에 올리브그린이 섞여 있고, 줄무늬의 경계 부분에 아주 폭이 좁은 빨간색도 들어간 것이었다. 한동안 검은색/회색 줄무늬 직물 밴드를 ‘007밴드’라고 판매해 오던 여러 판매자들이 ‘골드핑거’ 블루레이 출시 이후 새로운 색깔의 밴드를 서둘러 확보하느라 부산을 떨었다고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번 ‘스펙터’ 포스터 외에도 이런저런 사진 속에서 검은색/회색 줄무늬의 직물 밴드를 착용했다. 그가 시계와 ‘나토 밴드’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는 50년 선배 숀 코너리를 의식한 아이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로는 가장 시기가 앞서는 ‘카지노 로얄’로 역대 본드 대열에 합류했고, 선배들과는 달리 근육이 울퉁불퉁한 악동 이미지를 창조하면서도 ‘스카이폴’에서 본드의 50년 외길에 대한 오마주를 숨기지 않았다. ‘스펙터’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이번엔 11월이 좀 기다려진다.

한국 남자들은 왜 옷을 못 입나

한국 남자들은 왜 옷을 못 입을까?

우선 예상되는 반박이 두 가지 있다. “잘 입는 사람 많은데?” 또는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 입는데?” 감각이 남다른 분들이 물론 있지만 한국에서 ‘옷 잘 입는 남자’는 아직 그야말로 예외일 뿐이다. 너나 잘하라는 데 대해서도, 이 글에서 언급하게 될 ‘옷 못 입는 한국 남자’는 나까지 포함해서 하는 얘기라는 점을 미리 밝혀둬야겠다. 우리는 왜 옷을 못 입게 된 걸까.

전에 어떤 잡지에서였던가… “한국 남자는 세계적으로 가장 옷을 못 입는다”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진지하게 따져볼 말은 아니다. 그래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우리가 입는 옷은 서양에서 온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 비해 기럭지도 비율도 딸리기 때문일까? 편한 답이긴 한데, 그렇게만 말하고 끝내버리면 일본 남자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옷을 잘 입는 남자들로 꼽히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 남자들이 내심 “우리가 그래도 걔들보다 키는 크지” 하는 일본 남자들 아니었던가.

옷과 관련된 역사적 문화적 환경을 봐야겠지만, 한국 남자들이 옷 못입기로 월드클래스가 된 배경에 우리 특유의 ‘유니폼 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유니폼에 익숙하다는 뜻인데, 꼭 옷만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관점이나 사고방식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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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한참 외모에 민감할 시기에 다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다. 머리 모양도 일률적으로 규제한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남학생은 ‘앞머리 3cm 이하 스포츠 머리’, 여학생은 ‘귀 밑 3cm 이하 단발머리’ 같은 규정이 있었다. 자를 든 경찰관이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며 “무릎 위로 몇 센치” 하던 일을 시대착오적 추억처럼 이야기해도, 여전히 우리는 어느 지역에서 ‘두발 자유화’를 한다는 이야기가 뉴스인 시대에 산다.

교복은 왜 입는 것일까? 또는 왜 입어야 하는 것일까? 교복을 입으면 소속감이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교복을 입어서 대단한 소속감이 생겼던 것 같지는 않다. 교복 입고 나쁜짓 하면 바로 티난다는 느낌은 있었다. 수의(囚衣)를 눈에 띄게 만드는 것처럼 일종의 식별 편의를 위한 옷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교복이 옷값을 줄여준다고도 하는데, 교복이 사계절 외출복이자 평상복이고 체육복이기도 했던 시절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학원갈 때 입을 사복도 필요하고 겨울 되면 패딩도 사야 한다. 교복은 공짜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빈부격차에 따른 위화감을 막아준다는 주장도 별로 동의하기 어렵다. 교복 입고 있어도 누구네가 잘사는지 누구네가 그렇지 못한지 다 안다. 교육의 역할은 그 차이가 비뚤어진 권력관계로 변질되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지, 똑같은 옷을 입히고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선 눈감아버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작년까지도 입었는데 올해 갑자기 안 입으면 이상하니까’ 입는 옷이라고 하는 쪽이 솔직하다. 교복을 입어야(거기에 맞춰 머리 모양도 규제해야) 단정하고 학생답다지만, 무엇이 단정하고 학생다운 것인지는 누가 언제 정했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남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창의력이 살 길이라고 부르짖고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자기결정권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생각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뭘 입을지조차 고민하지 못하게 해놓고 무슨 창의력을 기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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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벗고’ 대학에 들어가면 남자들은 곧 군대에 간다. 자기 스타일에 대해 고민할 시간 없이 다시 군복을 입어야 한다. 학생 때는 그래도 하교하면 사복을 입었는데, 군대에서는 일과가 끝나도 전투복이 활동복으로 바뀔 뿐 유니폼을 입는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옷을 손질하고(구형 얼룩무늬 전투복에 다림질로 줄을 잡는 것은 잘못된 문화로, 신형 디지털무늬 전투복은 다림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지품을 정리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일치’가 미덕인 군대는 ‘유니폼화(化)’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군대에서 본능적으로 체득하는 마음가짐은 ‘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은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중간쯤 가야 좋다는 뜻이다. 고문관이 되면 곤란하지만 괜히 두각을 나타내도 여기저기 불려다니기만 할 뿐 좋을 것이 별로 없다. 튀는 놈으로 잘못 찍히면 군생활이 꼬인다.

군대는 ‘계급, 군번, 성명’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도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와서 꽃이 되었는데, 군대에서는 내 이름을 좀처럼 묻지 않는다. 훈련소 첫날 ‘오와 열’ 사이에서 번호로 호출됐을 때의 낯선 느낌은 지금껏 특별하고 유일한 줄 알았던 ‘나’라는 존재가 이제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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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하면 좀 달라질까? 양복이라는 유니폼을 입는다는 점에서 별 차이는 없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유니폼을 찾게 된다는 뜻에서는 유니폼화가 완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양복은 사실 다 같은 양복은 아니다. 수트의 소재, 재단, 색깔, 무늬, 셔츠나 넥타이와의 조화, 버튼이나 벤트의 수와 같은 디테일에 따라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다. 학생-군인을 거쳐 사회인이 된 한국 남자들은 그런 차이를 애써 거부한다.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비즈니스 캐주얼을 허용해도 남자 직원들은 “차라리 양복이 낫겠다”고 한다. 멀쩡한 성인들을 모아놓고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 강의를 열어 알려주는 웃지 못할 풍경이 그렇게 연출된다.

가장 나쁜 것은 옷차림에 대한 관심을 불온시하는 시선이다. 패션에 신경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충분한 남자들도 옷에 대해서만큼은 “마누라가 골라주는대로 입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만이 ‘남자다운’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도 좋다. 그런데 그것만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전에 글쓰기를 배웠던 어떤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학생들에게 성형수술에 대해 글을 써 보라고 하면 상당수가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낸다고 한다. ‘겉’은 가짜고 ‘속’이 진짜라는 이분법은 생각보다 집요하다. 여기에 철지난 남성우월주의가 스며든다. 패션은 어느새, ‘겉’이어서 ‘속’에 비해 본질적이지 않은 것, 피상적인 것, 하찮은 것, 겉치레,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 따라서 남자가 진지하게 신경쓸만하지 못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외화내빈’은 원래 겉만 화려해고 속이 빈곤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겉이 화려하면 속이 빈곤하다는 인과관계를 뜻하는 말로 슬그머니 변한다.

