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1 아나톨리아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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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떠남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짐작컨대 사는 것 자체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떠나려는 것이다…정말 먼 길을, 그리고 삶 전체의 여정을 펼치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 자체가 일종의 행군 아니던가.

J.P.S.

라고 이니셜이 찍힌 편집자의 말 중에서 와닿은 부분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5장 정도로 길게 쓰여진 편집자의 글에서 나는 벌써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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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조선일보에도 소개된 프랑스 전직 기자출신의 1938년 생 남자다.

우리나라 제주 올레길을 걷는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가 걸은 길 중에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의 1099일을 걸으며 쓴 글로

채우고 만든 책이 <나는 걷는다> 3권으로 나왔다.

나는 그 첫째 권인 1권을 이제 읽은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걷기시작한 그는 두달 간을 걸은 후 이란 국경을 35km앞두고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결국 엠블런스에 실려 이스탄불로 와 파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 후 2권에서 다시 그 자리로 와서 시작하게 되는 여정이 나와있지만 1권에서는 아쉽게도

터키에서 이란을 가기 직전의 글까지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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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발톱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낙관적인 생각을

조금씩 갉아먹었다.여기에 언어에서 오는 소외감이 더해졌다. 내가 과소평가했던 적이었다.

걸을 때는 고독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내 안에 쌓여가는 영상들, 자신과 나누는 대화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숙소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외딴 언어의 섬에 고립돼

있었다. 떠나기 전에 배운 말과 길을 가면 알게 된 말만으론 부족했다. 언어의 감옥이라는 이 넘지

못할 장벽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견디기 힘들 것이다.

베흐체트 쿠르말은 여러가지 다양한 녹색을 솜씨 좋게 조합한 스코틀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섬세한

잿빛 콧수염 또한 작고 가냘퍼서 그의 존재 자체가 마치 우주 속의 연약한 먼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금속성

광택을 내는 검고 명철한 눈에서는 예민한 지성이 엿보였다. 터키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며칠 기른 턱수염 탓에

나무랄 데 없는 옷차림이었지만 뭔가 허술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베흐체트는 은퇴한 농부였다. 일년 전,

친구의 영국인 친구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흔일곱의 그는 세익스피어의 언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그 영국인은 오지 않았지만 그는 공부를 계속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베흐체트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것 같았다. 이 마을에서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베흐체트는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낡은 신문에서 글자들을 해석하며 혼자 읽는 걸 배웠다.

그는 독서광이었다. 그에겐 내가 이스탄불을 떠난 후 어느 마을의 어느 집에서도 결코 본 적이 없는 서가가 있

었다. 그가 즐겨 읽는 책은 <돈키호테>였다…그는 볼테르,데카르트, 루소, 말브량슈(프랑스 로마 카톨릭 사제

이자 신학자)등의 작가들을 존경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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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콤포스텔라를 방문했을 때 스페인의 고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신들과 친숙해졌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상황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로 완벽한 고독, 이는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조건이다.비밀과 경계심이 너무도 많아 일부러 거리를

두는 신들은 단체 여행자들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올림포스 신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혼자인 것만으론 부족하다. 장소를 잘 택해야 하는 것이다. 대도시의 방에 혼자 있는 것은 고독이라 할

수 없다. 제단에 다가서기 위해서는무한한 공간을 골라야 한다. 나는 산을 좋아하지만 바다에서도 똑같은

광대함을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평선 외엔 아무것도 시선을 가리는 것이 없을 때 혹은 시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꼭대기를 향할 때,니르바다(열반)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이것 역시 충분하지 않다.

다른 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마지막 조건은 육체와 정신 사이의 완벽한 조화다……(중략) 정신, 그 순수한

정신은광야와 초원 혹은 산꼭대기 위로 날아오른다. 무한함 속에서 보이지도 않고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모래바다 속의 모래알이 되는 그 때, 우리를 가두고 있던 일상이라는 감옥의 창살이 순식간에 부서져버린다.

그제야 비로소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성 바울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면서 보았던

빛나는 환상을 자주 생각한다. 그는 기사였던가 혹은 카톨릭 세계의 면모를 바꾸어놓은 짐수레꾼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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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미셸 세르는 수동성은 "야만적인 것의 다른 형태" 라고 했다. 이러한 일상의 노력, 멀고 먼 목표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러나 강렬한 부추김 그리고 유익한 땀방울을 통해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어린 시절과

두려움과 고정관념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나는 사회가 얽어맨 줄을 꾾고, 안락의자와 편한 침대를 외면한다.

행동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걸으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몽상하기란 쉽지만, 걸으면서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날아오르는 독수리, 흘러가는 구름, 도망치는 산토끼, 엉뚱하게 마주치게 되는 교차로, 이름

모를 꽃의 진한 향기, 목동의 외침 혹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의 흰물결, 이렇듯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모든 것

들이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 걷는 이는 수많은 사소한 사건들에 이끌려 명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로 되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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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

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기

도 하는데, 여정에서 친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순례자나 대상들이

나보다 유리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저녁이 되면, 그들은 도보여행자들과 자신들의 신앙, 피로 그리고

각자 발견한 것들을 서로 나누곤 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느끼고 감탄한 점들을 서로 교환하며 하룻동안

의 일과 생각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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