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궁 화
삼천만의가슴에
피었네피었네영원히피었네
백두산상상봉에한라산언덕위에
민족의얼이되어아름답게피었네
별중의별창공의별
삼천만의가슴에
빛나네빛나네영원히빛나네
인왕산봉우리에조국의하늘위에
민족의꽃이되어아름답게빛나네
무궁화목무궁화과의낙엽관목.높이2∼3m.나무그루전체에털이거의없고가지가많이뻗어있으며,
회색의나무껍질은단단한섬유질로되어있어서잘부러지지않는다.잎은길이4∼10㎝이며어긋나고,
달걀모양으로깊게3갈래로갈라진다.잎표면에털은없고3개의큰맥이있다.잎의뒷면맥위에는털
이있으며가장자리에톱니가나있다.잎자루는약1.5㎝이며,7∼9월에꽃이핀다.꽃은지름6∼10㎝
쯤이며꽃자루가짧고,대개는분홍색이며꽃잎안쪽부위에서는짙은붉은색무늬가생긴다.꽃받침
은바소꼴이고작은털이있다.수술은많으며수술대는합쳐져통모양이된다.암술은1개이며암술
대는수술대를뚫고위로나온다.열매는달걀모양이며익으면5갈래로갈라진다.씨는콩팥처럼생겼
으며자흑색으로등에긴털이있다.
무궁화는새벽에꽃이피었다가오후에는오므라들기시작하고해질무렵에는꽃이떨어진다.보통작
은나무는하루에20여송이,큰나무는50여송이의꽃이피므로,꽃피는기간이100여일임을감안
하면,한해에2000∼5000여송이의꽃이피게되고,또한매일새로운꽃이연속적으로피는무궁화
특유의개화습성을지니고있다.겨울이나이른봄에도온도30℃안팎으로16시간정도빛을쬐면2주일
후부터는꽃봉오리가생겨꽃을피울수있다.또한번식은주로꺾꽂이와접붙이기등의영양번식에의
하여한다.꺾꽂이는봄과장마철은물론한여름에도모판의해가림과보습(保濕)에유의하면70%이상
활착시킬수있다.
심는시기는봄이가장좋고장마철도가능하나가을에심는것은좋지않다.물기가많은땅을좋아하고
비료는거의주지않지만봄철에주는퇴비는생육을왕성하게한다.또한조경가치가있어무궁화를가
지고수벽(樹壁)을쳐울타리를만들기도한다.식용·관상용·공업용·약용으로도쓰인다.어린순은나물로
먹고,흰꽃은민간에서그늘에말려서찹쌀과함께달여서지사제(止瀉劑)로쓰기도한다.
열매는조천자(朝天子)라하여한방에서이뇨·해혈·지혈·지사(止瀉)·위장염등에다른약재와함께처방
하여약으로쓰며,차(茶)로도만들어먹는다.특히무궁화차에는말산·타르타르산·시트르산등이함유되
어있어상쾌한신맛이있으며,두통·해열에효과가있다.
한편200여종의재배품종이있는데,배달·화랑·아사달·새아침등최근에화려한품종들이많이개발되었다.
무궁화는다른꽃나무류에비하여병이거의없는편이나생육초기에진딧물이많이끼기때문에심기를
꺼리는경향이있다.무궁화의진딧물은목화진딧물로서전년도9∼10월에무궁화가지끝에산란한것이
그이듬해봄에부화하여처녀생식을계속하여번식하다가5월중순이면채소·과수또는목화등다른곳
으로이동하므로6∼8월에는진딧물을볼수없게된다.따라서무궁화의진딧물은5월에가장심한데,다
른곳에서날아오는것이아니므로5월또는10월에한두차례구제하면진딧물걱정은없다.무궁화는소
아시아가원산지이며,인도·중국·한국(평남·강원이남)등에분포한다.
