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그 가슴아린 흔적들

지난토요일,아무도살고있지않은시골집을다녀왔습니다.

1977년여름,시골부엌을캔버스에옮긴것입니다.(유화,60호F)

痕1…돌담장

돌담장엔사립문이제격이다.그런데어느날,돌담장이헐린자리에시멘트블록담장이들어섰다.

투박한돌담장위이엉으로기어오른박넝쿨도사라졌다.

시멘트블록담장위엔이엉대신살벌하게도깨진농약병파편을꽂아마감했다.

이렇게하는것이당시로선최고의집단장이었다.

그시멘트블록담장은온데간데없고다만하단부에바스라진블록몇장이

잡초속에묻혀있어담장자리였다는걸짐작케할뿐이다.

痕2…사립문

시멘트블록담장엔역시철대문이어울린다고생각하셨던것같다.

철대문을매달기위해콘크리트문설주가세워졌다.

양생이되자,곧읍내철공소에서철문짝이실려왔고기술자는시꺼먼보안경을끼고선새파란불꽃을튕겨댔다.

사립문은이내둔탁한철대문에게자리를내주고만것이다.
그렇게들어선철대문은늘쇠막대빗장으로굳게잠궈져있었을뿐대문으로서의역할은별로였다.

다만대문한쪽에쪽문을매달아사람은쉽게드나들수있도록했다.

철문의상단부분장식은철공소기술자가나름대로손재주를부려아기자기하게한껏모양도냈다.
결코외부와의단절혹은방범용담장이나철문은아니었다고본다.
일꾼을두어새경을줄정도로농사가조금되다보니어느정도과시(?)용이아니었나싶기도하다.

그초록색페인트가칠해진철대문의여닫이기능은이제명을다했다.

쇠막대빗장마저도제역할을못해양문의손잡이를전선으로칭칭동여매놓아기둥에겨우기대서있다.

녹이슬어연탄재마냥손만대도부스러져내린다.

痕3…농기구(탈곡기,풍구)

처마밑탈곡기와풍구를보니벼를훑고쭉정이를날리던그시절풍경이그립게다가온다.
탈곡기는나무원통에강한철사를빗살처럼박아세워만든나락훑는농기구다.
풍구는바람을일으켜곡물에섞인쭉정이나먼지등을날려보내는농기구로큰북처럼생긴통속에

날개차를달아놓고,기어가물린손잡이를돌리면서이곳에곡식을부으면겉껍질이나

검부러기들은바람에날려배풍구로빠져나가고낟알만아래로떨어진다.
눈을지그시감으니타임머신을타고그때그시절어느가을날로돌아와있다.
탈곡기돌아가는소리와함께풍구바람에옷속으로날아든검부러기로온몸이깔끄러운느낌도맛보았다.

반질거리던탈곡기발판도,손때묻어윤기나던풍구의손잡이도금이가고뒤틀린채

처마밑에서호시절을그리워하고있었다.

痕4…곡간

곡간문은양팔벌린길이에한뼘정도폭의송판열개로이루어져있다.

문설주에홈을만들어맨위에서한판씩끼워아래로내리도록되어있다.

곡간에쌓인나락높이만큼문짝송판을끼운다.
맨아래판에서부터위로순서대로붓으로큼지막하게써놓은壹貳參四五六七八九十字가퇴색되어희미하다.

나락을넣어두는곡간은맨바닥이다.그해벼농사가풍년이면十자가적힌맨위송판까지채워진다.

그렇지않고흉년이들어수확이신통치않을때는六번판까지만끼워지기도했다.

순서잃고뒤죽박죽끼워진문짝판너머로고개를밀어넣어곡간을들여다보았으나

워낙이나락맛본지오래인지라퀘퀘한먼지냄새만흩날릴뿐이다.

痕5…들마루

시골집은집주인의온기가사라지면거짓말처럼무너져내린다.
바깥채처마에공들여만들어붙인툇마루는동네아주머니들의쉼터이자입방아공장이기도했다.

툇마루옆에들마루도놓여있어열댓명이모여앉아도비좁지않았다.

뉘집아들은서울서크게성공했다더라,윗마을사는김씨는대처에나가공장일하는딸이보내온돈으로

논두마지기를더샀다더라등등…

이처럼마루는동네通文장소이기도했다.
불과몇년전까지만해도들마루를지키시던어머니가계셔따뜻했는데…

어머니가하시던대로손바닥으로마루바닥을쓸어보았다.몹시도그립다.

당뇨로실명하여십수년을힘겹게보내시다영면하신어머니는생전에들마루에앉아계시다가

조그만인기척에도금새자식임을눈치채고선마루바닥을손으로쓰윽문지른뒤허리춤을잡아끌어앉히곤하셨다.

수십년물걸레질로먹자두빛처럼까무잡잡하게윤기나던마루바닥은까실까실거칠어진데다가

군데군데빗물이먹어내려앉아흉물스럽게변해있다.

痕6…저장고

여느시골집들과는달리지하에사과저장창고가있다.
당시사과품종인국광은가을에수확해이듬해초봄까지지하창고에보관했다가내놓아도말짱할정도로

저장력이뛰어났다.그러다보니저장고에보관했다가설대목에내놓으면사과값을두배로도받을수있었으니

지하저장창고가필수였던것이다.

지금처럼포크레인이나덤프트럭이동원된다면이정도쯤만들기는식은죽먹기였겠으나당시사정은그렇질못했다.
여러날동안인부들을동원해삽질로땅을파내려갔다.

한명은삽자루를잡고두명은삽날양쪽에매단줄을구령에맞춰당기는,이른바3인1조의특수삽질이다.
20평정도를3미터이상파내려간뒤큰돌을쌓아올려사방벽과환기구를만들고

그위는편평하게철근을넣어콘크리트지붕을덮었다.도면없는주먹구구식지하창고는이렇게탄생한것이다.

동네에사과농사를짓는집이몇집더되었으나번듯한지하저장고를둔집은없었다.
수확한사과를나무상자에담아창고로옮겨차곡차곡쌓아올릴때가계절상이맘때쯤이다.

공간이남아이웃집들의사과도함께보관해주는배려도잊지않으셨다.

지하로통하는계단을밟고내려서자거미줄이얼굴에휘감긴다.

발목까지잠길만큼의물이고여있는어두컴컴한창고안은을씨년스럽기만하다.
한겨울밤지하창고문을열고들어가사과몇알을꺼내온가족이아랫목에모여앉아나눠먹곤했었는데…
명치끝이아려온다.

痕7…왔다감?

庫房문옆흰회벽면에별난방문기록이남아있다.
딸아이가96년,97년경시골할머니댁에들릴때마다할머니가앉아계시던들마루옆벽에붙어서서

연필로깨알처럼써놓은시골방문기록이다.

특종1,2,3이라제목을붙여다녀간날짜까지꼼꼼하게기록해놓았다.

안마당의하늘을다가려버릴정도로훤칠하게자란목련나무사이로어머니의환청이또렷하게들려온다.

"인혜애미야,오늘은또갸가뭐라꼬써놨는지쪼매읽어다고~"

가을비한번이면다떨어져버릴손바닥만한목련잎은아직도미련이남은듯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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