남자들에 대체로 패션에 무신경한 것은 세계 어딜 가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마크 저커버그는 왜 매일 똑같은 티셔츠를 입느냐는 질문에, 더 좋은 서비스를 생각하느라 옷 신경쓸 여유가 없다고 했었다. 영국이나 일본이 패션 선진국이라고 해서 길거리에 온통 모델같은 남자들만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질문을 약간 바꿔서, 왜 남자들이 옷을 잘 입어야 하나? 사실 모든 남자들이 다 옷을 잘 입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옷차림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냥 무난하게 입으면 된다. 그게 나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취향을 찾고 드러내는 모습도 그대로 존중해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인질처럼, ‘겉모습에 신경쓰는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강박적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해리슨 포드의 쾌유를 빌며 – 인디아나 존스의 트위드 재킷

지난 금요일 오전에 해리슨 포드의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골프장에서 경비행기를 몰다 추락해 크게 다쳤다고 했다. 처음에 중상으로 전해진 것보다는 상태가 양호해서 곧 회복할 듯하다니 다행이다. ‘비행기’로 기억되는 배우는 존 트라볼타인줄 알았는데(브라이틀링 광고에 항상 비행기와 함께 나오기 때문인듯), 해리슨 포드도 개인용 비행기 마니아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익스펜더블3’에서 해리슨 포드가 왕년에 날리던 파일럿으로 나온 게 우연이 아니었나보다.

전성기는 좀 지난 느낌인데다 유명세에 비해 이슈가 없어서, 해리슨 포드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서 그를 ‘액션 배우’로 분류하는 것도 어색했던 것 같다. 내가 해리슨 포드의 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에어포스 원’이나 ‘도망자’ 같은 영화들을 빌려 보면서부터였는데, 이런 필모그래피를 보면 분명 액션 장르이긴 하다.

Alden 405 'Indie' boots

Alden 405 ‘Indie’ boots

아직 ‘스타워즈’를 안 봤기 때문에 내게 해리슨 포드의 대표작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다. 배우가 되기 전 목수 일을 하던 시절부터 포드가 애용했다는 알든의 부츠(Alden 405)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도 등장하면서 ‘인디 부츠’로 유명해진 사례가 있는데, 인디아나 존스는 이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스타일이 인상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위키피디아 같은 곳에서는 존스 박사가 영화에서 착용한 모자(스턴트 장면에서 챙 넓은 페도라가 대역배우의 얼굴을 효과적으로 가려 줬다고 한다), A-2 재킷, 부츠, 심지어는 가죽 채찍까지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 설명해놓고 있지만, 이것도 스타일보다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 자체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1980년대에 3개 시리즈가 나온 이후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4편이 나왔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당시의 평가 중 하나가 “주제가가 나오면 모두 ‘파블로프의 개’가 된다”는 것이었다.

존스 박사의 스타일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채찍을 휘두르며 정글을 누빌 때보다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스크린에 비추는 분량은 작지만, 존스 박사는 고고학자로서 현장을 뛰지 않을 때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이때는 늘 조끼까지 갖춘 스리피스 수트 차림이다. 그리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을 때가 많다.

얼마전에 영문판으로 나온 ‘Take Ivy’에서는 아이비리그 스타일 워드로브의 구성 예시를 제시하고 있는데, 스포츠코트(책에서는 Sports Jackets)는 두 벌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크네이비 블레이저는 꼭 있어야 하고, 나머지 한 벌은 트위드(민무늬 또는 헤링본)가 좋다고 제안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 교수가 재직중인 학교가 아이비리그의 특정 대학으로 설정돼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전통적으로 아이비리그 남자들이 즐겨 입었던 트위드 수트로 학구적 열정을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투피스가 아닌 스리피스 수트는 보다 ‘교수님’ 같은 느낌이 있다. Take Ivy는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교본같은 책인데, 저자들이 미국이 아닌 일본 사람들이라는 점은 좀 신기하다.

트위드는 독특한 소재다. 비가 잦은 스코틀랜드에서 야외 활동용 옷감으로 탄생한 소재답게 두껍고 거칠다. 그런데도 수트나 스포츠코트로 지어놓은 옷은 독특하게 dressy한 느낌이 있다. Josh Sims의 ‘Icons of Men`s Style’을  보면, 트위드의 원래 이름은 트윌(Twill, 스코틀랜드에서는 Tweel)인데 1830년 스코틀랜드 방직회사에서 온 서류의 ‘Tweel’을 ‘Tweed’로 잘못 본 런던의 상인 때문에 트위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상인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트위드 강의 이름을 따서 Tweed라는 브랜드 이름을 만들었겠거니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여러 작품에서는 어딘가 지적(知的)인 느낌이 있는 캐릭터들이 주로 트위드 재킷을 입었다고 한다. 예컨대 셜록 홈즈다. 옛날부터 수많은 버전의 영화로 제작돼 왔고 최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조금씩 다른 해석의 홈즈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변화를 주기도 했지만, 파이프 담배와 함께 홈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트위드로 만든 재킷과 deerstalker다. 스코틀랜드에 휴가를 갔을 때 트위드 매장에서 이 모자를 보고 하나 구입했는데, 런던의 셜록 홈즈 기념관에서 파는 모자보다는 품질이 훨씬 나았으나 실생활에서 쓰고 소화하기는 역시 쉽지 않았다.

해리슨 포드가 대표작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들도 이렇게 ‘지적 면모를 겸비한 모험가’가 많았다. ‘도망자’의 킴블 박사(인디아나 존스에 이어 이번에도 박사다)가 그랬고, ‘에어포스 원’에서 연기한 제임스 마셜 대통령도 책상물림의 정치인이 아니라 참전 경력을 가진 역전의 용사였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트위드 재킷을 입은 모습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아마 2편에서만 식사하는 장면이었고(어린시절 TV에서 본 ‘원숭이 골’ 디저트는 충격이었다), 나머지 1, 3, 4편에서는 강의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1편 ‘레이더스’다.

회색 트위드로 만든 스리피스 수트를 입고 강의중인 인디아나 존스 교수(왼쪽). 강의를 듣는 여학생이 두 눈꺼풀에 'Love' 'You'라고 쓴 뒤 눈을 깜빡이는 장면을 넣은 것으로 봐선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뒤로 돌아선 장면(오른쪽)을 보면 재킷이 일반적인 수트와 달리 허리 부분에 벨트 처리가 돼 있고 요크에서 이 벨트까지 이어지는 한 줄의 세로주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색 트위드로 만든 스리피스 수트를 입고 강의중인 인디아나 존스 교수(왼쪽). 강의를 듣는 여학생이 두 눈꺼풀에 ‘Love’ ‘You’라고 쓴 뒤 눈을 깜빡이는 장면을 넣은 것으로 봐선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뒤로 돌아선 장면(오른쪽)을 보면 재킷이 일반적인 수트와 달리 허리 부분에 벨트 처리가 돼 있고 요크에서 이 벨트까지 이어지는 한 줄의 세로주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데 관심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존스 교수의 재킷은 멋지고 말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살린 옷이다. 의상 담당은 여기까지 의도했던 것일까? 우연의 일치일 것 같지는 않다. 강의를 마친 존스 교수는 정부 관계자들(아마도)과 함께 나치의 움직임과 ‘성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칠판에 글씨를 쓰기 위해 돌아서는 장면을 보면 등 뒤에 세로로 주름(shirr)이 잡히고 허리 부분에 벨트 처리가 들어간 재킷을 입고 있다. 이 재킷은 앞에서 봤을 땐 일반적인 수트와 차이가 없다. 승마용 해킹재킷처럼 수트와 약간씩 다른 디테일도 없다. 등에 주름을 넣은 것은 활동하기 편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텐데, 이 디테일은 영화 ‘어느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1934)’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입고 나와 유행하게 됐다고 한다.

1935년 4월4일자 밀워키저널센티넬의 지면. 오른쪽 옷 광고 그림에 인디아나 존스 박사의 재킷과 비슷한 디테일이 보인다. 기사는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지만, 클라크 게이블 덕에 올 봄에 세로주름 재킷이 유행한다는 내용이다.

