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고야성(名護屋城) 박물관
BY sanhasa ON 7. 5, 2015
나고야성터
나고야성박물관
7나고야성(名護屋城)박물관
나고야성터부근에있는나고야성박물관은조선반도와일본열도의‘교류의역사’를전시하고있다고했다.그래서인지박물관입구에는우리나라의돌하르방과장승한쌍이서서고국에서온길손을맞이한다.이박물관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대한역사를조명하고있어서관심을끌었다.
나고야성박물관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文祿/慶長의役,1592-1598)을침략전쟁으로자리매김하고그반성위에서일본열도와한반도와의긴교류의역사를되돌아보며,앞으로쌍방의교류와우호추진거점이될것을목표로1993년10월30일에개관한것이라고한다.
박물관안내서처럼이박물관은특별사적인나고야성터와진영터의조사,보존,활용과일본열도와한반도의교류사에관한자료를수집하여보관하고조사하여전시하며외국과교류사연구를주제로하는국제학술문화교류사업을목적으로하고있다고한다.
이러한토대위에이박물관은한국의문화소개와한국어강좌,한・일간의교류및우호촉진을위한한・일교류센터를개설하는등새로운일을추진하고있다고한다.
이박물관은나고야성이전,역사속의나고야성,나고야성이후로구분하여자료를전시하고있었다.
나고야성이전에는조선과일본에서출토된구석기시대의토기를비교전시하는원시시대부터중세까지한반도에서일본열도에문화전래과정의사료를전시하고있었다.
역사속의나고야성은도요토미히데요시에의해일어난임직왜란과정유재란에관한전시와모모야마(桃山)문화를소개하고있었다.
거기에는나고야성도병풍,다이묘의진영배치도,일본군선인아타케부네(安宅船),이순신장군의초상화와거북선,조선군지도병풍등7년동안에걸쳐서싸웠던전쟁의역사의잔영들이전시되어있었다.
나고야성이후에는에도시대조선통신사의왕래와근대까지한반도와일본열도의관계자료를전시하고있고특별사적인나고야성터및진영터에는나고야성터및다이묘진영터들의발굴유물을전시하고있었다.
그런데임진왜란을일으킨도요토미히데요시의초상화와그의편지,전란때명성을날리던거북선과함께일본군함을나란히전시해놓은것도돋보였지만한국과일본의역사교과서를원문과함께상대방국어로번역해놓은것이관심을끌었다.시간이있으면두나라역사교과서를하나하나읽어보면서비교해보고싶었지만시간이없어서그를수없는것이안타깝다.
나는오늘참으로놀라운역사의현장을보았다.나고야성터와박물관을돌아보면서이곳이바로임진왜란을일으킨본거지임을확인했다.그런데400여년의세월이흘러버린지금은성은비록폐허되어버렸지만역사는그대로전해지고있었다.
나고야성터부근에는성을쌓을때부족했던물을공급하기위해서만든자수지가지금도남아있고,성기슭에는도요토미히데요시가차를마셨다는가이게쓰(海月)라는찻집도남아있어서나도말차(抹茶)한잔을사마시고있으려니정유재란당시오타가즈요시(太田一吉)휘하에종군승(從軍僧)으로참전한케이넨(慶念)이남긴‘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가문득떠오른다.
들도산도몽땅불태웠으며죄없는사람을마구죽였다.나는부모를찾는아이들의울부짖는모습을처음보았다.그비참함이란꼭지옥의거리와도같았다.(1597.8.6)
조선아이를왜군이잡아가자놓아달라고애원하는아버지를칼로찔러죽이니비참하기이를데없었다.(1597.8.8)
일본으로부터많은나라상인들이왔는데그중에는인신매매(人身賣買)상인들도끼어있었다.그들은일본군부대의뒤를따라다니면서남녀노소를가리지않고사람을사가지고새끼줄로목을묶고뒤에서지팡이로두들기며걸음을재촉한다.이것을보면마치지옥에서죄인을못살게하는나찰(羅刹)과도같다.(1597.11.19.)
그리고영국크리스티경매장에서324,000파운드(66,000만원)에경매되어세상을깜짝놀라게했던그림한장이생각났다.벨기에화가루벤스의<한복입은남자>이다.그주인공은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갔다가카를레티라는이탈리아상인에게팔려간안토니오코레아(AntonioCorea)로추정하고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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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박물관
일본교토에있는귀무덤-임진왜란때우리나라사람들의귀와코를베어가서만든무덤
도요토미히데요시상1
토요토미상2
도요토미히데요시옷
거북선
평양성전투도
임진왜란도
왜장가토기요사마
왜장오다노부나카의초상화
가이게쓰(海月)찻집
케이넨(慶念)이남긴‘조선일일기
최근에발행된케이넨(慶念)의‘조선일일기번역판
루벤스의<한복입은남자>-영국크리스티경매장에서324,000파운드(66,000만원)에경매됨
玄海國定公園
玄海國定公園
주상절리
해식동굴
해양수족관-수조에서기르는것이아니라사람들이바다속으로들어가서본다-위의흰원통안에들어가서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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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터
나고야성박물관
7나고야성(名護屋城)박물관
나고야성터부근에있는나고야성박물관은조선반도와일본열도의‘교류의역사’를전시하고있다고했다.그래서인지박물관입구에는우리나라의돌하르방과장승한쌍이서서고국에서온길손을맞이한다.이박물관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대한역사를조명하고있어서관심을끌었다.
