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의 설날…
BY 모가비 ON 2. 10, 2013
그때그시절의설날~~
설날이다.형제,자매와아이들이모두해외에나가있으니오가는인척도없다.
그저막연히지내니자연옛일들이생각나서앨범을뒤지며그때를생각해보았다.
설날이되면나이를한살더먹는다는생각은떨처버린지오래다.나이란세월의
흐름에얹혀있는것이니,흐르는세월에집착하면닥아오는세월이두려워진다.
오히려지나온세월을회고하면그위에닥아오는날이투영되어그만치
세상은아직살아갈만한세상임을느낄수있다.
내가육군보병학교에서고등군사반을졸업하고전방의00부대로부임한것은1972년
1월3일이었다.『그날은눈이몹시내렸다.집을나서자뿌연하늘에짙은구름이깔리
더니망우리를넘으면서함박눈으로변해차창을때리고흩어지곤하였다.앞으로몇년
을근무해야하는부대는6시간이상을덜컹거려야도착할수있는수백리의거리다.
이렇게하여시작된나의중대장시절은1973년2월20일로마감하였다』…
(1977,1.11"전우신문"계재수기"나의지휘체험"중의서두에서)
당시군대의화두는1.21사태를지난지얼마되지않은터리온나라와전군의분위기는
멸공과새마을운동이었다.그런가운데내가부임한1군은"고한신(韓信)"장군의지휘하에
"잘먹이고,잘입히고잘재우고훈련을철저히하여강한군대만들자"라는
구호하에전투력배양에매진할즈음이었다.
그날은중대장으로취임하고한달이넘어설날을이틀앞둔어느날이었다.중대에전입병
2명이도착하여신고를받고중대장실에서차를마시며대화를나누었다.훈련기간을마친후
진짜군대생활앞에서잇는초년병들은모든것에서툴러서어딘지움추러드는모습이통상
이어서서툴기마련이다.
그러므로이들을맞이하는나는되도록이면조금긴시간을함께하면서그들이자라온
환경이나성격을파악해야되므로담배도나누어주면서환담을하고있었다.
그중의한명은고아출신이었다.일찍부모를여이고할머니손에서자랐는데그마저돌아
가시고혈혈단신이라고하였다.대화가진행될수록어려서아버님돌아가신후어머님의
어려운보살핌을받으며자라온나로서도공감을하지않을수없었다.
그래서좀더대화를나누었다
="내일모레가설날인데부모님과조부모님제사는못지내겠구나"
"군대인데..기상하면동방재배하겟습니다"
"나도편모슬하에서자랐는데고향에못간다.어쩔수없지않느냐?"
"네~~"
"아~~그게아니라나와함께중대장실에서제사지낼까?’
나는즉시중대인사계를시켜무의탁자를챙겨보라일렀다.
『무의탁자4명을데리고내가제주가되기로하였다.물론초라하였지만사과몇개와
부대의콩나물,매점의막걸리한말,오징어,북어를구입하여조그마하게제상을차려
놓고제례를지내주었다.그중의한명이눈물을흘리고있음을안타깝게보면서,제사
후남은음식은해당월의생일자들을불러함께파티를열어주었다』(1977,1.19
"전우신문"계재수기"나의지휘체험"중에서)
(1972년2월15일당시의사진은없습.이사진은그해추석에사단에서나와찍은것임)
지금생각하면조그마한사건일지는몰라도그당시더욱놀라운것은차레를지낸후채
두어시간후에사단사령부의주임상사가급히찾아왓다.언제알았는지는몰라도사단당님
(고안종훈장군)이보내신금일봉(당시에는거급2만원(대위월급이5만원±)전해왔고
연대장님도선물을보내주시었다.
이일이있은후나는설과추석명절때마다,GOP에있응떼에는해당병사를뫃아서이런
행사를치루었고,예비대로돌아와서는전중대원을대상으로합동차레식을행한계기가
되엇었다.
(1972.01.15중대장실에서)
지금도간혹신문을보거나TV보면명절에이런행사를치루는부대가소개되고또회자
되는현상을보면서내심반갑고기쁜마음이듬은사실이다.
지금은그병사들도나이가60세가훨씬넘었으리라.그리고당시중대장실에서한글을
깨우친병사들도며느리손자들과함께단란하게살고있을게라.
군대~~군대는딱딱한곳도아니고험악한곳도아니다.그곳에도보살핌이있고정이
넘치는곳이다.최소한나는그렇게지금도회고하고있다.그리고그회고가전혀부
끄럽지도않고자랑스럽지도않다.왜냐하면내가좋아서했으니까.
그러나그립다그때그시절의그병사들좋은삶과좋은가정이기를바랄뿐이다.
(1972.08월GOP의벙커앞에마련한휴계실에서..)
(1972.10월)
(197212월혹한기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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