1935년 4월4일자 밀워키저널센티넬 지면. 오른쪽 옷 광고 그림에 인디아나 존스의 재킷과 비슷한 디테일이 보인다. 기사는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지만, 클라크 게이블 덕에 올 봄에 세로주름 재킷이 유행한다는 내용이다.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은 지금까지도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고(지체높은 아가씨와 신문기자의 사랑은 나중에 ‘로마의 휴일’에서도 되풀이된다), 영화는 크게 히트해서 게이블은 1935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다. 1935년 4월4일자 밀워키 저널 센티넬(Milwaukee Journal Sentinel)에는 “게이블로부터 시작된 ‘등에 주름있는 재킷’이 올시즌 유행 예감”이라는 기사가 있다. ‘레이더스’의 시간적 배경은 1936년으로 설정돼 있다. 존스 박사는 밀림에서 돌아와 대학에 복귀하면서 당시 한참 유행하기 시작한 ‘피터(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서 클라크 게이블의 극중 이름) 재킷’을 한 벌 장만했을 것이다.

Alan Flusser의 ‘Dressing the Man’에도 등에 세로주름이 들어간 재킷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역시 클라크 게이블로부터 시작됐다는 설명이 있고, 처음에는 주로 개버딘으로 만들었으나 이후 모직, 리넨, 트위드 등 여러 소재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해리슨 포드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요즘의 액션 히어로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온갖 효과와 CG가 난무하는 요즘의 액션영화와 비교해 보면 시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캐릭터에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에, 해리슨 포드가 주요 영화제에서 연기상 한번 못 받고도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흥행 보증수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후임에게 역할을 물려주는 것이겠지만 이제 인디아나 존스 5편도 나온다고 하는데, 해리슨 포드가 곧 부상을 털고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숙제처럼 느꼈던 ‘스타워즈’ 시리즈도 이번 기회에 시작해 봐야겠다.

디테일의 힘 – 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해밀턴 시계들

얼마전 제87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시각효과상 하나를 받는 데 그쳤다. 미국 잔치라곤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데 ‘그쳤다’는 표현이 심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개봉 전부터 불러일으킨 관심에 비하면 평범한 성적표다.

물리학자 킵 손과의 협업, 각본에 참여한 감독 동생이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일화, 과학을 정교하게 시각화한 블랙홀,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스토리…. 얘깃거리가 너무 많아 다른 것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인터스텔라는 리얼리티를 위해 소품과 장치에도 공들이고 신경쓴 영화다. 흙먼지 구름을 컴퓨터그래픽 없이 톱밥가루를 날려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여러 기사에 소개됐다. 이 외에 패션, 특히 시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등장한 두 개의 시계에 주목했을 것이다.

시계는 영화에서 간접광고(PPL)하기 좋은 아이템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촌극을 다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나 ‘째깍째깍 시계 소리에 속이 타들어가는 순간’은 나오기 마련이고, 이 때 주인공이 들여다보는 시계를 클로즈업하면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007시리즈의 오메가, 본 시리즈의 태그호이어 링크, 트랜스포터 시리즈의 파네라이, 그리고 최근 킹스맨의 BREMONT 같은 시계들이 그런 경우다. 인터스텔라는 약간 다른데, 시계가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소품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묻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결정적 장치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시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쿠퍼(매튜 매커너히)의 시계, 다른 하나는 쿠퍼가 우주로 떠나면서 딸 머피(매킨지 포이/제시카 차스테인)에게 남긴 시계다. 두 시계 모두 해밀턴(Hamilton)이 만들었다. 쿠퍼의 시계는 시판중인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Khaki Pilot Day-Date)’, 머피의 시계는 영화를 위해 별도 제작한 제품이다.

우선, 왜 해밀턴이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의 소품을 담당했던 리치 크레머(Ritchie Kremer)의 인터뷰에 힌트가 나온다. “농부이면서 엔지니어, 파일럿이기도 한 쿠퍼는 전형적인(classic) 미국인이다. 그런 그에게 딱 맞는 브랜드가 해밀턴”이었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스위스가 장악한 기계식 시계 시장의 이름있는 브랜드들 중에서 거의 유일한 ‘미제’다. 호화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무뚝뚝하되 실용적인 군용(軍用) 시계를 주력으로 한다는 점도 미국 브랜드답고, 실제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시계를 공급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미국의 정신에 스위스의 시계 기술을 결합했다”는 것이 해밀턴이 스스로 설명하는 정체성이다.

우주·항공 장르로 분류되는 시계는 많지만 쿠퍼라는 캐릭터에 어울릴 시계는 이것이더라는 얘기다. 시골에서 픽업트럭 타고 다니는 쿠퍼가 서랍에서 IWC나 브라이틀링을 꺼내 차고 우주로 떠나는 장면은 확실히 상상이 잘 안 된다.

약간 아쉽다고 해야 하나, 의아한 부분은 쿠퍼가 찬 시계가 자동(automatic) 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쿠퍼가 우주에 갈 때도 시계를 찼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우주에서 저 시계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기억나지 않는데, 우주를 배경으로 한데다 ‘중력’에 따라 변하는 ‘시간’을 소재로 삼은 영화인 만큼 수동(manual) 시계가 나왔다면 좀더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주로 다시 떠나야 한다고 머피를 설득하는 쿠퍼(왼쪽). 쿠퍼가 차고 있는 시계는 해밀턴의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 모델이다.

우주로  떠나야 한다고 머피를 설득하는 쿠퍼(왼쪽). 쿠퍼가 차고 있는 시계는 해밀턴의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 모델이다.

(블로그는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지가 신문처럼 명확하지 않은데… 시계에 대해 별로 관심가지지 않은 분들도 계실 터이니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차는 시계는 크게 전지를 사용하는 쿼츠, 전지 없이 태엽을 감는 기계식으로 나뉜다. 기계식은 다시 용두를 돌려서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수동/manual과, 손목에 차고 움직이면 중력에 의해 시계 안의 ‘로터’라는 추가 돌면서 태엽이 감기는 자동/automatic으로 분류한다. 자동 시계는 중력의 힘으로 태엽을 감기 때문에 지구와 중력이 다른 곳에 가면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버즈 올드린이 달에 차고 갔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시계는 손으로 용두를 돌려야 하는 수동식이었다.)

해밀턴에서 특별 제작한 Murph Watch.

해밀턴에서 특별 제작한 Murph Watch.

머피의 시계는 내용상 쿠퍼의 시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쿠퍼가 시공을 초월해 우주 공간에서 보낸 메시지의 수신기 역할을 이 시계가 담당한다. 베젤은 유광으로 만들고 케이스의 나머지 부분은 브러시로 무광 처리하는 등 커스텀 시계만의 디테일이 있지만 카키를 베이스로 해 해밀턴 특유의 약간 레트로한 분위기도 살아 있다.

이 시계 역시 자동(automatic)이어서, 쿠퍼가 우주로 떠난 뒤 머피가 차고 다니지 않아 이내 멈춰버린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Interstellar Special Edition’ 같은 이름을 달아서 판매해도 될 것 같은데(오메가의 경우 007에디션을 적극적으로 발매하고 있다), 해밀턴이 원래 한정판 발매에 소극적인 것인지 인터스텔라가 아카데미에서 기대만큼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판매를 하고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존 제품군에 없는 시계를 왜 별도 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행 해밀턴의 카키 시리즈는 날짜창이 있는 제품들만 판매되고 있는데, 수신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날짜창 같은 ‘방해요소’를 다이얼에서 제외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바늘이 모르스 부호를 표현하면서 움직이는 장면 역시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않고 시계 안에 작은 모터를 넣어서 구현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시계의 부품 구성과 내부 장치가 다른 만큼 시/분/초침뿐인 다이얼 구성이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Murph Watch' 제작을 위한 스케치(왼쪽)와 영화에 등장한 머피의 시계.

