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72호
수필제72호

차례

머리말이결실의계절에회장姜中九/7

황다연사랑의힘/9

순연한마음속엔지혜의빛이있다/14

심득순비파나무/19

태풍사라호/25

이원우세상을향해던지는편지/29

과거를묻지마세요/34

하창식전면주차/39

토끼와거북이/43

안태경골목벽화/46

사람의온기/50

이병수가족묘원조성기(記)/54

맥아더장군동상앞에서/59

윤용흠게곤노타기(華嚴瀧)/63

도슈궁(東照宮)/68

손수영군청색두루마기/73

관광버스춤/79

허정림그녀의망부가(望夫歌)/84

내마음의노래/89

오기환겨울방학과독서/91

영혼의보약설날의추억/97

김상희주롱의펭귄은지금도그자리서있을까/101

밤,칼을가는바다/105

최홍석유년의여름/109

여정(旅情)/113

황선영스트레스(stress)는내친구/116

姜中九오,부처님이시여/120

섬마을선생님/124

박희선짬/128

이경자추억을찾아서/133

전정식예불하는토끼/139

지옥이야기/143

이기태승강기에서겪는일들/148

머리염색을그만둔까닭/152

남기욱간절곶풍경/156

동창회/159

이몽희나의장타령/163

두번째눈/167

박송죽내젊은날의꿈이살아숨쉬는거리/172

배병채달걀/175

디지털과아날로그/179

배기형누수(漏水)/183

떠나는길손들/188

최헌아버지를생각하며/191

이해주신발에대한단상/195

수난의역사와기록문화의빈곤/199

박문자미완성의모정/203

황원준적(敵)과의야반도주/207

정인조작은카페이야기/214

장광자우리말을생각하며/219

허정아름다운민속문화/224

정약수편지/228

박우야전서로이해하는마음으로/233

젊은이와늙은이/236

박홍길덤으로가는여행/238

전희준퇴직후10년/242

김훈세계의명곡아리랑/247

정철규버리기연습/250

버스가왔다/254

成洛九알[卵]과벽(壁)/258

가정을지키자/264

윤옥자쓰레기장에서줍는큰꿈들(2)/270

허현숙명품/274

우리모임소식/278,

수필부산문학회회칙/281,

회원주소록/286.

편집후기/290

이결실의계절에

회장姜中九

가을이다.여름내내초록빛으로물들어있던산과들이붉게물들어가는모습이참으로아름답다.커다란느티나무한그루가서있는마을앞길가에는희고붉은코스모스가바람결에하늘하늘춤을추고,황금빛으로물들어가는넓은들판은보기만해도풍성하다.

맨드라미꽃이발갛게피어있는골목길을들어서면삽살개가달려나와누구를찾아왔느냐고멍멍멍짖어대고,돌담위에는호박이누렇게익어가는데,초가지붕에널린빨간고추는가을햇살을받아더욱붉다.

학교를다녀온아이들은꽁보리밥을된장찌개로맛있게비벼먹고,산으로소를치러가서는알밤을주워먹는것도재미가있었지만,콩서리를하는것은더재미가있었다.산에서따먹는머루랑다래는그야말로꿀맛이었고.

밤이면호롱불당겨놓고책을읽었다.그러면귀뚜라미도따라서귀뚤귀뚤책을읽고,기러기도기럭기럭울면서밤하늘을날아갔다.하늘에는별들이초롱초롱빛났고.어릴때우리고향마을의가을풍경이다.

가을은수필의계절이다.피천득선생은‘수필은서른여섯살중년고개를넘어선사람의글이며,정열이나심오한지성을내포한문학이아니요,그저수필가가쓴단순한글이라고했지만,나는그렇게생각하지않는다.

수필은원고지15장에불과한비교적짧은글이기는하지만,거기에는글을쓰는사람의정성과혼이담겨져있어야한다.뿐만아니라재미가있어야하고,감동을줄수있는글이어야하며,해학과위트가있어야한다.거기에다교양이담겨있으면더욱좋고.

그리고수필은선(禪)과같은것이어서단순한말의기교나너절한신변잡기로서는좋은수필이될수없다.그러므로작자는진지한태도로인생을관조하면서,수준높은자기경험을토대로하여진솔하게써야좋은수필이될수있을것이다.

올해도수확의계절인가을이다가왔다.농부들이새움이돋아나는봄날에씨를뿌려서무덥고비바람치는여름내내땀흘려가꾸어오던오곡을결실의계절인가을에수확을하듯이,우리수필부산문학회회원들도‘隨筆이이나라최장수동인지라는자부심을가지고정성들여써온작품을모아서이가을에활짝웃으면서제72호를펴낸다.

끝없이펼쳐진갈대밭속에조각배한척이떠있는표지그림은부산의명소인을숙도의가을을풍경화의대가인이동수화백이그린것이다.표지화를그려준이동수화백에게감사를드리면서우리수필부산문학회의무궁한발전을기원해본다.

사랑의힘

황다연

맑은자연수는살아있는물이라서의식기능이있다는것에착안하여,물이가진감정의결정을사진으로찍어낸‘에모토마사루란놀라운인물이있다.세계평화를기원하는도구역할을하는그의저서<물은답을알고있다>는그내용은바로요약된경전해설서였다.

물의길정보가내재된물의다양한결정모습을통해알게된대자연순환운동은한마디로그는‘사랑과감사라고한다.대자연의생명현상의근본원리가‘사랑과감사라는말은붓다의‘자비사상,그리스도의‘사랑,박애사상과일치한다.

자연의섭리속에캐낸언어의보석이곧그성자들의말씀이었다.

이런관점에서나는,운명을좋은쪽으로전환시키는탁월한치료법은‘독서라고본다.그중자연섭리가순도높게무르녹은불가사의한에너지로가득채워진경전,즉고전공부요법이제일이다.사람들이틈만나면누가부르는듯이산이나바다의품안을파고드는것도,늘대지의모성을그리워하는일종의잠재의식작용이다.대자연의사랑의흡인력은이처럼불가사의한힘을갖고있다.

성공한사람은자연의정기를받고태어났다거나,대단한여성이그곁에있었다는사실도위대한그사랑의모성영향이다.

‘에모토마사루는삶이흐르는길공명의원리파동을이렇게설명한다.

“…사람과사람이서로를끌어당기는‘사랑이란현상을파동적으로해석할때,예를들면자신의능력이파동적으로10의수준이라한다면,자신과똑같은10의파동을가진상대와공명하든지그보다높은파동을가진사람을동경하게된다.그런형태로사랑할때인간이가지고있는능력은최대한발휘한다.10의능력을갖고있으면서5의힘밖에발휘하지못하는사람이라도10의능력을가진사람을사랑하면그에맞게10의능력을발휘하게되고,상대가12,20의파동을가지고있으면자신의능력도자연스럽게높아진다.따라서사람은사랑하고있을때일의능률이올라간다.…물론여기서말하는사랑이란연애에한정되어있지않다.…사랑은주파수를올리고인간을연마하는기폭제다.…”

종교가내세운진리에대한사랑의실현도물론이와같은현상을나타낸다.

만해의주장처럼,긔루는(또는그리운)사랑의대상은다‘님이기때문이다.

아무리쓸어버려도가득차는고독의공기

당신의부탁인듯음악같은물소리흘러

혼자서걷기아까운절창의계절즐깁니다.

허공의깊은가슴에제울음묻고싶은듯

바람스칠때마다풍경(風磬)의아픔하얗게날아

목숨이지닌비애도아름답게느껴집니다.

(山寺에서만난아름다운비애)

살아있는동안은한없이사랑해야할창작활동이발전지향적인독한갈등을유발할때마다뭉텅뭉텅피로엉키는목숨이지닌비애란.

인연의바람이끄는대로내발길닿는곳마다임의눈길안쓰럽게따라다니며,어느땐그냥흐르는물과바람에게나를사랑하는당신부탁실어놓고임은삼매에든다.물리학적극미진블랙홀속으로들어가보면사물의근본본성이없는‘空임이드러나‘있는그대로신뢰한다는의미인‘哲字를파자하면‘입을다무는학문이된다던가.이런데도문득애상의정감이나를휘감으면나는속수무책으로환상이만든그애상속에도취한다.

나그대를생각함은항상그대가앉아있는배경에서/해가지고바람이부는일처럼사소한일일것이나/언젠가그대가한없이괴로움속에헤멜때/오랫동안전해오던그사소함으로그대를불러보리라.…

(황동규의‘즐거운편지에서)

어느날영화‘편지를소개한영화속의한장면이순박한사랑의향기뿌리며나를끌어당긴다.먹은것없어도,함께있는것만으로도배부르고평온하게하는사랑의힘.인간의종속본능속에가정을만드려는욕구가저장된배경도,사랑이란불가사의한파워에얼마씩부족한서로가의지하며살기위함이리라.

이영화는두청춘이사소한일로서로의외로움을감싸안으면서결혼으로발전하였으나,소박한행복이넘쳐흐르는이들사랑은운명이시샘하여오래가지않는다.한사람이먼저‘암이란질병을이겨내지못해저세상으로떠난다.참을수없는아픔이드리워진방안에그리움의촛불켜놓고한없는사랑의실타레아무리풀어내도,이미결정된일에대해선운명은눈길한번주지않는다.

‘굶는사람양식을사준다.든지,‘가난한학생등록금을내준다.든지하는적선은에너지의순환운동으로서자기통장불리는또다른방식의저축임이분명하지만,이런선행은몇전생부터습관이되어있어야했다.대부분의적선습관은금방만들어지는게아니다.삶의행복지수올리기엔이우주가장예민한센서를가진인간의아름다운감정역할이크다.

춘원은그의대표작‘사랑에서인간의순수순도를혈액으로분석측정하는광경을그렸는데,이해타산을떠난자연발생적인순수한감정으로남을도울줄아는사람은진리와교감이빨라,자기를이끌어올릴수있는많은힘을갖고있다했다.이런사람은꾸준히발전하여결국뜻을이룬다.어떻든현재의지와상관없이윤회라는자연순환구조속에서과거로부터상속받은우리삶은언제나다양한문제로부터자유로울수없다.크게발전해야할사람에게도타당성있는역경이주어지듯,허물어질사람에게도타당성있는역경이주어진다.역경은무연의시험대가아니라삶의연속선상에서잘됐거나혹은잘못된감정이지은결과를향한필연의시험대다.

이래서그지없는자비로움으로가득채워진대지와같은마음으로살라고대자연은‘사랑과감사를존재의근본원리로삼았으리라.

순연한마음속엔지혜의빛이있다

황다연

가만히물속에서있는물풀을바람이흔든다.물풀만바람이흔드는게아니라나무잎도나뭇가지도흔든다.꿈이아른대는창가에서조용히책읽는소녀의마음까지흔든다.

성인들은살면서흔들리지말라고삶의뿌리키우는마음공부를많이시키지만,마음다스리는솜씨가명곡을감동적으로연주하는연주자같아지려면땀냄새나는인내로하염없는훈련을쌓아야한다.

어떻든신의언어로도설명할수없는운명에휘둘리는인간의무력함이있어,밤은늘무섭도록깊고또낮은너무나미안할정도로밝다.

장자와혜시는둘도없는친구사이인데혜시는변론가였다.

어느날장자와혜시가물속에서고기들이노는것을보고,장자가먼저말하기를“물속의고기들이굉장히즐겁게논다.”고했다.그러니까혜시가“자네가고기가아닌데고기가즐겁게노는줄을어떻게아느냐?”고장자를몰아붙였다.장자가답변하기를“자네가내가아니고내가고기가아니라면내가알고모르는것을어떻게아느냐?”고했다.…

견해의차이가없다면다양한문화와문명은없었으리라.물이그릇에따라모양새가다르고차별이나는것은,물자체는분별하는생각이없으나사람마음그릇이다르기때문이라지않던가.습관에종속된운명의시각은어느세계에서나차별이있다.모든생명들은자기업(業,습관차원)대로보고자기업대로살아간다.서로다른업을가져서로다른환경갖고서로다른시각으로사는그것이당연한현실임을받아들이면,어떤혼란도가볍게넘겨버릴수있다.

그러나확연히트인심신통일이룬이런경지까지도달하려면온갖슬픔을통해많은상처를경험해야한다.가혹한시련을주는겨울끝꽃샘바람이느닷없이봄짓눈깨비를뿌리기도하는오슬오슬추운대지며,허공을고운향기로사로잡는매화의인욕쯤지니면그어떤고통도동반자쯤으로여기지싶다.

아득히딛고오르는고독의층층계단

단단한정신이다스린한벌열정은

처음본수정보다맑은

사랑을풀어낸다.

세상다가진듯한결고운설렘으로

바람속에애틋한꿈의궁전지어놓고

간절한시간안에서

그리움의파도를탄다.

(‘매화,그리움의파도전문)

조선관기두향은시문에능숙하여퇴계선생연인이되었는데,후일퇴계선생이단양군수직을마치고떠날때귀한매화를선물했고,선생은평생그매화를정성껏키우며두향을잊지않았다고한다.

매화에관한시를100여수지은만큼스스로매화를혹애한다했다는데,오늘날까지많은후학들의섬김을받을수있는것은그어른매화기질덕분이리라.그러니까두향은단양군수이퇴계를사모한게아니고고매한인품가진자연인이퇴계를사모했던만큼,그녀존재의향기도남달랐을것이다.

현대에서불치병을근절시키는대체의학요법으로통하는‘유교의중용,‘불교의중도부근까지간사람몸에선퇴계선생이지극히사랑한인욕의매화향내가나지싶다.

진리의3대원칙중첫째정리(正理)인‘자연의순리대로살면나쁜병에걸리지않는다고한다.참된삶은곧그만큼아름다운습관[業]을가져이세상소금역할하는보살(菩薩)그릇으로사는사람인데,나쁜병이근접할리없단다.

항상다양한질병에걸릴가능성의범주가인간세상이지만,전생에서가져온질병도순리대로살면자연치유된다고한다.

인생은입으로사는게아니라지혜로살아가야하기에,인간은미완의존재라는환경조건을직시할줄알면,복덕의온상인겸손의미덕을잊고사는후회병을예방할수있다.

오래전부터불교경전맛에길들여져사는것을축복으로여기는나의최대곤란점은,특별한질병은없지만신체조직모두조금씩약하다보니항상부족한체력이문제였다.작은밥상다리를세워책상삼고얇은방석깔고앉아저녁두시간을공부해야하는건언젠가부터내겐무리였다.오묘한경전공부그자력에끌려구도회법당까지가서도두시간을버텨낼체력이없어되돌아올땐체력의한계가뼈저린아픔으로움직인다.

세상을한결같이가슴으로살아야만물을사랑할수있다는것,죽음보다높은고독으로그렇게묵연히살아야무한시공을향해여울지는그리움의파장을만들수있다는것….

안목이좁으면사물전체를볼줄몰라부분만보며왜곡하기일쑤여서,죄를쌓는다고깊은안목키우는마음공부,고전공부를꾸준히하는사람도제법있다.자기삶을키운다는고집,또는집착이약이될때보다병일때가더많은인간세상은그저자신에게온고통을달게참고견딜때그아픔에서벗어나는길이보인다.

우리가희구하는평화는어떻든현란한문명이만든갈애의숲에둥지튼외눈박이새가아니고,밝게갠마음속에자란아름다운지혜의빛이었지않던가.

삶을물리적잣대로재며살수록혼란은가중되고,그혼란만큼거꾸로흐르는역사가생기면서사회가침체되고퇴화되므로정신세계를주도한옛선비들은정신차원문제인마음공부를최상의덕목으로꼽았다.어디로부터온것인지알수없는단장(斷腸)의괴로움이명멸하는곳,아울러그만한기쁨이명멸하는이곳이다마음속에있다는데,지금마음을찾아도마음이없다.

나는나를사랑한임의자비로운가르침에이끌려그윽한안심입명의경지에머물고있는것일까.

비파나무

심득순

한송이국화꽃을피우기위해

봄부터소쩍새는그렇게울었나보다.

한아름의비파나무열매를양손가득받아쥐기위해나는지난해여름부터올봄까지그렇게가슴설레며기다려왔노라고.서정주시인이국화한송이를위해절절히노래한것처럼나는빛나는햇살속에푸릇푸릇한비파가어서빨리노랗게익어주기만을고대했다.

여름을향해불타오르는6월중순어느날,마침내오랫동안기다려왔던보람이찾아왔다.밤늦은때,집근처범일성당에서성가연습을마치고나온나에게딸과사위가찾아왔다.남천동사돈댁에는넓은정원한켠에한그루큰비파나무가있다.노랗게잘익은열매를손수따당신아들며느리손에들려비닐봉지가득안사돈인나에게로보내왔다.어느해부터나의혀는비파맛에길들여졌고,비파가익어가는계절을기다리게되었다.그마음을아들내외로부터전해들은사돈내외는달고새콤한수분이가득찬비파가익자마자나에게가장먼저선보이신것이다.오리알노른자만한크기의비파를한입물고향에취하고맛에취하고초여름의산란한밤향기에취한다.향기로운시간에깊이빠져들게해준사돈내외분의따뜻한배려에우선감사를전하고,나의비파사랑이시작된싯점을풀어놓을까싶다.

중국과일본이원산지로장미과에속하는아열대산교목인비파나무는다자란키가10m정도며,일년내내잎을볼수있는상록수로공원과정원에많이심는다.우리가알고있는비파라고부르는국악기는몸통이비파나무의잎모양과닮았다해서붙여졌다고한다.6월에과일이익으며건강에좋은독특한효능이있어,이과일에관심을기울이는사람이날로늘어가고있는것같다.내가비파나무에기린처럼목을길게빼고관심을가지고바라보게된두해전,그날의그광경들을떠올리자또다시가슴이벅차오른다.고단한삶의더께가더덕더덕떨어져나가는소리가들린다.마치물이몸속으로스며들듯나에게자양분이되어준좋은비타민같은시간들,그시간은나를마법의세계로인도한다.

쾌청한봄날,네덜란드항공에몸을맡기고지구반대편을향해빠르게날아갔다.네덜란드를경유하고독일뒤셀도르프공항에내려청사밖을나오니독일에서작곡가로활동하며살고있는동생이환한얼굴로기다리고있었다.창문가에온갖예쁜꽃들로치장한독일의고풍스런집들과마치수목원을방불케하는거리풍경에한동안압도됐다.유럽의정취를한몸에느끼며독일중부도이스부르그에있는동생본가로갔다.동생을따라음악공연장과미술전람회장으로품위있고격조높은분위기에젖은시간도갖고,독일의상징이라는라인강을배경으로기념촬영도하는멋진몇날을보낸후,다시동생과함께그리스크레타섬을향해비행기를타고날아갔다.

지중해한가운데,세계적인휴양지의한곳이라고불리는크레타섬공항에도착하니밤바람이후덥지근하게불어왔다.내가떠나온낯선이국의섬크레타공항은문명을떠난원시자연의형태가아직그대로남아있는곳이었다.우리네어느소도시버스터미널을연상케하는낡고작은국제공항을보고잠깐어리둥절했다.세계각국에서몰려오는수많은관광객들을볼품없는이작은공항에서다수용한다는것이그저놀라울따름이다.

그러나크레타는희랍신화에나오는제우스신,엘그레꼬라는유명한화가,소설그리스인조르바로명성을떨친카잔짜키스의출생지이며,또헬레니즘문화이전에전성한미노안문화의발생지이자,고대지중해를교차하는여러민족과문화들이남긴다양한문화유적지이기도하다.

공항앞렌트카대여점에서,터무니없이무리하게요구하는차량가격을놓고실랑이를벌이는바람에시간이지체되어우리는호텔에서하룻밤을묵기로했다.다음날아침,기후특성상봄여름에는비가잘내리지않는다는크레타섬에이른아침부터비가내렸다.촉촉이젖어드는창밖아래빈도로가에고양이두마리가울고있었다.엊저녁먹다남은빵과치즈를꺼내어던져주었더니입에물고골목안으로줄행랑친다.이방인이던져준먹이에오늘하루든든한요기가되었으면하는내심정을아는지모르는지,반대편창문아래골목을내려다보니꾸역꾸역먹는데만정신이팔려있었다.

호텔을나와전날빌린렌트카를타고남부해안가에있는마리우라는마을언덕위에음악작업을하기위해서마련해둔동생집으로갔다.산중턱에양떼들이삼삼오오짝을지어풀을뜯어먹는광경이한가롭고아름답게보였다.그날로부터7일동안한송이들꽃같은마음으로나를버리고나를찾는시간을반복했다.그리고그곳에서비파의매력에푹빠져들게되었다.일상의번거로움을내려놓고머나먼곳으로떠나온길.동생이짜놓은여행일정표에맞추어신비의섬크레타에추억이라는이름의풍경들을가슴에차곡차곡채웠다.

미르티오스라는마을의플라티아식당에서우리는지중해를바라보며점심을맛있게먹었다.통밀로구운달콤하고고소한식빵을올리브기름에흠뻑찍어먹던맛은지금도군침을돌게한다.아시아인인나의왜소한체구와얼굴에호감을가진듯식당주인이‘야사스라며고개를옆으로젖히고인사하는이색적인모습이매우인상적이었다.이다음에또만나게될것을기대한다는그의친절한말을뒤로남긴채,우리는낡고오래된이국적인회백색집들사이투명한햇볕이전율하는좁은도로위를걸어갔다.

머리위로하늘이열리고이웃간의분쟁도범죄도일어날것같지않은한적한마을에과히없어도좋을한가한경찰서가눈에띄었다.경찰서문앞에시원한그늘을드리운키큰아름드리나무한그루가서있었다.크레타의거대한자연풍광을닮은코큰그리스남자가나무에매달려열심히열매를따는모습이눈에들어왔다.

멀찌감치쳐다보니꼭승리의상징인금메달같은노란열매들이조랑조랑매달려있기에퍽신기했다.호기심이동한나도달려가양해를구하고몇개를땄다.동생이다가와비파나무열매라며지중해에서는흔한과실수이며,그리스말로는무스물라라고가르쳐주었다.대도시에서한뼘의땅도없이자라난우리는이나무가한국에서도자생하고있음을전혀몰랐다.우리는길가에서아이들마냥새콤달콤한맛을내는비파에얼굴가득웃음을매달고속속까먹는재미에푹빠졌다.주체할수없는행복감이밀려왔다.하얀낮달이내안에찾아들고생애가장기분좋은시간,비로소비파나무와의인연이시작된순간이다.

열매는지구반대편에서온낯선여행자의삭막한감정에기름칠하고일상에쪼들린나를위무하며,마음을풍선처럼부풀게했다.꽉막힌숨통을틔우며잃어버린감각을찾아주었다.동생과함께한아름다운시간의열매를그곳에서발견한까닭이며말없는조언자가되고,삶에대한절절한희구가되었다.

인생에쉼표가되는여행,만나고헤어지는여행,만나고헤어지는그리움,일탈그이상의감동과함께했던보름동안의여정도끝나고집으로돌아왔다.짧은만남이너무길게뇌리에선명한자국을남긴다.많고도많은여행지에서마주쳤던사물들속에서왜하필비파나무에유독심취하는지?예전에사돈집을방문할때정원을몇번이나둘러보았는데도눈에띄지않던그나무,이제는필연으로각인된것존재의정체성이확인되는만남에놀란다.

소중한추억이고그리움이고,내마음의고백이며확신이자사랑이된비파에심장이들끓는다.세월은흐르고기억은날이갈수록희미해지고,어둠속으로사라지는석양에시시각각요동치는내마음에안정된바람이들어오는소리를놓치지않기위하여,나는오늘도비파와소통하고,비파에열애한다.

(2009.6.20.)

태풍사라호

심득순

여름철이면꼭한번씩연례행사처럼찾아오는물난리다.신문지상이나TV화면에연일기상특보가전해지고,엄청난재해를당한사람들의안타까운모습들이비쳐진다.수마가할퀴고지나간자리에남아있는참담한현실앞에인간은너무나미약한존재이다.오래전사라호태풍을겪은적이있다.내나이네살무렵,해안가인영도남항동에서살던때다.

지금은모두고인이되신부모님께서는추석날차릴차례상을준비하시느라바빴다.마당한가운데에서제기를닦으시던아버지모습이눈에선하다.놋그릇에낀때를마른짚에재를묻혀쓱싹쓱싹문질러서반짝반짝윤이나도록닦으셨다.머리에하얀무명수건을덮어쓰고부엌에서전을부치시는어머니도정겨웠다.정지된평온함이어린내눈에들어왔다.잔잔했다.

한더위도물러가고가을철로가는한가위대보름전날.천마산너머로해가가고나는붉은노을을보러갔다.자박자박짧은발걸음으로바쁘게갔다.옹골차게혼자걸어갔다.골목에서나와길만건너면바로해변이었다.붉은융단을깔고산너머지는해가신기해서가끔엄마손을이끌고가고,오빠들을따라나서기도했다.언덕을이룬자갈돌위에서서천마산붉은해를좇아갔다.저녁하늘이어쩐일인지낯설었다.나를반기던하늘이아니었다.골이잔뜩난칙칙한하늘이다.바람이크게울었다.파도가심란하게몰려왔다.해가종적을감췄다.후두두빗방울이쳤다.누군가엄마한테어서가라고했다.파도가내발아래까지왔다가갔다.종종걸음으로집으로돌아갔다.

해일이일어바닷물이넘치고우리동네에물이밀려들었다.봉창으로번쩍이는섬광이나타나고아버지얼굴이어두웠다.한나절동안공들인차례음식이걱정이신어머니,갑자기뒤죽박죽된현실이불안했다.동네구장이집집마다쫓아다니면서빨리대피하라고고함을질러댔다.옆집용이엄마가어서나오라고재촉했다.폭우가쏟아졌다.무섭고두려운밤이었다.집근처동네에서제일큰건물이던통조림제조공장으로갔다.공장건물안에는태풍을피해온사람들로발디딜틈도없었다.어른들의긴한숨내쉬는소리를들으며나는탁자위에서잠을잤다.

다급한아버지목소리를듣고잠이깼다.아침이었다.공장안에물이가득찼다.물난리였다.초등학교3학년이던큰오빠는헤엄을치고,작은오빠와나는아버지등에업혔다.엊그제첫돌이지난동생은엄마등에서새근새근잠이든채구호소를찾아갔다.한순간에모두이재민이되어임시구호소인남항초등학교로올라갔다.추석날조상님께올릴과일들이물위에둥둥떠다녔다.귀하고맛있는배와사과가여기저기떠다녔다.한꺼번에두아이를등에업고허리위로차오른물속을헤쳐나가는아버지의힘든상황에도아랑곳없이나는생떼를썼다.아버지께사과를주워달라고억지를부렸다.두아이를업은채과일을줍기란불가능한일이다.물에젖은몸만큼이나아버지마음도젖었을것이다.

태풍사라호는기나긴고통만안겨주고떠나버렸다.집도절도아무것도없다.8ㆍ15해방통에겨우찾은보금자리였다.용이엄마도울고우리엄마도목놓아우셨다.나도옆에서덩달아울음을터뜨렸다.낯익은된장독이흙더미속에서우리집터였다고알려주었다.묵은된장독이주인을기다렸다.누런된장이고스란히담긴장독은엄마의근심을덜었다.

태풍이올때마다어머니가말씀하셨다.폐허가된집채속에서용하게살아남은된장독이하도기특해서된장맛이더좋았노라고.물속에잠겨있던장독에한방울의물도들어가지않은게신기하고놀라울뿐이다.집과가재도구,모든것을잃고도된장독하나건진게고마운어머니였다.

아버지절친한친구덕분에영주동에있는방두칸짜리집을얻어옮겨갔다.마당넓은집에여러가구가옹기종기모여살았다.수심이가득하던부모님얼굴에화색이돌았다.엄마를따라중앙동40계단을오르내리며구호품을타러다니기도했다.그시절배급받아먹던강냉이죽에는아련한향수가들어있다.정많은이웃들과따뜻하고아름다운날을보냈다.옛부산역근처철길옆마당넓은집에서는기적소리때문에밤잠을설치기는했어도,이별의부산정거장이라는노래는늘내머릿속에감돈다.우리형제들이태어나고자란영도에서의삶은사라호탓으로일시중단되고,영주동에서새롭게시작된날들은넉넉하고단맛나는생활로기억된다.차돌같이단단한가족애가넘쳤다.

해마다여름철태풍으로인한물난리소식이들려오면느낀다.그때우리를업고허리까지차오른물속을힘겹게헤쳐나가시던아버지등이얼마나따뜻하였던지,얼마나그리운지.고된삶의한가운데서맛본아버지사랑이었노라고.

(2008.7.20.)

