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단편집을 처음 접한 것을 뒤로하고 이번에 장편소설을 통해 작가를 다시 만났다.
처음 접한 작품이 SF를 다룬 소설집이었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커짐을 느끼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느낌이 참 좋다.
가끔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나와, 만일 타임슬립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어느 시대, 어떤 장소, 누구로 경험해보고 싶은가 하는 질문들을 던지고, 각 개인들마다 내놓는 기발한 답들은 나도 모르게 현실에선 비록 어렵지만 공상적으로나마 상상을 해보곤 하던 시간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게 했다.
아인슈타인은 머지않아 인간이 시간을 정복할 날이 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그렇다면 과연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의 어느 시대로 가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측한 이론의 근거들에 비추어보면 가상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과학의 발달로 인한 앞날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방송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치를 이용한 극들을 보고 있노라면 허구지만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배경은 1976년 6월 9일이다.
이날은 흑인 여성 다나의 생일이자 약혼자인 케빈과 새로 살 집에 이삿짐을 정리하게 되면서 시작이 된다.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는 다나, 깨어나보니 케빈과 새 집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 숲 속에 자신이 있다.
이 곳은 1815년 메릴랜드 주의 숲. 왜 자신이 이상한 과거의 장소로 와 있는지도 깨닫기도 전에 호수에 빠진 한 소년을 보게 되고 본능적으로 그 소년을 구하게 된 다나, 하지만 소년의 엄마는 흑인이 자신의 아들을 구한 사실을 알고 경악을 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 이동은 순간적으로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인 1970년대와 과거 백인이 소위 말하는 흑인 노예를 다루던 시대를 오가며 겪게 되는 일들을 다나란 여인을 통해 보여주는데, 다나란 흑인 여성이 처한 당시 1815년의 시대를 살아갈 때는 오로지 그 당시에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대적인 의식 속에 살아가는 현재의 흑인 여성 다나는 노예를 하나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백인들의 시선에서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도망 다니다 잡혀오면서 매 맞고 다시 노예의 생활을 하는 다나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뿌리와 인종적인 차별, 그 안에서도 힘없는 여성이란 존재가 지닌 연약함을 무방비로 강간하고 이용가치가 없을 시에 다시 팔아버리는 행위를 하는 백인들의 행동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 케이블에서 방영한 뿌리 4부작이 생각났다.
아주 어릴 적 보았던 알렉스 헤일리란 작가의 뿌리는 무척 길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방영된 것은 진액만 뽑아서 만든 것인지 좀 짧다는 아쉬움을 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쿤타킨테의 딸이 주인집 딸의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장난감이란 존재로서 동거하다 끝내는 팔려가고 팔려간 백인 주인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아이를 낳는 장면들, 백인 감독관들의 무차별적인 흑인 노예를 길들이거나 총살하는 장면들은 흑인의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과 울분, 통탄을 다시 느끼게 해 준 드라마였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의 전개를 보면 여성의 필치답게 흑인 여성인 다나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인종과 노예란 제도, 특히 젠더란 문제를 공상이란 장치를 이용해 결합해서 시도한 점들이 상당히 어색하지 않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공상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이미 과거의 결과물을 알고 있는 주인공이 위험에 닥쳤을 때 어떤 행동을 하면 위기를 모면한다는 식의 모험극이 아닌 인간이 이룬 사회란 토대 위에서 벌어졌던 각 역사 속의 인식 문제를 소설이란 장치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줬단 인상이 기억에 남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 속에서 나오는 힘없이 당하고 사는 흑인들의 삶은 저자 자신들의 조상의 일들을 그린 것이었고, 지금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종 용광로란 이름을 달고 사는 미국이란 나라의 독특한 정치와 인종들 간의 불화는 이미 일찍이 이런 점을 느끼고 있었던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 보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속도감이 좋게 읽힌다.
이 말은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심을 증폭시키는 저자의 구상력과 필치, 그리고 소설이라고는 하나 인간 사회에서 벌어진 인류학적인 문제점과 사회적으로 바르지 못한 처사에 대한 일들을 풀어낸 저자의 역작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신분차별이 있던 시대가 있었던 만큼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도 생각나게 만든 작품, SF계의 ‘그랜드 데임’이란 이름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윈제인 KINDRED를 한국식으로 드러내 책 제목으로 삼았으면 훨씬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