‘Murph Watch’ 제작을 위한 스케치(왼쪽)와 영화에 등장한 머피의 시계.

극장 예매 앱을 들여다보니 인터스텔라를 관람한 게 작년 11월7일, 개봉 다음날이었다. 분명 훌륭한 영화지만 떠들썩한(한국에서 유독 심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야심작’에는 아무래도 높은 잣대를 들이대게 되는 것인지, 일반적인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한 놀라움은 ‘인셉션’이 나았고 영화적 연출의 힘에서는 ‘다크 나이트’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물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건 러닝타임이 중간쯤 지났을 때 이미 포기했고…

그래도 인터스텔라가 몰고 온 ‘과학 붐’에 반발한 일부 관람객들처럼 “과학 어쩌고 하더니 결국 질질짜는 가족 얘기”라고만 해버리는 건 너무 가혹하다. 인터스텔라는 디테일이 강한 영화다. 아무도 실제로 못 본 블랙홀이라고 해서 대충 그리지 않고 물리학 이론의 토대 위에서 재현하려는 노력 못지않게, 주인공이 차는 손목시계 하나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는 세심함도 중요하다. 아이디어가 갑자기 작품이 되진 않는다.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이런 디테일의 힘인 것이다.

터프가이가 되어보자 – 바라쿠타 G9

얼마 전 이 블로그에 올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TSS) 리뷰는 아무래도 주인공 게리 올드만 위주로 흘러가긴 했지만, 영화에서 새삼 다시 보게 된 인물은 리키 타르(Ricki Tarr)를 연기한 톰 하디였다. 이 영화는 주연배우 5명(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하디) 모두가 당장 각각 다른 작품에서 원톱으로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캐스팅이 화려한데, 개봉 무렵 처음 영화를 볼 때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톰 하디 쪽은 아무래도 연륜이 짧아서 그랬는지 눈길이 덜 갔던 것 같다.

(단독 주연 작품이 적은 마크 스트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이름을 빼고 싶지 않은 건 영화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때문이다. 전에 쓴 적이 있는 ‘바디 오브 라이즈’에서 그랬고, 이번에 개봉한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도 조연이긴 하지만 정말로 압도적인 간지를 보여준다.)

출연 분량도 많지 않은 톰 하디가 이번에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서커스(영국 정보부) 수뇌부 구성원인 다른 인물들과 달리 리키 타르는 현장의 ‘외근직’ 정보원이기 때문이다. 서커스에 보내는 보고 전문(電文)을 작성하기 위해 현지의 비밀 사무실에 잠입하는 장면에서 리키 타르는 바라쿠타(Baracuta)의 스테디셀러 G9을 입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적국 여성 정보원과 사랑에 빠지는 행동파 정보원다운 차림이다. 

G9은 생각해보면 신기한 옷이다. 특정 브랜드의 특정 아이템이 반세기 넘게 주목받으면서 하나의 아이콘이 된 다른 사례가 또 있으려나. 제식으로 대량 보급됐던 M65같은 군복과는 태생이 다르다. 수트가 남자 옷의 클래식이라지만 어떤 하나의 브랜드, 한 가지 스타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리바이스처럼 브랜드가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경우에도 어느 하나의 아이템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반면 G9은 바라쿠타의 제품명이 그 종류의 옷을 통칭하게 됐다는 점에서 ‘프리마’나 ‘미원'(특정 제품명이 커피 크림이나 조미료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경우)과 비슷하다. 좀더 일반적인 명칭으로 해링턴 재킷(Harrington Jacket)이나 블루종(Blouson) 같은 말이 있지만 ‘바라쿠타 재킷’으로도 많이 불린다. 

비교적 최근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G9을 보면 주로 ‘터프가이’들이 이 옷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TTSS의 리키 타르가 그랬고, ‘행오버2’의 주인공들이 태국으로 출국하는 장면에서 필(브래들리 쿠퍼)도 네이비 G9을 입고 있는데, 행오버의 필은 딱히 터프가이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4명의 친구 무리 중에서 그나마 남자답고 정상에 가장 가까운 역할을 맡고 있다.

(왼쪽부터) 킬러 엘리트의 제이슨 스태덤, 행오버2의 공항 장면에서 브래들리 쿠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톰 하디. 모두 바라쿠타 G9을 입고 있다.

(왼쪽부터) 킬러 엘리트의 제이슨 스태덤, 행오버2의 공항 장면에서 브래들리 쿠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톰 하디. 모두 바라쿠타 G9을 입고 있다. 목 여밈 부분의 dog ear flap이나 편지봉투 모양의 사선 주머니, 안감의 붉은색 체크무늬 같은 G9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도 또 하나. 형사-킬러-전직 특수부대 요원을 무한 반복중인 터프가이 전문 배우 제이슨 스태덤도 영화 ‘킬러 엘리트’에서 베이지색 G9을 입고 나온다. 킬러 엘리트는 그다지 흥행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로버트 드 니로나 클라이브 오웬 같은 출연진도 만만찮고 그저그런 액션영화들보다는 한 수 위였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qosbc-main1다니엘 크레이그도 자신이 출연한 두 번째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해링턴 재킷을 입었다. 이 때 등장한 옷이 G9의 형제뻘인 G4라는 주장도 있고,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던 톰 포드가 G4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옷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G4의 특징적인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좀더 높아 보인다.

G4는 G9의 허리 부분과 소매에 들어있는 신축성의 리브(‘시보리’라고 부르는 것)가 없고, 허리를 조일 수 있는 밴드(adjuster)가 달려 있다. 퀀텀 오브 솔라스에 등장한 재킷은 이런 디테일들과 조금씩 차이가 있고, G4, G9의 공통적인 특징인 칼라의 dog ear flap도 보이지 않는다.

G9의 이런 모습들은 사실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바라쿠타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설립된 것은 1937년이고, G9이 언제 처음으로 생산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라쿠타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1950년 미국/캐나다로 수출됐다는 내용이 있지만 어느 모델이었는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즉 G9이 언제부터 글로벌한 인기를 얻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50년대 초중반 무렵이 되면 미디어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영화 ‘열정의 무대(King Creole)’에서 이 옷을 입었다. (바라쿠타 홈페이지에서는 1954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King Creole은 1958년작인 것을 보면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 당초 주연으로 제임스 딘을 염두에 뒀으나 1955년 딘이 사망하는 바람에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왔다고 한다.) G9을 애용한 유명인사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배우 스티브 맥퀸은 1960년대에 영화에서는 물론 일상에서 이 옷을 자주 입었다. 영화로 유명해진 것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이고, 맥퀸이 G9을 입고 있는 가장 iconic한 사진인 라이프지 표지는 1963년에 발행된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도 영화 ‘Assult on a Queen'(1966·국내엔 개봉되지 않았는지 우리말 제목을 모르겠다)에서 이 옷을 입었다.

‘열정의 무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연기한 대니 피셔는 자신을 놀리는 친구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퇴학당했다. Assult on a Queen의 마크 브리튼(프랭크 시나트라)도 2차대전 이후 잊혀진 독일군 잠수함을 발견해내는 잠수사이자 모험가이고, 스티브 맥퀸은 설명이 별로 필요없는 악동이자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남자라는 이미지가 있다.

‘터프가이가 선택한 옷’이라는 주제에 맞아떨어지려면 반항아 제임스 딘도 이 옷을 입었다는 얘기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딘이 ‘이유없는 반항’에서 입었던 빨간색 해링턴 재킷은 모양이 비슷하긴 하지만 G9이나 바라쿠타 제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가볍고, 편하고, 어지간한 비도 막아주는 이 재킷은 격식이나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에게 꽤나 잘 어울렸을 것이다.

