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유형

1. 꼬부랑 할머니.


꼬부랑 할머니는 봄이면 나물의 씨가 마를 때까지 캐댄다. 나의 집 앞으로는 낮은 산이 있고 그 주변에 여러 나물들이 서식한다. 쑥은 물론 원추리, 냉이, 돌나물을 비롯해 깨 나물이라 부르는 식물 등 캐기 시작하면 한 보따리는 너끈히 추려온다. 그 할머니는 식전부터 나와선 해가 숨는 저녁 무렵까지 땅에 붙어 있다.

나물 캐기를 즐기는 나로선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뻑 하면 내가 캐려고 점찍어 둔 나의 영지를 점령하고 죄다 훑어가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그녀의 식단은 나물이 전부인 것처럼 종일을 투자하고는 어김없이 그 다음 날이면 반드시 땅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은 큰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그 할머니가 혼쭐이 나고 있었다. 애써 가꿔 논 아저씨의 야채들을 살짝 서리하다 들킨 것이다. 그런 예가 여러 번이 있고 보니 내 보기에도 참 얄미웠다. 나물도 다른 이들 캘 것 없이 죄다 캐버리고는 또 남이 가꿔 논 작물들을 이른 아침마다 나가서는 철가면을 썼는지 서리해대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모 생수회사의 사장 장모인데 옷이라고는 일 년에 단 두 벌.. 굉장한 절약정신으로 뭉쳐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왔다리 갔다리 하며 남의 텃밭에서 오늘도 서리할 것을 넘본다. 어지간하면 귀여울 만도 한데 도저히 그런 맘이 안 생긴다. 내 속이 좁은 건지…


2. 뽄쟁이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부르면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양산인지 우산인지 지팡이 대용인지를 지구인 땅에 꼭 짚고 의연하게 집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핑크면 핑크 컨셉으로 또는 옐로우 컨셉으로 원색의 올 패션을 즐기는 그녀다. 소문에 노인정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

화투놀이를 하는 노인정에 들어가서는 “댁들은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누? 나는 경기고녀 나왔는데..” 그랬단다. 그 뒤로 노인정에서 왕따를 당하고 말았으니 어쩐다.


연극배우처럼 화장을 하고 향수를 퍼 붓고 1000미터 뒤에서도 알아 볼 수 있게 차리고 다닌다. 나이는 80대 초반인데 정신연령은 10대이다. 한 번은 며느리한테 볼 일이 있어서 찾아 갔다가 예외 없이 문 앞에 서 있길래 “할머니, 누구엄마 계세요?” 했더니 “여기 할머니가 어딨누? 그리고 누구엄마 있고 없고를 내가 어찌 아누..” 그러는 거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찌 보면 귀여웠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화장품 회사를 경영해서인지 화장품에 집착하는 그 할머니. 그렇게 멋이란 멋은 다 온 몸에 휘감더니 작년 말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많은 옷과 화장품은 다 어쩌고 가셨는지 모를 일이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화려한 색을 뽐내며 스타인양 으시대던 할머니 생각에 빙긋 웃음이 난다.


3. 일본 할머니.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 온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와서 근 70년을 서울서 살았다. 항상 단정한 차림에 낮은 단화를 신고 비음이 섞인 목소리를 지녔다. 네 개 은행의 총재를 하신 살아있는 신화인 할아버지의 온갖 오만불손을 조용히 받아 넘긴 그녀다.


자녀들은 네 명이 다 뿔뿔이 흩어져 이태리, 미국, 일본, 호주에서 각각 헤어져 산다. 외로워 보인다. 하얀 그랜드 피아노를 사서 쇼팽을 치며 우아하게 사신다. 얼마 전부터는 악보가 안 보인다며 이제 피아노도 못 치겠단다. 언젠가 나랑 ‘부닌’의 연주회도 다녀 올만치 클라식 매니아다.


바로 윗집이라 한 번씩 마주치게 된다. 영화도 좋아해서 ‘하나비’ ‘우나기’ ‘지금 갑니다’등을 봤냐고 묻는다. 내가 봤다고 하면 영화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시는 정도이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10년 전부터 가족이 달랑 두 사람이니 사후 걱정이 되는지 나의 인도로 성당을 다닌다. 이제는 나보다 더 독실하다. 그녀처럼 늙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꿈처럼 말한다.



16 Comments

  1. Beacon

    2006년 3월 23일 at 11:43 오후

    1,2번 할머니는 우리 동네에도 계시네요,,
    1번 할머니는 내 베란다 앞에 심었던 장미까지 패 가 버리셨던,,ㅎㅎ
    2번은 수년 전 돌아가신 울 고모부를 생각케 하네요,,
    어렵던 그 시절 일본유학까지 다녀오셨던 분인데,,,
    평생을 친구하나 없이 왕따처럼 살다가신 분..
    동네 가게에 외출을 하실 때도 항상 중절모에 지팡이에 하얀 구두를 즐기셨던,,,ㅎㅎ   

  2. 맑은 아침

    2006년 3월 24일 at 1:04 오전

    리사님,
    저는 3번말고 4번을 추천합니다.
    모름지기 시험문제는 4지선다형이라야합니다.
    예전에는 수험생에게 엿을 주었는데 요즘은 포크를 준다면서요? 잘 찍어라고.

