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자기의 고향 아리타(有田)

도잔진자(陶山神社)에모셔놓은도조이삼평도자기상

8,도자기의고향아리타(有田)

일본후쿠오카(福岡)에살고있는아들네집에다니러갔다가때마침아리타(有田)에서도자기축제를한다기에구경을나섰다.아리타는일본도자기의본고장으로그시조가바로임진왜란때끌려간조선도공이삼평(李參平)이었다.

일본도자기의세가지흐름은사쓰마(薩摩)도예와가라쓰(唐津)도예,아리타(有田)도예이다.이세가지도예양식은각각다른전통으로이어져오고있지만그들은모두임진왜란때끌려간조선도공들에의해이룩된것이라는공통점이있다.

그중에서도일본도자기를대표하는아리타는임진왜란때충청도공주에서끌려간이삼평등조선도공들이정착하여가마를열고자기를굽기시작한곳이다.이삼평은이즈미산(泉山)에서백자광을발견하고가마를지어서정착했는데,그가바로세계적명품인아리타야키(有田燒)의시조이다.

이곳에가마를연이삼평은표면이거친도자기를매끈하게개량했는데이것은일본도자기의획기적인발전이었다.초기에는조선문양을그대로사용하다가나중에가키에몽등세가지양식으로발전했는데이로써일본을대표하는도자기의지위를굳히게되었다.

이삼평을일본으로끌고간영주나베시마나오시게(鍋島直茂)는도자기만드는방법이외부로알려지지않도록하면서발전시켜온아리타도자기는대대로일본왕실에공급되어왔을뿐만아니라이마리(伊萬里)항구를통해서전일본으로팔려나갔다.

그리고아리타도자기는나가사키의데지마(出島)에서네덜란드로수출되어유럽의왕실과귀족들의환영을받았다.그리하여처음수출이시작된1,653년부터에도말기까지유럽으로수출한도자기가무려2백만점에이르렀다니얼마나많은가.

도조(陶祖)인이삼평을모시는도잔진자(陶山神社)는아리타마을이내려다보이는산중턱에있었다.입구에는백자로만든대형도리이와고마이누(고려에서온개’라는의미로신성한동물로전해지고있다)상과대형물독이있는아담한신사에는흰두루마기를입은이삼평도조의도자기좌상을모셔놓았다.

신사뒤편산정상에는’陶祖李參平碑(도조이삼평비)’라새겨놓은기념비가우뚝서있었다.아리타는도자기창업연대를1,616년이라보고창업300주년을맞은1,916년도잔진자뒤편언덕에도조이삼평의비를세워서그공적을기린것이다.

도잔진자에서오른쪽으로내려오는길목에는도자기로만든이삼평비문과도산시비가서있었다.비문에는이삼평의일대기가적혀있고,도산시비에는1918년니시마츠우라(西松浦)군수가지었다는시’도산(陶山)‘이새겨져있는데이삼평비에서내려다본아리타마을의아름다움과아리타도자기의명성을노래한것이었다.

눈아래집들이즐비하게보이고

도자기굽는연기가발아래서올라온다.

솔바람이그것을떨어뜨리듯이

이삼평도조가도산을평정했다.

[眼底家如櫛,窯煙起脚間,松風自

落事,李祖鎭陶山]

1,959년어느날시라카와공동묘지에서월창정거사(月窓亭居士)라는묘비가발견되었는데그것이바로이삼평의호라는사실이확인되자마을의사적으로지정했다.‘창에달빛이비치는정자에서고향을그리면서살아가는거사’라는그의호는애절함마저느끼게한다.

이곳사람들은아리타도자기의역사와명성을자랑하고자1,990년에도자기공원인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를조성했다.공원중앙에는독일드레스덴Dresden에있는츠빙거(Zwinger)궁전을모방한아리타도자기갤러리를짓고,거기에다각종도자기를전시하여이곳을찾는사람들이관람할수있도록해놓은것이도자기의고향답게참으로좋았다.

아리타도자기축제는도조인이삼평의기일을기해서해마다4월29일부터5월5일까지열리는데그역사가100년도넘는다니대단했다.더구나이기간이일본의황금연휴여서해마다100만여명이찾아와서30억엔(약300억원)의매출을올린다고하니얼마나놀라운가.이일주일간의매출로일년을산다고해도과언이아니라니말이다.

아리타는인구2만명에불과한작은마을이지만도자기가마가200개나되고도자기상점이650개나된다니참으로놀랍다.도자기는100엔짜리로부터몇억엔짜리까지무려3만점이나전시되어있다니어쩌면이작은마을에서그처럼다양한도자기를생산할수있을까.

도조이삼평의14대손인가나가에쇼헤이(金ガ江省平)의상점은아리타의중심거리에서외진곳에있었다.그는한국에서온나를반갑게맞으며그의작품들을하나하나소개해주었다.