왼쪽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열정의 무대), 프랭크 시나트라(Assult on a Queen), 스티브 맥퀸(오른쪽 두 사진). 맥퀸이 네이비 G9을 입은 사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찍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왼쪽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열정의 무대), 프랭크 시나트라(Assult on a Queen), 스티브 맥퀸(오른쪽 두 사진). 맥퀸이 네이비 G9을 입은 사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찍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1964년에는 TV 드라마 ‘페이튼 플레이스(Peyton Place)’에서 로드니 해링턴 역할을 맡았던 라이언 오닐이 ‘해링턴 재킷’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행시킨다. 말하자면, 해링턴 재킷이라는 말이 먼저 등장한 뒤에 바라쿠타나 G9이 일반명사화한 것이 아니고, G9이 먼저 인기를 끌던 중에 착용자의 배역 이름을 딴 해링턴 재킷이라는 말이 일반명사로 자리잡은 경우다.

역사가 오랜 만큼 이야기도 많아서, 골프황제 아놀드 파머가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웨어를 론칭할 때 바라쿠타와 콜라보레이션을 했다. 안감에 들어가는 빨간 체크무늬도 G9 하면 생각나는 상징 가운데 하나인데, 스마트턴아웃 같은 곳에서는 이 무늬를 사용한 넥타이를 출시하기도 했다. 일종의 위트다. 그런데 스마트턴아웃 영문 홈페이지에는 이 제품이 있지만 한글 홈페이지엔 없다.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을 거라고 본 모양이다.

요즘 이른바 ‘스토리텔링’이 뜨면서 패션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브랜드에서 홍보나 마케팅 기법으로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려는 모습을 자주 본다. 제품을 둘러싼 이야기를 어색하게 만들어내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보도자료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쓰는 사례도 있다. 당연히 별 감흥이 없다.

억지로라도 얘기를 꾸며내야 스토리텔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얘깃거리가 쌓이면(꼭 유명인이 많이 입었다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스토리텔링은 ‘스토리’ 자체보다는 시간의 문제다. 스토리텔링이 된다는 건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랑받아왔다는 뜻이고, 시간이야말로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대상인 만큼 ‘진짜’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백화점 1층에 매장이 있는 고가(高價) 브랜드 대신 이런 물건들을 ‘명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작정하고 만든 패션 교과서 영화 – ‘킹스맨’의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

출근길, 덕수궁 쪽 출구로 시청역을 나서기 바로 전에 붙어 있는 영화 킹스맨(Kingsman: The Secret Service) 포스터를 근래 계속 지나쳤다. 콜린 퍼스 주연의 영국 스파이 영화라면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을법도 한데 이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가 않았다. 일단 영문 표기를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King`s man’인 줄 알았고, 국왕에게 충성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인가 싶어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킹스맨(Kingsman: The Secret Service) 포스터.

킹스맨(Kingsman) 포스터.

킹스맨의 ‘K’를 좌측으로 90도 회전시킨 듯한 엠블럼 사이사이로 등장인물들이 몸을 내밀고 있는 포스터 디자인이라든지, 가운데에 크게 나오는 걸로 봐선 뭔가 중요한 역할인듯한 젊은 배우가 스냅백을 삐뚜름하게 쓴 모습도 어딘가 만화같은 느낌이어서, 007보다는 엑스맨에 가까운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최근 몇몇 엑스맨 시리즈를 만든 매튜 본이 감독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도 역시 007보다 엑스맨에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황당무계한 비밀무기로 싸우던 피어스 브로스넌 이전의 본드들보다 주먹으로 부딪치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더 매력적이라는 관점에서는, 방탄 우산이 총으로 변하고 만년필로 상대를 독살하는 킹스맨은 매력이 좀 덜할 공산이 큰데, 다행히 감독의 세련된 솜씨 덕에 영화가 별로라고 느낄 겨를은 거의 없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 액션이라는 장르 때문에 007이나 본(Bourne) 시리즈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매튜 본은 그런 비교도 애써 피하려 하지 않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위트있게 받아넘겼다. (강아지 이름과 관련된 대사에 그런 위트가 묻어있는데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여기까지만 언급해야겠다.)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영화(또는 드라마나 소설처럼 다른 작품도)에서 인상깊었던 룩(look)이나 브랜드, 아이템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보자는 쪽으로 큰 방향을 정했다. 그런 것을 왜 쓰느냐고 물으면 사실 그럴싸한 대답이 궁하다. 굳이 답하자면 우선 그때그때 스치는 생각들을 나름의 기록으로 남겨서 스스로 스타일을 만드는 과정에 참고하려는 이유가 있겠고, 좀더 바라자면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작은 것이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정도다.

킹스맨이 반가웠던 건 비슷한 생각으로 만든 영화, 그것도 꽤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콜린 퍼스의 ‘수트빨’이 정말 멋지더라는 얘기는 이미 개봉 전부터 여러 영화평이나 블로그에 나왔다. 그런데 단지 그뿐은 아니다. 개봉 한달쯤 전에 파이낸셜타임스( FT)에 나온 기사에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Moreover, he argues, film is far more influential than any men’s fashion show. “The only catwalk men will look at is Victoria’s Secret,” he argues. “If you ask most men who they want to look like, it’s always the usual names that come up — Steve McQueen, Paul Newman, Sean Connery. Most guys want to look like an image or a person they’re inspired by rather than create their own look.”

남자들은 스스로 자신만의 룩을 만들어나가기보다는 숀 코너리나 폴 뉴먼, 스티브 맥퀸처럼 영화에서 봤던 인상적이었던 캐릭터의 모습을 따라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니, 아예 작정하고 그런 교과서가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그냥 콜린 퍼스 수트빨이 참 좋더라는 정도로는 안된다. 매튜 본은 영화에 등장한 옷이며 소품들을 ‘킹스맨’ 컬렉션으로 만들어서 올해 런던컬렉션에 나갔다. (영화에선 콜린 퍼스가 태런 애거튼에게 각종 무기를 설명해주는 장면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올해 런던컬렉션 시간표의 일부. 킹스맨 쇼는 1월11일 저녁 6시에 있었다. (빨간 네모 친 부분) 오른쪽은 킹스맨 쇼의 상세 내용 소개.

올해 런던컬렉션 시간표의 일부. 킹스맨 쇼는 1월11일 저녁 6시에 있었다. (빨간 네모 친 부분) 오른쪽은 킹스맨 쇼의 상세 내용 소개.

이걸로도 아직 부족하다. 매튜 본은 콜린 퍼스가 들었던 우산, 입었던 양복, 신었던 구두, 그 외에 라이터, 시계 같은 소품들까지 ‘영화에 나온 그 물건’을 실제로 갖고 싶은 관객들을 위한 배려도 해놨다. MR. PORTER(뭐라고 해야 할지 약간 애매한데, 굳이 소개하자면 온라인 쇼핑몰과 패션 웹진을 합친 형태가 될 것이다)와 제휴해서 ‘킹스맨 컬렉션’의 아이템들을 실제로 판매한 것이다.

조악한 물건을 영화에 나왔다며 파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을 소유하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아이템들의 브랜드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그 면면도 가격도 만만치 않다. 문제의 우산은 스웨인 오드니 브리그(007가방을 만들었던 그곳!), 구두는 조지 클레버리, 손수건은 드레이크(Drake`s), 셔츠는 턴불&아서, 가죽 수첩은 스마이슨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이템은 ‘멀린’ 역의 마크 스트롱이 입었던 왁스코튼 필드재킷(매킨토시)이었고, 이미 왁스재킷은 가진 것이 있어 또 다른 아이템인 밀리터리 스웨터를 잠깐 봤는데 가격이 무려 69만원이었다.

