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벌써70살이넘었다.그러고보니모교를졸업하고떠난지도50년이넘었다.그러니모교를이별한지가반백년이넘었다는말이다.그동안나이를먹었을뿐아니라,나에게는변한것이많이있다.그중에서몇가지예를들어보면,첯째로내가모국을떠나서미국에서살아온지가벌써45년이넘었으니."세월이많이변했다."둘째로는그동안에젊어서늘가꾸어오던꿈을거의이루었다는생각이든다."이만하면되었지하는마음"이다.셋째로는한국을떠나미국문화속에살면서살아가는양식이라든가생각하는사고의형태라든가하는"문화적인면에서많이변했다"고생각된다.
오랜세월속에서변한것들이많지만,내가철들기시직하여떠난,모교로부터받은정신적인자부심(Pride)는바꾸어지지않았다.언제부터인지는모르지만나는이제껏살아오는동안망서려지거니주저할일에접하거나,어려운일을성공적으로해냈거나,혼자외로울때는언제든지우리모교의교가를부르는것이나의습관이되었다.나는어디에가더라도나에게는"나는강농인"이라는것을자랑스럽게여긴다.
이십의중반을갓넘은나이로가슴을뿌듯이채우는희망을안고미국으로떠난지가50년이가까워온다.그때에나의마음속에는미국에가서좀더새로운그리고획기적인학문의이론을배워돌아와서가난한한국의사회발전에기여해보고싶은젊은꿈이있였다.그당시한국에서는대학을졸업하고도직장이없어서젊은이들이고심하는시대였다.그런데,나는용케고급공무원으로진출해서동료들이부러워했던관료직을차지하게되었었다.물론시험을보아서함격이되었다.몇몇친구들이그만하면됐지무었때문에다시미국까지가서고생하려고하느냐고말렸지만,“아니다,가야지”하는일념으로한국을떠났다.“산은넘어보아야산넘어의세상이보이는법이다.
50불을주머니에넣고떠났다.어렵사리나는나의입학을허락해준학교에서장학금도받았으니,여름방학에일을하여돈을벌면생활을충분히할수있다는승산이였다.그러나,김포공항에서비행기를타고보니슬그머니마음속에걱정이생겼다.그것은비행기속에서만난몇분의한국유학생들때문이였다.첮째로나를제외한유학생들은학교배경이나가정적인배경에서내가비교를할수없는사람들이였고.모두들서울에서소위일류고등학교를졸업한사람들이였고,그들의아버지는당시한국사회에서알려진분들이었다.나는이들과어울리기힘들다고생각하고그들을조심스럼게대해주었다.그러면서도,나의마음속에는“나는강릉농고출신이다.”라는자부심으로마음을메웠다.
미국에도착하여내가입학된학교로의.장학금을유지하기위해서는좋은학점을유지하여야하니쉬운일이아닐뿐더러일년후에는학위자격시험(Doctoralcandidatequalifyingexamination)에통과해야계속학업을할수있으니,보통의어려움이아니였다.그때대학원에동기로입학된학생들이한15명이되었다.이들중에서외국인은나와인도에서유학학생의단두사람이었고그중에서학위를성공적으로마친학생들은4명뿐이였다.밤새워도서관에서책을읽고간추리고읽은내용을비판하고종합하여내가보는나름대로의관점을뫃아서Paper를쓰느라고밤을새운후도서관을나서면교정의숲을넘어뜨는해를보던때가많았다.나는“해내었다.”라는자부심을안고교정을나설수있었으며,나는“강농인”이라는자부심을느끼며"이런것쭘이야다해낼수있다는자부심을느꼇다.
어느한해봄이었다.NorthCarolina에서뻐스를타고뉴욕으로가는길이였다.버스운전석바로뒤에자리를하고Virginia를통과하고있었다.버스는미국의동부와중부를가르는아팔라치아산맥정상을넘고있었다.버스앞을달리는한고급승용차가가고있었다,그차의뒤차창에는미국의두명문대학교스티커(Sticker)가붙어있었다.참으로부러웠다.나도앞으로자녀들을갖게되면그들도이러한학교에갈수가있으면하는생각을떠올리기도하였었다.그러한대학의이름에인상을받은것이아니라,그러한대학을들어갈수있는자질을가지고있는자녀들이부러웠다.그때도그랫지만,요즘도미국에서는명문대학을나온자녀들이대학을졸업한지10여년후에그들이차지하게되는사회계층을보면,그들의직업이나년수입이그렇지않은자녀들보다훨씬높다.
나는지난주에Atlanta에사는딸집에가서한보름머물며,둘째외손자의첯돌을보고외손자들과놀아주고돌아왔다.Atlanta에서내가사는Harrisburg까지는약1,200Km나되는먼거리다.돌아오는길은Georgia를떠나서SouthCarolina를통과하여NorthCarolina에들어오면하룻밤을여관에서쉰후아침일찌기Appalachian산맥을넘어야한다.이길이바로40여년전에뻐스를타고뉴욕으로가던바로그고속도로다.산맥의구비구비를돌아운전을하면서지나간옛날빈손의유학생으로NewYork으로가는버스에서보던그승용차가문득생각에떠올랏다.그리고는내차의BackMirror뒤를보았다.이두학교의시티커(sticker)가내차의뒷창에도붙어있었다.그때그승용차주인이어떤사람인지는모르지만,나도모르게"나도이만하면되었다"하는자부심으로대관령을상징하는우리모교의교가를부르면서Virginia주를통과하고있었다.