그는조상이일본으로귀화할때성은고향인금강을따서가나가에(金ガ江)로하고삼평은일본발음대로산베이(三兵衛)로했다고하면서오랫동안일본에살다보니어쩔수가없었노라고한다.

그랬을것이다.임진왜란때끌려가남의나라에서400여년을살아가는그들의고충이야어찌다말로서표현하겠는가.그래도고향을잊지않으려고성(姓)으로삼았다니눈물겨운일이다.

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간그들은고향이얼마나그리웠을까.하지만돌아갈수가없으니고향이그리우면물레를돌리면서눈물과한숨으로도자기를빚었으리라.그리하여그의피와땀과눈물의결정이아리타도자기가되었으리라.

1,990년대에한국을처음찾은이삼평의13대손인가나가에산베이(金ガ江三兵衛)는공주에세워진할아버지의비석앞에서하염없이울고나서야고국에대한400년한을풀수있었다고했으니말이다.

일본교토국립박물관이소장하고있는찻사발에는’개가멀리서울부짖는소리가들려온다.그리운고향으로돌아가고싶다’라는한글이새겨져있다고한다.그그릇은야마구치(山口)현하기(萩)에서17세기에만들어진것인데일본으로끌려간그도공은고향이얼마나그리웠으면도자기에다망향의글을새겨놓았을까.

일본도자기의고향인아리타에가보니그곳도공들의고향이바로조선의공주였으니,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가망향의한을눈물로달래면서도자기를만들던조선도공들의모습이눈에선하다.[2008.한국휴머니즘문인연합]

*

교토국립박물관에소장되어있던한글다완은기증자후지이다카아키(藤井孝昭)

*

님유족의뜻에따라2008년7월우리나라국립중앙박물관에기증해왔다.

도잔진자(陶山神社)입구

도잔진자(陶山神社)

이삼평도자기상

도조이삼평비1

이삼평비에서내려다본아리타

도산시비

도조이삼평비안내문

이삼평묘

이삼평요

도조이삼평의14대손인가나가에쇼헤이(金ガ江省平)

그의작품들

한글이새겨진도자기

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

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아리타도자기갤러리

18세기도자기

도자기전시품

도잔진자(陶山神社)에모셔놓은도조이삼평도자기상

8,도자기의고향아리타(有田)

일본후쿠오카(福岡)에살고있는아들네집에다니러갔다가때마침아리타(有田)에서도자기축제를한다기에구경을나섰다.아리타는일본도자기의본고장으로그시조가바로임진왜란때끌려간조선도공이삼평(李參平)이었다.

일본도자기의세가지흐름은사쓰마(薩摩)도예와가라쓰(唐津)도예,아리타(有田)도예이다.이세가지도예양식은각각다른전통으로이어져오고있지만그들은모두임진왜란때끌려간조선도공들에의해이룩된것이라는공통점이있다.

그중에서도일본도자기를대표하는아리타는임진왜란때충청도공주에서끌려간이삼평등조선도공들이정착하여가마를열고자기를굽기시작한곳이다.이삼평은이즈미산(泉山)에서백자광을발견하고가마를지어서정착했는데,그가바로세계적명품인아리타야키(有田燒)의시조이다.

이곳에가마를연이삼평은표면이거친도자기를매끈하게개량했는데이것은일본도자기의획기적인발전이었다.초기에는조선문양을그대로사용하다가나중에가키에몽등세가지양식으로발전했는데이로써일본을대표하는도자기의지위를굳히게되었다.

이삼평을일본으로끌고간영주나베시마나오시게(鍋島直茂)는도자기만드는방법이외부로알려지지않도록하면서발전시켜온아리타도자기는대대로일본왕실에공급되어왔을뿐만아니라이마리(伊萬里)항구를통해서전일본으로팔려나갔다.

그리고아리타도자기는나가사키의데지마(出島)에서네덜란드로수출되어유럽의왕실과귀족들의환영을받았다.그리하여처음수출이시작된1,653년부터에도말기까지유럽으로수출한도자기가무려2백만점에이르렀다니얼마나많은가.

도조(陶祖)인이삼평을모시는도잔진자(陶山神社)는아리타마을이내려다보이는산중턱에있었다.입구에는백자로만든대형도리이와고마이누(고려에서온개’라는의미로신성한동물로전해지고있다)상과대형물독이있는아담한신사에는흰두루마기를입은이삼평도조의도자기좌상을모셔놓았다.

신사뒤편산정상에는’陶祖李參平碑(도조이삼평비)’라새겨놓은기념비가우뚝서있었다.아리타는도자기창업연대를1,616년이라보고창업300주년을맞은1,916년도잔진자뒤편언덕에도조이삼평의비를세워서그공적을기린것이다.

