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하나 또 있다. 러닝타임이 긴데도 몇 번이나 봤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배경도 뉴욕이었다. 이번에 묵었던 호텔과 연결된 곳에 그랑 센트럴 기차역이 있었는데, 뉴욕을 대표하는 오래된 기차역이란 말만 듣고 영화에서 누들스 무리들이 사물함에 열쇠를 숨겨뒀던 역, 누들스가 편도 티켓을 들고 떠나던 곳이 바로 여기일 거라고 기대했었다. 좀더 찾아본 뒤에야 그 역은 뉴저지에 있는 호보컨 터미널이고, 누들스가 떠나고 30년이 지나 돌아왔던 곳은 기차역이 아니라 버스 터미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뉴욕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기차 탈 일도 없으면서 이 역에 여러 번 갔다. 별자리를 그린 천장이나, 중앙 매표소 지붕에 달린 4면 시계 같은 명물을 구경하기도 했고, 아치형의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처음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한국이나 서울의 첫인상을 물으면 “현대적인 모습에 놀랐다”고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 된다. 나는 이것이 아직도 동양에서는 비단옷을 펄럭거리며 사는 줄 아는 서양인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뒤늦게 산업국가 대열에 합류한 한국에 대한 립서비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뉴욕에 다녀오면서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도시 중의 도시라는 뉴욕조차도 거리에는 백년이 넘은 건물과 초현대적 빌딩이 뒤섞여 있어서, 콘크리트로 뒤덮은 서울이 그들의 눈에 정말로 필요 이상, 상상 이상으로 모던해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기차역은 원래 역사(驛舍)를 리모델링한 건물이 1913년에 문을 열었다니 100년이 넘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차를 탄다. 한국에도 오래된 건물이 있지만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유폐돼 있는 것이다. 백년씩 된 건물을 여러 사람이 공공의 용도로 실용하는 경우가 한국에 있던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기차역만 해도 지금 이곳 그랑 센트럴 터미널이 백년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일본 도쿄역도 얼마 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지만 서울역 옛 역사는 더이상 기차를 타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석조가 아닌 목조건축 문화였고 전쟁의 참화를 겪어서 보존이 어려웠다지만, 옛것이나 거기에 쌓인 시간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데 어느새 우리는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닌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반나절 정도 짬이 생겨 브루클린에 가봤다. 과거 우범지역이었다가 요즘 맨해튼에서 밀려난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면서 동네가 새롭게 뜨고 있다는데, 나는 그보다도 건물 사이로 맨해튼 브리지가 바라다보이는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갔던 것 같다. 한국 어느 예능 프로에서 출연자들이 모여 사진을 찍으면서 유명해졌다지만 내게는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에서 누들스 무리들이 신나게 걷던 골목, 그러다 도미닉이 넘어져 숨을 거둔 곳이다.
축축하고 어두컴컴하던 골목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소로 바뀌었다. 돈푼이나 만지게 된 누들스 무리들이 양복을 빼입고 의기양양하게 걷던 거리를 지금은 가지런히 주차된 자동차들이 메우고 있지만, 영화를 감명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브루클린은 충분히 가볼 만한 곳이다.
강변으로 나오니 맨해튼 쪽으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들러리들과 함께 결혼식 사진을 찍는 신랑 신부가 있었고, 강쪽으로 향한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로 치면 한강 둔치쯤 되는 이 공원에는 장 누벨이 설치했다는 회전목마도 있다. 뉴욕 오는 비행기에서 ‘스팅’을 봤기 때문인지 더 눈에 들어왔다. 2달러인가를 내고 한번 타보는 데 남녀노소의 구별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목마가 돌 때 나오는 흥겨운 멜로디는 오히려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 있었다.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에서 건물 사이로 보이던 다리가 브루클린 브리지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다리는 맨해튼 브리지라고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어서 맨해튼까지 건너가보기로 했다. 다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할 정도로 붐볐다. 다리를 건너오고 건너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말하진 않지만 축제나 의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동류의식 같은 게 있다.
한밤에도 타임스스퀘어는 여전히 축제 분위기다. NYPD 간판조차 무슨 백화점 내지는 쇼핑몰처럼 보인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 활기를 띠는 것 같다. 미국 전국을 다 따져도 밤새 불야성인 곳은 라스베이거스와 시카고 다운타운, 그리고 맨해튼 중심가 정도 외에는 없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브라이언트 파크 앞은 여전히 붐빈다. 그 모습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내려다보고 있다. ‘잠들지 않는 도시’답게 꼭대기 전망대는 새벽 2시까지 문을 연다고 한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몰던 것과 같은 느낌의 옐로캡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금 뉴욕 택시는 연비좋고 중고차값 잘 나오는 일본차로 대부분 바뀌었다고 한다. 호텔 들어가기 전에 찍은 이 옐로캡이 뉴욕에서의 마지막 사진이다. 뒷자리의 승객은 관광객인 듯했는데, 아마도 내일 일정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운전하는 이에게는 또 내일이 있을 것이고, 나도 이 사진을 찍은 뒤에는 다시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