세상을향해던지는편지

-‘역대대통령의애창곡악보(樂譜)묶음을들고-

이원우

방학이다,모든노인학교가.천주교성당이나개신교교회,일반노인회노인대학다마찬가지다.돌이켜보면지난1학기도나자신너무바빴다.25년동안줄곧그래왔다.자나깨나교재연구등을해야한다.1,420여회,그숫자도큰의미가없다.

어쩌다보니천주교부산교구은빛사목지원단장을맡게되었다.부산교구에있는성당노인대학에강사를지원하는그런업무가부여된것이다.그러나정작나자신부터바빠서공적(公的)인본연의임무에소홀했다.뉘우쳐진다.

그러면서도2학기개학이후의여러가지전망을쏟아놓는다.정말다양한프로그램을어떤방법으로든제공하고싶다,천주교성당이라는외연(外延)의벽을더허무는것도중요하다.여담이다.1학기말나는진영과김해에하루에몇시간씩머물러있었다.그곳노인회에서운영하는두군데노인대학강의때문이었다.노무현대통령이서거하기며칠전에시작한노인학교수업이,국민장이끝나고나서도한참이나거기서계속되었던것이다.그게내가부르짖는외연운운의예다.

나는거기서노무현대통령의애창곡‘허공과‘외나무다리등을불렀다.누가그두곡외에‘상록수와‘부산갈매기등이있다고했다.‘상록수는나자신잘모르는곡인데다악보마저얼른구할수없어,노인학생들앞에내놓을수없었다.노인들도낯설긴마찬가지고.

그얘길<조선일보>에소상하게썼다.마지막에자기자신이라도생명은절대스스로버릴수없다고강조하였다.나도그와비슷한상황직전에서돌아선일이있어설득력이있다고자부했다.사설형식의이졸고에댓글도상당히올라와있었다.내의견에대한찬성폭이반대보다훨씬넓었다.나는무릎을쳤다.

그런데두달이안되어서다시인터넷앞에서나는놀랐다.내눈을의심할정도였다.앞서들먹인몇곡이사라져버린것이다.대신그자리를다른노래들이차지하고있었다.우리같이나이좀든보통사람들은어쩐지가까이할수없는….나는적이실망하였다.나는그가노래를통해서라도서민(庶民)냄새가물씬풍기는그런봉하마을촌로(村老)로남아있길바라고있었는데.60일이채못되어그는타의(?)에의해변모되어있었다.

그의애창곡과나는추억이있다.00년도7월중순,강서노인학교1학기종업식에대표로초청을받아갔다.여당부총재였었던그와,그지역에서출마한H위원장,B구청장등과함께였다.H위원장은날깍듯이선배로대접하였고,당시만해도노인들한테인기가정점(頂點)에있던나에게노무현부총재는의아스런시선을던졌다.현직교장이일과시간에노인학교에나온것자체가기이한(?)일이라여겼으리라.게다가화제가,‘둔치도마을의노인들과의고스톱에까지미쳤으니….

마침내내빈중노무현부총재와나둘만남았다.내노래에맞춰노인들과그가디스코인지뭔지모를춤을췄다.이윽고내가반주도없이허공에날린곡이이거다.지금흔적도찾아볼수없는,제목조차모르는,머리와꼴마저잘린옛노래.‘화투장에점을치며맺은날짜애태우고맺은날짜애태우며기다리는여자라오.노인학생들은열광하였다.그가이어받은노래제목은신문에썼으니생략하자.그가김상국씨처럼나를괴짜로여겼으리라는환상에빠져10년을허우적거렸다.

이야기가엉뚱한방향으로흘러갔나?

참,내2학기노인학교수업준비를한다고했었지.으뜸가는프로그램은역시노래다.내가취입한‘부산노래19곡과역시내가콘서트를열어호소한,화합을위한영호남가요등말이다.거기다가하나더보탠다.‘역대대통령의애창곡!노인학생들에게아주매력적이겠다.생사를기준으로삼을필요가없다.노무현대통령이불행하게도서거함으로써애창곡자체가‘둔갑을했다는그서글픔따위도차치한다.

적어도대통령의애창곡이라면말이다.최고공인(公人)으로서의자기시대에대한자존심의발로일수도있다.물론단순한개인으로서의정서일따름일지도모르지만.어쨌든내친김에욕심을다시한번여기적어본다.부산과영남의경계를벗어나서‘역대대통령의기분을내고싶다.

어쨌든대통령이라는거추장스러운직함을벗기고얘기하자.

초대이승만,그는‘희망가와‘타향살이라고되어있더라.4대윤보선은‘유정천리⋅‘눈물젖은두만강,5-9대박정희는‘짝사랑‘⋅전우야잘자라‘⋅‘황성옛터와짝짓기를할수있다.10대최규하는애창곡이없다지만,‘울고넘는박달재와‘비내리는고모령은가끔불렀다더라.11-12대전두환은‘삼팔선의봄과‘방랑시인김삿갓,노태우는‘베사메무쵸다.민주화의두기수대통령김영삼과김대중은가각‘아침이슬⋅‘선구자⋅‘메기의추억과‘선구자⋅‘목포의눈물이라나?노무현은중언부언말고생략하자.

꽤재미있는유추(類推)를할수있어서좋다.애조(哀調)를띠며불러야할곡이너무많다.말이‘희망가지나중에는오히려’절망가’처럼여겨졌다는이승만의애창곡부터그렇다.‘타향살이인들어찌예외일수있으랴.‘유정천리⋅‘눈물젖은두만강⋅‘짝사랑⋅‘황성옛터⋅‘삼팔선의봄⋅‘방랑시인김삿갓⋅‘울고넘는박달재⋅‘목포의눈물등등.진중(陣中)군가라할수있는‘전우야잘자라는씩씩한곡이지만가사는역시슬프다.

노태우가‘베사메무쵸를좋아했다는것은그럴싸하다.박정희가‘새마을노래에노랫말을쓰고곡을붙였다는사실이대단하듯이,노태우가직접사단가를만들었다는일화도있을만큼그도음악에조예가있었다.따라서멕시코산(産)인세계적인‘베사메무쵸는그와어울리는‘근사치(近似値)라는답을매겨도괜찮겠다.미국민요‘메기의추억역시우리국적이아니라는점에서‘베사메무쵸와동격이다.

김영삼과김대중이같이‘선구자라는가곡(歌曲)을가까이했다는것은의미가깊다.다만노래만든사람중하나가친일인사에포함되느니어쩌니하여가슴아프지만.그런가하면‘황성옛터니‘눈물젖은두만강,‘목포의눈물등은일제강점기의민족노래라고주장하며,내가대중들앞에서꽤나부른곡이다.해서친근감이상의무엇이가슴에와닿는다,찡하게!다만‘아침이슬은대통령의목소리를빌기엔너무강한메시지를지닌것같다.아깝다.

매듭을짓는다.역대대통령의애창곡들에담긴눈물,그건국민들의가슴을적시는게아니라되레건조(乾燥)하게만들었다.안타깝다.만약에9월이후에말이다.내게어디서든얽히고설킨그것들에대해이야기할기회가있다치자.더낱낱이분석하여펼쳐보여야하지않겠는가?내손의제법두꺼운악보뭉치에제법무게가실려있다.단서가있다.노무현의애창곡은그가스스로목숨을끊은이전의것들만취하련다.참그의애창곡에다‘울고넘는박달재를추가하더라.최규하와짝이된셈이다.관련서적,대중가요집이나가요사등도여남은권책꽂이에서내손길을기다린다.

과거를묻지마세요

이원우

대과거(大過去)란말이있다.중고등학교때영어공부를하면서많이접했었던기억이난다.과거의어느시점보다더앞선기준(시점)에서,과거의시점까지계속되는시제(時制)를일컫는것으로기억한다.당장예문을하나쓰면좋겠지만,그건영문학자들의몫이지내겐어울리지않는다.그만두자.

나는내대과거를20대중반으로잡는다.그로부터현재이순간까지의지난시제가내게는‘과거다.논리적으로는안맞지만….어쨌든대과거나과거나모두내게는중요한의미가있다.

대과거를되새기기위해오늘나는화두(話頭)를‘과거를묻지마세요로던진다.나애심이부른가요말이다.자연스레타임머신을타고근50년전으로거슬러올라간다.1966년?아니면67년이었으리라.그해6월9일,그러니까내생일을이틀넘긴날,큰사건과맞닥뜨리게된다.군대에서가수나애심을만난것이다.

그얘기를좀해보련다.나는당시8171부대(보병사단)사령부부관참모부에서근무하고있었다.상벌계,사단장M장군의표창장을붓으로쓰는게주업무였다.시인(詩人)이기도한그는워낙표창장주는걸좋아해서,나는항상비상대기해야할형편이었다.그날도그랬었다.가수나애심이위문공연단을이끌고오니,만반의준비를하라는K참모의지시였다.

나는낮에원안을대강잡고부관참모K중령에게내밀었더니오케이사인을보냈다.나는붓을잡았다.감사장,주소(지금기억이나지않는다.)다음에가수나애심이란이름을본문보다약간큰글씨로일필휘지(?)했다.귀하는바쁜중에서도위문공연단을이끌고본부대를방문하여,장병들에게노래와무용등을선사함으로써장병들의사기를크게진작시켜주셨으므로,감사의뜻을표합니다.날짜다음에보병제2×사단장육군소장문×섭이라고붓으로옮기는데20분이채안걸렸던것이다.

나는사무실에서빵으로저녁을때우고,이제나저제나하고연락이오길기다렸다.열시를넘겼을까?참모실전화벨이울렸다.사단장실당번병J병장이었다.나는표창함을들고부리나케장교식당으로뛰어올라갔다.

나는눈이휘둥그레졌다.대위에서대령까지의장교들이밴드에맞춰공연단과어울리고있었다.아니정확하게기억해내자.사교춤을추고있었다.계급의벽이무너져버린것같기도하였다.운전교육대장L대위의모습이보이는걸로봐서그렇게짐작했다는뜻이다.정훈참모(스님)P대위는안보였다.

이윽고부관참모K중령의사인으로연주가멈춰졌다.그리고참모장H대령이감사장을들고섰고K중령이대신읽어나갔다.감사장어쩌고저쩌고….불무리모양이새겨진별두개짜리사단장라이터는아마도스무남은개소요되는것같았다.물론감사장은나애심가수만받았고.

돌아나오려는데K중령이뜬금없이나를부르는게아닌가!노래를한곡하라는것이었다.그때만해도지금같지않아미성(美聲)이란얘길예사롭게듣던터였다.참모들도워낙내가사단장실을자주드나들어안면이있어서그런지반대하지않았다.훤칠한키의나애심이동의(同意)의박수를보냈다.

나는호흡을가다듬고,그의히트곡‘과거를묻지마세요를불러나갔다.

장벽은무너지고강물은풀려/어둡고괴로웠던세월도흘러/끝없는대지위에꽃이피었네./아꿈에도잊지못할그리던내사랑아/한많고설움많은과거를묻지마세요.

노래는물론2절까지였다.우레와같은박수소리가터질정도로반응이괜찮았다.H대령으로부터술한잔까지대접받았다.

그감격이내가평생노래와더불어살게하는계기가되었으리라.나아가대과거와과거를결정짓는경계선으로탈바꿈했고.지금나는운명의끈을지금도가끔느낀다.‘월하빙인(月下氷人),사람은태어나자말자말이다.부부의연이닿을사람끼리보이지않는기운이이승과저승까지넘나든다던가?

대신무뢰한처럼행동한나를L상사가가만두지않았다.그가야전곡괭이자루를내게‘안죽을만큼휘두른것이다.그러나그정도야뭐참을만했다.

그로부터50년가까운세월이흘렀다.나는지금도줄기차게노래를부른다.어디서든,겁이아예사라져버졌다.월하빙인같은사연을안고,때로는저승문턱까지갔다왔다,그것도여러번.그런데감추어져있는곡이있었다.‘과거를묻지마세요.노인학교도학교라면어찌그런걸드러내겠느냐는노파심에묶여있었기때문이다.

그런데성당노인학교에가서보니그게아니더라.그시절의영화가멜로물이었다는,단순한현재의선입견에내가마냥지배당할수만은없다는신념을얻게되었던것이다.6월중순경어느개방적(開放的)인성당노인학교에서나는그동안숨겨왔었던‘과거를묻지마세요2절을끄집어냈다.

구름은흘러가도설움은풀려/애달픈가슴마다햇빛이솟아/고요한저성당에종이울린다./아아흘러간추억마다그립던내사랑아/얄궂은운명이여과거를묻지마세요.

아,반응이예상외였다.하기야과거가없는사람이어디있는가?나도‘대과거든‘과거든‘과거는있었다.부산문단의걸출한스타J교수,그는만약이글을읽고있으면미소를지을게다.누가정말묻지않았으면좋을,그런가슴앓이의과거를그가재생해낼수있을지모른다.그런데나애심의‘과거는묻지마세요는일관되게과거를묻지말라한다.

아무튼좋다.내게주어진시간이앞으로얼마일지모르지만,나는노인학생,특히천주교성당노인대학에서‘과거를묻지마세요를고집한다.주님도말씀하셨지.진정으로회개(悔改)하면구원을받는다고.한걸음더나아간다,어찌쩨쩨하게교우들앞에서만서랴.내일찍이무당(巫堂)제자가넷이있었지.그들중누가이승에발을딛고서있다치자.그가다니는노인학교에서인들왜목청을못돋우랴.

참,나애심에게가수인딸이있었다고했었지.오후엔어떻게든알아봐야할것같다.나보다12살연장인나애심,그리고1966년의그감격,그의딸의나이등에오차가있다면이졸고(拙稿)는픽션이될지모르기때문이다.아무튼다시한번부르짖노라,과거를묻지마세요!

전면주차

하창식

‘전면(前面)주차.아파트에살다보면지상주차장에서자주볼수있는입간판글귀들중의하나이다.비단아파트뿐만아니다.학교나공공장소의화단이조성된곳에서는거의예외없이볼수있다.조성된화단의나무나꽃들을자동차매연으로부터보호하기위하여,화단쪽으로차량의앞부분을대어주차하라는의미이다.다른차들이주차되어있는좁은공간을비집고주차하려면전면주차보다는후면주차가훨씬쉽다.자동차운전을해본사람들이라면누구나경험할수있다.때문에,아파트나공공장소에서전면주차를꼭해야만하는지에대해불만을가진사람들도적지않다.

실제로,주차의편리함뿐만아니라,주차한차량을움직여야할때,후진시발생할수도있는안전사고,특히뒤에서놀고있는아이들이보이지않을위험때문에후면주차시스템으로바꾸어야한다는주장도있다.수목(樹木)들의보호보다인간의생명이더중요하다는논리이다.맞는말이다.하지만,오랜정차후자동차의시동을걸때코를찌르는배기가스의역한냄새를맡아본사람이라면,전면주차의필요성에동감할것으로생각한다.수목들도생명체인만큼,배기가스가수목의생명에도나쁜영향을미칠것임엔틀림없다.비단자연보호관점에서가아니더라도,사람이맡아도머리가지끈거리고불쾌해지는배기가스냄새를꽃이나나무인들결코좋아할리만무할것같다.환경론자는아니지만,나자신도전면주차가바람직하다고생각하는편이다.

차량의전면주차는물론,자동차에서뿜는배기가스로부터수목을보호하고자하는목적이가장클것이다.

하지만,전면주차란용어자체가가지는의미는그리녹록하지만은않은것같다.초보운전자에게‘전면주차라는말은쉽게이해할수없는용어이기도하다.전면주차라는말이우리어법에맞는말인지도확실치않다.아무튼요즘들어아파트화단근처에전면주차를할때면가끔씩머릿속에떠오르는두어가지느낌이있다.

하나는,주차장에차량이많지않을때는아무런생각없이입간판이지시하는대로전면주차를하게되지만,주차된차량사이로전면주차를하기어려워,어쩔수없이후면주차를하게될때,무언가모르게마음속에남는찜찜함이다.또하나는,전면주차란용어자체에서‘전면이란용어가갖는시사적(時事的)의미에기인하는것이다.찜찜한마음은물론,나의후면주차로인해잠깐이나마내차가뿜어내는배기가스에신음할수목들에게너무미안하기때문이다.아파트입주민이라면누구나지켜야할불문율같은규칙을어겼다는자책감또한그렇다.주차가어려워어쩔수없었다고강변해보긴하지만,화단보호를위해만들어진규칙이라면반드시지켜야명색이문화시민으로부끄럽지않을것아닌가.

그런데‘전면주차란입간판을볼때마다,‘전면이란단어에서요즈음우리사회를생각하게된다.전면은즉앞쪽면이란뜻일진대,대한민국의오늘을보면,앞은보지않고뒤만되돌아보며살아가는사람들이적지않다.특히,정치적현실을보면더욱그런것같다.여당은여당대로,야당은야당대로,건설적인대안이나앞으로의대한민국의발전을염두에두기보다는,몸은뒤를향하여서있으면서목소리만“앞으로.”를외친다.폭력이허용되는난장판국회,대화보다는선동과투쟁에집착하는야당,표의논리를앞세운여당의정치적정책결정,지역이기주의적정치에목매다는국회의원님들….국민들은안중에도없는답답한정치현실을보면서가진느낌이다.왜이럴까.모두들대한민국의앞날은생각하지않고눈으로는자신들의뒤만쳐다보면서몸은앞으로기울인채로걷는기묘한걸음걸이를하고있다.우리정치현실이언제쯤선진화되어우리백성들의얼굴에자그마하나마기쁨과행복의미소를짓게할수있을것인지….

진실보다거짓의목소리가더큰,비상식적인사회현실을보면서전면주차를생각해본다.뒤에서놀고있을지도모를아이들의생명을위해전면주차를반대한다며,그럴듯하게큰목소리로외치는분들에게도,목소리를낼수없기에자동차의독한배기가스를그대로들여마실수밖에없는가련한수목들도생각하는아량이필요하지않을까.전면주차나후면주차나근처에있는사람들의안전은당연히최우선적으로고려되어야한다.그것이전면주차니까더위험하다는것은어찌보면억지주장에불과하다.안전이가장중요하지만,그에못지않게인간들에게아름다움과여유를선사하는수목들의생명또한보호될필요가있다.그것이자연과더불어살아가야할인간의최소한의도리일것이다.

돌아온길이가시덤불이든포장도로이든뒤돌아보지말고앞으로만달리는모습,진정으로국민들의행복을위해여야가함께손잡고앞으로달리는정치인들의모습을보는것은과연불가능한것일까.2009년대한민국에서는….

(2009.6.24.)

토끼와거북이

하창식

토끼와거북이의경주를다룬이솝우화.도무지상대가되지않을것같은시합이지만,거북이의승리로끝난다는것은우리모두가알고있는그우화의결말이다.자만해서는아니되고,꾸준히노력하는자만이최후의승자가될수있다는교훈이담긴우화이다.‘네가죽어야내가산다.는살벌한경쟁논리가바탕에깔려있는이야기이기도하다.

어릴적그이야기를처음들었을때,잠든토끼를깨우지않고승리를챙긴거북이가좀야속하고치사하다는느낌을받았었다.그느낌은꽤오랫동안내머릿속을채웠다.

이솝우화에나오는토끼와거북이의손자들이어느날또다시달리기시합을하게되었다.그들의할아버지들이했던것처럼.출발총성이울리자마자토끼는저만치앞장서달려갔고,거북이는엉금엉금기었다.한참을달리던토끼가뒤를돌아보니아직도까마득히먼,저아래언덕에서땀을뻘뻘흘리며기어오는거북이의모습이가물거렸다.너무빨리달려와지친토끼는그만잠이들어버렸다.

거북이는회심의미소를지으며생각했다.“옳지.토끼가깊이잠들었네,함께달려서는어차피토끼를이길수없는걸.이기회야.토끼가깨기전에어서부지런히달려야지.승리는내것이야.”그리곤한참을달렸다.달린다고해봐야거북이는거북이다.그렇지만젖먹던힘을다해,토끼가거의보이지않는곳까지기어가게되었다.그런데갑자기거북이의가슴저언저리에서이런소리가들려왔다.“거북아,너,토끼가잠든곳을지나칠때잠든토끼의얼굴을보았니?뭔가이상한느낌이들지않던?”그소리에거북이는가만히생각해보았다.그제야,잠든토끼를지나쳐달려올때잔뜩일그러진얼굴을하고잠든토끼얼굴이떠올랐다.“그래,평소와달리무언가괴로움이있는듯한얼굴이었어.웬일일까?”

저만치결승점이눈에들어왔다.‘저모퉁이만돌아가면우승은내차지인데…하는생각이들었다.‘에이,그냥가버릴까?‘아니야,토끼에게무언가일이있어.머릿속에서여러가지소리들이복잡하게들려왔다.그때,거북이의가슴속에서,“토끼는네소중한친구야.”라는소리가들려왔다.거북이는,“그래,토끼에게가봐야겠다.분명히무슨일이있어.”그리고는거북이는힘들게왔던길을되돌아토끼에게다가갔다.거북이가다가간낌새에놀라토끼가눈을떴다.과연토끼의얼굴은괴로움으로일그러져있었다.“토끼야,무슨일있어?”거북이가물었다.토끼가대답하였다.“저언덕길을너무빨리달린것같아.언덕을막넘어올때,길게누워뻗어있는나무뿌리에걸려굴렀어.뒷다리가다쳤나봐.너무아파서괴로워하다나도모르게잠이들었나보네.깊이잠들었나봐.너무아팠었는데,한잠자고나니이제조금덜아파.”거북이가대답했다.“그랬구나.아까잠든네모습을보니찡그리고있었어.”그리고는또말을이었다.“그다리로는달리지못해.자,내등에올라타.나랑같이가자.”그러자토끼가말했다.“아니야,그래도시합은시합이고,너랑나랑둘중에한쪽만승자가되어야하는게이번시합의규칙이잖아.나는이미시합에졌어.너라도부지런히가.”

결국,거북이는토끼를등에태웠다.그리곤결승점에다달았다.거북이가말했다.“자,다왔어.네가다리만다치지않았으면당연히네가이겼을거야.난우리할아버지처럼잠든너를깨우지않은채나혼자달려이길생각은없어.자,어서내려와.”그러자토끼가말했다.“아니야,오늘시합은어차피네가이겨야돼.난다리를다쳤으니,내할아버지처럼잠들지않았더라도이길수가없었어.”토끼와거북이가서로“네가먼저.”라고옥신각신하는사이얼떨결에거북이의앞다리가결승점에닿게되었다.토끼와거북이손자들의달리기경주는그들할아버지들의경주에서처럼거북이의승리로끝이났다.

가정과학교,그리고사회곳곳에서예의범절이사라지고가치관이흔들리고있다.삭막하기까지하다.가정의달5월이다.워낙잘알려진이야기라,여러가지재미있는개작,‘토끼와거북이이야기가가능할것이다.하지만,이솝자신이만일오늘이땅에환생한다면자신의우화를위와같이고쳐쓰지않았을까하는생각이든다.‘더불어사는삶의지혜가그어느때보다더절실히요구되는나날들이기때문이다.

(2009.5.)

골목벽화

안태경

가장오래된예술품은그림이아닐까싶다.원시인들이살았던동굴에벽화가남아있는것을보면,인류에게이른바문명이라는것이발상하기훨씬이전에도사람들에게는미적표현의욕구가있었고,그것이그림그리기로나타났으리라고짐작할수있겠다.그림을그리던그때에다른한편에서는손짓발짓하면서괴성을지르는,무용과음악의원형이있었는지모르지만,흔적이남아있지않으니알길이없다.

이렇게발생한벽화는성당의벽이나천장,무덤의벽,절집의벽등에그려지며발전해왔을터인데,이런벽화는한번그려지면장소를옮길수없다는결정적약점이있기때문에종이나캔버스에그리게되었고,이것이상품으로유통되면서엄청난값이매겨지는작품도생기게된것은누구나아는바와같다.이런상황에서벽화가뒷전으로밀리는것은당연한추세라고볼수밖에없겠다.

이렇게뒷전으로밀리던벽화가빈민가담벼락에되살아난것이다.언젠가TV화면에서,어느가난한마을담장에벽화가그려진것을보고,밭에서김매던시골할머니가성장(盛裝)한것같은부조화를느꼈었는데,이번에어느골목에그려진벽화를보면서여러가지생각에잠겼다.

오랜만에아침등산을마치고내려오는길이었다.내가자주택하는하산길에는가파른비탈에조잡한블록집이다닥다닥붙어있는이른바달동네라는곳이있다.집들은시멘트블록으로벽을쌓아올리고그위를슬레이트나함석으로덮었다.낮고,작고,마당이없고,작은출입문을열면바로부엌이거나방이다.큰창문이없고,서로어께를맞대듯빽빽하게붙어있으니햇빛이제대로들리가없다.주거환경으로이보다더열악할수가있을까싶은이동네한가운데에아주가파르고꼬불꼬불한골목이나있다.폭이2m가채안되지싶다.

이골목이간선도로인셈이고,각자의집에가려면양옆으로갈라져나간좁고가파른계단을이용해야한다.이런집에살면서,이런길을오르내리면서이동네아이들은무슨생각을하고있을까?바로눈앞에우뚝우뚝흘립한고층아파트를남의나라풍경쯤으로무덤덤하게쳐다보면서체념하고있는것일까?아니면자기들만버려진사람들이라고생각하고세상을원망하면서좌절하거나박탈감을키워가고있는것일까?아무튼,밝고즐거운마음을자아내는골목이아니라는것만은확실하다.

이골목을여러번내려오면서도동네사람을만난일은극히드물다.그러니그들의표정을읽었다거나대화를통해서얻은추론이아니라,내나름대로짐작한그들의정서다.분명한것은이골목안에서아줌마들의수다나아이들의웃음소리를들은기억이없다는것이다.항상사람이살지않은듯괴괴하고가라앉아있었다.

군데군데균열이생기고곰팡이인지이끼인지거뭇거뭇한것이끼어있는벽면,덧붙여놓았던비닐이찢어져바람에펄렁거리고있는작은봉창,이런것들을곁눈질하면서내려오는내발걸음이가벼울수가있겠는가.싱그러운숲속에서상쾌해진기분이엉망이된것같아눈살이찌푸려진것이사실이었다.심화되어가는빈부격차를생생하게목격하고마음이무거워졌지만,이런거대담론을끄집어낸들무슨소용이있겠는가.다만희망의싹이돋아날기미를전혀엿볼수없는피폐한동네가안쓰러울따름이었다.

그랬는데이날하산길에,이골목어귀에들어선나는눈이휘둥그래졌다.블록벽에벽화가그려져있었기때문이다.한두폭이아니고100여m되는골목양옆벽면이모두벽화로메워져있었다.별을따서바구니에담는아이들,사이좋게나들이가는아이들,뛰노는아이들,꽃밭에물을주는아이들,모두가밝게웃고있다.

우중충하고삭막하던골목안이일변해서동화의나라인양아름답고생기가도는공간으로바뀌어있었다.아이들가슴밑바닥에억눌려있는꿈과희망을불러내기위해서애썼다는의도가역력히보였다.누군가는‘그림이무슨소용인가,라면이라도몇박스가져다주지.하고생각할지모르지만,라면으로어찌꿈을키울수있겠는가.이동네아이들이시장기를느끼는까닭은먹을것이없어서가아니라,꿈을가꿀토양이부족하기때문이리라.그래서봉사자들이이동네에찾아와벽화를그리면서아이들가슴에꿈이싹트고자라기를염원한것이아닐까싶다.

사람은살고있는환경에서지대한영향을받는다.지저분하고삭막하던골목이화랑인양아름다운그림으로가득차고,그림을그린봉사자들의따스한마음이가시지않고그대로고여있으니,이길을오며가며아이들은자기도모르는동안에정서가순화되고마음이열려희망의날개를펴볼수도있지않겠는가.

골목끄트머리에‘반딧불봉사단:www.sll.or.kr이라는홈페이지주소가적혀있었고,행복을비는말들이곁들여있었다.발길을멈추고바라보고있는동안에잔잔한감동이가슴에스미는듯싶었다.소외된지대에서고통받고있는사람들에게내미는이작은손하나가이동네아이들에게는앞으로키워갈꿈의밑거름이되고,고달픈삶에지친어른들에게는가슴으로다가가는위로가되기를바라면서골목을빠져나왔다.

사람의온기

안태경

샤워할때왼쪽젖꼭지에손이닿으면약간의통증을느꼈었다.별거아니라고생각하고그대로방치했는데,증상이달포나계속되고제법큰멍울도생겼다.이대로두어서는안되겠다싶어피부과로찾아갔는데,멍울을만져본의사가내얼굴은보지도않고“일반외과로가보라.”고툭한마디던졌다.무엇때문인지물어보고싶었지만,의사의얼굴이너무냉랭해말을붙여보지못하고그대로나와서외과의원을찾기시작했다.