도잔진자에서오른쪽으로내려오는길목에는도자기로만든이삼평비문과도산시비가서있었다.비문에는이삼평의일대기가적혀있고,도산시비에는1918년니시마츠우라(西松浦)군수가지었다는시’도산(陶山)‘이새겨져있는데이삼평비에서내려다본아리타마을의아름다움과아리타도자기의명성을노래한것이었다.

눈아래집들이즐비하게보이고

도자기굽는연기가발아래서올라온다.

솔바람이그것을떨어뜨리듯이

이삼평도조가도산을평정했다.

[眼底家如櫛,窯煙起脚間,松風自

落事,李祖鎭陶山]

1,959년어느날시라카와공동묘지에서월창정거사(月窓亭居士)라는묘비가발견되었는데그것이바로이삼평의호라는사실이확인되자마을의사적으로지정했다.‘창에달빛이비치는정자에서고향을그리면서살아가는거사’라는그의호는애절함마저느끼게한다.

이곳사람들은아리타도자기의역사와명성을자랑하고자1,990년에도자기공원인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를조성했다.공원중앙에는독일드레스덴Dresden에있는츠빙거(Zwinger)궁전을모방한아리타도자기갤러리를짓고,거기에다각종도자기를전시하여이곳을찾는사람들이관람할수있도록해놓은것이도자기의고향답게참으로좋았다.

아리타도자기축제는도조인이삼평의기일을기해서해마다4월29일부터5월5일까지열리는데그역사가100년도넘는다니대단했다.더구나이기간이일본의황금연휴여서해마다100만여명이찾아와서30억엔(약300억원)의매출을올린다고하니얼마나놀라운가.이일주일간의매출로일년을산다고해도과언이아니라니말이다.

아리타는인구2만명에불과한작은마을이지만도자기가마가200개나되고도자기상점이650개나된다니참으로놀랍다.도자기는100엔짜리로부터몇억엔짜리까지무려3만점이나전시되어있다니어쩌면이작은마을에서그처럼다양한도자기를생산할수있을까.

도조이삼평의14대손인가나가에쇼헤이(金ガ江省平)의상점은아리타의중심거리에서외진곳에있었다.그는한국에서온나를반갑게맞으며그의작품들을하나하나소개해주었다.

그는조상이일본으로귀화할때성은고향인금강을따서가나가에(金ガ江)로하고삼평은일본발음대로산베이(三兵衛)로했다고하면서오랫동안일본에살다보니어쩔수가없었노라고한다.

그랬을것이다.임진왜란때끌려가남의나라에서400여년을살아가는그들의고충이야어찌다말로서표현하겠는가.그래도고향을잊지않으려고성(姓)으로삼았다니눈물겨운일이다.

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간그들은고향이얼마나그리웠을까.하지만돌아갈수가없으니고향이그리우면물레를돌리면서눈물과한숨으로도자기를빚었으리라.그리하여그의피와땀과눈물의결정이아리타도자기가되었으리라.

1,990년대에한국을처음찾은이삼평의13대손인가나가에산베이(金ガ江三兵衛)는공주에세워진할아버지의비석앞에서하염없이울고나서야고국에대한400년한을풀수있었다고했으니말이다.

일본교토국립박물관이소장하고있는찻사발에는’개가멀리서울부짖는소리가들려온다.그리운고향으로돌아가고싶다’라는한글이새겨져있다고한다.그그릇은야마구치(山口)현하기(萩)에서17세기에만들어진것인데일본으로끌려간그도공은고향이얼마나그리웠으면도자기에다망향의글을새겨놓았을까.

일본도자기의고향인아리타에가보니그곳도공들의고향이바로조선의공주였으니,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가망향의한을눈물로달래면서도자기를만들던조선도공들의모습이눈에선하다.[2008.한국휴머니즘문인연합]

*

교토국립박물관에소장되어있던한글다완은기증자후지이다카아키(藤井孝昭)

*

님유족의뜻에따라2008년7월우리나라국립중앙박물관에기증해왔다.

도잔진자(陶山神社)입구

도잔진자(陶山神社)

이삼평도자기상

도조이삼평비1

이삼평비에서내려다본아리타

도산시비

도조이삼평비안내문

이삼평묘

이삼평요

도조이삼평의14대손인가나가에쇼헤이(金ガ江省平)

그의작품들

한글이새겨진도자기

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

아리타포셀린파크(AritaPocelainPark)아리타도자기갤러리

18세기도자기

도자기전시품

2 Comments

  1. 우듸

    2015년 7월 6일 at 1:42 오전

    지금보면이삼평도공이고향을그리워했을거라고막연히생각할수도있겠지만.한국서는천대받는공인으로살다가일본가서극진한대접받고하고싶은도자기공예를하면서살았던것이개인적으로는훨씬좋았을것같기도합니다.   

  2. 김준영

    2015년 7월 6일 at 7:59 오전

    이제라도늦지않으니우리는문과를개취급하고기술자를우대하는정신을가져야합니다.대한민국은기술자와과학자그리고기업가의나라가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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