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로 소통하던…
바쁜농사철,술심부름하느라드나들던신작로옆주막집이있었다.
겨울철농한기가되면주막집은동네어르신들차지이다.
오후햇살에한기가덜해지면한분두분주막집으로걸음하신다.
"냉큼달려가아버지모셔오니라"하신다.
또래아이들과함께무시로방죽저너머주막집으로달려가곤했다.
주막집토담너머로스미는막걸리내음에
콧구멍을벌름거려가며달콤쌉쌀한맛을취하는것도,
이따금주모의걸쭉한입담을엿듣는재미도,
‘번지없는주막’으로시작해‘나그네설움’으로이어지는
어르신들의구성진노랫가락도,
더하여상모서리를두드리는젓가락장단까지도,
빙판에서’시게토’타고노는재미보다훨씬쏠쏠했으니.
아이들이안스러워주모는부엌안으로불러들여
방안어른몰래막걸리한모금씩을돌리곤했다.
술맛을알턱없는나이에어른흉내내느라꿀꺽꿀꺽단숨에들이키다가
취기가올라헤롱대던그때가60년대말쯤으로기억된다.
함께일찌감치시작됐다.
과수원일손이바빠질때면앞마당한켠을파고묻은
술독엔늘술이넘쳐났다.
매일술도가에서한말짜리술통2개를자전거에매달고와
빈만큼채워놓고가곤했기때문이다.
학교를파하면과수원일을거들기도했는데새참때가되면
술심부름은내차지였다.
응달에묻어둔술독을열어주전자를가득채운다음
밭으로가지고나간다.
일꾼들은커다란대접에넘치도록부어마신뒤
포기김치쭉찢어입에넣고선트림한번훑고서
풍년초한모금말아태우고는다시일을손에잡는다.
일꾼들은‘막걸리한잔은끼니’라며중학생인내게도
한사발따라주기도했다.
사실은주전자에퍼담으며이미조롱박으로슬쩍두어모금
들이킨터라얼얼했지만마다않고곧잘받아마시곤했다.
지금생각해보니그때부터이미조금씩술에길들여졌던게아닌가싶다.
텁텁했지만알싸한느낌으로지금껏기억되니말이다.
이렇게야금야금입을댄막걸리는대학시절에이르러제대로숙성됐다.
축제나써클모임엔으레막걸리가등장했고캠퍼스는
암울했던70~80년대,대학가주변에늘어선학사주점들은
젊음의해방구이기도했다.
막걸리와파전,두부김치를놓고선후배,동료들과둘러앉아
낭만을노래하다가도시대정신을토로하며답답한세상을안주삼아
막걸리로쌓인울분을털어내곤했다.
80년대중반만해도퇴근하면누가먼저랄것도없이
발걸음은선술집이몰려있던을지로뒷골목으로향했다.
6월항쟁을전후하여을지로통은온통최루가스로범벅일때가많아
비닐봉지와치약을휴대하기도했었다.
뿌연최루가스만큼이나한치앞을종잡을수없던시절,
막걸리를앞에놓고모여앉아이선희의‘J에게’를들으며
‘J’를안주삼았고설운도의‘잃어버린삼십년’을들으며
이산가족상봉장면에눈물을훔치기도했다.
그래서다닥다닥붙은뒷골목선술집은언제나북적거렸다.
웬생뚱맞게막걸리타령이냐할지모르겠으나
막걸리가그리워서라기보다막걸리와함께한세월,사람들,
그리고함께울고웃던소통이그리워서이다.
요즘퇴근풍경은한마디로가뭄에갈라진논바닥처럼삭막하다.
회사문을나서면대개이어폰을끼고손바닥안화면에몰두한다.
남에게피해를주지도않지만남이터치해오는것도싫어한다.
사전에공지가안된즉석회식제의는자칫
개인시간침해로눈총을받을수있다.
7080의막걸리문화를어쩌면‘웃기는짬뽕’이라할지는몰라도
막걸리집에서젓가락장단맞춰가며목청컷노래하며모임을갖던시절,
낯모르는옆팀과도때로는분위기에휩쓸려함께
막걸리잔을치켜들던,그시절이새삼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