요즘은외과라면대체로성형외과나정형외과지일반외과의원은드물다.그래서물어물어겨우찾아가환부를보였더니모종합병원으로가란다.‘병원까지지정해줄필요야없지않겠느냐고생각하고있는데,“대학병원에있을때이런거조직검사를해본일이있는데별거아니더라.”고덧붙였다.

‘아니!그렇다면조직검사를해볼필요가있단말인가당황한나는집으로돌아오자마자인터넷으로검색을해보았다.‘남성유방암이란검색어를쳤더니유방암환자가운데200:1정도의환자가남성이라고나왔다.자료의신빙성이나남녀비율이문제가아니라남자도유방암에걸릴수있다는사실에놀라지않을수없었다.나이가나이인지라얼마든지암에걸릴수는있다.그리고받아들일용의도있기는하다.그런데왜하필유방암을걱정해야한단말인가?

그날밤을뜬눈으로새우다시피하고이튿날아침병원으로향했다.종합병원으로가기로작정하고길을나섰는데,가다가가만히생각해보니,종합병원으로가면수속이복잡하고오래기다릴뿐만아니라자칫하면불필요한검사까지하게될지도모르겠다싶어,‘각종암검진이라는진료과목이있는개인병원이생각나거기가기로하였다.

병원으로들어서니시설이낡고허름했다.접수창구로다가간나는왠지미덥지않아“여기서암검진을할수있느냐?”고따지듯물었더니“할수있다.”는대답이돌아왔다.

대합실에서한참앉아있노라니진료실문밖으로몸을내민,나이지긋한의사가나를보고들어오라고했다.뜻밖이었다.여느병원같으면창구에앉은아가씨가이름을부르며진료실로들어가라고하거나,대기실에비치된모니터에대기순번이뜨고,차례가되면자동으로호명하게되는데,의사가직접나와맞이해서같이진료실로들어가다니….그동안수없이많은병원에들락거렸지만처음겪는일이라어리둥절하면서따라들어갔다.

진료실에들어가서도자기책상에무게를잡고앉아나를대하는것이아니라,길에서친구를만나잡담하듯선채로“어디가편찮으냐?”고물었다.환부를보이며“암이아닐까걱정이되어서왔다.”니까멍울을만져본의사가“사진을찍어보자.”고했다.권위의식이란눈곱만큼도없는이웃집할아버지같이수더분한모습에서,요즘대형병원등에서사라져가는훈훈한인간미같은것을느낄수있었다.

이런대화를하는동안에‘혹시암이아닐까.싶어불안했던마음이어느정도누그러진것은,의사의표정이너무편안했기때문이아닐까싶었다.‘별거아닐거니까걱정말아라.하는암시를주고있었는지모른다.사진을찍고나서대합실에앉아있는동안에가슴이두근거릴법도한데의외로덤덤하였다.

X레이촬영기사가필름을들고간지얼마안되어이번에도또의사가문밖으로나와나를부르기에들어갔더니,선채사진을들여다보고있던의사가나를돌아보며“암은아닌것같다.”고했다.안도의숨을쉬면서도X레이사진만보고진단한것이어쩐지못미더워“좀더자세히알려면어떻게하면되느냐?”고물었더니,“초음파검사를해보고이상한점이발견되면조직검사를하면된다.”고했다.

이런과정을거치는것이너무나당연한데도,다짜고짜로암일지모른다면서바로조직검사를하는병원이있다.아내가몇년전에이런경우를당해검사결과가나올때까지의약일주일동안에얼마나마음을졸였는지이루다말할수없다.정상이라는결과통보를받고,안심이되었다기보다사기를당한것같아의사와병원에대해속으로많은욕을했었다.그런일이있은터라,진단의단계를자세히말해주는의사가고맙고존경스러웠다.

초음파검사까지해본결과암은아니고단순한젖멍울[乳腺炎]이라는말을듣고나오면서고개를갸우뚱했다.‘여든이넘어오십견에걸리더니,여든여섯살이나된남자가슴에무슨놈의젖멍울이냐,내몸뚱이가유별나게생겼나보다.라는생각이들었다.그래도암이아니라니얼마나다행한일인가.그리고얼마나고마운일인가.나도모르게합장하며감사기도를드렸다.

제집에찾아온손님대하듯일일이일어서서환자를맞이하고,전문지식을코끝에걸고환자위에군림하려는생각이전혀없는의사,그의사가운영하는병원에는사람의냄새가오롯이남아있었다.편리와세련미,그리고속도를지상목표로삼고치닫는디지털세상한가운데에낙도처럼남겨진아날로그공간,그공간에서나는내건강을확인했고,덤으로훈훈한사람의온기에젖어볼수있었다.

가족묘원조성기(記)

이병수

사자(死者)는말이없다.기쁨도슬픔도불평불만도일체함구한다.그러기에우리는더욱그를위해정성을다하여조상(弔喪)의예를갖추어보낸다.여기에서생겨난것이장묘(葬墓)문화이다.

그간우리장묘문화는많은변천을하였다.8ㆍ15해방직후까지도장례는으레매장을하는것으로만알아왔다.그런데묘지로잠식되는국토가매년여의도광장의1.5배가된다는통계가나오면서매장에따른규제가생겼다.반면에화장(火葬)을권장하는정부시책과함께납골당이우후죽순처럼생겨났으며,이에따른전문업체와사찰까지등장해재미를보았다.

그러나모든일에는장단점이따르기마련이어서,그후납골당의문제점이곳곳에서드러났다.통풍이잘안되어골분이부식,냄새가진동하고벌레까지생겨,방문하는후손들이상을찌푸리게하는등으로인기가떨어짐으로써주춤하고있다.스피드시대에는변천의속도에도가속도가붙는모양이다.

이런장묘문화의변천파문은우리가문에도예외없이불어닥쳤다.6~7년전설날친족간세배끝에우리종형제들이모여자연스레가족묘지에대한논의가되었다.그리하여논의끝에지금산청군생비량면도전리실매동집현산기슭의밭에자리한할머니묘소밑에납골당을만들기로합의가되었다.

이곳은1957년할머니가별세하셨을때아버님3형제가의논하여,선산(先山)이있는단성면묵곡리까지는거리가멀기에가까운이곳도자리가괜찮다는풍수지관의말에따라장지로설정했던곳인데,그후내아버님과어머님의유택도그밑에마련하였던것이니,이미세분의묘소가있는곳인지라,이곳에납골당을만들어앞으로후손들이작고하면모두여기에모이도록하는게좋겠다는의견으로모아졌다.

처음엔90년전에돌아가신할아버지묘소(단성면묵곡리에있음)까지도손을대어다시화장을하고유골을단지에넣어모셔다납골당에안치할것까지를논의하였으나,할아버지비석까지옮겨야한다는문제에봉착하고,한편으로는묘소에함부로손을대었다가손해수를보는수가있다는미신적인경고성말도나오는등,복잡한문제가생겨이는원점으로돌렸다.

그리하여할아버지직계후손들의납골당으로하되,이미묘지에묻혀있는분은그대로두고,앞으로작고하는사람들만에한정하기로하였었다.따라서내중부님산소도같은동네산에자리하고있으나그대로두고,다만숙부님내외분께서는최근까지부산에사시다가몇년전작고하심으로써,현재부산영락공원납골당에안치돼있는지라,가족납골당이마련되면최초로모실작정을하였던것이다.

그러던차에2년이지난후납골당의문제점이심각해짐을보고이를중단하기로하여,1년후에다시논의한결과납골당대신가족묘원을조성하기로수정계획을수립해추진해오다가,금년4월에본격적으로이일에착수하였다.

먼저약900평되는땅의정지작업을하였으며,입구에오석으로된우산공후손묘원(愚山公後孫墓園)이란표석을세우고,뒷면에간단한비문도새겼다.이튿날가족대표몇사람이고유제(告由祭)도지냈다.

이묘원에는표석에새겨진그대로우리우산공후손들이묻힐것이다.앞으로매장은어렵게될것이므로,화장을한유골이주로묻히게될것이다.봉분(封墳)은만들되그리크지않게하고,공원묘지나유엔묘지처럼개인이름을새긴조그마한비석도세울예정이다.묫자리순서는위에서부터차례차례잡아나갈것이니몇천년은계속되리라예상한다.요즘수목장(樹木葬)이란말이나오고있는데,그것은먼훗날당시의후손들이알아서할몫이리라.

이와같은가족묘원을조성하는것은후손들에게숭조,효행사상을북돋우고,자손의번성을기원하며,유명을달리한영혼의세계에서도한데모여지냈으면하는염원이있고,앞으로후손들이편하게,자주선조의묘소를참배할수있게되었으면하는바람도있기때문이다.이번에가족묘원을조성함에있어,종제들이‘형님생존시에이일은마무리하고가셔야되지않겠느냐?하는요망에따라이를추진해왔던터이므로,이제빗돌을세워고유제를지내고나니무거운짐하나를벗은것같아홀가분한기분이다.(비문참조)

<정면>

陜川李氏愚山公

後孫家族墓園

<뒷면>

우리는愚山公의후손이다.公은陜川李氏江陽君31世로諱가尙鎬시다.淸香堂李源,竹閣李光友,菊軒李廷奭先生의後裔이며1864年11月23日丹城黙谷里에서출생하셨다.學德이兼備해文士生活로一貫,訓長을歷任,遺集도남기셨다.1958年長男億柱의主管으로愚山集을漢文本으로간행했고,1995年長孫炳壽가從弟들과合心,다시國譯本으로발간했다.配晋陽河氏⋅全州崔氏를맞아三男三女를두었다.公의墓所와碑石은丹城黙谷里山幕洞에있다.우리는一祖同根가족묘지를造成하여幽冥의世界에서도함께모여지낼念願으로여기愚山公後孫墓園을設定한다.後孫들은崇祖⋅孝行⋅敦睦함으로써번성하기를希求하면서이表石을세운다.

西紀2009年7月20日

愚山公後孫

子(作故):億柱(配;柳潤秀)甲柱(配;沈道鳴)康柱(配;鄭点)

女(〃):商山金氏宅旬配,晉州柳氏承台配,安東權氏泰慶配

孫子:炳壽(妻;金貞子),靑一(妻;權奇順),炳乾(妻;金聖順),炳哲(妻;權德子)

孫女:慶年,他連,又順,炳蓮,炳順

曾孫子:東烈(妻;玄靜和),奉奎(妻;曺順美),源奎(妻;成敬任),炯奎(妻;李珍玉),光勳

曾孫女:政娥,賢娥,宣和,奉順,旼京,새미,和永

玄孫子:泫錫,縡炫,縡雄,浚成

玄孫女:柔旼,修珍,知原,知胤

맥아더장군동상앞에서

-6ㆍ2559주년에부쳐-

이병수

우리역사상최대민족적비극이었던6ㆍ25전쟁이발발59주년을맞았다.3년간에걸친동족상잔의전화는온국토를폐허로만들었으며,막대한인명피해를내고53년7월27일휴전이조인되어오늘에이르렀는데,그불씨는아직꺼지지않고미완의숙제로남아우리를갖가지형태로괴롭힌다.

그간에우리의기억들은희미해져가고있는반면에,올해에는유독당시에우리를돕기위해UN군으로참전했던외국인용사와그유족들이UN묘지를참배하는등으로우리의6ㆍ25를상기시키고경각심을울려주는것같아씁쓸한생각이든다.이에나는문득인천자유공원에세워진맥아더장군의동상을찾고싶어진다.마음같아서는당장이라도인천으로달려가당시도탄에빠졌던우리를건져준그분의동상에참배하고감사를드리고싶다.그러나부산에서인천은남한땅의극과극으로벌어져있는터이라쉽지않다.

다음기회로미루기로하고,우선인터넷을통해장군의동상을상면키로하였다.다행히단번에쳐서맥아더장군의동상을만날수있었다.화면에나타난맥아더장군의늠름한입상을대하니옷깃이여며진다.“장군님!참으로고맙습니다.”하는말이절로나온다.만약그때장군께서인천상륙작전을성공시켜반격을가하지않았더라면대한민국은영락없이공산군의밥이되고말았을것이니,그렇게되었더라면지금우리국민은현재북한인민들이겪고있는그대로의불운의길을걸으면서살아가야할것이아니었던가하는것을생각하니,맥아더는우리의은인이었음이분명하다.

그런데어느날갑자기모대학K교수가“맥아더는우리의통일을방해한원수다.”라는주장을서슴지않고하였다.이를신호탄으로기다리기라도한듯,그추종세력들이장군의동상을넘어뜨리려함으로써이를지키려는사람들과충돌이벌어지고,나라가벌집쑤셔놓은듯했다.다행히‘정의는힘이라고,장군의동상은철거일보직전에서모면되었다.

만약좌파세력들에의해동상이철거되고말았더라면,우리체면은무엇이되었겠는가?당시정의를돕기위해평화의사도로이국만리땅에달려와목숨을걸고싸워주었던유엔참전용사들에게무슨낯으로대할수있었으며,국제연합에대하여는어떻게변명을할수있었겠는가?아찔하기도하다.

맥아더장군님!정말로죄송합니다.8ㆍ15광복후우리나라는비록일본의굴레로부터는벗어났지만,뒤이어그에못지않은공산당이검은손을뻗침으로써국민이좌우로갈라져사상전을벌이게되고,때마침미국과소련의합작품인3ㆍ8선장벽이만들어짐으로써겨레는하나인데나라는두동강으로쪼개어지고말았습니다.그러므로오늘날우리나라를이처럼분단시킨책임이미국에도있었던것이니‘뿌린대로거둔다는법칙에따라이런결과가초래되었음을너그러이이해하시고받아들여주시기바랍니다.그리고장군님!장군님의동상을넘어뜨리려한것은결코우리국민대다수의뜻은아니고,소수세력들에의해자행된것이었음을명백히말씀드리오니올바로이해하시기바랍니다.

오늘날우리사회에‘잃어버린10년이란말이나돌고있습니다마는,한때의우리들의실수로우리가원치않았던10년세월을허송하게되었음을지금은모두가후회하고있답니다.장군님의동상철거소동도그기간동안에야기됐던것이니이해해주시기를당부드립니다.

맥아더장군님!이제는안심하십시오.앞으로는우리민족과나라를건져준은인인장군님을원수로몰아붙여동상을철거하려는그런무례한자는결코나오지않을것입니다.

우리나라가8ㆍ15광복을맞은지도64주년이되었습니다.우리민족은한때의단합심부족으로일본에36년간국권을빼앗기기도했습니다마는,결코무능한민족은아니어서그간에‘무에서‘유를창조할수있었습니다.그리하여오늘날세계경제10위권에육박할정도로경제성장을이룩함으로써개발도상국들의부러움의대상이되고있습니다.우리의‘새마을운동이주효해아세아각국의경제개발모델로까지인기를얻고있습니다.

우리는민족적자긍심을갖고스스로의발전을이룩하였으니,이젠6ㆍ25때처럼남에게구원을요청하는일은결코되풀이하지않도록자립성장을함은물론,나아가서는당시각국으로부터입은은혜에보답하는뜻으로도앞으로는우리가약소국가에대해서지원을할수있도록할것입니다.

맥아더장군님!참,한가지큰아쉬움이있었습니다그려.장군님께서평양을점령하고압록강까지진출해갈적에우리에게는남북통일의희망이바로눈앞에아른거렸습니다.그런데중공군의개입으로그희망은깨어졌습니다.세계대전으로확산될것을우려한트루맨대통령에의해산산조각이나고말았으니,그안타까움을어디다비유하오리까?장군님께서도필시체계상엄연히통수권자인상사에게항명을할수가없었으므로눈물을머금고복종을하지않았겠느냐싶어이해를합니다.우리국민들은남북통일의절호의기회를놓친것이천추의한으로남아있지만,돌이킬수없는역사속으로묻혀버렸으니누구를원망하려하지는않으렵니다.

우리는결코좌절하지않고,그때우리를도와주셨던그은혜에보답하기위해서도손잡고힘을모아당면과제인통일을성취시키도록하겠습니다.지하에서나마지켜봐주십시오.

장군님!감사합니다.

게곤노타기(華嚴瀧)

윤용흠

작년5월나와처는닛코(日光)를관광했었다.

닛코는1617년도쿠가와이에야스의묘소로서도쇼궁(東照宮)이세워지면서부터유명해진명승지이다.1934년국립공원으로지정되면서부터그명성이국내외로떨치게되었다.내가60세되던해(1987년)에도일본의고도들과이곳을관광한적이있었다.험준하고사고지점으로유명했던‘이로하토오게(50고개)를만원버스로오르내릴때,식은땀에젖으며마음이조마조마했던기억이새롭다.지금은국철사철(社鐵)은물론,고속도로의발달로교통은사통팔달로통하고숙박시설등기타관광시설이획기적으로바뀌어참으로금석지감을금할수없었다.닛코에서의관광은역시주젠지호(中禪寺湖),게곤노타기,도쇼궁등이초점이되고있다.

주젠지호는남성적인난타이산(男體山)의용암류(溶岩流)에막혀서이루어진언색호(堰塞湖)이다.넓이11.5,둘레21,수심163(평균94)인데고랭지에속하는호수로서는결빙치않음이특징이다.호변(湖辺)곳곳에별장지,야영장,유람선선착장,사찰(주젠사),온천장등이있어관람객들을즐겁게하고있다.

광막하지않고꿈꾸듯이잔잔한호수,명미한산봉으로둘러싸여우아하고기품있는호수.나는내고장이웃에자리하고있는어느호수인양,그리움이조근조근가슴속에스며드는듯함을느꼈다.형편이된다면호숫가에텐트라도치고한보름쯤쉬어갔으면하는생각이꿀떡같았다.

호수의동쪽끝오지리(大尻)에서다이야강(大谷川)이게곤노타기로되어흘러내린다.높이97,폭7,오지리강의수위조절에의해서겨울갈수기에도1(초당)의낙수를볼수있다고한다.100에가까운아득한절벽,기암괴석의연속이다.꼭대기바위끝에서서폭포의굉음을들으며,밑바닥에괸검푸른물살의소용돌이를내려다본다면어떤심정이들것인가.아마도공포이전에전율,혼절하여졸도하게될는지도모른다.

초당9,000의물을쏟아붓는나이아가라나빅토리아폭포의장엄함에는아득히못미치나,일견수려한묘미를느낄수있었다.그러나단아하고수려한묘미속에감추어진삼엄한기운!아니,서슬이시퍼런비수가그속에서번쩍이는듯한느낌을주는것은웬일일까.나의그런느낌의연유를더듬기로한다.

후지와라미사오(藤原操,1886~1902,명치36년자살)라는청년이있었다.그는일본의수재중의수재들만입학할수있다는도쿄제1고등학교학생이었다.그의뛰어난재능과예리한판단력은선후배는물론국민적선망의대상이었다.그러나그는‘인생이란무엇인가라는문제를안고번민에번민을거듭하고있었다.무한한공간,유구한시간,그속에미미하게겨우존재하는(5척단신)인간,그진상과존재의의는과연뭣일까.실체도흔적도없는시간과공간은과연실존하는것일까.실존한다면인간과는어떤관계에있을까.부싯돌한번번쩍할사이에사라져버리는,순간존재인인간!달팽이뿔끝만도못한좁은공간에서제몫을아귀다툼하다가일순에사라져버리는미미한인간.살아갈만한가치는과연있는것일까.인간은어디서왔다가어디로가는것일까.그렇게할(왔다가는것의)의미는뭣이고진상은또뭣일까.그는‘인생의진상을밝히려철학과학문들을천착연구했으나점점더깊은회의에빠지고말았다.회의가회의를불러더깊은회의속을헤매게되는회의주의에빠져버렸다.번민에번민을거듭하다가‘세상만사는불가해라는결론에이르게된그는,삶의의의(진상)도모르면서삶을계속하는것은어리석은것이라고생각하였으리라.자살을결심하고이곳게곤노타기로달려왔다.투신직전에바위끝에서서세상에남긴글[岩頭之鑑]이있다.원문에따라필자가졸역(拙譯)하면이렇다.

바위끝에서서세상에남기는글

무한한하늘과대지,유구한과거와현재,나5척밖에안되는작

은몸으로이크낙한신비를헤아리려하였으나,진상을밝히려는

철학과학문에서는아무런결론을얻을수없었다.(내가판단컨대)만유의진상을오직한마디로말하면‘불가해(不可解)!일뿐.

한(풀지못한)에사무쳐번민끝에드디어죽음을결정하게되었

으니,이미바위위에서있음에도가슴속에아무런불안이없도

다.죽음직전에깨달은바는커다란비관은커다란낙관과일치

한다는것임이라.

그는죽음직전에최대의비관과최대의낙관이일치함을깨달았다.위대한각성(覺醒)이다.사물에는언제나긍정적인면과부정적인면이있게마련이다.인생의문제에도긍정적견해와비관적견해가있는것이사실이다.그는그요사한회의주의에빠져서헤어나지못하고인생은드디어불가해라는회의적결론을내리고자결하였다.애석하고안타깝고통탄스러운일이었다.그가만약‘인생의진상은영원숙제임을깨닫고학문에정진했었더라면그의행복은물론세상에크게이바지했을것이아니었을까.

그가만약원효의‘제법일체유심조(諸法一切唯心造)-만사는내생각여하에달려있음-의진리를이해했었더라면그수재의비극은없었을것을,두고두고아쉬운일이었다.공자께서는‘삶도모르는데죽음을어찌알랴라고하시면서도70평생을모범적으로사셨다.따지고보면인생의문제는각자주관적견해의몫이다.

학문의아버지아리스토텔레스는로마(야만국이아닌)에태어난것을감사했고,남자(자유로활동할수있는)로태어난것을감사했으며,플라톤과동시대(스승으로모실수있게)에태어난것을감사했다.태어난다는것자체가신성한축복이고최대의은총이다.사실긍정의시각으로주변을살피면행복한일아닌것이없고감사할일아닌것이없다.더구나우리나라가OECD가입국중자살률제1위라는오명을감안할때,우리청소년중에도이런우를범하는경우가있지나않을까생각하니,마음이더욱암울해짐을견딜수가없다.

우리내외는전망대에서즐거운척사진을찍기도했으나,110년전에있었던그투신의충격이줄곧내가슴을아리게했다.

도슈궁(東照宮)

윤용흠

에도바꾸후(江湖幕府)가개막되기수10년전어느날,젊은길손이비를피하려어느집에들렀다.미소에교양미가감도는여주인이친절히맞았다.수인사에이런저런이야기중에비가그쳤다.길손이떠나려고인사하자,여주인은‘잘가세요대신하이꾸[일본의단가(短歌)]한수를들려주었다.

“나나에야에하나와사께도모야마부끼(山吹)노,미와히쯔다니나끼조가나시무”(겹겹이눈부시게꽃은피어도단하나의열매도맺지못하는황매(야마부끼,山吹)는서글라.)[拙譯]

길손은“무슨뜻입니까?”라고물었으나여주인은넌지시웃을뿐이었다.사나이는밤새워골똘히생각했다.‘겉모습그럴듯하나,내용이빈약하니참으로아쉽다.는자신에대한충고라고받아들였다.그후그는심혈을기울여건축미술을공부했고드디어건축학계의거장이되었다.이사나이가후에도쇼궁(東照宮)건축의총책임자로임명된오타도깡(太田道觀)이다.초등학교6학년담임이셨던김경섭선생님께서들려주셨던말씀을잠깐회상해본것이다.

일본역사에서110여년간이나지리하게계속되던전국시대의피날레,그대단원의막을내린것은도쿠가와이에야스(1542~1616)바로그였다.인내와끈기의사나이,‘꾀꼴새가울지않거든울때까지기다린다.는기다림의사나이였다.바위같이함묵하며태산처럼장중하나,일본제1의명궁(名弓)답게전술에민첩했고,시류(時流)를헤아려승기(勝期)를포착하는전략의대가였다.절대자도요토미히데요시가어린아들을남긴채죽은후,그는재빨리세력을규합하여세끼가하라(關原)의결전에서수적으로우세한적을격파하여1600년그는드디어천하의대권을거머쥐게되었다.그는조정으로부터세이이다이쇼궁(征夷大將軍)에임명되어1603년에도바쿠후를개설하고,15대쇼군도쿠가와요시노부가정권을조정에봉환(1867년)할때까지260여년간의바꾸후정치에기초를이루었다.

이에야스는오사카성에잔존하던도요토미히데요시추종세력을완전히소탕한후1616년78세의생을누리고사망했다.유언에따라시즈오카의구노산(久能山)에묻었다가이듬해닛코산(日光山)으로이장하였다.조정에서내려진‘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라는시호에준하여그의묘당을도쇼궁(東照宮)이라칭하게되었다.

“닛코를보지않고는만족하다고말하지말지어다.”라는일본격언은과장된것이기는하나,수려한경관속에예술미의극치를이루었다는도쇼궁은세인의관심을끌기에충분했다.더구나이에야스의손자3대쇼군이에미쯔(德川家光)는슬기롭고과감한정치가로서에도바쿠후의기초를확고히다진인물이었다.그는전국에할거(割據)한봉건영주인다이묘(大名)들을통솔함에있어서도실로과감하였다.“그대들이바쿠후의명을반대하려거든지금즉시영지(領地)로돌아가서군비를갖추어라.3년간의유예를줄터이니그때나에게도전하라.미약하나마내가직접응해주겠다.”라고우회적으로엄포를놓았다.노련한역전의명장인그들영주들도20대의젊은쇼군이에미쯔에겐끽소리못하고유유낙낙할뿐이었다.그런이에미쯔가도쿠가와가문의명예를걸고심혈을기울여건조한것이현존하는도쇼궁이다.

동원된당대의명장(名匠)들-건축가,조각가,미술가등1,500명과기타인부들450만명이1년5개월만에완성했다.투입된금품또한놀랍다.금56만8천냥,은100관,백미1천석등이었다.어디그것뿐이었겠는가.눈치보기에급급했던다이묘(大名,領主)들이충성을경쟁하며음양으로헌납했을금품과노역은또얼마나많았을지짐작이간다.어쨌든,그렇게해서건존된도쇼궁이다.

정문은요메이문(陽明門),7색으로장식된이문에는400여개의예술품이정교하게조각되어있다고한다.대충보았을뿐자세히살필겨를이없었다.정문을지나면신큐사(神廐社,馬房間)가보인다.말을질병으로부터지킨다는신앙에서,원숭이8마리를조각했는데,그중세마리의명칭이특이해서나의관심을끌었다.1)미자루(자루는원숭이의일본어)-보고도보지못한척해야하고,2)이와자루-아는것도모르는척말하지않아야하며,3)기끼자루-들은것도못들은척해야한다는것이다.이것은인내와기다림의사나이인이에야스의처세술을암시하는것으로,아마도그가출타할때마다이경구를명심했으리라.

내부의전각(殿閣)들은본당을중심으로부채꼴형태로배열되어있다고한다.이들전각에는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까지등록되어있을만큼금은으로장식된예술품과국보급유물들이많다고하는데우리는그것들을자세히살필겨를이없었다.국내외관광객들도많은데,더구나중고교학생들의여행단,그대군단의물결이겹겹이이어지는바람에노인인우리내외는그물결에휩쓸려밀려다녔을뿐,감상은커녕제몸하나건사하기도힘들었다.시간제약(버스출발시각)이엄격한데다전각을옮겨갈때마다신발을벗고신어야하는짜증까지겹쳐서결국겉핥기관람이되고말았다.언젠가하루쯤의여유를가지고찬찬히살필수있는기회가오기를기대하면서총총히버스에올랐다.

나는귀로에일본중세봉건사회의대표적인물인이에야스를곰곰히생각해보았다.그는끈기와인내의사나이,기다림의인물로대표된다.그리고그는검소검박한생활인이었던듯하다.그의상관이었던오타노부나가와도요토미히데요시와의여자관계를비교해보면,전자들은귀족적이고미모가뛰어난여성을측실(첩실)로삼은데비하여이에야스는건강하고서민적인여성을택했다.그런점으로도그의사람됨을알수있다.그러나그는꾀꼴새가울지않거든죽여버리거나울려보려고애쓰지도않았다.울때까지지긋이기다렸다.그는때가될때까지기다렸다가대세를타고천하를통일했다.그는우리나라에서도입지전적인물로추앙받으며그의전기가한때범람했었다.