이 브랜드들은 고가라는 것 외에 태생이 영국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영국 물건들로 ‘영국 신사’를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만 그러자면 시계가 문제였을텐데, 최고급시계 시장은 스위스가 장악하고 있고 독일과 일본(세이코)의 일부 브랜드들이 진입해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익스펜더블’ 시리즈의 실버스타 스탤론이 파네라이를 차고, ‘논스톱’에 조연으로 나온 이름 모를 부기장도 파텍 필립을 찼고 하물며 제임스 본드도 “롤렉스?”라는 재무성 요원의 물음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의 2음절 강세로 “오미가!”를 외치는데(‘카지노 로얄’에서 본드와 베스퍼의 기차 장면), 킹스맨의 스파이들은 다소 생소한 BREMONT라는 브랜드의 시계를 차게 된 데는 그런 연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는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공간적 배경으로 KINGSMAN 양복점이 등장한다. 피팅룸에 갖가지 무기가 가득하고, 방이 통째로 엘리베이터가 돼서 지하로 한없이 내려가면 비밀 기지로 이어지는(실제로 매튜 본이 양복점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 양복점의 실제 배경은 런던 새빌로 11번지 HUNTSMAN이다.

HUNTSMAN은 마크 스트롱이 요르단 정보국장 역으로 간지폭풍을 일으켰던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에서도 의상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남긴 곳이다. 영화계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가 오랜 곳임에도(조선 철종이 즉위하던 해인 1849년 창업) 영화촬영과 같은 이벤트에 개방적인 마인드인 것인지. 다만 킹스맨에서 주인공들이 입었던 수트까지 HUNTSMAN 제품은 아닌듯하고, Cheshire Bespoke에서 따로 제작했다고 한다.

위는 영화에서 양복점으로 찾아오라는 해리 하트(콜린 퍼스)의 말을 듣고 에그시(태런 애거튼)가 KINGSMAN을 찾아가는 장면. 아래는 이 장면의 배경이 된 실제 양복점 HUNTSMAN.

위는 영화에서 양복점으로 찾아오라는 해리 하트(콜린 퍼스)의 말을 듣고 에그시(태런 애거튼)가 KINGSMAN을 찾아가는 장면. 아래는 이 장면의 배경이 된 실제 양복점 HUNTSMAN.

이 영화는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라는 아이템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옛날 옷’ ‘아저씨 양복’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외면받고 있지만,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에는 싱글버튼이 따라올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옷 때문이 아니라 콜린 퍼스의 ‘기럭지’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청바지에 스냅백을 쓰던 태런 애거튼이 더블수트를 입고 어떻게 변하는지 보면 잘 재단된 수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스파이 액션 장르의 팬이라면 한번쯤 봐도 후회하지 않을 영화, 패션과 수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봐야 할 영화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스파이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 –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소품들

약간 오래된 영화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2011)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다음주에는 어쩐지 새로 개봉하는 영화 킹스맨(Kingsman: The Secret Service)을 리뷰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킹스맨과 TTSS(제목이 길어서 보통 이렇게 줄이는 모양이다)는 영국 첩보원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콜린 퍼스/마크 스트롱이 출연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영화 속 패션은 상당히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될 것 같다.

출근길 시청역 광고판에 붙은 포스터로만 언뜻 봤던 킹스맨은 007시리즈의 아류같은 느낌이 약간 있었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었는데, 영화 속 옷을 구경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킹스맨에 대해서는 우선 영화를 봐야 자세히 얘기할 수 있을 테니 다시 TTSS로 돌아와 보면, 이 영화에는 늘 ‘지적 스릴러’ ‘고품격 첩보물’ 따위의 수식어가 붙곤 했다. 첩보 영화의 공식처럼 돼버린 추격, 격투, 총격전 장면이 이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약간 비약하자면, 결국 재미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영화 감상평에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거나 “화려한 캐스팅에 혹해서 봤는데 돈 버렸다”와 같은 것들이 많이 섞여 있다. 장르가 장르인만큼 007시리즈와 같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포스터. 이미지에 난수표 같은 처리가 돼있지만 안경을 치켜올리는 손에 낀 가죽장갑이 보인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포스터. 이미지에 난수표 같은 처리가 돼있지만 안경을 치켜올리는 손에 낀 가죽장갑이 보인다.

나 역시 개봉한지 얼마 되지않아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신나는 액션 활극을 기대했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장면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 실망했었다. 원작소설 작가인 존 르카레(영화의 한 장면에 까메오로 등장한다고 한다)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비교적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어 TTSS를 소설로 읽어보려고도 했지만 역시 내용이 잘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이번에 영화를 두 번째 보니 먼저는 발견하지 못했던 디테일이나 복선이 눈에 들어와 처음처럼 지루하지는 않았다. 007과는 좀 다른 종류의 재미이긴 하지만, 꽤 재미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TTSS는 영국 정보부 첩보원들의 이야기인데, 마찬가지로 영국 첩보원이 주인공인 007시리즈와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아마 곧 개봉하는 킹스맨과도 전혀 다를 것이다. 차라리 킹스맨과 007의 스타일은 꽤 통하는 데가 있겠지만.)  어느 한쪽이 좋고 다른쪽은 못하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007은 남자들의 판타지다. 제임스 본드는 수트를 입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잠수복을 벗으면 그 안에서 턱시도가 나온다. 악당들과 결투를 벌이느라 찢어지고 헝클어진 모습마저 완벽하다. (대중문화부에서 007 50주년을 맞아 영화, 음악담당 선배들과 함께 특집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장난삼아 던져 본 기사 제목이 ‘한결같은 그남자, 외길 50년’이었다) 반면 TTSS의 주인공들은 상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직장인’으로서의 첩보원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지 보여준다고 해야 하려나.첩보원도 결국 공무원이니까.

이 영화에는 압도적인 스타일의 어떤 인물, 시선을 사로잡는 강력한 아이템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남자 옷에 아직 우아함이 남아 있었던 시대, 본고장 영국의 분위기가 녹아 있다. 서커스(정보부) 수뇌부가 모여 회의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참석자들은 가슴에 포케치프를 꽂고 보타이를 매기도 한다. 직장에서 매일 열리는 일상적인 회의에서 포케치프를 꽂아도 괴짜 취급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포스터를 보면 존 스마일리(게리 올드만)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고 있다. 꽤 중요한 의미를 담은 소품인 라이터도 아내가 남편에게 전하고픈 문구를 새긴 것이다. 스마일리가 특별히 우아함을 추구했던 것은 아닐테고 이 물건들이 당시로선 하이테크였던 것이겠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사는 의당 잘 재단된 가죽장갑을 끼고 라이터 같은 소지품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 간직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더 가볍고 따뜻한 소재에 밀려 가죽장갑이 드물어지고, 더 간편한 일회용 라이터를 어디선가 얻어 쓰다가 역시 어디선가 잃어버려도 잃어버린지도 잘 모르는 ‘기능성’의 시대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이터. 초기 방식의 가스라이터인 듯하다. "To George from Ann All My Love"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상당히 의미 있는 소품으로 영화에 나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이터. 초기 방식의 가스라이터인 듯하다. “To George from Ann All My Love”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상당히 의미 있는 소품으로 영화에 나온다.

주인공들이 들고 다니는 브리프케이스도 마찬가지다. 가죽으로 만든 브리프케이스는 “남자 가방 중에서 가장 편하진 않지만 가장 우아한” 물건이다. 영화에서 스마일리나 피터 길럼(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바닥이 넓고 탭(tab)으로 여미는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있다. 신문도 넣고 책도 한 권 넣고 서커스 자료실에서 훔쳐온 비밀 서류도 넣다 보면 네모반듯한 형태가 정해져 있는(그래서 내용물의 양에 따라 약간 늘어날 여지가 없는) attache case는 불편했을 것이다.

