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6

흐린날내가 사랑하는 포트.

아버지는 밥상에 앉으시면 늘 반주로 한 잔이나 두 잔을 하셨다.

어릴 적 부터 그런 걸 보고 자라 온 나는 그다지 술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고딩 아들이 맥주를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한 병을 비워도 니가

누구 아들이냐 싶게 이해하고 귀엽게 보인다.

3명의 오빠들도 모두 술을 아주 잘 마신다.

나도 물론 아주아주 잘 마시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버지나 오빠를 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술에 취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다음날 뻗어서 비몽사몽을 헤매어도 실수를 하거나 남에게 업혀 들어오거나

비틀거리는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술을 마신다고 할랴치면 그런 자세는 필요한 것 같다.

흐린날아주 쓰임새가 좋은 티팟.

둘째 오빠는 술을 먹고두어 번 집에서 불미스런 언행을 한 적이 있었다.

모두 싫어하고 자신도 부끄러워했다.

어찌보면 별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완벽하게 술을 끊어 버렸다.

모질고 독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대단한 인내심이다.

우리가 모이면 당연히 술을 마셔도 눈하나 꿈쩍 않는다.

배도 좀 튀어 나온 걸 봤는데 어느 날 보니 배가 쏙 들어갔다.

관심증폭으로 물어보자 밤마다 학교운동장을 30바퀴씩 돌고 식사량을

줄이고 술을 끊으니 자동 얼굴이 반쪽이 되고 배는 뒷 등에 붙을 지경으로 됐다.

나는 왜? 왜? 모진 면이 없을까?

흐린날이런 마개 마음에 들어서.

아니다 싶을 때는 상대방에게 모진 말을 잘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상대가 모진 말을 하면 기분 나쁠 것이고

상처를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모진 말이란 갑자기 튀어나온다기보다는 몇 번 보아오다보니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심하게 나오는 법이다.

10명이 싫다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건 고쳐야 한다.

고치지 못한다면 혼자 있을 때나 그래야지 타인을 조금이라도 힘들게 하거나

피곤하게 하거나 지루하게 한다면 반성을 하고 한 번 더 자기진단을 해야한다.

그렇다고 아주완벽한 인간도 진땀나지만 어느 정도 헤아릴 줄 알아야겠다.

행동으로 내가 타인을 피곤하게 할 때는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문제다.

그래서 듣는 모진말은 상처가 아니라 충고라고 한다.

서설와플이 좋아.

오랫만에 동숭동에서 연극을 한 편봤다.

‘보고싶습니다’라는 작품이다.

2004년부터 해온 즐기 찬 앵콜공연인데

신파, 추억, 골목길, 헐랭이, 눈 먼 소녀, 깡패, 구멍가게…가 배경이다.

식상할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 연극이 신선했던 건

오버조차 귀여운 주인공들 때문이기도 하다.

치매걸린 검버섯의 엄마가 돈으로 접는 종이학을 본다.

엔딩에 하얀 눈이 내리며 그 눈이 종이학으로 변하기도 한다.

다 보고나니 그 연극이야말로 한 마리 종이학 같은 연극이었다.

마음의 때를 그나마 씻어낸 기분으로 돌아왔다.

서설모름지기 커피란 거품이..

연극배우들은 연봉이 20만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들다.

그 힘듦을 견디어내며 연극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가 살면서 얻는 산소같은 부분을 체험하고 사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계단이 부담스러울만치 연극인들에 대한

씁쓸한 회한이 든다.

그들이 편하게 마음놓고 연극을 하고 적당한 댓가를 지불받을 수

없는 현실이 불편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잠시 바로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연극을 자주 보는 일인데 요즘 영화도

10년만에 첫 영화관 나들이..등등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누가 연극보러 가나싶다.

다들 왜그리 사느냐 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박봉에 시달리는 월급장이들이 연극이라고 마음 놓고 보기가 쉽나?

회전에 먹구름이 낀다.

14 Comments

  1. 바위섬

    2010년 1월 27일 at 12:08 오전

    잔잔한 글… 맘이 평온해 짐을 느낍니다…

    후배 동생이 연극전공을 했는데 지금도 가난하게 살더라구요

    후배가 20여년을 그 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가정생활이 늘 궁핍하다보니
    고생하는 게 눈에 다 보이더라구요

    연극인들 보면 한편으론 그네들의 자존감 높이 사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안됐다 싶은 마음에 동정이 가곤합니다

    커피포트가 맘에 드네요^^*…
       

  2. Hansa

    2010년 1월 27일 at 1:16 오전

    술 한잔 하면 마음이 따스해지지요. 하하
    가족분들이 모두 술을 멋지게 마시는군요.

       

  3. Lisa♡

    2010년 1월 27일 at 1:17 오전

    바위섬님.

    맞죠..커피포트 마음에 들죠?

    저거저거–심혈을 기울여서 산 겁니다.

    온도도 제법 2시간 정도 가고 불에 올려도 되지만
    불에는 올리지 않고 뜨거운 커피나 티를 넣어서
    책상에 올려놓고 마시기 딱이랍니다.