그의인내와끈기는아직도미덕일수있겠으나,꾀꼴새가울지않거든울도록무슨수를써야지한없이기다리기만한다면입벌리고사과떨어지기를기다리는것과뭐가다르랴.모르는척,못본척,못들은척하는것은개인의일시적처세술(위장술)은될지언정적극적인삶의태도는아니다.객관적조건이유리해지도록적극적으로작용하는것이삶의정도이며현대의미덕이다.위장하고먹이를기다리는것은‘파충류의전술이라고까지폄하할수없으나,현대에있어선미덕이될수없을듯하다고생각되었다.

군청색두루마기

손수영

언니,참멋져요.오랜만에만난후배가찬탄을해준다.내가입은두루마기에대한그녀의인사대신한첫말이다.아무렴그렇지,당연하다는듯사양하는눈흘김한번없이그녀의눈부신찬사를고스란히다받아들인다.지난해12월,<수필>70호출간기념회가있는구내식당에서다.

쪽풀한소쿠리거머담아몇날몇밤을우리고우려내어멋과한과창한가락배어들게만든우리의쪽빛.그쪽빛을닮아서늘한듯담백한듯맑은듯,그러면서한없이수순한글들,푸르면푸르다고붉으면붉다는매운글발들,겉과속안팎이다르지않은문학을보듬고45년동안꾸준히달려온국내최장수수필문학지가바로‘수필부산이다.

중심권에서살짝빗겨간변방의문학지이지만그것에는세월이굽이굽이주름져있고,생활속에서자아내는지혜와삶의향기가은근히스며있다.개인의역정이한개인에게만그치지않고사회의흐름과함께가거나그그림자를반영한다는것도깨닫게한다.어떤이는,오른손보다는왼손에서,다수보다는소수나약자에게서,그리고중심권보다는변방에서예술이태어난다고주장하지않던가.

그자부심때문일까.별일열일다제치고그기념식장엔꼭참석하고싶었다.아무리먼곳일지라도,어떤곤란한일이내앞에가로놓일지언정무릅쓰고참석해야한다는강박증까지생긴것이다.‘험한세상다리역할을했을‘수필부산이아닌가.그리고또하나의간절한이유는,자신은과일이라하는데남들은채소라고부른다는토마토같은내글을덩달아자축하고싶은마음이무엇보다도강렬했기때문이었다.

명절도아닌평일에한복을입고참석해야겠다는데에생각이미치자,마치아련하고고아한우리어머니의모습을재현하는것같아가슴까지설렜다.나에게도아직설레는가슴이남아있었다니놀랍기조차하다.더구나나는그변방의예술,쪽빛을닮은군청색두루마기까지덧입을참이지않은가.

쪽빛보다더진한,이두루마기에는50년정도의해묵은세월이스며있다.비록아슴푸레하게삭긴했으나거기엔어머니의젊은날이푸르게숨을쉬고,아삭하게어린우리들의풋내나는웃음소리가들판의쪽풀처럼돋는다.

마치어제일어난일처럼생생한기억을간직한이오래된두루마기는빛깔조차남성성이강하지만,깃과앞섶이나솔기조차도남자두루마기같이둔중해보인다.나같이촐싹대는사람에겐꽤괜찮은옷이다.그러나기장이무릎까지만내려올정도로깡총하고소매도저고리끝동이다드러날정도로짧은편이다.길이로말하자면둔중한느낌에비해엇박자를놓고있다.어디그뿐인가.목도리역시목을한번밖에두를수없이짧아서얌전하게꼭눌러놓아야제대로모양을내게된다.그러고보니이군청색두루마기는내그리움의초상인우리아버지를어지간히닮은듯하다.

내가시집올때친정어머니에게서물려받은것이라그런지어중간하다.어머니의키가나와비슷한데도왜그리어중간하게만들었는지모르겠다.5,60년대의유행이그러했던것일까.그때나지금이나두루마기는공임이비싸서쉽게맞춰입을수없다.유행은또어찌나도삽을부리는지발목까지내려오는긴두루마기,종아리정도의얌전한두루마기,엉치를살짝덮는반두루마기,당의비슷한두루마기,오방장두루마기,누비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반짝이두루마기등등십여가지는되지않을까.값비싼두루마기를유행따라해입을처지도아니지만,나는이만큼아름다운두루마기를아직보지못했다.그래서신식두루마기에는관심이없는것이다.

늦가을에서다음해초봄까지한복을입어야할땐반드시이구식두루마기를떨쳐입고나선다.하얀고무신을받쳐신고걸으면마치내가우리어머니처럼고아하다는몽연한환상에빠지게되는데,나는그몽연한느낌이참좋다.

어머니에게물려받은건두루마기뿐만이아닌것같다.지금내가수필을쓸수있는바탕도어머니에게서나온게아닐까.젊은어머니는단편소설을써서지방문학지두곳정도에게재한적이있었는데,그중‘아내라는단편소설이실린지방문학지<수양>을미국사는남동생이보관하고있지싶다.

내가수필로등단하기전에이미돌아가신엄정한성품의어머니지만,저세상에서내글을읽는다면아마도흐뭇한미소를떠올렸으리라.잘못을저지른나에게따끔한질책으로마음의짐을벗게하거나위로를해주셨던어머니지만,이제는꿈길로나마오셔서잘했다고등을두드려주시겠지.

전철이라거나길거리에서뭔가를선뜻사지못하는나와는달리,쌈박하지만따뜻한성품의내여동생이지하철에서‘7080추억의올드팝을용기있게사왔다.물론60년대의팝송도포함되어있다.하루종일방안에틀어박혀노래를들었다.옛날팝송이흘러나오는방안엔열에들떠부유하던우리들의전성시대가눈앞에망망한바다가되어출렁인다.거기엔어김없이노래부르기를좋아하던젊고아름다운우리어머니가환하게웃고있다.사이먼앤가펑클의노래‘험한세상다리가되어를들으며,연약해서부서지기쉬운우리들에게,아무탈없이인생의다리를건널수있도록힘이되어주었던어머니를비로소통곡처럼기억한다.나에게있어서어머니는언제나꽃이었고향기였고쪽빛이었고,그리고군청색두루마기였다.이제는목놓아울고싶은통곡이기도하다.

두루마기를물려받고내가얼마나좋아했던지어머니는그걸알았을까?새색시가되어다른가문으로들어가는큰딸에게,자신이입던두루마기를입혀보내야하는가난한어머니의심정을철없는딸은결코헤아리지못했다.꿈에서라도감히욕심을부리지않았던어머니의묵직한두루마기가뜻밖에내것이되다니,이무슨횡재냐고촐싹대며좋아라하지않았던가.마치두루마기가탐나서시집가는것처럼….

안섶에새겨진자신의이름을바늘로따내고딸의이름을새길때의어머니,그심정을내가새겨보기나했던가.자신의이름을한올한올따올리면서,그리고딸의이름을한올한올새겨박으면서어머니는무수한감회에젖지않았을까.그녀의청춘이지나가고있다는쓸쓸함,세아이를항상보물이라고여기며홀로건강하게키워낸자긍심,막결혼을하게되는큰딸이짊어져야할짐이그리무겁지않기를바랐을지모른다.

그녀의심중에있는그모든것들을이두루마기는알고있을것이다.우리가모르는어머니의달빛같은추억을,강심보다더적막한그리움을그윽하게지켜보았으리라.그러하기에어머니와청춘을함께보낸이두루마기가나에게는더없이소중하다.형편이충분히좋아졌는데도불구하고돌아가실때까지어머니는새두루마기를해입지않으셨다.그까닭을나는아직도알지못한다.다만새두루마기를큰딸이장만해드렸어야한다는걸이제야깨닫고가슴을치고있다.

쪽빛보다더진한,군청색두루마기의묵직한중량감이참좋다.그러나어머니와나의세월이녹아있는이두루마기는대물림하지않고나의대에서끝내려고한다.아쉽지만그러는게좋을것같다.그러나며느리에게한번물어나볼까.이아름다운군청색두루마기를받겠냐고.

관광버스춤

손수영

태양이서쪽하늘끝에서붉다.관광버스안에서는무채색의사람들이무아지경으로춤을춘다.

일몰이가까워진시간,피사체를역광으로잡은카메라의시선은붉게물든하늘,그리고마구뒤섞여서넘실거리는사람들을유유하고아름답게포착한다.넘실대는사람들틈에서간신히찾아낸‘마더,만사잊고싶은듯넋놓은듯죄책감에서놓여나고싶은듯,하염없이흐늘거리는팔동작들을부각시켜화면가득히실루엣으로처리한장면은다소몽환적이기까지하다.

5월끝자락에중학동창들의전국모임이있었다.젊었을그땐서먹하고할말도없고어쩌다말을건네는마음이어색하더니지금은매년만나다시피해서그런지자연스럽다.건강을걱정하고서로를챙기는것들에진정성이묻어있다.매양탈이많고허물이던어느동창의짓궂음을마지못해받아넘기기도했었는데,지금은그냥개성으로귀엽게받아들여지는누그러움,혹은너그러움을누구나지닌것일까.아니면그러려니관심밖의대상으로돌린때문일까.별말썽이없다.어쩌면우리들의열정이식어가는것이그이유인지도모르겠다.

헤어질즈음엔아쉬움과공허함을붕띄우고영화‘마더의마지막장면처럼춤을추었다.수평선너머로사라지는태양이붉듯,이자리에서의우리들마음도석양의그것처럼붉다.그래서일까.흔들흔들아싸아싸,버스통로는콩나물시루가된다.흉내만내고건성이던춤에관성이붙고열이오른다.화끈달아오른발바닥을‘마더의카메라인들잡아낼수있으랴.누가무슨춤을추든상관없이나만의세계에몰입된몰아의지경까지도달하게되는게바로관광버스춤이지싶다.곧일상으로돌아가좋은부부,좋은부모,좋은이웃으로살아갈것이기에하루쯤마음내려놓고춤을춰도좋지않겠나.

엔딩크레딧이올라갈때까지계속되던영화속의관광버스춤처럼현실의우리역시춤에열중하였던것같다.그것은마치우리들을둘러싼모든현실을비현실적으로만들고자하는몸짓같기도했다.‘붉은노을이슬프다고어느가수가노래했던가.붉은노을즈음의우리들은작아가는키보다식어가는가슴이더슬픈게아닐까.

영화‘마더를보았었다.‘마더는‘머더이기도했다.영화제목을‘엄마라고해도충분할것을굳이‘마더라고한이유가뭘까,살인과연관된모정을보여주고있기에발음상의유사성을염두에둔것이아닐까해서인터넷을뒤져보니역시그러한것같았다.자식을위해서라면살인까지도불사하는어미의동물적사랑,자식에대한죄책감에사로잡힌엄마이기에더욱맹목적일수밖에없는자식사랑을영화는그려내고있었다.

아들에대한‘마더의집요함은빗나간모정이아닐까.다섯살배기아들과동반자살을꾀하다가그만바보로만들어놓은그죄책감이아들을더욱바보로만들어가는지도모른다.막연히복수를꿈꾸는아들은어줍잖게폭력에가담하다가도‘바보라는소리에는느닷없이달려들어맹수같은폭력주체자로변한다.깜짝깜짝기억을되살리는그가뇌고다니는누구에겐지모를복수,그것은‘마더에대한것일수도있다.부모의사랑을이해는하면서도감정적으로제대로소화할수없다는걸영화를만든그들도진정알았을까.

‘마더의집착이아들을더바보스럽게만들어가듯,우리부부의애증역시그집요함으로서로망가진건아닌지생각해보게된다.때늦은후회가치마폭감기듯나를휘감는다.‘마더의사랑이죄책감이빚어낸‘머더였다면이미고인이된남편에게집착하는나의집진정,그역시자책감이빚어낸잘못된애증이아닐까.

미운정이고운정보다우리의가슴을더사무치게하는지도모른다.정좋은부부가혼자되면재혼을빨리하게되고,정없는부부가혼자되면재혼을안한다는말이있다.고운정만알던사람이무정한세월을어찌견딜수있으며,무정했던그세월을다시살아낼자신이없는사람들이어찌또다른반려자를찾을수있겠는가.

내경우라고해서별다를까마는,최선을다하여남들처럼아름답게살아내지못헸던그삶이재탕될까두려운까닭도있고,집요하게상대를갉아댄것에대한미안함,아들하나더키운다는어미의마음을가지지못한것에대한후회,곱고깊은속정을드러낼틈조차없이그만끈을놓쳤다는자책감에서다른생각을할겨를이없는것이다.이미놓친끈이지만그끝에매달린정때문일까.고인을놓지못하고아직도내옆에주저앉히고있다.미운정을반추하면서….

세월이약이라고했던가.세월을어느약곽에담을수있으랴.세월은온갖것에자국만남길뿐어디에도걸리지않고떠나간다.우리의마음도세월따라자유롭게흐를수있다면얼마나좋을까만걸리는데가많다.밉고고움,싫고좋음,사랑과혐오,교감과반감등좁쌀만한뾰두라지에도걸리는게사람마음이다.미운정이라서더심하게걸렸었나,미운정의상대를놓친상실감이너무크다.한동안허탈해진두손으로는아무것도할수없었다.놓쳐버린상대를가장그리워하는것은마음에앞서두손인것같았다.큰물이휩쓸고간냇가관목덤불에걸린마음은넝마가되어바람따라흔들리기만할뿐.

약이되지못한내세월은명치끝에딱걸려회한으로남았다.떠나지못하고고여있는세월이어디제대로된약이긴하랴.그에대한집진정은,미운정만드러냈다는후회와자책감이빚어낸실정(失情)일수도있다는생각을‘마더를보고난후문득떠올린다.그건실성(失性)이었다.실성도정일까.나의실성끼는‘마더의아들이뇌고다니던복수나협박의차원은아닌가를생각해보게된다.생전에속깨나썩혔으니지금이라도내옆에있어주어야한다는협박조가내심층에남아있는것같다.집착하지말고놓아보내는정이야말로고운정일터이다.

사람들과뒤섞여무아지경으로춤을추고싶다.허물없던동창회에서처럼마음내려놓고아싸아싸추고싶다.자책감일랑싹잊고,체면같은건훌러덩벗어던지고내회한풀어낼그런춤을추고싶다.고향의우리어머니들이봄바람에치마폭날리며선진벚꽃놀이회취하듯,그렇게춤에몰입될수있다면얼마나좋으랴.펄럭이는치맛자락이자칫봄바람에뒤집힌다한들그리큰허물이야되겠는가.

역광은진실의이면을몽환적으로비추어주는또다른아름다운시선이기에,나는석양을등지고‘마더처럼유유하게춤을출것이다.자책감을뒤로한몰아의관광버스춤을….세월은쏜살같이흐르고내마음속에도이미붉은노을이들어와있다.

그녀의망부가(望夫歌)

허정림

조용한시간이면찾아오는여인이있다.내기억속에깊숙이자리잡고있는옛친구이다.그와나는한창젊은나이때,초등학교어머니교실에서처음만났다.딸아이를초등학교에입학시켜놓고,한반이된아이들의학부모로서만나친구가된사이다.

누구에게나쉽사리마음을트지못하던내게성큼다가와,고향을떠나외롭기그지없이서러운타관살이를알싸한우정으로덥혀준벗이다.그게70년대초였으니,돌아보면아득한세월이흘러가버린셈이다.

그는초등학교근처에서약국을경영하고있었다.낯설고물선외지에서바깥출입이래야아이들학교에가는일이고작이던나는그앞을오가며자주그네집에들르게되었다.어머니교실을마치고나오면이끄는대로그의집으로따라가차를마시며대화를나누기도하고,조용한시간이면더러노래도함께불렀다.약대를나온그가피아노를치며가곡‘보리밭을노래할때면마치음대를나온사람처럼소프라노의고운목소리가오색구름계단을노닐었다.그시대가족계획의이상적구호대로아들둘에다딸하나씩을둔우리는강촌에서만나,대구에서온그녀와부산이고향인내가마음이잘어울리는벗이되었다.

마음통하는벗을만나는일이평생에몇번이나될까.그래서끝없이흘러가버린긴세월에도강촌의쓸쓸하던풍정이우정의추억과더불어더욱정감어린서정으로다가오는그리움이되어버린건지모른다.

이지적이면서도다정다감하여누구에게나친절하고활동적이던그녀도내심으론무척외로움을타고있었다.헤어질때면언제나더놀다가라고붙잡던그의만류를뿌리치고,내가기다려야할가족을위해서둘러돌아서곤하던일이지금도생각하면속이아리다.왜좀더푸근한벗이되어주지못했던가싶은회한이내속에앙금으로남아있다.

남편이월남에갔다고했다.아내와자식셋을남겨둔채,민간인의신분으로전쟁터인그곳으로돈벌러떠났다는게다.돈이뭐기에,그빈자리가얼마나허허로웠을까.전쟁이끝나도록쉬이돌아오지않는남편을기다리는마음은눈물겹도록애절했다.빨리돌아오게해달라는부적을지니기도하며애간장을태웠다.비방이영험이있었던지,마침내남편이돌아왔다.돈을많이벌어왔다는소문이강촌을흔들었다.얼마뒤에인근의도시로빌딩을사서이사를갔다.

거기에머물러살던나는가끔그가있는도시로나들이를가곤했다.남편은언제나외출중이었다.날이갈수록소문은날개를달고,그녀의얼굴엔우수의그림자가짙어갔다.남편이월남에서여자를사귀었다는거였다.그여성은귀족출신이며헤어질수없는관계로한국으로데려왔다는게다.그리고얼마뒤에친구는아이들의교육을핑계로서울로이사를뜨고말았다.우리의해후는그로부터5,6년이더지나서였다.서울에볼일이생겨,갈때면매번빼먹지않고그녀를만나러가곤했다.아직도약국에매여있긴마찬가지였지만,전에비해규모가퍽이나커져약사를두명이나더두고분주살스레지내고있었다.그런데홀로아이셋을데리고그냥살고있다.옛날우리가처음만났을때처럼말이다.남편은괌에갔다고한다.나는아무말도더하지못했다.그러는게우정을위한내진솔한마음일터였다.

여전히약국을경영하며,바쁜일상속에서도다시배움의길에들어한의학을공부하여병든이들에게헌신하는그녀를만났다.예전에남편끌어오기일념으로미신마저의지로삼던그녀가놀랍게도밥상머리에서하나님께감사기도를올린다.주일에는교회에나가기도하고,봉사의삶으로나날을메우면서현실을운명처럼받아들이고자한것은아닐까.

만인을위한그의약손이뼈마디만앙상하게깡말라보이던것이못내안타깝다.오매불망남편바라기하는아내와보석같이영롱한삼남매를두고그럴수도있는게남자의정인지,참으로알수없다.내가알고있는외곬수인그녀가지고지순한성품과애정으로남편의변심을수용하며여태도기다리고있을거라는생각만이절실하다.

세월은빗발치듯달아나고,한나절이멀다시피고속도로변해가는세상,그때그아이들이벌써어른이되어일가를이룬지금,내가강촌에서대구로,그곳에서자식들을모두제갈길로보내고다시부산으로돌아온지도두십년의세월이흘렀다.그녀가잘살고있는지궁금하다.그럴때면젊은날에자신의운명이듯뜨겁게부르던노래가생각난다.

내마음나도모르게꿈같은구름타고

천사가미소를짓는지평선을나르네.

구만리사랑길을찾아헤매는

그대는아는가나의넋을

나는짝잃은원앙새나는슬픔에잠긴다.

‘나는짝잃은원앙새라고심금이떨리도록애절하게부르던노래.그때그렇게나열창하지만않았어도그토록모진운명에이르지않았을지도모른다는생각이든다.말이씨가된다는말씀을그땐왜기억하지못했을까.혼을다바쳐부르던노래,70년대어느가수가불렀던‘애모의노래는내가슴깊이주름살로박혀잊히지않는그녀의망부가(望夫歌)이다.

어느깊어가던가을날,마지막작별이되고만서울의거리를바람에불려가는가랑잎처럼나부끼던자그마한몸매의옛친구뒷모습이지금도서늘하게눈에얹힌다.

지금쯤어디에살고있는지,여태도그노래를그냥부르고있을까.

내마음의노래

허정림

비가온다.

입동(立冬)을갓지난초겨울비가소리없이내리는풍경을바라본다.은회색빛살로아득한허공을가득히날아와세상을적신다.창밖에내리는비를하염없이바라보고있노라니,나도모르게흥얼거려진다.

언제어느때배운노래인지,곡목이무엇이었던지전혀기억에없다.

그러면서도언제부턴가,이렇게비가내리는날엔무심코내심연의표면위로떠올라아련한감상에젖어들게한다.티없는노랫말이고치에서풀려나오는한가닥외올처럼술술달려나오는것을보면,꿈많고감수성예민하던여학교시절에배운노래이지싶다.

한구절도막힘없이마음따라부르다보면,나도모르게소녀시절로돌아가꿈을꾼다.비바람더불어손잡고거닐던강물이눈결에어리고,이루어지지않는다는첫사랑의전설이상상속의추억이되어,홀로비내리는강가에앉아서옛일을그리는애상에잠기곤한다.현실처럼말이다.

곡조도그렇거니와노랫말이참맑고곱다.그투명함속에추억이,환상이,그리움이잠들어있다.울적해진마음속에한송이꽃으로피어나,애틋한소녀시절로나를데려다준다.언제나위로가되고기쁨이되어아릿한꿈을주는노래.향수에젖은우정의친구이며내마음의카타르시스이다.무심을달래주는신비로운요술사의묘약인가싶기도하다.

비가올때면흥얼거려지는노래,내마음의노래를낮은목소리에얹어조용히불러본다.

♬~창밖에비바람불때면내맘은나래달고

정든임손잡고거닐던강가를헤맨다.

그립다내임이여내너와떠나던날

말없이언덕에앉아서강물만보았지~.

가슴이훈훈해진다.

겨울방학과독서

오기환

으레방학이오면거창한계획을세워두게된다.이번방학에는무엇을할까.어디에엑센트를붙일까를두고두고생각하곤했다.그렇게계획을세우지만막상방학하는다음날부터엉뚱하게흐르기마련이다.잠시지나면방학이중반을지나고있음을깨닫는다.세월은경우에따라참으로빠르다.

<하루108배>라는책이있다.어느한의사가과학과한의학,그리고불교를종합해서고안한운동에관한책이다.아침마다백팔배절반의운동으로하루를시작한다.온몸운동이라몸의유연성에는그만이다.걷기운동보다몸에좋다는실험결과도있는운동이라서,요새그것을계속하고있다.집을나서면느끼는겨울추위도겁낼이유가없고,비싼가격으로운동기구를구입할필요도없다.집안에서한평의공간만있으면가능한운동이라경제적이고실용적이면서,효과쪽에서는월등하다고하니여러모로좋다.그절반의운동으로흘린땀을샤워하고나서혼자서간단히할수있는무극보양뜸을몇군데뜬다.그리고나서신문을펼친다.어느날이다.그신문에문단의두거장이쓴옛기억력을발휘하여쓴책이소개되었다.

그중하나가유종호교수의<51년겨울,그리고가을-그해겨울은따뜻하지않았네>이고,다른하나는김윤식교수의<한국의근대문학사>이다.평소유종호교수를멀리서늘존경하고흠모하고있다.교수님을가까이서보면서대학시절을보냈고영어교육과에다니는친구들과선배님들의숱한칭찬의말을들었지만,정작강의를들어볼기회가없었던것이다.3학년부터일과중에ROTC의훈련이들어있어서청강의기회조차전혀찾을수없었던것이다.너무아쉽고후회되었지만어쩔수없었다.

3학년이다.다짜고짜로교수님댁을방문한용기가새록새록하다.예약도하지않았다.소읍의소재지에있는학교와가까운주택지에사시는교수님댁을방문하였을때‘공부하라고꾸중을참많이들었다.시골에서자신을찾아온타학과학생의방문은어쩌면당돌하고또기특했을까.싫은표정하나짓지않고방문객을맞이하고또격려해주신것이다.아직도내기억에는20대의젊음이주는무지갯빛그림으로남아있다.

그러다가학교를졸업한다.이어서군에서장교로근무하는데,보병제35연대본부중대에서근무하는사병을만나게된다.교수님을자기고모부라고했다.고모의연애편지전달자였다고자랑하였다.군에서제대를하면서그사병의이름은내기억에아주희미하다.하지만그때왜그에게더자세한일화를듣지못하였는지지금도아쉽기만하다.더많은정보와친근감을갖추어야했는데말이다.

군에서제대를하고나서시·도배정에관한서류를제출하려고모교를찾게되었다.당시친구를만나기위해해당다방에갔는데,그곳에서교수님과마주친것이아닌가.정말로뜻밖이었다.인사를드렸더니‘오○○군하면서내이름을부르는것이다.근6년의세월이흘렀다.그리고나는타과인데도내이름을기억해서부른다는것에감탄하면서놀랐다.‘이름을기억해주셔서감사합니다.고답을했으면좋았으련만,그자리에서는무심코인사만하고쩔쩔매다가그렇게흘려보냈다.

제대를하고나서도교수님의행적은계속해서내관심안에간직되고있었다.어느날알아보니모교를떠나인하대학에서근무하고계셨다.다시이화여대로다시연세대학으로자리를바꾸는것을자연히알게된다.최종학교에서정년을마치시면서‘이제글쓰는전문직업인이되었다는식의발언을일간지를통해서알게된다.새로운출발이었다.

발간하는교수님의저서에대한애착으로무조건사두려는심사는변함이없었다.비순수의선언,동시대의진실,문학이란무엇인가,서정적진실을찾아서,내마음의망명지,나의해방전후….

그러다가이번겨울에는<51년겨울,그리고가을-그해겨울은따뜻하지않았네>를읽게되면서지금까지사두었던책들을다시펼치기시작했다.‘그해겨울…을다읽었다.그리고다시‘나의해방전후의읽다남은부분을죄다읽고다시처음부터다읽었다.그리고‘내마음의망명지를계속읽으면서교수님의문장에대한우리말의구사력에감탄하지않을수없었다.그문장을벤치마킹해보려고무진애를쓴다.몹시어려운부분은두고쉬우면서도적절하게사용된우리말의뉘앙스까지찾아내어익히고싶은것이다.

하지만내두뇌의메모리는넘친다.한계를벗어남을인정하지않을수없었다.어린시절부터주위에서대성을기대한교수님이아닌가.60여년의세월저쪽의일들이다.초등학교와중학교시절의급우의일본식이름을기억하고있다.당사자도까맣게잊어버린이름인데말이다.또당시의지명과책들의일본어지은이와그책에등장하는명칭들을고스란히기억해낸것들에서감탄에앞서교수님에대한무서운경외감(敬畏感)을느낀다.

‘<나의해방전후>나이번글의연재부분을접한독자가운데혹메모를해둔것이있느냐고묻는분이있었다.60여년전의내가무슨메모를했을것이며,설사했다한들전쟁통에남아났을리있겠는가?교수님의말이다.참신통한일이다.60여년전,시골의초등학교에다닌꼬마가보았던당시상황을동영상을보듯이써갈수있다니.

대학시절찾아갔을때내가직접필사한이태준의‘가마귀,‘복덕방등의단편들을보시고는중학교시절에읽었다고하는기억을더듬어줄거리를이야기하는데,요며칠전에읽은나의두뇌회전을마비시켜버린것이다.나는그소설의줄거리를겨우겨우기억했지만,교수님의이야기는최근에내가읽었던책의줄거리보다더생생하게이야기를하시는것이었다.그탁월한기억력에귀가멍멍하기만했고,나는멍한상태로교수님댁을부리나케빠져나왔던것이다.

‘양복점주인은입은양복으로,구두점주인은신은구두로그임자를판단한다지만,나는글솜씨로사람을판단하고있었다.문인아닌경우에도그러했다.<중략>글이허술하기짝이없는허명무실한모모인사들을내심인정하지않았다.우연히보게된박선생의번역문장은장총을메고영어를유창하게하던내소싯적영웅의상대적위상격하를불가피하게만들었다.교수님이말하는문장의정확성에대한감동은전편을망라하고우리말구사가구절마다특이하였다.

부러움과존경의염을가지고교수님의책을잘구입했다고생각한다.이전에는문장의어려움을알고내게는어울리지않는수준이라고단정했다.그런데이번에쓴에세이형식의저서를접하면서,우리말구사에산뜻한문장들이눈에들어오면서내글의위상에반성의계기를마련하고있다.

최근의발간한책에서보는사진은,백발이지만얼굴은젊은의욕적생기로가득한모습이다.내학창시절에보아온교수님의모습과전혀다르지않다.지금은새로운문학서를작성한다고열중이실것으로추측된다.그숱한독서를통하여기억된풍부한그의안목은새로운한국문학의지평을긋기에충분한열정으로불타는듯하다.그러면서항상자부심이앞선다.내가저교수님을알고있다.그리고언제나스승이고은사님이고참훌륭한한국문학사의기둥이시다.책을통하여교수님을새로만난것이지만근래보지못한겨울방학기간독서의보람이었다.