    4번이 뭐냐구요?
    한국에서 일본사람처럼 되겠다고 했다간 뼈도 못추리는 것 아시잖아요.
    그러니 4번은 멋쟁이 한국할머니지요.
    왜냐면 1과 2번이 다 어글리 한국할머니니까,
    누군가가 한국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잖아요.

    장래에 우아하고, 맘씨 착한, 멋쟁이 한국할머니, 리사님을 위하여!   

  3. Lisa♡

    2006년 3월 24일 at 4:37 오전

    맑은 아침님 저는 남이 뭐라든 별로 상관 안 하는 스탈이예요.
    일본, 한국, 미국 뭐..이런 거 사실 별로 안 따집니다.
    본 받을 만한 사람은 어느 나라건 어디서건 본 받아야죠.
    그리고 4번…있어요. 사실 그런 분 쓸까 하다가 길어 질까봐
    안 쓴 거예요. 그 할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에 눈이오나
    비가 오나 자식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걸어서 가시는데 기사까지 있는데도 꼭 걸어서
    가시는 건강한 분이랍니다.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에 말씨도 항상 따스하신 분이 있죠.
    장래에 내가 그리 될래나 모르겠어요. 저도 실은 철이 많이 없거든요.   

  4. Lisa♡

    2006년 3월 24일 at 4:40 오전

    Beacon님…1,2 번 할머니는 좀 흔한가보네.
    평생을 친구 하나없이 왕따로 사는 사람 많네.
    우리집에도 비슷한 사람있어요. 항상 그런 사람이
    집안에 한 명씩 있대요.
    중절모에 하얀 지팡이에 중절모라…하하하…우리
    친구 시아버지 아닌가? 성씨가 혹시 윤?   

  5. Obscurde

    2006년 3월 24일 at 4:49 오전

    ‘철’이라면 당연히 iron
    난 시금치가 쪼아쪼아해~ 헤헤..
    팝아이 살려 주세용~ ~ 11:44분 Zzzz…..    

  6. Lisa♡

    2006년 3월 24일 at 6:01 오전

    담에 기회가 되면 뽀빠이랑 소개를..
    근데 뽀빠이 어딨나?
    아~낮부터 자고 싶다. 어디서 잘까?
    수면방이 가까이 있으면 가서 잘텐데.   

  7. 리플러

    2006년 3월 24일 at 6:29 오전

    "경기"라고 하면 경끼하는 사람 많은 한국에서
    경기고녀라고 했으니….왕따가 당연합니다…ㅎㅎㅎ
       

  8. Lisa♡

    2006년 3월 24일 at 6:38 오전

    으헤헤헤==========^^
    우리 동네에 경기에다 서울대 나온 여자분이
    있는데요, 진짜 그 여자보면 경기들려고 해요.
    난 그런 스탈 아닌데도 그 여자는 그래요, 어쨌든…   

  9. moon뭉치

    2006년 3월 24일 at 6:39 오전

    오늘도 눈팅만 하고갑니다…

    Lisa♡님 건강조심하시고

    주말 잘보내세요…   

  10. Lisa♡

    2006년 3월 24일 at 7:38 오전

    달뭉치님–
    방문만으로도 좋아요.
    귀여운 이름.   

  11. 로사리아

    2006년 3월 24일 at 12:47 오후

    할머니 1. 2. 3.
    1번과 2번 할머니 그래도 미워할 수는 없군요. ^^

    처음 방문했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12. Lisa♡

    2006년 3월 24일 at 12:52 오후

    로사리아님 착하기도 하시지…
    특히 2번 할머니는 안 미워요.ㅎㅎ
    자주 방문해 주시렵니까?   

  13. 퓰리처

    2006년 3월 25일 at 2:49 오전

    제가 쓴 나의 8순 노모 이야기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즉 8순에 20대 처럼 사시는 할머니가 있답니다.   

  14. Lisa♡

    2006년 3월 25일 at 2:53 오전

    퓰리처님 저도 그럴꺼예요.
    그래도 괜찮겟지요?   

  15. 베드로

    2006년 3월 26일 at 11:49 오전

    하하하하… 재미 있네요. 결코 미워할수 없는 우리들의 할머니 입니다.   

  16. Lisa♡

    2006년 3월 26일 at 11:53 오전

    어마나…베드로님 그리 크게 웃으시면 깜짝 놀라잖아요…
    어서 오세요.. 그러젆아도 그 집에 가니 사고 싶은 거 있던데…
    다시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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