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김

나는 디지털시계와 아날로그시계 둘 다 가지고 있다. 디지털시계는 세련되어서 좋지만 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복고풍의 멋이 깃든 건 아무래도 아날로그 쪽이다. 소리 없이 어느새 빠르게 넘어가는 분침보다는 “째깍째깍” 거리는 정적을 깨는 그 소리가 싫지 않다.

아는 이 중에 아날로그 김이라는 별명을 붙일 만한 중년의 남성이 있다. 그는 핸드폰은 사업상 갖고 다니지만 문자를 보낼 줄도 모르고 컬러링은 물론 그 초 현대판 기계속의 많은 매뉴얼을 사용하지 못한다. 딸이 아빠의 답답함을 가르쳐 보려 무수히 노력했건만 허사였다. 아날로그 방식의 무전기만한 핸드폰을 그는 오랫동안 사용했다. 그 기계의 최후 사용자 2인 중에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보니 자꾸 독촉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전화기 회사에서 공짜로 최신형으로 바꿔주겠다는 요청이 왔다. 그는 바꾸면서도 더 쓸 수 있는 걸 왜 교환하라는지 불만이 많았다.

끈질기다고 할 수 있으나 절약정신 하나만은 알아줘야 한다. 머플러는 보푸라기가 생길대로 다 생겨도 그대로 하며 신발은 빗물이 새어야 바꿔 신을 정도이다. 사무실에 컴퓨터가 없으면 안 되는 직종이라 여러 대의 컴퓨터를 두었지만 그는 완전한 컴맹이다. 어지간하면 메일은 보낼 줄은 알던데 이 사람은 오로지 누가 화면을 켜 주면 볼 줄만 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에도 상에 달린 단추를 누르거나 부르면 될 일을 직접 가서 해결한다. 지나가는 할머니의 짐이 무거워 보이면 성큼 가서는 그 크고 듬직한 목소리로 “이리 주세요” 하면서 목적지까지 택배비도 없이 배달을 한다. 타고 다니는 차도 찌그러진 조그만 봉고형의 차에 히터도 제대로 안 나와 겨울이면 추워서 떨질 않나 여름이면 에어콘도 안 나오니 다른 사람 에어콘 땜에 창문 닫을 때 그는 열어야 한다.

그를 보면서 친구들이 이름을 붙였다. ‘아름다운 청년’이라 했다. 매사에 자기를 낮추는 자세가 보이고 진솔하며 가식이 전혀 없는 몸짓과 말투까지 다 아름답다. 그의 학력이 어디까지인지 집안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그가 초등학교조차 못나왔다 하더라도 그의 인격은 높고 멋진 인간으로 보인다.

어려서 가난하다보니 배추뿌리를 먹은 적도 있단다. 그래서인지 일을 부지런히 한다. 덕분에 작은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새벽 다섯 시면 벌써 일터를 돈다. 아랫사람들이 무색할 만치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무거운 짐도 자진해서 날라다 놓는 통에 직원들이 몸 둘 바를 모른단다.

강하고 곧게 뻗은 목선, 힘이 세어 보이는 팔뚝, 지구가 무너져도 가족은 편하게 지킬 것 같은 남자. 뒷모습이 편안한 남자, 깡패가 나타나도 거침없이 해치워 버릴 것만 같은 사람. 전쟁이 나면 주변을 안심시킨 뒤에 전장 터로 곧장 갈 남자. 그가 하는 행동은 거의 아날로그적 체험에서 나온 차갑지 않은 믿음직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배여 있다.

내가 아는 한 부인은 그를 무척 믿고 따른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순수함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선 인간냄새가 난다.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행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는 빛, 소리, 전기, 목소리처럼 파장을 지니고 있는 신호체계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나 천둥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등 다 아날로그이다.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인간도 아날로그 형 인간이 더 좋다. 세련되고 매끈하며 신지식인인양 잘 난체 하는 인간들보다 편하면서 땀 냄새 풍기며 행동하는 사람이 좋다.

때아니게 복고바람이 불면서 과거의 그리운 시절을 불러일으키며 감성을 자극시킨다. 패션도 빈티지, 인테리어도 낡은 듯 해 뵈는 복고풍이 유행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나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이 기계에 의해 지배 당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미래를 그려 놓았는데 끔찍하다. 가상의 접촉이 아닌, 차가운 기계의 세상이 아닌 따뜻한 인간끼리의 접촉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어쩌면 디지털 방식을 못 따라 가는 짧은 다리의 소유자가 하는 항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애들도 디지털 형으로 변해 간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부모로서 느끼는 게 있지 싶다. 너무 삭막하다. 자기 자식이 공허하게 변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갈수록 온라인 닷컴만을 고집하는 기업보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잘 공유하는 기업(클릭 앤 모르타르 기업)이 뜬다고 한다. 권유하고픈 현상이다.