(2009.3.16.)

영혼의보약설날의추억

오기환

‘설날추억은영혼의보약이라고누구는말했다.그설날에대한추억은각박하게살아가는현대인의생활에서잠시필요한활력소가된다는뜻이다.그래서설날의추억은육신도정신도맑고건강하게정화시키는역할을한다.설빔이나세찬준비도,설날아침의따뜻한부모님의경험에서우러나온덕담도,다양한우리놀이문화도,설날의음식냄새를맡으며기다리는어린아이의설렘···.이런것없이자라난보육원출신의어느작가가쓴글을읽으면서그의설날심정을얼마간이해할수있었다.

올해는특히경제한파때문에유난히썰렁했던설이라고모두가알고있다.글로벌경제파산은우리나라힘으로어쩔수없는흐름이다.그래서국민모두가허리띠를졸라맨다.1997년외환위기때보다더어렵다고다들아우성이다.5천원짜리점심에서3천원짜리로,더어려운사람은2천원짜리라면으로점심을대신한다는말이들린다.

이런어려운시절에도설명절이다가오면조상들에게차례를차리는것이우리민족의자랑스러운고유풍습이다.생활고에시달리는사람들은설명절이달갑지않다는심정을말한다.그렇다.그렇지만설명절에흩어진가족들이한자리에모여조상의음덕과그동안못만났던부모형제와의정을나눈다고생각하면,어떤조건보다도더세게끌리는힘이있다는것을알게된다.

농한기라고하지만설이다가오면자잘한농삿일은이미끝냈다.그리고어머니는달포전부터설빔을장만하고세찬준비를했다.그렇게마련한어머니의손길마다정성과따뜻함이배지않은것이없었다.단술을만들어다시엿을고고,강정을만들고또유과를만든다.가을부터누렁이호박을따서껍질을벗기고속을파낸다.그리고길게잘라서겨울추위에얼린다.녹이고다시얼리기를수차례하고나서야완성품이된다.이렇게얼린호박을잘라서쌀가루와버무린다.시루를솥에걸어놓고떡을찐다.낮에는잠시도여념이없다.그리고밤에는늦게까지희미한등잔불옆에서바느질을하며아이들의설옷을만들었다.이모두를어머니혼자서다해냈다.어린시절에본정경들이다.

강원도산골에서는아직도마을어른을모시고합동세배를지내는곳이있다고한다.촌장으로추대되는어른에게마을의성년남자모두가의관을갖추고합동세배에참여한다니산업화시대에드문풍경이다.그자리에서세상돌아가는인심을듣게되고또도시로나가있던사람들과고향사람들이만나서정을나누는자리가되는것이다.고향에서느끼는것은고향을지키는어른들의따뜻하고끈끈한사랑과그사랑에감사함이라고했고,그것이메마른우리사회를바르고따뜻하게이끄는힘이라고했다.

해마다설명절이다가오면귀성인파가교통체증현상을이룬다.설명절이면한번이라도한산한귀성길이라는제목의기사나뉴스를접한때가없다.긴연휴가이어질때면대체로무난한귀성전쟁이라고말할정도이다.그렇게설연휴를통해이동하는인구는전국을후끈하게달구는셈이다.

30대초반의젊었을때다.어김없이귀성전쟁을겪었다.당시에는대부분이승용차가없어서시외버스를이용해야했다.길게늘어선줄서기부터이제서너살되는아이들을손잡고배차되는버스를기다리는것이다.매표소가제구실을못하는선착순줄서기를하던시절이다.가끔아는고향사람이먼저와서줄을서있으면그의앞자리에새치기를하는맛도있었다.동행하는가족친지라고둘러대는것이었다.줄서서차를타지만좌석이없는경우,버스에서3시간이넘는거리를서서고향까지가야했다.

그렇게고향을찾아가면부모님은동구밖저만치까지나와서아들을기다리고계신다.부모님을만나는것도반갑고,손때묻은고향집가구들을다시보는것도은은하게정겨운일이었다.초라하기그지없는가구와덕지덕지붙은가난한농촌살림,그래도방문을열면아랫목에는겨울추위를녹이기충분한온기가감돈다.땔감으로군불을지펴놓았고,그것은부모님의자식에대한아낌없는정성이고사랑이었다.

설날새벽에는일가어른들을일일이찾아뵙고세배를드렸다.그리고어른들에게덕담을들으면서새해의계획과용기를얻기도했다.간단히차려낸세찬음식을맛보면서설날아침을맞고나면이어서돌아가신어른들께차례를지냈다.그렇게오전을보내고나면음복으로마신술기운에마음은세상을얻은듯푸근하였다.

농촌도차츰변화의바람이불고도시화되어갔다.그에따라우리고유민속들이퇴색되어가는모습이역력하다.농촌도산업화에걸맞은풍습으로변화되어가는것이감지되었다.그런차에부친이별세하고제사를부산에서모신다.이때부터명절이면시골에서어머니가아들집에오신다.그렇게4년을보내고뒤이어모친도별세하니차례나기제사를모두부산에서모시게되었다.

귀성인파니교통체증이니,서울에서부산까지9시간이소요된다는등의텔레비전의뉴스는귀에들어오지않는다.편하게집에서명절을보낼수있기때문이다.얼마나편하게되었느냐.심하게막힌차도에승용차를타고가는불편함이없어서너무좋은것이다.

그러면서가끔고향을생각해본다.부모님이계시지않은고향은마음부터허전하게할뿐이다.사람의훈기가끊긴옛집은10년이못되어허무하게그대로주저앉았다.마을의흉물이된다하여헐어버리고평평하게정지작업을했다.이제는집터만황량하게남아있다.어린시절을보낸그옛집의빈터에서면개구쟁이로뛰놀며정들었던어린시절의자화상이눈앞에서아른거린다.그리고50년저쪽을더듬어가면세월의덧없음을실감한다.

그렇지만요근래에와서는이상하리만치저렇게고생하면서도설명절에귀성하는이들이한없이부럽기만하다.아무리교통체증이라해도귀성전쟁을치르는것은설명절이영혼의보약이기때문이리라.그리고고향에서아직이들을기다리는분이계시기때문일것이다.

(2009.1.29.)

주롱의펭귄은지금도그자리서있을까

김상희

오직새들을위해17만평이넘는늪을메우고황무지를가꾸어인공호수며폭포까지갖추어놓은지상최대의새들의천국,주롱새공원(JurongBirdPark)앞에섰다.갑자기온몸을휩쓰는야릇한감동.지금쯤,한국의멧새들은먹이를찾아눈덮인겨울산에서내려와인가근처를헤매고있을텐데….

그래서그런지,새에대한내경험은예나지금이나별로행복하지못했다.

고향집가까이에는제법넓은대나무숲이있었다.그대나무숲에가면늘후닥닥놀란다.갑자기엄습하는온갖소리들,시골마을은잠든듯조용한데대나무숲은늘시끄러운소리로들끓고있었다.아침이나해거름때면더극성스러웠던그소리는대나무숲에서살고있는참새나굴뚝새들의지저귀고퍼덕이는소리였다.

귀청이찢어지도록시끄러운소리였지만,저희끼리는분명의미있는대화였을게다.아마저들삶의애환이나자연과교감하는환희였는지도모른다.어쨌든그소리에는생기와활력이넘쳐,시장거리같은박진감과역동감이넘치고있었다.

그바람에나는자주대나무숲을찾았다.그리하여별빛처럼쏟아지는그들의지저귐과푸드득거림에서나를찾고삶의의미도건져올렸다.그러나그거대했던대밭도지금은개발에밀려다베어지고말았다.

또하나의체험은철새들의천국인낙동강하구언에서였다.바싹마른갈대만서걱거리던겨울의을숙도는너무을씨년스러웠다.그을씨년스럽던들판에갑자기일어나던회오리바람.고개를드니,수백수천도넘는철새떼가하늘을뒤덮고날아오르고있었다.온들판에서날아오르는새떼는하늘을가렸고,지저귀는소리와깃치는소리는회오리바람을일으켰다.

그러나지금그모래톱역시오염되어새들의웅대한비상과지저귐의장관은거의사라지고있다.

내가그토록주롱새공원을보고싶어했던것도,지금은없어진대나무숲이나낙동강하류에서의감동을주롱새공원의새들의비상이나지저귐의장관에서찾고싶어서였다.

주롱새공원은듣던것보다더넓고아름다웠다.나는종일토록공원을누비며온갖새들과어울려그들과함께자연이주는한없는혜택을누리고싶었다.그리고그들이누리는행복을함께음미하고싶었다.그러나짧은일정때문에부득불관광용모노레일을타고,유리창을통하여우거진숲과호수와폭포를만나야만했다.하기에호숫가를거니는백조며플라밍코,타조,앵무새,구관조,카나리아,매,독수리등많은새들도그저주마간산으로스쳐지나가야했다.대자연속에서마음껏날고지저귀는소리,살아있는숨소리와그들의내면의속삭임,하소연같은,내가듣고싶었던것의작은부분도듣지못했다.눈한번마주치거나표정하나자세히살피지못했다.

‘이게아닌데….‘그들의작은몸짓과표정의하나하나,그리고고른숨소리와가슴앓이의하소연하나라도놓쳐서는안되는데….

나는불만을삭이느라가끔씩먼하늘로눈을돌렸다.

특별행사인‘올스타버드쇼가있으니모노레일에서내리란다.

‘편지전하는비둘기,농구시합도하고만담도하는앵무새,장난감수레를끌던구관조…

한시간남짓의쇼는,새들을위한것이아니라,오직인간이인간을위해새들을혹사하는볼거리였을뿐이다.

쇼를보고찾아간곳은특별전시관,야행성조류인올빼미전시관은동굴을옮겨놓은듯,물체의윤곽만보일정도의어두운조명만해두었다.그아래여러종류의올빼미들이나뭇가지위에앉아있었다.그러나조명이좀밝아서그런지는몰라도올빼미는자리에서꼼짝달싹도하지않았다.‘혹시올빼미마네킹인가라고여겨지기도했으나그렇지않았다.자세히보니노란눈동자가분명히움직이고있었다.눈동자가마주치자,갑자기둥글해진눈동자에는경계의기색이뚜렷했다.사람을경계하는불신의눈초리,‘아!아찔했다.분명,속으론절규하고있었으리라.‘인간의잔인성에대한분노를,‘어둠의세계에대한향수를….

마지막으로들른곳이이곳의명물인‘펭귄관.남극의펭귄을위해많은대형에어컨이설치되어있었고,찬해수며눈덩어리,그리고많은얼음조각을물에띄워놓았을뿐아니라,제비갈매기며바다오리같은남극의해양조류도함께살게하여한껏분위기를살리고있었다.

그러나백마리가넘는펭귄중펭귄특유의둔탁한소리를지르거나뒤뚱거리며걷고있는새는한마리도없었다.모두가더위와사람에지친듯멍청히서있을뿐,박제된전시물에불과했다.고향잃은에뜨랑지어,열대의더위속에서겨울을그리워하는펭귄은슬프다.

돌이켜나를살핀다.며칠전만해도방한복을입고눈덮인서울근처의학교운동장에서손자들과함께공차기를하고놀았다.그런데오늘은남방셔츠와짧은바지를입고적도(赤道)에서불과130km떨어진,햇볕쏟아지는‘여름나라를지쳐걷고있다.나도틀림없는우리속에갇힌한마리펭귄이다.떠나온겨울나라의눈이오히려그립다.‘모든것은있어야할시간에,있어야할곳에놓여있을때,가장아름답다.

주롱의펭귄은지금도그자리에서있을까?

밤,칼을가는바다

김상희

자정을넘긴바다는시꺼먼광물덩어리다.아무리두드려도꼼짝하지않는무쇳덩어리다.절망처럼앞을가로막는이견고한어둠의철옹성앞에서나는그만심한좌절을앓는다.

지금,내가서있는곳은망망대해가운데있는한작은섬,한줌빛도비쳐들지않는시꺼먼어둠의세계다.만상은죽은듯잠들었는데,오직깨어있는것은어둠과바다와나뿐.

해가지기전까지만해도바다는나에게매우우호적이었다.한없이쏟아지던밝은햇살,망아지처럼달려들던남빛물결,바위에부딪치면서드러내던파도의하얀속살,파란하늘을비상하는바다갈매기의날갯짓마저도다품어안은넓은가슴…,바다가어머님품처럼포근하다는것을,자연이아름다운은총이라는것을새삼깨닫게해주었다.

그런바다가밤들면서갑자기등을돌려버렸다.일체를어둠속에묻어버린바다는침묵으로맞선다.나는그의견고한침묵이열리기만을기다리면서눈을감았다.눈을감자,이내바다도,어둠도눈앞에서사라져버렸다.아무것도보이지않는완전한없음의세상,이상하게도마음이가라앉아왔다.

그리고마음의깊은곳으로부터천천히변화가일어났다.사라진바다가소리로살아나고있었다.감아버린눈대신닫쳤던귀가열리면서바다가소리로살아났다.대문을닫으시는하나님께서는언제나작은창하나는열어두시는가보다.

열린내청각의창문을통해밤바다의온갖소리가차곡차곡쌓인다.일렁거리는파도소리와바람소리와잠든고기들의고른숨소리,잠들지못하는산호수의서걱거림,그리고공해로병들어죽어가는고기들의앓는소리…,그것들은어둠의바닥에서들려오는밤바다의내밀한속삭임이요숨결이요,고통받는것들의아픈소리다.문득‘듣는다‘는것의소중함을깨닫는다.공간의원근에따라펼쳐지는평면적영상이시각의소산이라면,시간의진행에의해내안에또하나의입체적조형물을높이쌓아올리는작업은듣기의몫이다.듣기야말로눈으로볼수없는내면의세계,영혼의세계를천착하는비법인가보다.명상할때굳이눈을감음은귀로듣는것이눈보다더깊은내면의세계를사색할수있기때문이란생각도해본다.

사실,눈으로보는낮의바다는사색에탐닉하기에는너무현란하고역동적이었다.파도는고개를치켜들고천천히,또는힘차게달려와서는모래밭기슭에스며버리거나,밀려왔다밀려가는쉼없는움직임이었다.그러나귀로듣는밤의바다는오직침묵과고독과명상으로열어가는소리의세상이었다.천지가소리인데,그큰소리속에작은소리가있고,또,그속에더작은,평소듣지못했던신비의소리가숨어있어속삭이고하소연하고눈짓한다.밤바다소리는매우감성적이고,미묘하여듣는사람따라달리들리는주관의목소리였다.

까르르,웃다가도억울해서못견디겠다는듯이쿵쿵거리고,짐승같은울부짖음을지르다가도,어떤땐흐느낌같은소리를낸다.그래서오랜항해에지친뱃사람들에게는밤은무서운세상이라고했다.그중에서도바다의흐느끼는소리는사무치게가슴을도려내어,그때문에잠을설치는일이흔하다고도했다.바다낚시를오래한한친구도깊은밤이면바다가울음소리를낸다고비슷한이야기를들려준적이있었다.

지금,밤바다는나에게도애절한울음소리다.울음,그것은아픔을치유하려는바다의몸부림인가.가슴밑바닥으로흐르는바다의울음소리가내가슴을후벼놓는다.파도가잔잔해졌기때문일까.얼마쯤지나자소리는한결잦아들고차츰고른가락으로바뀌어갔다.대청을걸어가는여인의치맛자락스치는소리,그러나이상하게도내귀에는숫돌에칼가는소리로들렸다.

숫돌에칼가는소리,지금은잃어버린내유년의고향소리,바다는갑자기그고향소리를내고있었다.

농사철이다가오면아버지께서는마당에서반들반들한숫돌에낫이나칼을가셨다.칼바닥을숫돌에대고밀었다가들였다가되풀이하시던그것은차라리느린두박자의음악이었다.숫돌에는칼을간쇳물이꺼멓게흐르고있었다.한참을그렇게날세우시던아버지께서는숫돌의검은녹물이맑아지자,칼을들어햇빛에비춰보시는거였다.그러면,날카로운날은허공에서뻔쩍섬광을내뿜었다.어떤사악한것도침범못할것같았던섬광의위엄,그게신기했던나는호주머니에넣고다니던연필깎기조그마한칼을숫돌에대고아버지흉내를내보곤했다.그사악사악하던칼가는소리가지금잠들지못하고뒤척이는밤바다에서살아나고있다.

바다는왜하필이면밤에칼을갈고있을까?어둠이싫어,사악한것들이우글거리는어둠이싫어,어둠의덩어리를삭똑삭똑썰어내기위해,수천수만자루의칼을갈고날을세우는것일까.새아침의찬란한여명을맞기위해밤새우며칼을가는것일까.

해야솟아라.해야솟아라.말갛게씻은얼굴고운해야솟아라.

산넘어산넘어서어둠을살라먹고이글이글앳된얼굴해야솟아라.

-박두진:‘해에서-

지금도나를감동으로몰아넣었던시가떠오른다.어둠을살라먹고,고운해떠오르게하기위해밤바다는저렇게칼가는의식을치르고있는것일까?

밤이면칼을가는바다,하기에바다는아침이면날마다빛으로차출렁거린다.

유년의여름

최홍석

유년시절을시골에서보낸사람이라면누구나소먹이려다니던여름한철의아름다운추억들을간직하고있을것이다.늦은봄,농사철이끝나면이때부터긴긴여름한철을소들은먹고자고먹고자고,그렇게편히지내는데,집집마다소를먹이는일은아이들차지다.아침일찍동네아이들이자기집소를몰고한길가아니면동네타작마당에모여서오늘은어느골짜기로갈것인가를의논한다.말이의논이지기실은의논하고말것도없이누군가가앞장서면대개그냥따라나선다.산자락에다다르면한두시간소가풀을뜯도록풀어놓는다.농작물이자라는논밭에서한참떨어진곳이어야한다.소들은이슬이촉촉한산풀을정신없이뜯어먹는다.잠시도쉬는법이없다.우리산의여름은온갖여리고풋풋한풀들로넉넉하고,칡을비롯한넓은잎의넝쿨식물이풍성하다.이들모두소가좋아하는식물이다.떡갈나무를비롯한키작은관목의나뭇잎은초여름에는잘먹지만잎이세어지고새가지가여물어지면잘먹지않는다.소가풀을뜯는모습을물끄러미지켜보고있으면새삼경이로움을느낀다.한눈팔지않고오직튼튼한이빨로풀을뜯어서는씹지도않고잘도삼킨다.아침해가중천으로떠오르면아이들은산중턱으로소를풀어놓거나,아니면그늘이넉넉한큰나무밑둥에고삐를매어두고풀섶이슬에젖은바짓가랑이를추스르며집으로돌아가학교가는길을서두른다.학교가끝나면냇가에서미역감고놀다가다시소고삐를풀어풀을뜯기고는해질무렵에소를몰고집으로돌아온다.그당시여름에소를돌보는농촌노동력은전적으로아이들몫이었던것이다.

그여름,소가풀을뜯어먹는오후내내우리들은얼마나재미있게산골짜기를누비며뛰놀았던가.배고프면산딸기며머루랑다래랑따먹고병정놀이에,칼싸움에시간가는줄도몰랐다.여름방학이되면아침에학교가지않아도되니산에서더미적거려도된다.이무렵산에는복분자딸기가까맣게익어가고있었다.우리는그까만색깔때문에고무딸기라고했다.숲속에소를풀어놓고는입술이까매지도록딸기를따먹었다.딸기나무가시에팔뚝을찔려도아픈줄도몰랐다.잘못하여벌집을건드리면큰일이났으므로그것만조심하면되었다.그러나아침나절의숲속은밤새내린이슬때문에오래머물기에는불편하였다.

점심을먹은후,모두모여냇가에서미역을감고놀다가다시산으로간다.나무그늘아래서되새김질하고있는소를풀어서다시풀을뜯게하고는그때부터가우리들세상이다.너럭바위밑으로펼쳐진너덜겅곳곳에돌을쌓아서참호를만들고,참호와참호사이로칡넝쿨로전화선을깔았다.그리고는나무막대기로만든총이며솔방울수류탄으로전쟁놀이를하였다.6ㆍ25동란이끝난지얼마되지않은시점이라아이들의놀이도전쟁과관련된것이많았다.학교운동장에서도탄피따먹기,땅따먹기를하며놀았다.우리사회의모든부문이전쟁후유증을심하게앓고있었던시대였다.군대간젊은이들중에서는유골함으로돌아오거나상이군인으로돌아온집이마을마다두세집건너한집씩있었다.참담하고암울한시대였다.그럼에도아이들은계속해서태어나고무럭무럭자라고잘놀았다.도시중학교로진학한이웃집형이돌아오면그가책속에서만났던위인들의이야기에귀를쫑긋거리기도하였다.우리와사뭇다른도시사람들의말투를흉내내며깔깔거리고,살아있는사람의코를베어간다는도시사람들의비정함에전율하기도하였다.

뉘엿뉘엿해가서산에걸리면우리는소를찾아서고삐를잡고는집으로돌아온다.가을추수가끝나면보리농사를위하여논갈기와써레질이시작된다.아침일찍부터소들은일을해야하고우리는산으로소먹이러가지않아도되었다.소들에게는여름에베어서말려두었던건초를먹이거나작두로잘게썬볏짚을가마솥에삶아만든소죽을먹이며겨울을나게한다.

지난여름이었다.참으로오랜만에꿈에그리던그고향을다시찾았다.알고지냈던사람들은모두세상을떠났고,그때같이놀았던친구들도모두대처로나가서나를알아보는사람은아무도없었다.소먹이러다녔던산골짜기는그대론데숲이우거져길을찾을수가없었다.유년의내모습을찾으려떠났던여행이었건만그어디에도나는없었다.소가하던농삿일은기계가대신하고,어쩌다소가있어도수입건초를먹이는시대가되어있었다.소먹이러다닐만한나이또래의아이들을찾아나섰다.그들의왁자지껄한사투리와천진난만한모습을보고싶었다.그러나젊은사람들이다도회지로나가고없으니길에서아이들을만나는것도쉬운일은아니다.한길가에차를세워두고먼산을바라보며망연자실하였다.

어느새반세기가넘는세월이흘러간것이다.십년이면강산도변한다했는데,산천이다섯번이나변하였을긴세월이다.어찌옛모습이아직도남아있겠는가.실망만잔뜩안고돌아오는길에기어이읍내로차를돌렸다.남아있는초등학교동창생몇명불러내어막걸리라도한잔하고싶었기때문이다.그들의얼굴에깊게팬주름살을보며세월의두께를한겹한겹벗겨볼참이다.어디에서도찾을수없었던내유년의여름을그들속에서라도한번찾아볼작정이었다.

(2009.8.)

여정(旅情)

황선영

얼마전여행사를경영하는지인의추천으로어느인도여행팀에합류하게되었다.각지에서모인18명의일행가운데내가아는사람이라고는아무도없어,나는호텔의숙소마저독실을배정받을만큼무리속의고독을느끼면서7박8일간의여로에올랐다.한동안휴대용CD플레이어에서울려나오는몇곡의고전음악을반려(伴侶)로삼을수밖에없었으나,그래도뒤섞여비행기를타고,같은테이블에서식사하는동안일행은차츰편하게서로를대하기시작했다.

그런가운데서40대초반의한중년여인이나의관심을끌었는데,호감이가는그녀의인상에다등산과문학을좋아하는취향의공통점으로우리는금방친해졌다.그녀는부산에서자영업을하고있는이혼녀로,이번여행에혼자참가하게되었단다.마침일행중에또한사람싱글로참가한여성이있어즉석에서그녀들끼리룸메이트가되었고,서로특유의친화력으로해서잘어울렸지만,그래도우리둘은가벼운농담을주고받으며점점더가까워져갔다.

여행의마력이이런것일까?인도의아름답고정교한문화유산을경이의눈으로탐방하는가운데,특이하고묘한풍물을접할때마다그녀와나는손짓하고탄성을질러가며걷거나쉬기를거의함께했다.아그라의성벽에올라앉아,저만치타지마할의환상적모습을뒤로하여사진을찍었을때는나도모르게한쪽팔이그녀의어깨위에얹혔고,그녀의환한얼굴은내쪽으로기울어져있었다.이제우리는마치처음부터동반한사이였던것처럼끼니때마다서로를챙기기에이르렀다.

우리가보드가야의대탑(大塔)에들르던날,일행중의여럿이그성지(聖地)에남아참배하고좌선(坐禪)하는동안,나머지몇몇과나는일찍호텔로돌아와쉬고있었다.잠시낮잠을한숨청하던중에노크소리를듣고방문을열었더니,아!어느새치마로단장한그녀가바로내앞에서있지않는가!심심해서들렀다고했다.별로거리낌없이내방에들어선그녀는나란히놓인한쪽의빈침대에비스듬히기대앉아자연스레대화를이끌기시작했으나,나는익숙지않은상황에서몸둘바를모를지경이었다.

‘어떻게해석해야될까?,‘이건유혹이아니야,저렇게표정이편하고순진한데…!,‘하여간이좋은기회에그만야수가되어버릴까?그러면그녀는순순히나의밥이되어줄까?,‘아니면,냉정한조련사가되어늙은야수를비웃으며채찍을들려할까?,‘한순간에온갖생각이머릿속에서일었다.마침화제가아까대탑에서봤던석가모니부처님이깨달음을얻으셨다는보리수나무와,이시간그나무아래에서참선하고있을나머지일행에이르자비로소나는마음을가다듬고나서미소로그녀를문밖까지배웅할수있었다.

아무래도여정(旅情)탓이려니!여정의장난끼는40대중년의따뜻한가슴이나60대노인의서늘한머리를가리지않는가보다!그래도그것은신기루만큼이나아름답고낭만적이지않은가!이얼마나엉뚱하면서도멋진추억이될까….

여행도거의막바지에이르러,우리가바라나시의갠지스강에서유람선을탓을때그녀는룸메이트와나란히앉아,말없이건너편의장작불에그슬린회색빛화장터를응시하고있었다.다시여행을끝내고고향의공항에닿자우리는그동안아무일도없었던듯이가볍게작별의인사를나누었다.그러고나서나는마중나와있을아내를향해기운을추슬러가방을끌고대합실로걸어나왔다.

스트레스(stress)는내친구

황선영

위층집에서내부수리작업을시작한지오늘로서3일째….어디를어떻게손대는지기계가뿜어내는파열음에다연이어쿵쾅거리는잡음으로,바로아래층에사는나로서는견딜수가없을지경이다.그렇다고이아침나절에어디로가서피한단말인가?도리없이고스란히당하고있자니부아가일고짜증이난다.아직도좋이보름은더걸리는작업이라니내가어찌견뎌내야할지….에라!소주라도한잔마셔야겠다!그리고안주는뭘로…?이래저래마음은황폐화해가고몸은우리속의비육우(肥肉牛)처럼살이오를것같다.

TV에서는뉴스시간마다얼굴을수건으로가린채이마에붉은띠를동여맨노동조합원과방패를앞세운전투경찰대간의진짜전쟁같은충돌이되풀이방영된다.화염병이날고물대포가터진다.노조집행부는최후까지의투쟁을선포하고사용주는원칙대로해고를통고하고직장폐쇄를선언한다.나날이그렇고그런모습을거듭해서듣고보려니그저답답하고속에서천불이날뿐이다.

이런비정상적상황에서겪는신체적감정적행동적반응을스트레스라고하는모양인데,이스트레스가바로현대생활속에서야기되는모든질환의가장큰원인이된다고한다.물론스트레스를유발하는인자는한둘이아니다.대개직장상사와의불화ㆍ상대방의무례ㆍ가족관계의해체…등으로부터,작게는소음이나빛의세기며지나친규제등이우리사회의전형적스트레스유발인자라하겠는데,이들이짓누르는중압감을견디지못하고자살로써해방을택하는경우도적지않음을우리는거의매일같이듣고보고있다.

대체로‘불행은혼자오지않는다.는속담처럼,스트레스의여러요인은한꺼번에밀려오든가마치무슨숙명이듯차례로찾아들기도한다.이럴때사람들은‘사주팔자탓으로여기거나‘전생의업(業)으로받아들이면서아예체념해버리는가하면,온갖종교적무속적방법으로이런상황을극복하려시도하고있는듯하다.그러나내가경험하고관찰한바로,인간사회에서생활인으로살아가는동안어느누구도,어떤방법을통해서도이스트레스로부터완전히해방될수는없다고본다.출가(出家)한종교인이거나성직자라할지라도예외일수는없을것같다.‘나무가가만있으려해도바람이자주지않는다.는격언이실감난다.일찍이석가모니부처님은정신적신체적번뇌와스트레스를오온성고(五蘊盛苦)라하여인간사에서누구도피할수없는고통가운데하나라하셨다.