나는미국에살면서,친분이두터운한국분이별로없다.이유는직업상이곳정부와대학에서35년이넘게보내고은퇴를하엿고,아직도가르치고있으니,나의취향에맛는한국분들을만나기가어려운것도그하나의이유다.그때도그렇게느꼇지만나의위치에서만나는한국인들은아직도자기들이나온고등학교를중심으로만난다.그리고나는한국인들이좋아하는Golf를치지않는다.Golf장에나가면이렇게하루를보내는것보다다른일을하면생산성이더높을텐데..하는계산성이앞서기때문에취미를붙일수가없다.다른한편으로는만나는사람들과몇마디이야기를나누어보면살아오고살아가는배경의상당한이질적인차이를느끼게된다.서로의공통적인대화의기반을찾기가어렵다.나는호미로밭을매는모교의영향을받아서꾸준히일을하고무었인가생산적인일을하여야일하고살아가는즐거움을느낀다.
나는요즘도미국친구들과더속마음을비우면서얘기를나누고산다.그들과같이학교도다녔고직장생활도같이했고또가까운동네에사니까서로주고받는대화의내용이풍부할뿐더러서로들의입장을이해하기도쉽다.이렇게살다보니어느때는스스로더미국사람이된것처럼느껴지기도한다.그러나나에게그동안많은것이변하였다고하더라도,내가"강농인"(현재는강릉중앙고등학교)이라는자부심은내마음속에깊히자리잡아있고,그것을자랑으로여기며산다.언제나나는우리"강농의교가"를부르면힘이생긴다.나를다시돌아보게한다.그래서내입에서는언제나교가를담고다니는가보다.
도리켜보면,나는때로나를지탱하고어려움을도전하고극복하는“힘”은어디에서왔을까생각해본다.
그것은“나는나다.”라는자부심이었다.내가나를정의하는데는내가다녔던모교“우리강농교”를빼어놓을수가없다.한집단의응집의기본적인요소는그집단이가지고있는이념적인특성이라고한다.내가나를정의하는이념의큰부분이우리강농의교가에서왔다고느껴진다.
우리강농인들은말없이늠늠하게미래를도전하는정신이있다.대관령을닮은기상이다.대관령은높이웅장하게줄지어서있는동해의울타리로.경포대의잔잔하고아름다운호수를내려다보며늠늠히마음다지게해주는산이다.이기상을닮고배운젊은시절이었다.그래서우리는사시푸른장엄한대관령을본받아늠늠하고굳건한자태의정기를지니고있는젊은이들이었다.이러한정기를가지고자라나는새나라의일꾼들이였다.희망에부풀어동해바다돋는해로마음을끓이는젊은이들이였다.
우리는도전을무서워하지않는다.호미,낫으로마음다지고,뜨거운햇살아래에서도쉬지않고심신을단련하며자라온건아들이다.오뉴월여름한철에밭에나가서잡초를뽑아작물을가꾸고가을의수확을위해어려움을무서워하지않고미래를개척하는정신을가지고젊음을다짐한사람들이였다.이러한면에서나는한국을떠난후에내스스로쓸쓸해질때나,어려운일에부닥치거나,기쁜일이있으면언제나우리강농고의교가를부르는것이습관화되었다.누가듣거나말거나혼자마음속으로“우리강농고”교가를부른다.
뒤돌아보면,대관령을넘으면서가지고떠난젊음의꿈을이곳에서이루었다느생각이종종들때가있다.그러기에나는요즘도(비록나이를먹어가며백발을날리지만..)우리모교의교가를부르면서나자신을돌아보고꿈을세운다.
장엄하다대관령은사시프르고,
Themajesticevergreenmountains,DaegwanRyung,
경포대를굽어보는우리강농교,
LookingdownuponGyungpoDae..
새나라의일꾼들이자라나는곳,
Thisisourschool,GangnongGyo,
Wheretheworkersofthenewnationgrow.
동해바다돋는해에맘도끓는다.
TherisingsunintheEastseahotlyinvigorateourmind.
노래를부루고난후나는"언제나푸르게젊은마음으로살아야지,젊음은새로운것들을배우고뜻있는일을하는삶이지.그러니꾸준히배우고부지런히일을하며나를가꿔야겠지……."하는다짐을한다.
(교가의내용을의역하여옮겨보았습니다.)
주:철자법들이틀린것들양해해주시기를바랍니다.
-Harrisburg에서DrK.SHam(함급식)-
[사진위:쉐난도우산맥이보이는펜실배니아의들에서..아래:"아트랜타오션"의해돋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