책도 전자책의 용량이 클지 몰라도 종이와 인쇄냄새 “풀풀” 나는 책이 더 좋다. 나의 경우 책 냄새에서 얼마나 많은 희열을 느끼는데 말이다. 다 읽지 못해도 쌓아 놓기만 해도 좋은 게 책 아닌가? 그렇다 해서 디지털화가 다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따뜻한 정감이 상실되고 만남이 없는 사회는 상상도 싫다. 아날로그 김과 같은 형의 인간이 많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도 배우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온기라도 유지하며 따라 가고 싶다.

생명이 느껴지는 시간들 속에서, 눈물이 날만큼 정겨운 가슴들 속에서, 그렇게 때 묻지 않은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다. 힘이 불끈 불끈 솟아나는 아날로그 김처럼.

12 Comments

  1. Beacon

    2006년 2월 16일 at 12:20 오전

    대단하신 분이네요,,
    전 전자제품은 웬만하면 최신형을 선호합니다만,,
    책만은 아직은 인쇄냄새 "풀풀" 나는,,,아날로그 책? 이 더 좋더군요,,,^^   

  2. 理解

    2006년 2월 16일 at 1:43 오전

    싸이언에서 블로거로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시는군요. ‘the life in the digital world’ ; 아날로그에 대한 칭찬이라… 뭔 얘긴진 알겠는데 좀 히포크리티컬하다.^^   

  3. Lisa♡

    2006년 2월 16일 at 9:30 오전

    Beacon님..실은 저도 전자제품은 최신형을 선호합니다.
    핸폰도 제일 최신형입니다…사람들이 너무 디지털화가 되는게 아닌지해서요.
       

  4. Lisa♡

    2006년 2월 16일 at 9:33 오전

    理解님..이해 좀 해주세요.
    그냥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랄까..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한 번쯤 느껴봄직한 거 아니겠습니까?
    잘 알면서—-방문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5. ariel

    2006년 2월 16일 at 12:09 오후

    hello lisa..^^ I can’t write in Korean from here.
    I am so happy because I can see the aqua blue ocean
    from my room and my work is going well too..

    miss my neighbour~   

  6. Lisa♡

    2006년 2월 17일 at 2:35 오전

    세상에..추카추카..진짜로 INVU다. 나는 언제쯤 그리 즐기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람 많은 오늘도 빠샤~ 아자~
    영어로 써도 해석은 되니 마음껏 메일 날리길…..후후   

  7. 백의민족

    2006년 2월 17일 at 11:19 오전

    리사양 !
    오늘 너무 좋은 글을 써주셔서 "리사양"이라고 불러봤습니다.
    낭군께서 질투하실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날로그 김이라는 분 정말 멋지고 든든하고 남성다운 분입니다.
    냉정하고, 약삭빠르고, 세련돼 보이려는 디지털시대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합니다.

       

  8. Lisa♡

    2006년 2월 17일 at 12:38 오후

    어머나..캄사캄사하옵니다.
    괜찮았어요?
    히히–칭찬받으니까 기분조오타.
    낭군님 질투안합니다.
    워낙 단련이 되어서요.
    예쁜 마누라두면 가끔
    포기할 건 해야죠. ㅋㅋ…
    저도 아날로그 김같은 남자가 캡입니다.   

  9. 거 당

    2006년 2월 18일 at 8:49 오전

    하루가 다르게 모든게 변하고 바뀌는 요즘에
    많은 분들이 본받아야 할것 같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등 새모델이 나오면 얼마 쓰지도 않고 바꿔 버리는
    젊은이 들이 많은데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위에 훌륭한 분이 계시는군요.
    좋은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10. Lisa♡

    2006년 2월 18일 at 11:40 오전

    심지 깊은 말씀 깜사합니다.
    저 자신부터 절약, 절약해야겠습니다.
       

  11. 푸른비

    2006년 2월 23일 at 3:04 오후

    아날로그 이 ?

    저도 가끔씩 이삼일간 컴을 끄고 아날로그의 시간을
    줄기곤 하지요. 독서와 음악감상, 그리고 술도 들고요^^
    너무 치열한 인터넷 세상을 벗어나는 일탈도 괜찮구요 !^^!   

  12. Lisa♡

    2006년 2월 23일 at 3:15 오후

    그럼요~ 아날로그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가끔 그런 시간 가지고 싶잖아요.
    저도 엄청 바쁠 때는 혼자 좀 여유를 갖고
    슬슬 즐기고 걷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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