세파가이럴진대,이른바‘성공한사람들은이들스트레스를잘다스렸거나극복해낸사람들이아닐까싶다.그야말로운좋게스트레스를비교적적게겪으며살아가는사람들도적지는않을것이나,많던적든스트레스는그때그때풀고가는것이현명한삶이다.물론건강의요체이기도하다.스트레스의적체는개인의불행일뿐아니라사회나국가적으로도불안의요인이된다.고대로마제국에서는빈곤층의스트레스가국가불안의요소로발전하는것을막기위해서,‘빵과서커스라는사회정책을썼다.즉,부자들이빈곤층에게정기적으로먹을거리를제공하도록했다.이와더불어자주원형경기장에서검투사(Gladiator)들의목숨을건대결을보여주거나전차(戰車)경기장에서의통쾌한질주를공짜로구경시키면서그들의스트레스를풀어주려했던것이다.예로부터다양한취미와오락은스트레스해소와불가분의관계를가진듯하다.오늘날여러프로운동경기는상당부분그때의그역할을맡아치르고있다해서지나치지않을것같다.이렇듯취미나오락이스트레스해소의좋은처방이긴하나,그것만으로족한것이아님은물론이다.때로는그자체가더큰스트레스로돌변하는가하면,갈수록더과격하거나짙은농도를요구하게되는것이취미와오락의속성이다.

한편여행이나등산등야외활동에다,심지어는술과담배까지도스트레스해소의방편이되고있긴하지만,아무래도마음을달래는데서방법을찾음이가장나을듯하다.어차피벗어나지못할바에야더러는수용하면서살아가는것이더현명할것같다.의학적으로도적당한스트레스가오히려생활의활력을더해준다하지않던가!문제는어느만큼을어떻게포용할것인가이겠는데,이럴경우불가(佛家)의화엄경(華嚴經)에서보는‘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화두가기댈수있는커다란언덕이될수있지않을까싶다.모든번뇌는마음의작용이니,마음을다스려그고통을덜라는교훈말이다.이래서자주“마음을비운다.”는말을듣곤하지만,정작마음비우기에성공한사람은별로못본것같다.나같은범인으로서는차라리체념하는편이더나을지도모르겠다!

얼마전눈에이상을느껴안과를찾은적이있었다.눈동자에무슨티라도들어박혔는지.간혹검고작은벌레같은형체한두개가때에따라나타났다사라지곤하지않는가!그것때문에특별히불편을느끼지는않았지만,그래도영마뜩찮아진찰을받아본결과,의사선생말씀인즉,생각보다흔한증세인데,아직까지원인도불명이고치료방법도없는실정이란다.(*병명은잊어버렸다!)그러면서“크게위험한병도아니니,그저‘평생친구처럼편하게대하면서살아라!”하는것이었다.

‘평생친구라!그러고보니문득스트레스또한나의평생친구로받아들이면어떨까싶은생각이든다.아무리잘봐주려해도결코좋은녀석이라할수는없겠지만,그래도평생을같이해야할처지라면친구로삼고지내는것이차라리편할듯하다.잔금으로가득찬내두손바닥의손금이암시하듯,크고작은스트레스에시달림은오히려당연한일!평생토록유복(裕福)을누리기란애시당초바라지도말일이다.그럴바에야아예기다렸듯이,스트레스의인자들을친구처럼맞이하여,가끔스릴을느끼며최악의상황을가상해보거나때로는더불어불안과긴장을즐겨볼수는없을까…?

이렇게마음을달래고있는데,방금배달된두통의편지가또기를채운다.그중한통은고지혈증이의심되니속히재검받으라는‘건강진단결과통보였고,다른하나는주차위반에대한‘범칙금고지서였다.

오,부처님이시여

姜中九

김해공항에서타고온택시를아파트입구에서내린나는열걸음쯤걸었을무렵부처님이생각났다.인도네시아발리에서사가지고온부처님을깜빡잊고택시에그냥두고내린것이다.

정류장을돌아다보니택시는이미저만치달려가고있는게아닌가.빈택시로돌아가는가,어쨌든한발늦고말았으니어쩔수가없었다.

혹시나하고경비실에들러서CCTV사진을점검해보았지만택시번호는확인되지않았다.아파트정문을통과한택시만사진이촬영되고있어서입구에서내린차는검색이불가능했다.

혹시택시기사가부처님을본다면아파트경비실로가져다줄는지도모른다는생각에며칠을기다리고있었지만허사였다.놓친물고기가크다고하더니참으로좋은부처님이었는데.

나는여행을좋아한다.그래서고희를지난지금도1년에몇번씩해외여행을하고있다.그중에두번은배낭여행을하면서가깝고먼나라를쏘다니는것이지리학을전공한나의보람이다.

그런데내친구박사장은회사일이바쁘기도하지만건강이따르지않아서해외여행을거의하지못하고있다.그래서나는여행길에나서면카메라로여행지의풍물을촬영하여보내주기도하고작은기념품을사가지고와서대리만족이라도하라면서전해주곤한다.

이번에도인도네시아여행길에나선나는그친구에게무엇을사다주면좋을까생각하다가문득부처님이좋겠다는생각이들었다.동남아시아는목각기념품이흔할뿐만아니라,그가독실한불자이기때문이다.

그래서수도인자카르타에서도,명승고적지로유명한족자카르타에서도기념품상점을돌아보았지만부처님은없었다.인도네시아는이슬람교국가였던것이다.

그런데자바섬관광을마치고발리섬에도착하여조각마을을찾았을때에는훌륭한조각품들이많은데놀랐다.거기에는부처님이있었지만큰것은너무비싸고작은것도100달러가넘어서,몇번흥정을하다가그만두고말았다.

며칠이지난후해수욕을나갔던나는바닷가기념품상점에서마음에쏙드는부처님을발견했다.가격을물었더니25달러라니이게웬떡이란말인가,그래서몇번의흥정끝에15달러에사고나니마음이그렇게흐뭇할수가없었다.조각마을에서라면몇백달러는주어야살수있을것인데도말이다.

나무로만든부처님은얼굴모습이자비롭고왼손에약병을든것이약사여래부처님을빼어닮았다.나는부처님이하도좋아서몇번이나살펴보면서사람들에게자랑을하기도했다.

보살이었을때,12가지서원을세우고수행을하여부처님이되셨다고하는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중생의모든질병을고쳐주는부처님으로,어떤병에든사람이라도그의상을만지기만해도낫는다고했다.

그렇다면이약사여래불상은건강이좋지못한내친구에게는참으로좋은선물이아닌가.그래서내친구의건강이회복되어함께여행을다닐생각을하니기분이좋아서콧노래가절로나온다.

그런데하루가지나고이틀이지나자엉뚱한생각이들기시작한것은부처님상이너무좋아서일까.친구의선물로산부처님상을부처님에게의지해서나날을보내시는누님에게갖다드리면어떨까하는생각이문득들었던것이다.

그리고또며칠이지나고나니,그럴게아니라내서재에갖다두고내가보는것이좋겠다는생각마저들었으니,명색이교육자로평생동안학생들을가르치던내가이렇게간사하고욕심이많은사람인가하고깜짝놀랐다.

그러나어쨌든불상을집으로가져가서결정하기로하고행여다칠세라차를타고비행기를탈때마다품안에안고다녔다.그리하여발리에서도쿄나리타공항을거쳐오면서도다치지않고용하게도부산까지가지고온것이다.

그런데집앞에서택시에그냥두고내려버렸으니,모든것이허사였다.아니,허무했다.이는아마도부처님이탐욕으로가득찬나를보시고는내집에머무르시기가불편해서이리라.아니그런게아니라,어쩌면내친구보다도더절실한불자가있어서그의집으로가셨는지도모른다고자위를해보지만,마음은역시편하지않다.

그래서인도네시아여행에서돌아온지1주일이지난지금까지도나는친구에게아무런말도못하고있다.기념품들이어지럽게널려있는내서가를보고있으려니나에게탐욕을버리라고꾸짖으시는약사여래부처님의모습이보이는것같다.

섬마을선생님

姜中九

하루의일과를마치고하숙방에누워서잠을청하고있노라면철썩철썩쏴하는파도소리가자장가처럼들려왔다.그래도잠이들지않는밤이면라디오를켰다.그러면그무렵한창유행하던이미자의노래‘섬마을선생님이흘러나왔다.

‘해당화피고지는섬마을에,철새따라찾아온총각선생

열아홉살섬색시가순정을바쳐사랑한그이름은총각선생님

서울엘랑가지를마오가지를마오.

‘중학교교사에임함.거제○○중학교근무를명함.1967년

4월1일문교부장관

이사령장한장이심심산골합천에서나고자라서초등학교교사로근무하고있던나를하루아침에섬마을선생님으로만들어버렸다.

사령장을받은나는지도책을펼쳐놓고거제도고현이어디쯤있으며어떻게찾아가야할것인가를검토해보았다.다행히나는지리학이전공이어서지도를보고찾아가는데는자신이있었다.

합천에서진주로가서비스를바꿔타고고성을거쳐서충무에도착하니,늦은오후여서거제도로가는배는끊어져버리고없었다.부둣가여관에서하룻밤을묵은다음날아침에금양호를타고거제도성포에내려서,다시버스를타고찾아간학교는계룡산기슭에자리하고있었다.

개교한지얼마나되었는지운동장마저제대로정리되지않은학교는황량하기그지없었고,잡초가무성한후원에는6ㆍ25전쟁때지은거제포로수용소건물이아테네신전처럼늘어서있었다.

3개학년5개학급으로운영되고있는학교는단출해서좋았다.하지만8명의교사가한학년에15,6개나되는교과목을가르치려니,한사람이3~4개과목을맡지않으면안되었다.

그래서부임한지6개월만에교무주임이된나는교과배정을하느라고진땀을흘렸다.지리학을전공한나는지리는물론이고역사와일반사회,심지어는물상까지맡아서가르쳐야했고,체육교사는음악과미술을맡아야했으며,그해처음교단에선가사교사는물상을맡으라고하자눈물을흘리는것이었으니,섬마을학교선생님들의교과배정은참으로어려웠다.

그러니수업인들얼마나힘겨울것인가.그중에서도물상은내전공과는거리가멀어서수업이있는전날이면밤늦게까지교재연구를해야했고,그래도수업을하다보면막히는것이있었으니,그래서체육을가르치다가국어로전과한김선생은3개월도견디지못하고사표를내던지고가버렸다.

그래도학생들이순박해서그런대로재미가있었다.전공과목이야문제될것없지만,상치과목을가르치다가막히기라도할라치면학생들이먼저눈치를채고“선생님,연구해서다음시간에가르쳐주시고재미나는이야기나해주십시오.”라면서떼를썼으니말이다.

그래서나는도루코면도칼로호랑이잡는이야기랑대창으로곰을잡는이야기하며,기름기많은고기로오리를잡는이야기들을수도없이해주었다.

그리고정규수업이끝나고나면보충수업도자율학습도없으니얼마나좋은가.그래도섬마을학생들은부산의명문K고교로,서울의S대학교로진학을했으니기특한일이아닌가.

그러다가토요일오후나일요일이면학생들을데리고바닷가로나가서낚시를하거나해수욕을하기도하고,어떤때에는학교뒤에높이솟은계룡산을오르면서호연지기를가르쳐주기도했다.

그무렵풍금을배워서초등학교교사가되겠노라는단발머리소녀가나를찾아왔다.내가초등학교교사로근무하다중학교로왔기때문에풍금을탈줄안다는이유때문이었다.

나는풍금이서툴기는하지만그소녀의소망을들어주었다.퇴근시간후학교로찾아오는소녀에게나의서툰풍금교습은시작되었다.‘도-레-미-로시작된풍금교습은소녀가총명해서진도가빨리나갔다.그래서‘학교종이땡-땡-땡-을거쳐서몇달이지나자‘나의살던고향은꽃피는산골-로나아갈수있었으니,참으로대단한발전이었다.

나는초등학교교사자격고시검정시험에대해서도가르쳐주었다.초등학교교사로있던내가몇년동안고전을하다가1년전에중등학교교원자격고시검정시험에합격했기에그방면에는비교적잘알고있었기때문이었다.

풍금교습이끝나고난한가한시간이면,우리는저만치내려다보이는고현바다의파도소리를들으면서거제포로수용소건물이늘어선학교후원을거닐기도하고,행운의네잎클로버를찾기도했다.

그런데다음해3월나는육지의어느고등학교로발령이나버렸다.그래서소녀의음악교습은끝이나버렸고,나는섬마을선생님생활을접게되었다.

섬마을을떠나는나에게소녀는바닷가에서주웠다는하얀조개껍데기를주었다.육지에가도이조개껍데기를보고있노라면고현만의파도소리가들릴지도모른다면서.

손을흔드는소녀를뒤로하고배를타고섬을떠나는나의귓가에는섬마을선생님노래가끝없이들려오고있었다.

‘구름도쫓겨가는섬마을에,무엇하러왔는가총각선생님.

그리움이별처럼쌓이는바닷가에시름을달래보는총각선생님.

서울엘랑가지를마오,떠나지마오.

박희선

지리산계곡에밤이깊었다.그윽한달밤이다.창문을열어놓고귀를기울이면물과달빛이어우러져숲속을거니는듯,그작은소리가온몸으로파고들어맑은피로흐른다.지금이순간,깨끗한피를나눌수만있다면죽어가는생명도구하지싶다.

숲속으로들어왔다.작은창으로보는것이한이차지않았다.여유롭게목청돋우던풀벌레소리가유리창을두드렸다.촉각을곤두세워찾아나섰으나소리는뚝끊어진다.참이상한일이다.가까이다가가면더잘들리리라믿었는데기대했던녀석들은어디론가사라졌다.사람이든자연이든적당한거리를유지하는게서로를아름답게바라볼수있다는걸새삼느낀다.너무깊이들어갔다가아니다싶어돌아설때의씁쓸한마음을한번쯤은부딪쳐보았으리라.나또한다르지않다.튼실한재목인줄알고왔다가회초리감도못되었을때얼마나큰실망을안고돌아갔을까.차라리먼곳에있을때가더듣기에좋았다.그들은나를따돌리고숨어버렸다.엄숙한밤의질서를뒤로한채쓸쓸히숲을빠져나온다.

새벽이었다.이슬내리는소리가가까이에있다.풀잎에도어린나뭇잎에도촉촉하게내려앉는다.풀잎과이슬의눈맞춤이보인다.잔디밭엔,바쁘게사느라고미처꿰지못한구슬이다모여있다.조금만일찍일어나도새로운세상이펼쳐지는데단잠에꼬리를잡혀좋은시간을놓치고살았다.놓친것이한둘이었을까만그래도새벽이집요하게따라다닌다.

새벽을맞이하러나간다.이슬머금은풀잎은그아름다움을무슨말로도찬탄할수없다.잎맥마저흠뻑젖어들어초록보다더짙다.계곡을두른사방마저갈매빛이다.나는작은나무가되어이슬을부른다.이슬방울을달고싶어양팔을벌려보았으나나무로알아줄지의문이다.팔이아프다.몸속에서뜨거운무엇이끓어오른다.새벽엔슬픔이거나어둠이거나불행이거나이런단어는찾을수가없다.새벽은확실한희망을품고있다.

한낮이었다.많은사람들이밤을보내고길을나섰다.나는하룻밤을더머물기로했다.이런호사가내삶한자락에준비되어있을줄몰랐다.몸도마음도벙싯거린다.평일의지리산계곡은독백에빠져있다.아무런이야기도내게들려주지않는다.귀를열어도닫아도별차이가없다.그들만이가지고있는방백을듣기위해나는숨소리마저삼키고있다.

무심히바라본맞은편계곡에큰느티나무한그루가의연하게서서정자를지키고있었다.나무옆으로갔다.홈이파여있는곳에이끼가자란다.눈여겨보지않으면지나칠작은생물도서로를도와주는살뜰한가족이다.든든해보인다.아름드리나무는땅속기운을힘껏뽑아올려생명이있는곳마다수관을잇는다.그나무를안고천천히돌았다.작은벌레들이기어간다.허리를굽혀자세를낮추었다.벌레가돌고있는길을수백배도더되는덩치의내가따라돌고있다.그래도나는자연이될수없었다.

개미떼가한줄로서서기어간다.반역이란걸모르는지오직한곳을향해하얀먹이를물고줄곧간다.잡다한언어제쳐두고페로몬으로소통하며가족을이루고사는부지런한일개미다.선두를따라의심하지않고가는것에가슴이뭉클하다.얼마나믿음이쌓이면저리될까.앞장서서냄새길을만드는일이참으로고달프지싶다.자칫훼방꾼이라도나타나면다시길을보강해야하는수고도아끼지않는다.개미길한뼘정도를없애보았다.갑자기행동이빨라졌다.우왕좌왕하며갈피를잡지못하다가최선의통로를찾았는지나란히간다.사춘기를혹독하게치렀던내모습이다.개미들에게도역경이있겠구나,운명이란것도있겠다싶다.

습기머금은흙주변에벌레가모여있다.소리는다감추고참으로조용하다.몸어딘가에소리통하나씩품고있다가적당한때가되면슬며시풀어놓을테지.나는홀로명상하는나무로서서그들의방백을한가롭게듣고있다.

숲속계곡에들어섰다.지리산자락의소중한알알천이다.계곡물에발을담근다.누구에게도차마하지못한말을털어놓았다.잊었다는것,용서했다는것이세월에덮여보이지않더니,어느날문득암초처럼버티고있다는것을알게되었다.“그랬구나.”불쑥내뱉은말에우호적으로고개를끄덕여주는물이더없이고맙다.응답만해주어도위안이되었다.

물살은그리급하지도느리지도않게흐른다.중용이랄까.장년을갓넘어온중년초입의마음공부잘된남성이었다.허리둘레가넉넉하다.성품또한늡늡해보인다.잠시머물다넘어온고개를돌아보는데,삶의치열한현장이즐비하게늘어섰다.한곳을향해달리는모습에힘이넘친다.무엇을얻기위해저리도급히달렸는지,목적지에도달해무엇을얻었는지그것은다음일이다.굽이굽이돌다가흐르고비틀거리다가다시시작하는물의흐름에서새힘을얻는다.

물속깊이손을담근다.겉과는달리손가락사이로빠르게지나간다.과거에집착하지않고이별에마음아파하지않는다.숲사이로들어온빛에물은제몸을비추며자태를드러낸다.그신비로움은무엇과도비교할수없다.지리산계곡의흐르는물은어둠을몰아내는강렬한불빛이다.나는환희에찬박수를보냈다.

계곡을따라얼마쯤내려왔을까.소용돌이가있다.헤살꾼처럼빙글빙글돈다.물이가는길은물길이다.개미가가는길은냄새를따라가는냄새길이다.그들이가는길은모두평지같은데유달리내가가는길만비탈길이다.또욕심이머리를치켜든다.

오솔길로들어섰다.“옴마니반메훔.”이나지막하게들렸다.옴마니반메훔,옴마니반메훔.수년전부산여류문인협회회원들과강원도정선엘간적이있다.하룻밤을깊은숲속에서보내고새벽에일어나산엘올랐다.골이깊은곳을내려오는데ㄱ소설가와ㅈ시인께서옴마니반메훔을불렀다.우리도모두옴마니반메훔을따라했다.좁은길이어서저절로한줄이되어걸어왔다.소리를어떻게내어야한다고말하지않았으나,수십여년동안이어져온분위기랄까,그런기운들이전이되어한마음이되었다.일행들은수행자가된듯마음이사뭇숙연해졌다.나는잠시소리에귀를기울였다.그화음이얼마나아름다웠는지,마음또한얼마나평화로웠는지행복에겨워하늘을올려다보며눈을껌벅거렸다.생각지도못한감동이었다.새벽산과깊은계곡을그리도은은하게울리던그소리가여기에서도들린다.

옴마니반메훔을부르며길을간다.평화로운마음보다내안을들여다보고나무라는일종의수행방법이랄까.길이나를데리고조근거리며갈때도있고따라올때도있었다.앞장서서가는일은여간조심스러운게아니다.따라오는여린발길이행여돌부리에채어넘어지진않을까.흘려둔이야기들이싹을틔우지못하고죽진않을까.그러다가헛걱정임을알고는다시편하게간다.오늘하루만이라도모든만물은타고난운명대로살아간다는것에초점을맞춘다.

영혼마저평화에젖어들게했던소리와나를나무라는채찍은점점멀어졌다.삶의절반고개를지나다알토란만큼옹골지게찾아온짬이다.짬은조용한음악이며열정적으로살아온다음날의여백이다.새로운길을가게하는데필요한활력이다.세상만사서로연결되지않은게없을텐데,누가내게보내준소중한짬인지.찰나같이찾아온기쁨지나고나면무엇이또나를기다리고있을까.

추억을찾아서

이경자

내가자란고향뒷산을50년만에,어릴때같이자란아재와사촌동생과함께가기로약속을하고아침일찍집을나서니,말로표현할수없는들뜬기분이다.

보고싶은약샘은그대로있을까,작은소나무는어떻게자랐을까,가만히기억을하면참나무골산에는습한곳어디쯤에산나리가피어났던곳이있고,집뒷산감나무골에는진달래가산등성이하나온통붉게물들어있었고,어느길어디쯤에서조금올라가면바위옆에서로친구하며자라던작은포동소나무들은어떻게자랐을까.또어디쯤에는산비둘기가가지에다엉성하게집을지어새끼를기르던소나무는어떻게됐을까.생각에생각을거듭하면서고향에도착하여준비해온점심을먹으니어릴때소풍왔던기분이다.

숲이우거지고풀이자라면길찾기가힘들것같아서낙엽이진계절을택하여이월달로정하였다.고향마을에는일년에한번쯤은왔지만,어릴때소풀먹이며오르내리던산을올라보기는처음이다.길의흔적이조금은있겠지,아니면짐작이라도하면서가보리라생각하고산을오르니생각보다쉽게옛길을찾을수있었다.옛날길의흔적은있었고,한참을올라산정상에거의왔을무렵그곳에있던약샘을찾기로했다.아재는앞서고나는뒤따랐다.이정도일것이라는짐작을하여주위를살피니작은바윗돌이나타났다.바윗돌틈새로흘러내리던약샘이분명했다.소나무낙엽이수북이쌓여덮여있는곳을지팡이로제치고돌틈을살펴보았지만,이미물은말라버린지가오래된것같다.

이곳은먹는샘이었고50m쯤내려가면그곳에는물이많이솟아나고샘이컸다.그약샘에는몸을씻는샘이었고,그리고올라와서먹는약샘의물을마셨다.몸을씻는약샘은물이많이나왔으니지금도물이나오겠지,기대를하면서가파른언덕을미끄러지면서내려가니이곳에도물이나오는흔적은없고,흙이무너져내려약샘이었다는것은짐작으로밖에알수없었다.

약샘에는작은소나무가지에조랑박하나대롱대롱달려있고,1원짜리빨강돈도한장걸려있었다.쌀을한숟가락정도흰헝겊에싸서실로찬찬매어서세주머니씩달려있었으며,가지마다의추억은그대로있는데내가보는것은흔적뿐이다.흔적이라도볼수없었다면얼마나서운했을까.

이약샘의물은피붓병에효험이좋았다고했다.약샘에가기전삼일을정성을들이고갔다와서또삼일을정성을들여야효험이있다고했다.초파일,오월단오,칠월칠석이런날이면사람들이많이왔다가는것을어릴때보았다.60년대부터는차츰사람이뜸해지더니70년대부터는사람들이보이지않게되었다.생활이좋아지면서약을구할수있는기회가많아졌기때문이었으리라.그래도소풀먹이던아이들이약샘을지날때면물을마시곤하였으며물은단맛이났다.지금은소풀먹이던아이들도없고찾는이없으니물은영영말라버렸나보다.흔적을좇아서추억하는날이되었다.그때뛰놀던단발머리소녀는어디가고중년이넘은한여자가추억을찾고있다.

여름이면약샘주위에는망개나무가자라고있었고,어린우리들은주위에있는망개잎을따오므려서돌틈새에끼워넣고물이흘러내리면또한잎으로오므려약물을받아먹곤하였다.망개잎에담긴그물맛을어디에서느낄수있을까.새봄에돋아나는망개잎은파르스름하고도톰했다.그윤기나는잎이지금도등산길어디쯤에는꼭볼수있을것만같다.

이곳을뒤로하고다시옛길을더듬어길을찾으니멧돼지다니는길이발견되었다.황토땅에물기를머금고있는곳에흙탕목욕을하고간시간이그리오래된것같지가않았다.어릴때뛰어놀던산은이제멧돼지생활터전이되어있었다.또한참을걸어가니,거기에는멧돼지가가려운곳을시원하게긁어대는소나무밑둥치가있었다.얼마나그소나무에몸을비볐던지나무밑둥치가반질반질하였다.멧돼지는만나지않았으니다행이다.

반대편산을가기위해산을내려와고개마루에서쉬었다.이곳은옛날부모님이농사를짓던큰밭이었는데,이젠산이되어버렸다.지금도곡식을심던그때그대로기억이생생하다.맨위에는들깨를심고중간에는고구마심고,맨아래밭에는장밀을심었다.밀대는어른키만큼컸고밀을물에삭혀서발로밟으면흰물이나오고,그것을흰천에다한숟가락씩떠서햇빛에말리면풀가루가된다.이것을두고두고옷에풀먹이는재료로썼고,밀대는초가집을이는이엉으로썼다.아재는어릴때이곳에놀러왔다가미국인여자를보았는데,머리가노랗고눈도노랗고,장밀밭에서숨어서보다가하도무서워줄행랑을쳤다는지난일을이야기하면서한바탕웃었다.

이곳은6ㆍ25전쟁의격전지였다.낙동강이가까운곳이며,북한군이미군에게쫓겨가면서동네뒷산과마주보는소명산에서전투가벌어졌는데,나중에는총알이없으니밤새빈총으로총소리만요란했다는곳이다.이때미군병사가전사를했다고들었다.전쟁이끝나고전사한동료를찾아군용지프차를타고왔는데,오빠들은어릴때초콜릿도얻어먹었다고들었다.그미군여성도동료나남편,연인을찾아서이곳산골짝까지왔던모양이다.오늘얘기를들으며그사람은평생이곳을잊지못하고상처를안고살아갈것이라고생각하니마음이아팠다.그사람들도이제팔순이넘었을나이다.

어릴때어른들께들은이야기다.북한군이미군에게쫓겨북쪽으로가려고낙동강을건너면서,옷을버리고헤엄쳐오기도하고,소나무를베어서그것을타고건너기도하였는데,마을에와서는옷을달라고해서바지가없어서못주고윗저고리를주니,그것으로두다리를끼어입고가는군인은스무살도안되어보이는앳된군인이었다고,지난이야기를들려주시던어른들의모습이눈에어른거린다.

이런저런얘기를나누면서산마루에서잠시쉬고전투가벌어졌던소명산에올랐다.어릴때는이곳에오르면큰들판이보였는데,지금은나무가빽빽이자라서들판이보이지않는다.이산중턱에조금평평한곳이있는데,옛날에는이곳이절터였단다.임진왜란때쌀뜨물이계곡으로흘러내리는것을보고는,사람이산다는것을알고는올라가불태워버렸다는것이다.한바퀴돌아보니그곳에는나무가울창하게우거져있고평평한곳에는몇개의봉분이있는데,윗대일가할아버지의무덤이었다.산아래동네내제는벽진이씨의집성촌이다.무덤은옛사람의흔적이다.무덤앞의상석을보니아주오래된무덤이다.세월의흔적을느낄수있었고,상석에새겨진할아버지의휘이름자를읽으며옛분들의정이느껴졌다.

절터에서우리마을쪽으로내려오면돌이팥색으로이루어진계단식계곡이있는데,여름에비가많이오면폭포처럼물이흘러내렸고,흐르는물의양을보고비가얼마나왔는지짐작할수있었던곳이다.

산중턱을가로질러오솔길이나있고길위로다랑이논이몇개있었다.우리집에서바라보면가을에는벼가누렇게익어있었다.잊을수없는고향풍경이다.다랑이논맨위에는작은연못이하나있었고,연못가에는수양버들한그루가있었다.유난히물이맑은연못이었다.낮에는흰구름과작은소녀의얼굴이머물게했던곳이며,밤이면달과별이머물던곳이다.새벽이면산토끼노루들이물을먹고가는작은연못이었다.이곳만은그대로있겠지기대를하면서찾으니,논은그대로흔적이있으나이곳역시연못에물이말라버린지오래된것같았다.수양버드나무는베어져버리고마른둥치만흔적을간직하고있다.다랑이논도농사지을사람이없게되었을것이고,물도필요없게되니그래서말라버렸나보다.여기연못만은그대로있길기대했는데,그흔적이위안이되기보다는이젠허탈감이다.50년이지난옛날이그대로있어주길바랐던것은나의소망이었구나.한번찾아가지도않고서는이제와서추억이그대로있기를바란것은어리석은욕심이었다.