요즘이라면 당당하게 수트 위에 백팩을 멘 주인공이 등장했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백팩은 편하고 실용적이지만 수트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니까. 누군가는 “옛날에 조인성이 드라마에서 수트에 백팩 멨는데 멋있었다”고 항변할지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조인성이니까 그렇지 네가 하면…”이라고 면박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조인성이 해도 이상한데 네가 하면…”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럼이 자료실의 비밀문서를 빼내러 갔을 때(위 장면) 브리프케이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콘트롤(서커스 국장)을 따라 정보부를 나서는 스마일리(아래 장면)도 가죽 브리프케이스를 들었다.

길럼이 자료실의 비밀문서를 빼내러 갔을 때(위 장면) 브리프케이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콘트롤(서커스 국장)을 따라 정보부를 나서는 스마일리(아래 장면)도 가죽 브리프케이스를 들었다.

사실 스파이가 무슨 옷을 입는지가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다. 국정원에 물어볼 수도 없고…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첩보원을 포함한 뭇 남자들이 남자 옷을 갖춰 입던 시절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일종의 ‘원죄’와도 같은 노트북 백팩을 메고 일하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레인코트를 입고 손에 브리프케이스를 든 채 천천히 거리를 걷던 스마일리의 모습이 약간은 부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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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은 왜 군복을 입었나

존 레논은 20세기 문화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 중 하나인데, 그 명성에 비해 스타일이나 룩(look)에 있어서 훗날까지 기억나는 모습은 많지 않은 편이다. 1960년대 초/중반에 비틀스가 통 좁은 재킷이나 첼시부츠 같은 아이템으로 모즈룩의 선구자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이후 비틀스나 그 멤버들은 점차 패션보다는 반전/평화를 비롯한 메시지로 기억되는 뮤지션이 되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레논의 모습 몇 가지를 꼽는다면 일단 동그란 안경이 있겠고, 그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군복’도 있다. 존 레논도 군복을 입었다. 1972년에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연 콘서트 ‘One to One’에서 미군의 OG-107(OG-507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107과 507이 형태상 차이보다는 원단의 차이인듯 해 확실히 가리기는 어려울 듯하다)를 입었고, 이때의 사진이 훗날 앨범 커버에 들어가면서 군복 입은 모습이 유명해졌다. 이 앨범이 ‘Live in New York City’이다.

왼쪽은 'Live in New York City' 앨범 재킷. 오른쪽은 아마도 1971년 Dick Cavett Show에 OG-107을 입고 출연했을 때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왼쪽 어깨에 2사단 부대휘장, 양팔에 상사 계급장, 오른쪽 가슴 주머니에 임진스카우트(Imjin Scouts) 휘장이 비교적 잘 보인다.

왼쪽은 ‘Live in New York City’ 앨범 재킷. 오른쪽은 아마도 1971년 Dick Cavett Show에 OG-107을 입고 출연했을 때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왼쪽 어깨에 2사단 부대휘장, 양팔에 상사 계급장, 오른쪽 가슴 주머니에 임진스카우트(Imjin Scouts) 휘장이 비교적 잘 보인다.

평화를 노래했던 존 레논이 군복을 입었다는 건 약간 아이러니다. 레논은 이 공연뿐 아니라 1970년대 초반 무렵 여러 차례에 걸쳐 이 군복 셔츠를 입었다. 1971년 9월11일 Dick Cavett Show에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출연했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잠깐 OG-107에 대해 찾아보니, 이 옷은 1952년부터 1989년까지 군별이나 병과를 가리지 않고 미군 전체에 보급됐다고 한다. ‘OG’라는 말은 Olive Green의 색상 코드에서 온 약자다. 미국의 원조나 물자 지원을 받았던 국가들에서도 널리 입었다고 한다. 가끔씩 인터넷 쇼핑몰 같은 곳을 보면 레논의 셔츠에 부착돼 있었던 패치를 달아서 ‘존레논 야상’ 같은 물건을 팔고있는 걸 볼 때가 있는데, OG-107은 재킷이 아니므로 이 옷을 ‘야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존 레논이 왜 군복을 입었는가’는 외국에서도 꽤 논쟁적인 주제였던 모양이다. 외국 일부 웹사이트나 포럼에 레논이 이 쇼에서 군복 셔츠를 입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 공항에서 미군 레인코트를 입고 서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 ‘지금 베트남의 군대에서 오는 길인데 당신 이런 옷을 좋아하면 내가 보내주겠다’고 하기에 그러시라 했더니 소포로 보내왔다”는 이야기다.

“It’s very funny, I was in the German Airport, I had an American Army mac on and a guy came up and said, I just got out of the Army in Vietnam and if you’d like these clothes I’d love to give them to you, ‘I said alright’, and he sent me all these Army clothes in the post, A few years ago it was.”

1971년에 출연한 방송에서 ‘몇 년 전’이라고 했으니 19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비틀스로 말하면 해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고, 레논 본인은 이미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다. 공항에서 군복 얘기를 했다는 남자 역시 레논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을 것이다.

레논이 출연한 Dick Cavett Show의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버전이 여러 가지인 모양이다. ‘enitre show’라고 소개돼 있는 영상에서도 방청객 질문이 나오는 부분은 편집돼 있다든지… 아무튼 군복을 입게 된 배경에 대한 레논 본인의 언급은 위의 영상 4분35초 무렵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레논은 공항에서 만난 군인에게서 받은 옷을 입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콘서트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코디네이터나 스타일리스트가 의상을 골라 주는 요즘과는 달리 평상복을 그냥 입은 것이었는지 약간 궁금하다. 그땐 그런 시스템이 아직 정착되기 전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그 옷을 고집했던 것인지.

어떻게 이 옷을 구하고 입게 됐는지 레논이 굳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약간 의아한 부분도 있다. 레논이 입은 셔츠에는 4종류의 패치가 부착돼 있다. 일단 오른쪽 가슴에 Reinhardt라는 이름표가 있고, 그 아래 가슴 주머니에 임진스카우트(Imjin Scouts) 휘장이 있다. 양팔에는 상사(Sergeant) 계급장이, 왼쪽 어깨에는 미 2보병사단(2ID : 2nd Infantry Division) 부대 휘장이 있다.

이런 휘장들이 달려 있는 군복이라면 베트남전 파병자보다는 주한미군이라고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존 레논이 ‘용사의집’ 같은 곳에 옷을 들고가서 이 패치들을 따로 오바로크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미 2보병사단은 베트남 파병 부대가 아니다. 6.25 이후 한국에 주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군부대’라고 부르는 부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겪었던 부대가 여기다. Imjin Scouts(임진전초부대)는 2사단 내에서 1960~1990년대까지 운영했던 프로그램으로, 처음에는 비무장지대 작전 수행을 위한 262시간짜리 교육(ACTA)을 수료한 이들에게 착용 자격이 부여됐고, 뒤에 DMZ내 작전 참여 20회를 넘긴 이들로 범위가 확대됐다고 한다.

상사 계급장, 임진스카우트 휘장, 미2사단 부대마크 (왼쪽부터)

상사 계급장, 임진스카우트 휘장, 미2사단 부대마크 (왼쪽부터)

2사단 일부 인원이 어떤 식으로든 베트남에 갔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독일 공항에서 레논 앞에 나타났던 사람은 한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Dick Cavett Show가 1971년이었고, 당시 레논이 언급한 공항의 에피소드가 “몇 년 전”이었다고 하니 시기적으로도 대략 맞는다.

좀더 상상의 나래를 펴 보면, 군인은 Korea라고 말했으나 당시만 해도 코리아라는 이름이 지금만큼도 널리 알려지지 못해 레논이 베트남으로 알아듣고 기억해버린 것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할 것만도 아닌 시나리오다.