    연극인들 정말 고생 많이해요.
    연극판을 그래도 떠나지 않는 걸 보면 열정이죠?   

  4. Lisa♡

    2010년 1월 27일 at 1:18 오전

    한사님.

    그런 분위기라서인지
    지나치게 마시게 되진 않더군요.
    그러니 술마시고 실수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오빠들의 경우 엄청 마시고 들어와도 양복을 곱게 접어놓고
    지갑도 반드시 꺼내놓고 단정하게 하고 자더라구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어떨땐 그대로 쓰러지거든요.   

  5. 김진아

    2010년 1월 27일 at 3:09 오전

    포트가 마음에 쏘옥 들어요. ㅎ
    불에 올려 놓기가 아까운데요.^^

    술 뒤끝의 고단함은 워나기 잘 아는지라 ㅎ
    다행히 남편은 술을 그리 좋아해도, 늘 얌전하게 마무리를 하는 사람이라
    그마저도 전 참 고맙다 생각하죠. 세녀석들도 제아빠의 그런면을 최고라고 치니
    것도 고맙구요. ^^

    연극은 아트센터에서 아이들이 보는것이 저도 처음이였어요.
    사실 마음뿐이지 굉장히 어려워요..실천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연극은….아직 먼길이네요..   

  6. 허필경느티나무

    2010년 1월 27일 at 3:26 오전

    연극이 깊은 맛이 있는데도 안 가는 것은 뭐랄까 시간이 없는 것도 한 핑계거리지만 같이 가자는 사람이 없는 탓인 것 같다. 주변에 정보가 잘 없다. 일부러 뒤져보기 전에는.    

  7. Lisa♡

    2010년 1월 27일 at 8:00 오전

    진아님.

    남편버릇 감사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술버릇이 꼭 뭘 때려부수고 그런 걸 떠나
    질질 끌고 상대방을 계속 피곤하게 하거나
    아이들 잠 다 깨우고 볼에 수염 엄청 문지르고
    그러면 아이들 울고…ㅎㅎ

    연극보는 거 힘들긴 해요.
    특히 아이들 키울 때는 더 그래요.   

  8. Lisa♡

    2010년 1월 27일 at 8:01 오전

    허필경님.

    그렇다….ㅋㅋ   

  9. 화창

    2010년 1월 27일 at 9:36 오전

    난 술을 아주 잘못 배워서 20대 초반에는 눈에 보이는 술은 무조건 마시고 (소주 8병이던 10병이던) 길에서 쭉 뻗은 적이 몇번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아마 너무 일찍 연애를 하고(프라토닉 러브) 상대방이 날 시덥게 생각하니까 그런 일이 많았었는듯?

    은행에 다니며 서을대 나온 모범적인 선배에게 인간적인 모욕조 비닌을 받고나서는 참 술마실 때 조심을 많이 합니다. 아예 회식자리에서는 잘 안마시려고 노력….

    폭설이 왔을 때 길에 쓰려져 있다가 옆집 처녀가 엎고 왔다는데 그 처녀에게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물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참 지금 내가 생각해도 슬버릇 좋은 것 같아요! 절대 비틀거리지 않고 술주정 하지 않고…. 참 기분 나쁘면 절대 술 안마시는거……
       

  10. Lisa♡

    2010년 1월 27일 at 10:28 오전

    화창님.

    좋은 버릇으로 갈아 타셨군요.
    그 처녀가 업고 왔다는…ㅋㅋ
    혹시 장미란?(비하는 아니고..)

    화창님.
    젊어서는 실수해도 다 용서가 되어요.
    한 두 번이야 그럴 수 있잖아요.
    나이가 들면서는 많이 고쳐야 할 부분이죠?   

  11. 허필경느티나무

    2010년 1월 27일 at 3:37 오후

    술이건 담배건 자신이 이길 만한 한계가 있는 듯합니다.
    두주불사 건장한 남자라도 술앞에 장사는 없더군요..   

  12. Lisa♡

    2010년 1월 27일 at 10:15 오후

    그러니까요…

    저도 많이 실감하는 나이랍니다.   

  13. 김삿갓

    2010년 1월 28일 at 11:27 오후

    아주 젋었던 시절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카페리호 에서 부산 아가씨를 만나
    같이 술 마셨다가 그만 저는 필림이 뚝… 그 아가씨는 그후로도 계속 마셨다네요.
    ㅋ 한참 나중에 또 다른 부산 아가씨 를 만났었는대 그아가씨도 레미 마틴 1병은
    거뜬이 마셔서 와 했는데 리사님도 술 잘마시는것 같은데 혹 부산의 무슨 비밀
    이 아닌지 궁금 하네요. ㅋㅎ ^________^ 좋은 시간 되세요. 구~우벅!!    

  14. Lisa♡

    2010년 1월 29일 at 1:12 오전

    ㅎㅎ…삿갓님.

    제친구들, 한방울도
    못마시는 애들 엄청 많아요.
    저야 집안 내력이지요.
    그리고 남자친구 많이 만나다보면
    못마시면 안되거든요.ㅎㅎ
    믿거나 말거나.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