언제나이곳이그리웠는데….옛날은가고추억만남는것,그래도마음속에는약샘이있고,수양버들가지늘어진작은연못이그대로있으니,내소중한꿈이마르지않도록영원히추억속에간직하여야겠다.

(2009.2.)

예불하는토끼

전정식

에니멀컴뮤니케이트인하이디가말과교감하는장면을보고나는놀랐다.그녀는말의괴로움을감지하고는눈물을흘리니말도눈물어린모습으로하이디의얼굴에볼을비비면서지난날의괴로웠던일을하이디에게털어놓는다.

“지난날에내가아이를배고있을때주인은나의임신도모르고나를함부로부리어사산을하게했어요.나는이괴로움을잊을수가없어마음이몹시아팠습니다.그뒤로부터나의마음은주인에게서멀어져버렸습니다.그러나이제는나의마음이다풀려서괜찮아요.”

주인은하이디가전하는이말의말에놀라고미안해서눈물을글썽이면서말의볼에얼굴을비비며‘미안하다.고잘못을빈다.경마에쓰이는이말은지금까지주인이타면매우난폭한행동을하였다.그런말이하이디의교감에의해말의고통스러웠던일을주인이알고말에게미안해하고새삼정을쏟자,말은주인을이해하게되고둘은정상적인관계가되었다.

어느집의고양이는그집어머니의접근을허락하지않는행동을늘취하였다.어머니가가까이하려고하면고양이는얼른피하여높은곳으로달아나거나때로는적개심을보이었다.이고양이와교감을한하이디는고양이의마음에맺혀있는말을어머니에게말한다.

고양이가이집에오던첫날,어머니가“왜고양이를데려왔느냐?”고고양이를가지고온딸에게말을했는데,고양이가이소리를들고는어머니가자기를싫어한다고생각하게되었다.마음에상처를입은고양이는그후부터어머니를피하게되었다고했다.하이디로부터고양이의자기에대한마음의갈등을알게된어머니는미안함을고양이에게전한다.이때까지높은곳에올라서어머니를경계하던고양이가한참뒤에슬그머니내려와서어머니무릎에머리를갖다대면서화해의제스처를취한다.

말과고양이와같은동물뿐아니라식물도사람과의교감을함을실험에의하여밝히고있다.

장미에심전도측정기를연결해놓고관찰을한실험을보고한것을보면식물의감수성을이해할수가있다.

장미옆을전정사(剪定士)가지날때와어린아이들이지날때의장미의반응을측정한결과,전정사가지날때는장미에연결해놓은심전도측정기의그래프가요동을치며오르락내리락하였는데,자기를좋아하는어린아이들이가까이오면그래프는잔잔한선을긋는다.전정사의경우는또자기를해칠까싶어몹시긴장한상황을나타낸것이고,아이의경우는자기를좋아하는사람이나타났으므로평온함을나타낸것이다.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의저서<선(禪)이란무엇인가>에식물학자의설을소개했는데,‘식물들도매우예민한감수성을지니고있다.고하였다.예를들면잎을뜯거나가지를꺾으면나무들도아픔을느끼어서세포들이그부분에집중해지면서세포조직이이상행동을한다는것이다.

또이런실험보고도있다.숲을벌목할때숲입구에서나무를베기시작하면멀리안쪽에떨어져있는곳의나무들이긴장상태를보인다고하였다.

지금으로부터약38억년쯤전에지구에처음으로생명이바다에서탄생하여,이후식물과동물로나누어졌다고생명과학에서는말하고있다.그러므로,동식물은본시같은조상에서갈라진것이니이로미루어보면앞에서말한식물의감수성을이해할수가있다.우리가무심히나무의잎을뜯거나가지를꺾는것은감수성을지니고있는식물에게는굉장한수난인것이다.

어느절에서스님과같이생활하고있는토끼는절마당에서놀고있다가범종이울리면엉덩이를팔짝치켜올리면서법당의부처님을향하여예불을하는모습을텔레비전이포착하여방영하였다.그절에는신도를안내하는개가있어서절문에서신도를법당까지인도하기도하고,스님이법당에서독경을하면스님옆에얌전히앉아서듣고있다가스님이예불하면자기도예불을한다.

언제부터인가나는전세현세내세의삼세가있는것으로믿고있다.나는이토끼와개의전세를나름대로상상해보았다.이토끼와개는전세에스님이었다.어느날잘못을저지르게되어서옥황상제의명으로잠시현세에와서지나게되었다.옥황상제께서는사람으로태어나면생각이많아져서또실수를할것을염려하여토끼와개로태어나게하되절의스님곁에서지내게하였다.절에서생활하니신심이생기어서청정한마음을갖게될뿐아니라,이들의행동을보는사람의마음도저절로신심이생겨나게하는포교의역할도하게되어선업(善業)을쌓게되게한것이다.선인(善因)은선과(善果)를낳아서내세에는고승의소질을가지고태어나게될것이다.

내가생각하여도그럴듯한삼세의업보이다.부디이토끼와개가내가생각하는대로되기를빌고싶다.

지옥이야기

전정식

여성여행가인50대의한비아씨가아프리카오지를여행하고그곳에서겪은일을말하는가운데,잠비아에서친해진어린이가이틀만에죽어서그사인을알고보니탈수현상이라고했다.설사로탈수상태였는데,링게르를맞으면쉽게살릴수있는아이였다.현지돈으로몇백원이면되는것을죽게만든것이다.영양실조로죽는이런현상이아프리카에서는흔히있는일이라고했다.한비아씨는이말을하면서그때자기에게는80만원을가지고있었다며안타까워했다.우리돈천원이면어린이한사람의일주일분을먹일수있는곳이잠비아라고했다.

나는이말을듣고바로그곳이지옥이라고생각했다.

미국뉴욕의빌딩에가한9ㆍ11자살테러는우리가상상을할수없는테러이다.그사건으로전세계사람들은몹시놀랐다.나는이런테러가왜자행될수있는지도무지내상식으로는이해할수가없었는데,우연히일본텔레비전을통하여그비밀을엿볼수있게되었다.

아랍의어느나라에서하고있는유아교육에서테러교육을하는과정을볼수있었다.이교육과정에서테러의주목표를미국으로정하고,어린아이들에게철저하게세뇌교육을하고있었다.그러니이아이들이성인이되면당연히미국은없애버려야하는나라로알게되고,자원하여자살테러에참여하게될것이다.어릴때부터사랑이아닌증오를심어주고있었다.그들은죽은뒤에는알라신곁으로가게되는영광을누리게된다고믿게해왔기때문에,서로테러에참여하려하고있다는것이다.우리의상식으로는무고한많은사람을살상하면지옥으로가는것으로알고있는데,이런행위로알라신곁으로갈수있다고하였다.

세계에는여러종교들이있다.긴세월동안한민족의생활과문화의토양에서생겨난것이종교이므로,그민족안에서는막강한힘을가지고있다.9ㆍ11의테러는알카에다같은종교단체가“우리가하였다.”라고공언하는것을보면아랍권이배후인것이분명하다.무고한사람들을대량살상하고도죄책감이없는아랍권의이런무리들의표적지가된곳이바로현대의지옥의땅이되는곳이되는것이다.

언젠가어떤모임에서경남창녕군궁류면에간적이있다.이궁류면은서(?)순경이던가한사람이무차별총기난사로많은사람이희생된곳이다.그지옥이연출된그곳에갔을때에는조용하고한가로운골짜기여서이곳이많은사람이희생된지옥이었다는생각이전혀들지않았다.

나는현세는이처럼지옥과극락이수시로뒤바뀌는상황이연출되는곳이라고생각하고있다.

한반도북쪽두만강주변에눈을돌려보면,이대명천지에있을수없는일들이거기에벌어지고있다.

2007년10월에세번이나북한을탈출하였다가북송되자다시탈북하여중국에살고있는어떤여인은다음처럼말한다.

“내소원은조국이빨리통일이되어서우리북한사람들이

중국에서제일못사는나만큼이라도살았으면….”

그렇다면그녀가살았던곳은또대체어떤곳이란말인가.

또다른여인은다음처럼겪은경험을말한다.

“나는중국으로팔려와서몽둥이부러지게맞고살다가쌍둥

이애를낳아주고몽둥이에못견디어도망쳐나왔습니다.”

또다른여인은다음처럼말한다.

“남편을찾아두만강을건너다가두딸과93만원에팔려갔다

가젖먹이를놔두고도망쳐나왔습니다.”

또한여인은북송때헤어진딸을4년만에만나서기쁨의눈물을흘리기도하였다.

이금희(가명29세)라는여인은강제북송,강제유산을당하고아들과는생이별하여지금한국에와서살고있다.

중국에사는북한에서온여인들은무국적이어서물건처럼인신매매의대상이되기도하고,임신을하여도국적이없으니무국적아이를가지게된다.

또중국인의아내로살다가는다른사람에게팔리어가기도하고,어떤여인은함께살던중국인이동네여러남정네에게윤간을당하게하는수모를겪게하여도호소할곳이없다.

어떤여인은일을뼈빠지게하고도보수를못받지만어떻게할수가없다.

2007년에제3국을통해한국으로온탈북자수가2,000여명이고,중국에살고있는탈북자는4만여명이라고추산되고있다.중국에사는그많은북한여인중에는지금도지옥을헤매고있을지모른다.

북한에있다는강제수용소는아마현대의지상지옥으로악명높은폴란드에있었던나치독일의아우슈비츠수용소와비슷하지않을지모르겠다.

많은사람들은죽은뒤에극락이나지옥으로간다고생각하고있다.그러나나는그렇지않다고본다.우리가살고있는지금이지구에바로극락도있고지옥도있는것이다.

아무도지옥같은곳에태어나기를원하는사람은없을것이다.그러나이세상에태어남이란신의영역이어서개인의희망이끼어들수가없다.그렇다면한시대에같이살고있는인류는운명적으로지옥에태어난사람들에게배려하는마음을가지고도움의손길을보내야하지않겠는가.유니세프회원이되어나는좁쌀보다도더적은도움을보내고있지만,요즘언론보도를보면많은사람들이어려운이를위한구호활동을활발히하고있는소식을접할때지구촌에희망있다는생각을가지게되었다.하비아씨와같은여행가들이앞으로도아프리카의오지와같은곳을다니면서세상의어려운곳을알려주어서,이런소식을접한사람들이십시일반으로도와나간다면이지구상에있는지옥도조금씩은없어지지않을까하는생각을해본다.

승강기에서겪는일들

이기태

현대생활을영위함에있어승강기와인연을끊기는힘들다.대부분의직장이고층화되어있고,아파트에서살기위해서는승강기에의존할수밖에없는것이현실이다.정과한이많다는우리겨레는한번정을주면잘변하지않지만,그정을좀처럼주지않는다.그점에있어생판초면인사람에게도살짝미소지으며“하이!”하고인사하는미국사람들이나말없이목례하는일본사람들과는달리,정식으로통성명을하기전에는서로먼저말을걸지않는것이우리의관행이다.

약25년전승강기가없는아파트에서살다가,당시만해도고층인온천동L아파트에이사했다.1층이었으므로승강기의신세를지지않는것이편했으나,출퇴근할때현관에서만나는주민들간에서로인사하는예를보기어려웠다.그들은좁은승강기내공간에서힐끗얼굴만쳐다보고내릴때까지말없이외면한채서있는게여간고통스러운것이아니었을것이다.

같은동(棟)라인에직장에서알게된K의사가살고있음을알게되었다.나는그에게우리라인에사는약30개가구들의부부로구성된친목계의조직을제의하였고,수년전부터살아온그도그필요성을통감해왔다고하면서적극찬성했다.‘이웃사촌이라는속담과는달리,인사없이지내는고통에시달려왔던이웃들의적극적인찬동으로오래되지않아친목계창립총회가개최되었고,초대회장에는가장연장인Y의사가추대되었다.회의이름은15동에연유하면서날로깨달아가자는뜻으로일오회(日悟會)라고회장이명명했다.

일오회의운영은순조로웠고,회원끼리의우의는날로돈독해져서만날때마다서로반갑게인사하고대소사를의논했다.회장은연령순대로2년마다자동임명되기로정했는데,내가3대회장에선임되었을무렵에는경주일원과해인사등에단체여행도가고금정산등반도자주했다.회식을마치면노래방에들려신명을돋구는것이관례가되었고,송년회는노래방시설이있는‘D초밥에서회포를풀었다.뒤에알아보니,그‘일오회와같은모임이다른동에는조직된바없다는것이었다.

세월이흘러이사하는입주자들이속출했고,옛정을잊을수없어월례회에계속참여하는이가있기도하였으나대부분은탈회를했으며,새로입주하는이들은생소함을이유로입회를사양했다.세상사모두가그렇듯이일오회도쇠락의길로들어선것이었다.

지난5월직장에서보행으로7분거리인H아파트로이사했다.

전에살던아파트보다휠씬고층인이아파트에는전부터아는이가한사람도없다.

그런데놀라운일들을겪게되었다.아침운동을나갈때나출퇴근때승강기에서만나는주민들이거의예외없이인사를하는게아닌가.특히,어린이집으로가기위해엄마손에매달려나온6세전후의어린이가“안녕하세요.”하고또렷이인사하는데는경악을금할수가없었다.전에살던아파트의주민들은대개가노년층이어서명절때외에는어린이들을보기가어려웠는데,세대주들이젊은직장인들이기때문인지,지금의아파트에는많은어린이들이살고있어서아침9시반경에그들을태워가기위한어린이집의소형버스가2대대기하고있는데,젊은어머니들이아이들을태워보내고난뒤끼리끼리모여서담소하는것이이채롭다.

저녁에조용히책이라도들고앉아있으면바로아래에있는구내어린이집부근에서아이들이웃고고함치는소리가크게들린다.옛날같으면그훤소(喧騷)가싫었으련만,노랫소리보다더흥겹게느껴지는것은내나이탓일까.출생률감소와급격한노령화로나라의앞날에위기감을느끼는데,건강하고똑똑한아이들을낳아사랑으로기르는저들젊은어머니들이야말로진정한애국자임에틀림없다.

내사무실이있는14층빌딩에는수년전부터다른사무실직원으로근무하면서출근때에자주만나는사람이있다.

입주한지5년이넘었으니,법조계와관련이있는사람들은서로를대개알고있다.한때상사로,동료로,하료로인연을맺었던사람들이라만날때마다반갑게인사를주고받는것이생활화되어있다.

그런데유독이사람만은나를보고도못본척한다.그와외면하고서있는수분간이내게는상당한심리적고통이지만,휠씬젊고동료도아닌사람에게먼저인사할용기가아직은내게없다.

그러고보면알지못하는초면의인사에게“하이!”라고먼저말을건네고,목례를주고받는외국인들은내가겪는고통에서벗어나기위해미리현명히대처하고있는것이리라.

간단한인사한마디주고받는것이얼마나삶을부드럽고기름지게하는것인가를안다면,비록정을쉽게주지않는국민성을지니고있지마는,새로이정들게하는인사만은게을리말아야할것같다.

머리염색을그만둔까닭

이기태

20년가까이전에‘머리염색이란글을쓴적이있다.머리염색을하게된경위와염색한후새로이알게된일들에관한신변잡기였다.

15년도넘게한달에한번꼴로어김없이해오던머리염색을그만두었으니그냥넘어갈수가없어졌다.

머리염색은참으로귀찮은일이다.마약중독환자마냥한번시작하면이를중단하기는어려워진다.염색후일주일만지나면새로이돋아나는백발이눈에띄기시작하는데,이를감추기위해서는3주에한번꼴로그역한염색작업을감내해야하는것이다.

처음아내의손을빌리다가그노고를덜어주기위해국산보다질이좋다는일제염색약을구입하여단골이발소에맡겨놓고이발과동시에염색을하게되었는데,시간내기가여간어렵지않아,비록약간보기싫어지더라도한달까지는견디기로했다.그런데그솜씨가좋지않다는이유로아내가자신이다니는미용원을천거하므로,어쩔수없이평소기피하던미용원에서이발과염색을하게되었다.

영국에서2년간미용교육을받고자격증도여러개취득했다는C원장은솜씨도좋을뿐아니라미식축구선수여서,한국에도미식축구를즐기는동호인들이꽤있고,지역별대항아마추어경기가열린다는사실도알려주었다.

시간에쫓기는현대인들의생활양식에맞추어염색도속성제품이경쟁적으로출시되었고,소요시간도1시간내외에서‘15분또는‘즉시로변화했다.

같이골프를치던피부과전문의P박사가아주연한갈색으로염색을하고있기에머리염색약의독성에관해물었더니,모든염색약은인체에유해한독성을함유하고있는데,속성염색약일수록그독성이강하고더디게염색되는것이덜유해하다는것이었다.

C원장은염색약도말후30분의대기시간을고수했다.자기가쓰는영국제약은독성이약해염색이더디게된다는것이었다.

나는짙은흑발이싫어서흑갈색약을선호했다.그런데머리칼끝부분은염색을거듭하게됨으로써더욱검어지고,새로돋아나는백발에는원하는색조가나지않아염색농도가불균형해지는결과가생겼고,너무짙게염색한것이아니냐는친구의충고도듣게되었다.

2년전연말에전국대부분의변호사들이참여하는연수회에서,개최인사를하는L변협회장의염색안한백발이아주매력적이라는느낌이들었다.나도염색을그만두면저런멋있는백발이되려나하는생각도일어났다.자연스레찾아오는늙음의상징인백발을염색으로눈가림할이유가무엇인가.과감히벗어던져야할거짓들을덕지덕지안고지고살고있는데,머리염색으로그두께를더할이유가없지않은가.

머리염색을시작하기는쉬웠지마는그만두는것은결코쉬운일이아니다.원래의백발을찾기까지반년이상의인고를겪어야했다.편하기야아주헤아릴수없었으나,백설이쌓인고산준령의숭엄한경관과는반대로서서히퇴색하는흑색두정을그대로남긴채아래로부터흰머리칼이자라나자니,비록세월따라그비율은달라졌지만흑백으로준별되는머리칼모양은어색하기짝이없었다.

마지막남은염색머리카락을가위질해내는이발사의손길이얼마나고마웠던지.장기간의탈염색화작전이성공하는날,나는또다른성취감을맛보았다.

그런데혁명적인탈염색화작전에자족하고있는내게주위의시선들이모두긍정적으로대해주는것에새삼놀란다.대부분의친지는풍성한백발이고상해보인다는것이다.전에는10년은젊어보인다고했는데,이젠그런말은없어졌으나품위있어보인다는것은결코듣기싫은소리가아니다.

백발에는나름의공덕이있다.

백발은경륜의상징이므로예부터장로로서존경받아왔다.영국의법정에서아직도법관들이백색의가발을쓰는이유는경륜과지혜에대한숭경의표현일것이다.

전철안에서는당연히자리를양보받는다.백발에대한존경심을상실한세대들로충만되었지마는,아직도겨레의심정근저에는효제(孝悌)의미풍이살아있음에틀림없다.

수일전에는퇴근길에초등학교5학년정도의어린여학생으로부터“안녕하세요.”라는인사를받고놀란일이있었다.자세히보았으나아는아이가아니어서“어디서나를만난일이있나?”하고물었더니,그냥인사를했다는것이었다.

약45년전검사초임시절지프차를타고가는마을신작로길에서마주걸어오다가손을흔드는아이들을보고신기해한일이있었는데,이어린이는길가는노인에게인사하라는가르침을학교나부모로부터받은것일까.어쨌거나가슴이흐뭇했다.

그런데서서히악화의길로가던내건강상태에호전의기미가보이기시작하고,피로감도덜느끼게된요즘,머리카락이검어졌다는말을듣기시작한것은신기한일이다.

그래서거울을유심히살펴보니귀밑머리카락은훨씬검어진것같고,하얗기만하던두정부의긴머리카락속에드문드문검은머리털이섞여있는게발견될뿐아니라,전체적으로흰빛깔이회색에가까워진느낌이드는것이아닌가.

그러고보니눈썹도백색장미(長尾)털은모두없어지고대신검고짧은새눈썹이돋아나고있는것이다.

옛날에80이넘어검은털이난다는말을들은적이있지만,그현상이내자신에게일어나고있다는사실이놀라울따름이다.

남은세월이얼마인지알수없지마는,생을마감하는무렵의나의머리카락빛깔이어떤모습을하고있을까.궁금한일이아닐수없다.

간절곶풍경

남기욱

바다가운데서있다.우리나라에서가장먼저해가뜨고,해를제일가까이에서볼수있는곳간절곶(艮絶串)이다.육지가뾰족하게바다속으로튀어나와간짓대처럼보인다고하여붙여진이름이다.울산광역시울주군서생면대송리간절곶은어둠을뚫고희망을안겨주는찬란한빛을뿜어내고있다.

수평선저멀리에서하루를여는이른시간에만볼수있는,눈부시도록아름다운광경을마음속깊이담아가고싶어하는뭇사람들의뜨거운열기로가득한곳이다.

일년열두달하루도빠짐없이해는솟아오르고서산마루로넘어가는일이어김없이반복되고있으나,지는해는쓸쓸하고외롭지만희망가득안고뜨는해는마중나온사람많아행복하며,무르익어가는신록의계절에도언제나발길이끊이지않는곳이다.길거리에즐비한커피집에서쌀쌀한바닷바람벗삼아따끈한커피한잔의맛은오랜기억속에남아있을추억거리중의하나이기도하다.

지난새해첫날에는한발자국이라도더가까이에서희망의날개를펼치려고하는이들로붐볐다.타오르는해를맞으려고그날은발디딜틈도없었다.오늘도붉은해가부글부글끓으며하얀증기를토해내더니시뻘건불덩어리가바다위로튀어오를때,숨죽인채기다리던고요한바닷가에환호성이터졌다.그것도잠시뿐적막이감돌며두손모아고개숙인모습에서엄숙함이찾아왔다.

언제나이곳에는젊음이있고피끊는용기가있으며,행복을갈망하는기도도함께한다.어느누가감히이어두운세상을밝게하겠는가.활기찬하루를시작하려고하는이들에게생동감마저느끼게한다.

천년을살아온듯한해송,녹색의잔디밭,부서지는새하얀파도,눈부시도록아름다운바다와더불어조화를이루며천혜의자연을즐길수있는간절곶의아침은힘차게밝아왔다.또한불타는용기와가슴속깊이묻어두었던욕망의덩어리를토해내듯붉은해가솟아오르는장관(壯觀)은생명이움트는하모니이다.

해맞이조각공원의하얀대리석조각작품은희망과사랑을연출하고,하늘높은줄모른채우뚝서있는우체통도이곳에있기에내소원담아보내면꼭이루어질것같아첫사랑의설레임을안고편지를쓴다.어디에선가오래전에잊어버린그녀가받을것만같다.그래서간절한마음으로띄워보낸다.강렬한열정에취하여해가하늘높은곳으로떠오르도록다들그자리에서떠날줄몰랐다.오랫동안놀란마음진정할길없어멍하게하늘만쳐다보다가,굳어버린몸이끌고내일을약속하며왔던길되돌아가는발걸음은한결가벼워진것같다.

(2007.5.)

동창회

남기욱

해마다여름이되면반가운얼굴들을만나는날이온다.그날만큼은동심으로돌아가고향의품속에서1박2일동안보낼수있어무척이나기다려진다.존경하는선배님,그리고보고싶은친구들,사랑하는후배들과하나되어기쁨과감동을함께하는자리로한자리에서만날수있어내게는뜻깊은날이다.

어릴때뿔뿔이흩어져모두제갈길을찾아떠나버리고얼굴을알아볼수없을만큼많은시간이흘렀으니,이런기회가없었다면고향을떠난지오래된친구들은어릴때뛰놀던곳에서다시만날수있는날은없었을것이다.

가까운동기생이나친구들과는각지역마다다시만나모임을가지고있으니얼굴을대할수있는길이있지만,같은지역이아니든지동기생이아니면길거리에서스쳐지나간다고해도서로를몰라보는처지가되었다.그래서이런만남이더욱더소중하게여겨지는것같다.

세상에서제일아름다운길,꽃길과물길의고장,내가태어난고향인하동의여러초등학교에서는봄부터여름까지앞다투어동창회를갖는다.안하는곳이한군데도없다.학생이없어문을닫은학교외에는전부다하고있다.

처음에는조촐하게만나는것에의미를두었으나,근래에와서는다들사는형편도차츰은나아져,이제는큰돈을투자하여행사준비도하고화려하게단장도하여제법규모도갖추어진큰행사로탈바꿈하고오는손님반갑게맞을준비를한다.

동창회가열리는날며칠전부터시장통어귀에는커다란현수막이걸리면서서서히잔치분위기가영글어가면,제집찾아오듯각지역에서친구들을태운버스가하나,둘씩도착하고,전야제에서흥을돋우기시작해서그뒷날의체육대회까지1박2일동안흥겨운잔치분위기가무르익는다.

천막밑에서는철없이뛰놀던개구쟁이시절의해도해도끝이나지않을흘러간이야기는언제끝날지모른채계속되고,밤은서서히깊어가지만어느누구하나먼저자리를털고일어나지않는다.

세월은흘러가이제는다들늙어가는길이지만,그옛날로돌아가니가벼운욕들이튀어나와도아랑곳하지않고기분나쁘다고시비하거나얼굴한번찡그리는일이없다.

다들동심으로돌아가선배들을찾아다니며인사도나누고막걸리도한잔같이나누는정겨움이란이곳에서만느낄수있는아름다운풍경이다.오늘하루는뽐내거나자랑할것도없고부끄러움도없으며잘남과못남도없다.다들돌아갈수없는길,천진난만했던그시절로되돌아가버린다.

또한잔치마당에먹을것없고볼거리없으면무슨재미가있을까.운동장한쪽구석에걸린커다란가마솥에서장작불로끊인구수한장터국밥과호박전,파전등이익어가는냄새에도마음은푸근해지고,높다랗게설치된무대에는노래자랑이한창이다.

고향을떠난사람들에겐어머니품속같이포근한그곳은수많은세월이흘러가도언제나마음속에서지워지지않는다.그래서항상그립고어릴때의친구들도같이소중해지는것같다.가고싶고,또갈수있는고향이있다는것만으로도마음이넉넉해지고행복한사람일것이다.

그런데불행하게도금년에가보니지난해와는다른점이있었다.동기생들도몇사람보이지않았고,학교현황을설명하는데학생숫자가해마다줄어들긴했으나지난해보다는더많이감소하였다.

내가학교다닐때만하여도한학년이3반,한반이60여명으로제법큰학교였었는데,이대로가다가는얼마쯤후에는한학년이40명도채되지않는초라한학교로전락해버리고,더상황이나빠지게되면아예한교실에서여러학년이공부를하는우스꽝스러운꼴이되지않을까하는걱정이앞섰다.

그동안총동창회를한다고하면설레는마음으로빠지지않고참석했었는데,어느날총동창회를제대로할수있는처지가아닐때는마음한구석에큰구멍이나너무나도서운할것같다.

나이가들어갈수록지난날을돌아보는시간이많아지고어릴때의기억이솟아나는데,내자리후배들에게물려주고사라져야할나이는아니라고하여도,지난날같지않아동기생들도하나,둘씩줄어들고,내위의선배들도별로없는것을보니마음이편안하지가않다.내언제까지참석할지모르지만,이제는잠깐왔다가오랫동안정담을나누지못하고돌아서야할시간이된것만같아쓸쓸하기만하다.

시간가는줄모르고못다한이야기를나누며헤어지기를서운해하지만,또다른내년을기약하면서만나고헤어짐은반복되는일,금년에만났던선배들과친구들을내년에도건강한모습으로다시볼수있기를진심으로바라고,언제나들뜬마음으로고향을찾을수있게모교도희망으로가득찬모습으로계속그자리에서나를맞아주었으면하는바람뿐이다.

(2008.8.)

나의장타령

이몽희

소년시절이나청년시절에들었던장타령몇구절은아직도내기억속에생생하게살아있어나를그시절로데리고간다.

“천장만장구만장,다리가짤라몬보고”

이장타령을지은걸인은걸인인채로시인이다.구만장을아는사람은이노래의반어적해학성을단번에알아차릴것이다.구만장은정겨운장이었으나장으로서는그규모가작은편이었다.이작고정겨운장을그지명에빗대어천장만장구만장이라하여천리만리구만리나되는먼장,천장(丈)만장구만장이나되는큰장이라멋지게부풀렸으니,말을부리는솜씨가실로비범하다.그작은장에대한애정과장의규모와이름이벌여놓은그머나먼차이에대한멋진해학이여느문장가나시인찜쪄먹을만하지않은가.