한국 DMZ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Reinhardt 상사(아마도)가 베트남을 거쳐서 독일로 가던 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2사단 병력이 참전을 위해 베트남에 전개한 적은 없더라도, 전역자(옷을 모두 보내줬다고 하니 어쩐지 다시 군복을 입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가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전시인 만큼 오히려 쉬웠을 것도 같다. TV에서 보던 존 레논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한국이며 DMZ며 임진 스카우트 따위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 그냥 베트남에서 오는 길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지.

외국에서도 레논이 밀리터리 셔츠를 입은 것을 두고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일종의 위선이라는 사람도 있고, 반전(反戰) 메시지의 반어적 표현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는 듯하다. 레논이 반대했던 것은 베트남전이지 한국의 6.25가 아닌데 주한미군 군복을 입은게 뭐 그리 대수냐는 의견도 있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레논은 이 옷이 베트남에서 온 군복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알고도 입었다면 본인이 적극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 내지는 규탄의 의미로 옷을 입었을 가능성이 좀더 높아 보이긴 한다.

모자의 시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모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여러 모로 인상적인 영화다. 우선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인터미션 포함 230분)이 놀랍고, 그 긴 시간을 사건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정교하게 교차편집해서 엮었다는 점도 그렇다. 여러 번 다시 봐도 지겹다는 느낌보다는 그때마다 새로운 기분이다. 어지간히 훌륭한 영화도 두 번째 볼 때는 재미나 감동이 덜하기 마련인데 역시 걸작은 뭔가 다른 모양이다.

갱스터 영화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도 패션 참고서가 될만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굳이 일부러 주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것이 모자다. 영화는 주인공 누들스가 노인이 될 때까지 60여년의 세월을 그리고 있는데,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모자를 쓰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서 모자를 협찬한 브랜드를 따로 언급했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엔딩 크레딧. 모자를 Borsalino에서 제공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모피(fur)는 Fendi에서 제공했는데, 주로 여성복에 쓰였기 때문인지 영화를 몇 번이나 본 뒤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엔딩 크레딧의 한 장면. 모자를 Borsalino에서 제공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모피는 펜디(Fendi)에서, 보석은 불가리(Bvlgari가 아닌 Bulgari라고 썼다)에서 제공했는데, 주로 여성복에 쓰였기 때문인지 영화를 몇 번이나 본 뒤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국의 전통에서도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관례(冠禮)는 성인이 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서양에서도 모자를 쓴다는 것, 특히 중절모를 쓰는 것은 중류 이상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기호로 통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누들스 무리들은 밀수품 운반으로 제법 돈을 만지게 되자 먼저 좋은 옷을 맞춰 입는다. 땟물을 벗어버린 이들은 가장 어린 도미닉을 제외하고 모두 중절모를 썼다. 수트에 긴 코트를 맞춰 입고 어른 행세에 들떠서 마지막에는 저마다 중절모를 하나씩 집어들었을 것이다.

도미닉이 “누들스, 나 넘어졌어(Noodles, I Slipped)”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면서 누들스들의 운명은 전환점을 맞는다. 누들스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잠시의 어른 흉내도 끝나고 마는데, 감옥에 들어서는 누들스를 전송하는 장면에서 친구들은 수트를 벗고 예전의 조무래기로 돌아와 뉴스보이 캡을 쓰고 있다. 뚱보 모(fat Moe)는 예외다. 이것은 뚱보네 집이 가게 유리벽에 다비드의 별을 그릴 만큼 유대교 전통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뚱보 모가 쓰고 있는 모자는 아마도 Kippah(정수리 부분만 덮는 유대교 신자들의 모자)인 것으로 보인다.

제법 돈을 만지며 어른 흉내를 내는 누들스 무리들(왼쪽)은 가장 어린 도미닉을 제외하고 모두 말쑥한 중절모를 쓰고 있다. 도미닉의 죽음으로 어른 놀이가 막을 내린 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뉴스보이 캡을 썼다.

제법 돈을 만지며 어른 흉내를 내는 누들스 무리들(왼쪽)은 가장 어린 도미닉을 제외하고 모두 말쑥한 중절모를 쓰고 있다. 도미닉의 죽음으로 어른 놀이가 막을 내린 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뉴스보이 캡을 썼다. 맨 왼쪽 뚱보 모는 제외.

세월이 흘러 출소하는 누들스를 마중나온 것은 맥스였다. 출감 장면에서 둘의 옷차림이 대조적이다. 장의사 업체(를 가장한 불법 비즈니스)를 차려 잘나가기 시작했던 맥스는 말쑥한 수트에 중절모를 썼고, 감옥에서 막 나온 누들스는 재킷에 넥타이까지는 구해서 걸쳤지만 머리에는 뉴스보이 캡을 쓰고 있다. 출감 시점에서 20대 후반이었을 누들스에게 썩 어울리지는 않는 모자다.

누들스가 블루칼라였다면 이런 모자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데(”lunchtime atop a skyscraper’와 같은 사진을 보면 건설노동자들이 뉴스보이 캡을 쓰고 있다), 누들스는 상류층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블루칼라도 아니다. 동료들이 이 무렵부터 사업가 행세를 하며 이미 모두 중절모를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누들스의 뉴스보이 캡은 감옥에서 막 나와 아직 옷을 갖추지 못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성년이 된 누들스가 중절모가 아닌 모자를 쓰고있는 것은 이 장면 뿐이다. 출감 이후 청년 시절에도, 나중에 시간이 흘러 뉴욕에 다시 돌아온 노년에도 누들스는 중절모를 쓰고 나온다.

어린 시절, 출감 직후, 청년기, 노년기의 누들스(왼쪽부터). 청년 시절에 비해 노년의 누들스가 쓴 모자는 정수리 부분의 각이 비스듬해져 좀더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왼쪽 옆에는 깃털 장식이 있다.

어린 시절, 출감 직후, 청년기, 노년기의 누들스(왼쪽부터). 노년의 누들스가 쓴 모자는 청년기에 비해 정수리 부분의 각이 비스듬해 좀더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왼쪽에 깃털 장식이 있다.

누들스의 출생연도는 영화에서 분명하지 않지만, 맥스(1905년생), 팻시/짝눈(1907년생)과 동년배이니 1900년대 초중반일 것이다. 출감 시점은 1933년(금주법 폐지 연도)이고, 뚱보의 술집으로 돌아온 노년은 “35년동안 생각해 봤는데”라는 대사를 감안하면 1960년대 후반이다. 남성복의 필수 규범으로서 모자가 존속했던 시기가 대략 1960년대까지이니, 이 영화는 ‘모자의 시대’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모자는 20세기 초반부터 2차대전 전후에 이르는 시기와 지금의 남성복을 구분짓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이제는 가끔씩 액세서리처럼 모자를 쓰는 사람이 있을 뿐, 아무도 모자를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 Bernnard Roetzel의 ‘Gentleman-A Timeless Guide to Fashion’을 보면 모자는 1960년대까지 사회적 규범의 하나로 인식되다가 1970년대 들어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모자의 본질적 기능은 비, 먼지, 햇빛 등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1970년대 무렵부터는 굳이 모자가 아니어도 이런 효과를 보게 해주는 물건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예컨대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 굳이 모자를 쓰고 빗속을 걷지 않아도 된다. 1950년대까지는 머리를 지금처럼 매일 감기 어려웠는지는 좀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 헤어스타일도 다변화하기 시작하는데, 모자를 쓰면 애써 만든 머리모양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모자의 퇴장을 부채질한 것 같다.

1960년대까지 모자는 남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관습에 대한 반발 또한 ‘뭔가 다른 것’을 머리에 쓰는 것일지언정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구절은 이런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자를 벗어야 할 때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