명칭의유래
무궁화의명칭은여러가지이며중국에서는목근(木槿)·순영(舜英)·순화(舜華)·훈화초(薰華草)·조개모락화
(朝開暮落花)등으로쓰였으나무궁화라는이름은보이지않는다.한국에서는한자로무궁화(無窮花)로
쓰는데이이름은<목근>이<무궁>으로변음되어생긴것으로보이며고려고종때의학자인이규보
(李奎報)가지은《동국이상국집》에목근화가무궁화로쓰인예를볼수있다.즉목근의중국식발음은
베이징관화[北京官話(북경관화)]의경우<무친(muchin)>과비슷하게소리나고,조선초기의운서(韻書)
들에의거해보면<무긴>정도로발음되었던것을알수있다.한자유입이래의한자어는초기에는중국
식발음에의거하였으나,세월이흐르면서점차한국한자음화됨으로써중국식의원음과한국한자음화한
것이병존하는시기를거쳐,결국한국한자음의음만이남게되는데,무궁화의경우<木槿>에대한한국
한자음이<목근>으로정착되는과정에상응하여중국원음역시세월이흐르는사이에<무궁>으로
변음되어이중어(二重語)를형성하게된다.중국원음의기원을가지면서한국귀화음이된<무궁>은
<無窮>이란한자어를취음함으로써처음의<木槿>과는전혀다른한자어가생겨나게된것이다.
이러한견해와는달리무궁화(無窮花)는예로부터쓰여오던고유어에한자음을따서쓰게된것이라고
주장하는견해가있다.이를뒷받침하는것으로김정상(金正祥)은논문<무궁화보(無窮花譜)>에서
1923년전라남도완도군(莞島郡)소안면(所安面)비자리(榧子里)에서는노인들이무궁화를<무우게>
라부르고있다고보고하면서무궁화라는꽃이름은<무우게>에서변한것이라고주장하였다.
또이양하(李敭河)는그의수필에서호남지방출신인친구가어렸을때부터무궁화를많이보아왔으나
그것이무궁화라는것은전혀몰랐었고<무강>나무로만알아왔음을기록한바있다.이러한사실로
보면무궁화는오래전부터한국고유의다른이름이있었으며이것이한자<無窮花>로취음되었다는
주장을뒷받침해주고있다.일본에서는<무쿠게[牟久計(모구계)]>로부르고있는데,무궁화가한국
에서일본으로전해지면서불려진것으로추측된다.
국화로서의내력
한국에일찍부터무궁화가있었다는것을전해주는가장오래된기록은동양최고의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찾아볼수있다.이책에는<군자국에는훈화초가있는데,아침에피었다가
저녁에진다(君子國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기록이있는데,훈화초는무궁화를가리킨다.
《원중기(元中記)》에서도<군자의나라는지역이천리인데,무궁화가많다(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槿
花)>라고하고있으며,《고금주(古今註)》에도비슷한기록이전한다고한다.
또한신라에서도최치원(崔致遠)이지어,효공왕(孝恭王)이당나라소종(昭宗)에게보냈다는국서(國
書)가운데한국을<근화지향(槿花之鄕;무궁화의나라)>이라하였는가하면,고려예종때에는고려를
스스로<근화향>이라자칭하였다는기록이있다.이러한기록들을종합하여보면예로부터중국인들은
<군자의나라동이(東夷)는사람들의민족성이군자답고,무궁화가아름답게피는나라>라고예찬함으
로써한국을<무궁화피는화려강산>으로인식하여왔음을알수있다.한편,조선시대광해군때의
실학자이수광이지은《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군자의나라에무궁화가많이있어꽃을피운다>
라고적고있으며,숙종때의대학자이익(李瀷)의《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무궁화에관한기록이
남아있다.그리고조선시대에과거에장원급제한사람에게임금이어사화(御賜花)를내렸는데,어사화의
장식이무궁화꽃이었다고한다.일제강점기에는일제에의해무궁화에대한날조된비난과왜곡이있었다.
그러나우호익(禹浩翊)은<무궁화예찬>이란글을통하여일제의만행과왜곡된허상을반박하고,독립의
의지와민족의자긍심을강조하였다.또한안창호(安昌浩)·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등도무궁화에
대한사랑으로민족정기를일깨우려하였다.국화(國花)로서의무궁화는,국기(國旗)나국가(國歌)같이
확실한법규정이나역사성을갖고있지는않다.그러나무궁화는3000여년전부터민족정서를대표하는
상징으로인용되었고,더욱이1948년정식채택된국가에<무궁화삼천리화려강산>이란후렴구를사용
함으로써국화로서의의미를인정받았다.또한입법·사법·행정삼부(三府)의표상으로무궁화가사용되고,
국기의봉도무궁화봉오리로제정되어무궁화는명실상부한나라꽃이되었다고할수있다.
[출처:야후백과사전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