나고야성박물관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文祿/慶長의役,1592-1598)을침략전쟁으로자리매김하고그반성위에서일본열도와한반도와의긴교류의역사를되돌아보며,앞으로쌍방의교류와우호추진거점이될것을목표로1993년10월30일에개관한것이라고한다.
박물관안내서처럼이박물관은특별사적인나고야성터와진영터의조사,보존,활용과일본열도와한반도의교류사에관한자료를수집하여보관하고조사하여전시하며외국과교류사연구를주제로하는국제학술문화교류사업을목적으로하고있다고한다.
이러한토대위에이박물관은한국의문화소개와한국어강좌,한・일간의교류및우호촉진을위한한・일교류센터를개설하는등새로운일을추진하고있다고한다.
이박물관은나고야성이전,역사속의나고야성,나고야성이후로구분하여자료를전시하고있었다.
나고야성이전에는조선과일본에서출토된구석기시대의토기를비교전시하는원시시대부터중세까지한반도에서일본열도에문화전래과정의사료를전시하고있었다.
역사속의나고야성은도요토미히데요시에의해일어난임직왜란과정유재란에관한전시와모모야마(桃山)문화를소개하고있었다.
거기에는나고야성도병풍,다이묘의진영배치도,일본군선인아타케부네(安宅船),이순신장군의초상화와거북선,조선군지도병풍등7년동안에걸쳐서싸웠던전쟁의역사의잔영들이전시되어있었다.
나고야성이후에는에도시대조선통신사의왕래와근대까지한반도와일본열도의관계자료를전시하고있고특별사적인나고야성터및진영터에는나고야성터및다이묘진영터들의발굴유물을전시하고있었다.
그런데임진왜란을일으킨도요토미히데요시의초상화와그의편지,전란때명성을날리던거북선과함께일본군함을나란히전시해놓은것도돋보였지만한국과일본의역사교과서를원문과함께상대방국어로번역해놓은것이관심을끌었다.시간이있으면두나라역사교과서를하나하나읽어보면서비교해보고싶었지만시간이없어서그를수없는것이안타깝다.
나는오늘참으로놀라운역사의현장을보았다.나고야성터와박물관을돌아보면서이곳이바로임진왜란을일으킨본거지임을확인했다.그런데400여년의세월이흘러버린지금은성은비록폐허되어버렸지만역사는그대로전해지고있었다.
나고야성터부근에는성을쌓을때부족했던물을공급하기위해서만든자수지가지금도남아있고,성기슭에는도요토미히데요시가차를마셨다는가이게쓰(海月)라는찻집도남아있어서나도말차(抹茶)한잔을사마시고있으려니정유재란당시오타가즈요시(太田一吉)휘하에종군승(從軍僧)으로참전한케이넨(慶念)이남긴‘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가문득떠오른다.
들도산도몽땅불태웠으며죄없는사람을마구죽였다.나는부모를찾는아이들의울부짖는모습을처음보았다.그비참함이란꼭지옥의거리와도같았다.(1597.8.6)
조선아이를왜군이잡아가자놓아달라고애원하는아버지를칼로찔러죽이니비참하기이를데없었다.(1597.8.8)
일본으로부터많은나라상인들이왔는데그중에는인신매매(人身賣買)상인들도끼어있었다.그들은일본군부대의뒤를따라다니면서남녀노소를가리지않고사람을사가지고새끼줄로목을묶고뒤에서지팡이로두들기며걸음을재촉한다.이것을보면마치지옥에서죄인을못살게하는나찰(羅刹)과도같다.(1597.11.19.)
그리고영국크리스티경매장에서324,000파운드(66,000만원)에경매되어세상을깜짝놀라게했던그림한장이생각났다.벨기에화가루벤스의<한복입은남자>이다.그주인공은임진왜란때일본으로끌려갔다가카를레티라는이탈리아상인에게팔려간안토니오코레아(AntonioCorea)로추정하고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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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박물관
일본교토에있는귀무덤-임진왜란때우리나라사람들의귀와코를베어가서만든무덤
도요토미히데요시상1
토요토미상2
도요토미히데요시옷
거북선
평양성전투도
임진왜란도
왜장가토기요사마
왜장오다노부나카의초상화
가이게쓰(海月)찻집
케이넨(慶念)이남긴‘조선일일기
최근에발행된케이넨(慶念)의‘조선일일기번역판
루벤스의<한복입은남자>-영국크리스티경매장에서324,000파운드(66,000만원)에경매됨
玄海國定公園
玄海國定公園
주상절리
해식동굴
해양수족관-수조에서기르는것이아니라사람들이바다속으로들어가서본다-위의흰원통안에들어가서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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