이노래의문학적기교와멋은그다음구절에가서더욱그빛을발한다.“천장만장구만장”,점층법과과장법을구사하여그언어적효과를높이끌어올린이노래는여기서더나아갈수없는벼랑끝에서게되었다.십만백만으로갈수도없고그멀고큰장을잘보았다고하면노래가밋밋하다.그렇다고이한줄로끝낼수도없다.앞으로더나아갈수없는자리,말그대로언어도단(言語道斷)의자리에왔다.

이말의벼랑끝에서걸인들은발길을뒤로돌려의표를찌르는새길을찾아냈다.“다리가짤라몬보고”기막힌반전의솜씨다.앞구와의짜임새도좋고서로밀고당기는정서의긴장과이완도재미있다.다리가짧아못본다고탁놓아버림으로써해학과재미도멋지게완성되고노래의맛도군맛이없이깔끔하다.

‘다리가짧다는말은걸인들의자신의빈천한신세에대한자조적한탄의표현일수도있다.지금은그런세상이아니지만,내가어릴때만해도어른들의대화에서‘한다리가짧다는말을가끔들을수있었다.적출(嫡出)이아닌서출(庶出)집안을비하해서이르는말이라는것을나중에야알았다.그시대를살았던사람들의신분의식이그렇게뿌리깊었으니걸인들의자조적정서는오죽했으랴.“두다리가다짧아”사람축에도끼지못했던자신들의처지를이렇게희화화하면서한을달랬으리라.“요놈에자슥이요래도정승판서자제로서팔도감사를마다하고돈한푼에팔려서각설이로나섰네”장타령의서두에나오는이노랫말에도그들의풍자와자조와한풀이의정서가이중삼중의구조로함축되어있다.

“이산저산양산장산이많아몬보고”

양산이란지명을두산이란뜻의양산(兩山)으로멋지게바꾸어,동서로산들이가로막아가기어려운양산장을재미있게그려낸노랫말이다.동래장이나기장장을보고가기에도산길들길이만만찮고,삼랑진이나밀양쪽에서온다고해도산을몇개나넘어야한다.이산저산굽이굽이산길을휘돌아오는걸인들의고달프고한스런행렬이선하게떠오른다.

우리세대가빠짐없이듣고자란말가운데“너는다리밑에서주워왔다.”이말도아마기억의중요한자리에놓일것이다.나도어릴때이말을많이들었다.그때마다그말이슬퍼서혼자마당구석에서서울기도했다.내가어머니의사랑을실감으로그리워할만큼자랐을때,들일로집안일로종일바빴던어머니가어쩌다어머니의자리로돌아오면어머니의품에는언제나어린동생들이있었다.그때마다“너는다리밑에서주워온아이”라는그말이떠올라집밖으로나가짧은다리로하염없이걸었다.어떤때는공굴이라불렀던꽤먼다리로가서다리밑에모여사는걸인들을눈물어린시선으로바라보기도했다.그러다가여자가나타나면“저사람이우리엄만가.”하는생각이들면서서러움에가슴이꽉막히고눈물이흘러내렸다.그들이갈것같은한없이먼그곳으로따라가고도싶었다.

그들은어디로가는지며칠씩다리밑움막을비웠다가돌아오곤했는데,나중에세상이란것을조금배운뒤에야그들이장마다떠돌아다니다가돌아온다는사실을알았다.그때는그들의가난은보이지않고그들이누리고사는자유와유랑이어찌그리도부러웠던지.

중학교때세계각국의낯선이름,그중에서도도시와강의이름을줄줄이외우는게그럴수없이재미있었는데,그때마다어김없이떠오르는공상하나는그지명과지명사이의낯선그길을걷고있는내자신의모습이었다.오브강,예니세이강,레나강,이나이가되도록가보지는못하고이름만기억하고있으니,그머나먼시베리아의강들은내가슴속에서만흐르다가나와함께이좁은땅어디엔가묻히고말것이다.

양산장가는길로굽이굽이산길들길을감돌아갔을그걸인들의행렬은,그들의한과설움으로나처럼눈물많고감수성예민한아이들의가슴에유랑과고독에대한향수를또얼마나심어주었을지….

소년시절,어머니와함께갔던이십리반성장에서어머니가노란참외한개를사서내게주었다.훗날생각해보니나는그참외를나혼자다먹었던것같다.그래서요새도참외만보면그날이생각나서가슴한구석에서가을강물흐르는소리가들린다.그날반성장에서도장타령은구성졌는데,그노랫말이한토막도기억나지않아내마음대로지어서속으로불러본다.가슴속의그쓸쓸한강물소리를들으며….

“돌아보니반성(反省)장,눈물나서몬보고”

두번째눈

이몽희

사진작가35,000명시대,몇달전어떤일간지에실린기사의제목이었다.인구대비로따지면천몇백명당한사람이다.실제로사진전문작가가그만큼된다면그건정말만만찮은숫자다.그런데실제로여기저기다니면서시각적으로나정서적으로느끼는사진작가의수는그보다훨씬많을것같다.이글을쓰고있는지금내가있는곳은부산근교의바닷가,차를세우고차안에서글을쓰고있는내앞에서사진작가로보이는사람이한시간도안되는사이에벌써대여섯명이나삼각대를세우고셔터를눌렀다.그런데나의편견일까.그들의렌즈가향하는그곳의경치는아무리보아도기념사진정도밖에안될것같다.35,000명사진작가의전문성에는다소허점이있지않을까하는생각이든다.

대단한장비를갖추고진지한눈빛으로바쁘게쫓아다닌다고다훌륭한사진작가는아닐것이다.그가카메라에담으려는대상이무엇인지,어디에서어떤각도로찍으려고하는지그대상과촬영장소와시점을보면대개그전문성의깊이를헤아려볼수가있지않을까.카메라가손에붙는정도,카메라를조작할때의숙련도,카메라가몸의한부분을이루는일체감,이런것을보면그가찍는사진이어느정도가될지를대충은짐작할수가있으리라고도생각된다.

초등학교시절,나는그림을사랑하였으나그림은나에게호의를베풀지않았다.나무를그리든사람을그리든꽃을그리든나는제법만족할만하다고생각된그림도교실뒤쪽벽에붙는일이거의없었다.통신표에미술은언제나80점대였는데,그때는불만이었지만뒤에생각해보니다른과목과의균형,급장혹은부급장이라는이름에대한보상으로적어도20점은보탠점수였던것같다.

4학년때부산에서전학온여자애의그림이뒷벽에붙었다.지금도선명하게기억하는그그림은빨간파라솔을들고서있는소녀의그림이었다.내보기에도색칠만요란했지솜씨는별로였다.그날청소시간에나는급우들을선동해서그그림을떼어버렸다.선생님에대한일대반항이며도전이었다.그죄로나는다음날책상위에오후내내꿇어앉았고,걸상부서진몽둥이로열대는더맞고며칠동안절뚝거려야했다.

훗날내가초등학교교사가되었을때,미술시간에그림을체계적으로알뜰하게가르치지못한것이오늘까지도상처깊은후회로남아있다.내가고등학교국어교사로직을옮긴지얼마안되어카메라에남다른관심을가지게된데는아마도그런상처를어떻게든치유하고싶은간절한염원의작용도있었으리라.거기다가나는무엇으로든어떻게해서든나에게감동을준형상을내손으로표현해내고싶었다.

처음캐논카메라로사진을찍기시작했을무렵,그때마침내아이들이초등학교와유치원에갓들어간때라좋은모델이되어주었다.그때찍은아들의흑백사진,우리집잔디밭에다리를뻗고앉아있는귀여운그사진은아직도내방책꽂이위에서40년의세월을건너뛰게해준다.나에게는영원한기념사진이자작품사진1호로귀중한나의정신적문화적자산이되어있다.

그로부터4년쯤뒤내아이둘을데리고원효산홍룡폭포로갔다.폭포의물방울에선무지개와아이들이함께어울린정경을그무렵새로산중형카메라롤라이플렉스로찍었다.찍는순간가슴이철렁했었는데,인화를하고보니역시좋은사진이었다.전지크기로확대하여공모전에출품하였다.함께사진을찍는친구들은특선감이라고추켜주었지만결과는입선이었다.지금그사진도우리집거실에36년째걸려있는데,무지개는다소퇴색이되었지만내아들딸은소년이고소녀인채로무지개를향해꿈을안고서있고,사진밖의나도늙을줄모르는30대의청년으로서정지된시간속에서셔터를누르면서여태서있다.이야말로카메라가연출해준기적이아닌가!

사진과거의비슷한시기에시작한등산은자연히나로하여금카메라를꾸려지고산을오르게했고,산에서많은사진을찍게만들었다.지칠줄모르던30대초반이라텐트며침낭에겁도없이잔뜩채운배낭속에는카메라두대에다두세개의렌즈까지집어넣었으니,어떤때는지고일어서기가벅찰정도였다.그런걸지고지리산설악산같은산을23일씩걸을때도있어동료들한테작은키가더작아지겠다고놀림도받았다.

그러나나의산사진은오랫동안기념사진수준에서크게벗어나지못했다.풍경사진에대한체계적인공부나수련없이그저좋아보이면찍었으니시행착오의연속이었고,장비나시간의부족도내가극복하지못한난관이었다.얼마전에어떤분야에진짜프로가되려면최고의장비를아쉬움없이갖추고모든시간을거기에쏟아바치는열정이필요하다고한글을읽고깊이공감하였다.그것은결코사치가아니다.비록생존의한계선정도의삶을살더라도창작을위해서는내가가진최고의것을아낌없이내놓을수있는그절대적몰입에서진정한예술은탄생하는것임을나는믿는다.그래서나는그런예술가를존경한다.

40년가까이카메라와함께살아왔지만나는사진작가도사진예술가도아니다.그저사진찍는것을좋아하고사진을아끼고사랑하는사람중의하나일뿐이다.그동안내가얻은것이있다면내가찍은사진과내가쓴글로써엮은두권의책을냈다는것이그하나이고,내가찍은사진으로함께시를쓰는문우들끼리시사진전을두번열었다는것이그둘이다.

그런데사진을찍어오면서진정내가얻은것은보이지않는데있다.사물과자연을보는내눈이더밝아지고그만큼그것들과더가까워진것이그것이다.모든존재의제모습과그놓인자리가보이고,특히자연의참모습과그내면이내눈을거쳐내마음에다가와서나에게미감과평화와안식을주는그것이다.

요즈음에와서그체중때문에나와조금멀어진카메라들은서재책장의한칸에갇힌채눈을감고있을때가많다.그럴때카메라는외롭고쓸쓸해보인다.며칠에한번카메라를들고나서면나보다그들이먼저신바람이나는것같다.뚜껑을열면눈을몇번비비고는환한눈으로세상을본다.눈앞에렌즈를갖다대면그차디찬유리에체온이돌고혼이깃든다.육안으로보는세상과는다른또하나의세상이렌즈를거쳐내눈내마음속으로들어온다.카메라와함께한40년,그세월동안같은사물을보아오면서카메라는언제부터인가나의두번째눈이되어있는것이다.이두번째눈때문에나는때때로참행복하다.

내젊은날의꿈이살아숨쉬는거리

박송죽

오랜만에찾는거리다.

<부산펜문학>에서제1회동광동‘거리詩대축제를열고,또프로그램에‘여는시를낭송하라고되어있다.

나는바쁜걸음으로백산문학관에가기위하여동광동입구에들어서니옛모습을찾아볼수없을정도로많이변하였다.

그동안부산에살면서도무심하게찾지못했던탓도있겠지만,일본관광객들의기호에맞게그오래된헌책방도다없어지고상가가형성되어있다.

이거리는지난날에내젊은날의꿈이살아서아직도연분홍빛으로가슴을설레게하는곳이다.

그러니까지금으로부터50년전에문학의길을인도해주신은사선생님과선후배문인들을자주만날수있었던이동광동과광복동거리는내문학의산실이기도한,잊을수없는추억들이살아서숨쉬는곳이다.

너무도오랜세월이지난지금은상호도희미하게잊었지만,‘호수그릴,‘보리수다방,‘칸타비레와같은이름은아직도내뇌리에서지워지지않고있다.

그리고하루가멀다하고만날수있었던문학인들중에딸처럼사랑하여주신부산문단의큰어른이신홍두표선생님,모더니즘과난해시의지향점을추구하고주장하시던조향선생님과,순수한서정성을바탕에두고많은독자들에게감흥을주시던살매김태홍선생님,낭만과격정의민중시를즐겨쓰시던정공채선생님과소설가이신손동인선생님,아동문학가인조유로선생님,박돈목선생님,김일구선생님…,아무튼많은문인들과교류하던곳이다.

지금은모두고인이되신분들이나,그분들에게각별한사랑을받으며문학의첫발을내디딜수있었던행복한시절이었다.

그리고유일하게‘민주신문사사옥이동광동에자리하고있었고,또그신문사편집국장님의배려로자주시를발표할기회가있어발표된시중에서‘불꽃이란시가작곡되었다.

그당시에는이승만대통령의호인‘우남공원으로명칭되어있었지만,지금은용두산공원으로명명되어있는그공원으로올라가는길목에칸타비레라는음악감상실이있었다.

그곳에서모교에서모든경비를부담하여처녀시집인<보라빛의상>의출간과함께은사이신진병덕화백님의화필로사제시화전을개최하여주었다.

그시화전에는전교생이학년별로차례로관람하여주었고,또현재문화재단의이사장이시며전부경대총장님으로재직하셨던강남주선생님,임수생선생님,김영준선생님,이상개선생님,박응석선생님,그리고고인이된김민부,박태문시인등많은문인들이방문하여격려로힘을주었다.그리고지금까지돈독한우정으로외로운문학의길에서로가서로를위한큰버팀목이되어주는귀한만남의인연도그때끈을맺어준것이다.

그리고이동광동거리에오면그때국제신문사논설위원으로계시던이형기선생님께서점심시간이라광복동으로나가시는길에서우연히나와마주치신것같다.

선생님은무척반가워하시면서등을떠밀다시피하여맛있기로이름난일본사람들이오면꼭들른다는음식점에서사주신냄비우동맛을아직도잊을수없다.

나는선생님의시를좋아한다.그리고순수한삶과투철한문학정신으로후배들에게많은교훈과각별한보살핌으로이끌어주신선생님을생각하면지금도가슴깊이감사하는마음과함께가슴이뭉클한뜨거움을느낀다.

달걀

배병채

합천형님이명절을앞두고어림잡아도백여개는되게달걀한바구니를보내왔다.가게에서파는것처럼크기도고르지않고알의표면에계분이군데군데붙어있다.넓은운동장을아무런제약없이뛰어다니던놈들이눈에선하다.

달걀이참귀했던시절이있었다.흰쌀밥에날달걀하나와간장종지가상위에오르는날이면나도몰래어깨춤이나오고입을벙긋거렸다.옻칠이곱게된사각상모서리에달걀을가볍게톡톡두번두드려깨뜨린다음따뜻한밥옆구리에숟가락을찔러넣어틈을만들고달걀을밀어넣었다.고봉으로담은밥그릇에봉긋솟은부분을다른그릇으로옮기고조심스럽게밥을비비면서간장을넣으면치자색으로고운날달걀비빔밥이된다.간장맛과어우러진밥은어찌나헤프던지,아껴아껴먹어도야속하게금세바닥을드러냈다.

밥알한톨까지아쉬운듯긁어먹고는달걀껍데기를가지고부엌으로내달아,물에잘불은쌀을조심스럽게달걀껍데기속에넣고물이새지않게공책을조그맣게찢어물에적셔입구를막는것도잊지않았다.재를헤집어모로세워놓은달걀에서물끓는소리에이어타닥타닥소리가나고밥냄새를풍기며쌀이설익은달걀밥이되었다.

우리집닭장에는해마다이른봄이면오십여마리의병아리가채워졌다.병아리는자라면서얼마는병사하고또몇마리는족제비나쥐에게잡아먹히며,무럭무럭커우리를기쁘게했다.여름이오고어느정도의크기가되면삼계탕용으로한마리두마리씩잡아먹히기시작해,겨울이가까울수록닭장안의닭은숫자가줄어들었다.그러다다시봄이올즈음이면십여수정도가남고,다시병아리를입식시켜자라게하였으니늘닭장에는닭이그만큼자라고있었다.가끔은건너마을학교선생님들이밤에추렴으로닭을잡아먹고는장날에비슷한크기의닭을사다채워넣기도하였다.

닭이무럭무럭자라기도했지만,때로는전염병이돌무렵이면닭에게도탈이날때가있었다.닭에게병이생기면어머니는닭의머리와부리를잡고참기름을숟가락으로떠먹이곤했는데,효과가어땠는지기억이희미하다.

달걀은단순한먹을거리만이아닌현금과같이쓰일때가있었는데,물물교환에있어서가장좋은수단이기도했다.신학기가되어공책이나학용품을살일이많아지면,현금이귀한시골에서는가장손쉬운방법이달걀을파는일이었다.

초란부터번호가매겨져항아리에숨어있던달걀을받아들고학교앞문방구로가면가게주인아저씨는먼저흔들어보고햇빛에비춰보며부화중인지상한달걀인지검사를했다.대부분이수탁과함께놓아길렀으므로부화가진행되는달걀이많았기때문이다.가끔은달걀을삶아서먹으려고껍데기를깨면악취와함께검은물이쏟아지는것도있었다.일정한온도로닭이알을품어줘야부화가되는것이지만,보관상의문제로항아리에서부화가진행되다실패한알들이었다.

봄이되면암탉들은꼬꼬꼬소리를내며부화시기가왔음을알린다.대략스무개에서서른개내외의알을둥지에넣어주면알을품기시작하고,봄볕이따뜻해지고새싹이돋으면병아리들이다투듯이알에서나왔다.

닭을키우긴했어도달걀은현금화하기가가장좋은물건이어서,생필품을물물교환하거나팔아서현금화했기때문에달걀은우리들차지가되기가쉽지않았지만,가끔은닭이알을낳은소리를내면닭장으로달려가따뜻한달걀을몰래꺼내먹곤했다.

감꽃이뚝뚝떨어지는어느봄,벌들이윙윙시야를흐리고감꽃향은현기증이나도록진했다.뒷집사는아이의집에서놀고있었는데,마침점심시간이가까웠던모양이다.그아이의할머니는삶은달걀을가져와그아이에게먹였다.옆에서침을꼴깍꼴깍삼키고있는우리보기가미안했던지,아이의귀가어두워서약으로달걀을먹이는것이라말했다.우리에게는할머니의주름진손에서아이의입으로들어가는달걀만보일뿐이었다.

세월이강산을몇번이나변하게해어언40년이지났다.귀하던달걀은이제더이상초란부터번호를매겨차곡차곡쌀독이나광주리에담아두어야하는물건이아니다.달걀두어개로대나무통에담긴풀과알록달록한색종이를바꾸던그때도더더구나아니다.그럼에도요즘나는아침저녁으로아주귀한약을먹듯날달걀을먹고있다.조류인플루엔자의위험을모르는바아니면서도말이다.

누군가를위해사랑을들이는일은아름다운것이다.나를위해한알한알모은달걀을바구니에차곡차곡담아보내주신형님의정분이새삼감격으로다가온다.

디지털과아날로그

배병채

이사를며칠앞두고미리짐정리를하던중에,책꽂이맨아래칸에어림잡아도200장은족히될것같은레코드판에눈이머물렀다.가끔추억을꺼내어보듯한장씩꺼내먼지를닦으며소리를듣곤했는데,이젠하루가다르게변해가는디지털시대에아날로그판을들여다보며예전을추억하는일이때로는버거운일로느껴진다.

첨단이라는디지털시대에살면서,아직까지아날로그적인것에더익숙하고친근한애정을가지고있는나를구식사람이라고불러도할말이없다.

청바지와통기타가젊음을대변하던70년대,야외전축이라는이름이줄어져서‘야전이라불리며젊은이들에게최고의사랑을받았던적이있었다.내또래가대게그러했듯,나도온전한야전하나를가지고싶다는환상적인꿈을꾸었었다.그러나경제적으로무척어려운나에게있어야전은언감생심그림의떡이나마찬가지였다.

굵은건전지몇개만넣으면장소가어디건신통하게고고나트위스트의흥겨운리듬으로흘려내나의혼을쏙빼놓던야전!간혹,바닥이고르지않으면곱지않은소리를내며돌아가기도했었지만,그런것조차멋있게보여내가정말로가지고싶어했던물건중하나였다.

야전을만나고나서나는레코드판을알게되었다.어느날형이빌려온야전을몰래몰래듣게되었는데,오직건전지로만작동되는야전은조금만틀어도건전지의수명이다해힘없는소리를내곤했다.결국나는야전에쓸건전지를감당할수없어표시나지않을만큼만몰래숨어서듣고는했다.

야전이가장대접받을때는여름캠프와가을소풍때였다.말갛게높은가을하늘을보며야외로소풍가는날은잠을설치기일쑤였다.야외로소풍을간다는것만으로도마음이풍선처럼부풀었던나는,날이밝자마자후다닥일어나학교로달려갔다.

점심시간이되면아이들은급히식사를하고하나둘야전주위로모여들기시작했다.야전이켜지고레코드판이올려지면상하이트위스트나모리나,키폰러닝따위음악이흘러나오면아이들은기다렸다는듯이흐느적거리며춤을추기시작했다.티없이맑은가을하늘아래서,풀풀흙먼지일으키며벌판에가득울려퍼지던야전의소리를잊을수없다.

요즘CD에서나오는음악은음질이깨끗하여좋긴하지만,기계적인음악이라마음에깊은여운을느끼지못한다.흐린날이나맑은날이나조금의틀림도없이같은소리를반복재생하는로버트같은소리에감정이입이쉬되지않아서이다.같은소리를내뱉는음악이라도레코드판의소리는주변의환경에따라서느낌이많이달랐다.비오는날은좀눅눅한듯소리를냈고,맑은날은은쟁반에옥구슬구르듯맑은소리를냈다.

아날로그세대인나에게깨끗한음질에화려한디지털기계음은왠지내옷이아닌남의옷을빌려입은것같은느낌이든다.디지털음악은화려하고깔끔한느낌은있어도정감과어깨를덩실거릴흥과신명을느끼기는어렵다.손으로만든물건과기계로만든상품과같은차이를느끼는것인데,어떻게보면간혹들리던야전의잡음은손때묻은오래된물건처럼인간미를느끼게한다.

어느날방송국에근무하는지인이라이브카페를정리하며전축과믹싱기를나에게선물로주었다.음악전문가인그사람이준오디오는음질이좋고시디와테이프를동시에두개씩을넣을수있도록된전축이었는데,아쉬운건턴테이블이없다는것이었다.

테이프로음악을들으면서도레코드판으로들었으면어떨까생각했고,잡음하나없이맑은시디를들으면서는레코드판특유의지지직거리는소리가들리는듯착각이일었다.

내가둔감하여그런지몰라도,음질좋은음악을들으면들을수록더불어짙어가는레코드판의소리를잊지못해,결국같은종류의턴테이블을구해달기로했다.그러나전원이맞지않았던건지잔뜩기대하고전원을넣었더니퍽소리와함께턴테이블은못쓰게되어버렸다.

나는아직도레코드판을바라보며그리움을달래고있다.그까짓턴테이블하나못살정도의형편도아니건만,소중하고그리운것은그대로두고즐기고싶다.사람냄새가그리울때면책장에가지런히꽂혀있는레코드판을꺼내어본다.세련되지못해더가슴으로와닿는소리는고향처럼푸근하다.

가끔레코드에서나는소리가듣고싶을때는집에있던턴테이블을가져다얼마간들었는데,그마저도고장이나버려그소리마저도들을수없게되었다.고쳐볼까하고수리공을불러보았지만오래되어부품을구할수없다고했다.나날이좋은물건들이쏟아져나오는때에,그깟구식전축하나가지고뭘그리궁상을떠느냐는뉘앙스를남기고돌아가버렸다

그러나나에게있어전축과레코드판은어디에서건쉽게사고팔수있는물건이상의의미가있다.내젊은날,지나간시간의냄새를맡고느끼고싶기때문이다.

레코드판을만져본다.언제다시그리운소리를들을수있을지는모르지만,레코드판이나에게있다는것만으로도뿌듯한위안이된다.지직거리며잡음이섞인소리가많이그립다.

누수(漏水)

배기형

가정이란공간에서물의존재는불가분의관계이며,잠시도떨쳐버릴수없다.누구든지물없이는살수없다.환자들에게약을복용해야만하는생명수이상의값어치로볼수있다.우리는단독주택,복합주거단지,아파트단지,다세대주택,연립,농촌주택,펜션하우스등다양한주거영역에서생활하고있다.

어떠한주거환경이라도물과는뗄수없는생활을하고있다.물이새고있다.생활주변에서다반사로일어나는누수,누수란즉물이샘,또는그새는물이라고일컬어지고있다.

나는상가주택한곳에서18년이란세월을살아왔기에누수로인한잦은경험과그에대비한노하우를자신도모르게축적해놓고있다.1997년5층으로보금자리를옮기고난뒤정상적인건물관리되고있으며,외부계단을오르내리기때문에청결유지도확인되고,건물상태를수시로확인할수있으니큰장점이다.

2008년5월의어느날,2층포교원천장여러곳에서물이떨어진다는급한전갈이왔다.2층으로내려가는도중3층중간목욕탕에서수돗물이콸콸쏟아져나오고있었고,좁은주위절반이물에잠기고있었다.나는급히집에있던총각을잠에서깨어나게하고,수도꼭지를잠그게했다.2층포교원천장서너곳에서물이계속떨어지고있었으며,플라스틱통들을받쳐놓고주인에게원망스러운눈빛을보내고있었다.물소동이있고난다음날,우리부부는3층목욕탕타일바닥과모서리등에백색시멘트를바르고누수여부를점검한바있다.신기하게도땜질을한이후부터는2층에는물이더이상떨어지지않아,정상적인일상으로되돌아온것에감사하고싶다.

참고로2008년부산시상수도본부의요금집계에의하면,누수로인한손실액이8억3천만원으로집계되고있으며,신고되지않은누수건수와맞물려지하로스며드는수돗물의경제적불이익의파장은엄청난것이다.3년과5년사이에건물의외벽과부속건물표면에방수액과도색을정기적으로해주는것이상식인바,건물주로서경제적부담으로적기에시행치못하여세입자들에게누수등의문제로송구한마음을가져본다.

생존하고있는모든생명체와유기물도시간의경과로변화무쌍하게바뀌는것을왜모를리가있겠는가.수백만원의비용이소요되는경제적이유때문이다.

쾌청한가을의어느날에수도요금이정상치를초과한18만원,그다음달은이십만원을육박하고있었다.요금고지서를받고서세대별로목욕탕과수도꼭지등을점검해본바있다.3층의한세대에서양변기내부의고무뚜껑이표면과떨어져서계속누수되고있었으며,많은양의수돗물이24시간하수구로방출되고있음을목격했다.근원적으로누수를발본색원하는것이다각적인시각으로점검해야되는것이다.계량기를잠그고통제했는데도개량기가움직인다는것은또다른곳에서문제가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누수전문가에의뢰해점검해보니,수도계량기의보호통에연결되어내부로이어지는엑셀연결관의밀림현상으로간격이이탈되어누수의원인제공을하고있었다.

건물건축시세대별로수도계량기설치등의조치가있었다면,절수와개인별수도꼭지점검장치의파악으로누수도예방되고즉시수리할수있는마인드(마음)가형성되는것이다.수도사업소에서오히려“물을왜많이쓰지않습니까?”라는전화가왔으니정말아이러니한일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말이떠오른다.살면서우리들은다른상대의처지에서나를몇번이나진지하게돌이켜보았던가?소슬바람이부는것같았는데어느덧아침저녁찬공기가귓전을스치는어느날,막내동생이형님,형수생각이났다며온돌,온수기능을갖춘매트를선물로사가지고왔다.

보름정도지나니물보충을알리는경고신호가계속되어지시대로물을충족시켰으나결과적으로누수의연속이었다.

모중소기업에서만든제품인데부도로파산되었고,인수받은다른회사는새로살수있는요금과버금가는수리비요구로결국은무용지물이되었다.제품의결함은물건이나부속품들의결격사유도아니고,고객들에대한신뢰를망각하고눈앞의물질추구에만눈이먼결과일것이다.누수의대상은보금자리를감싸고있는외벽바닥에도도사리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우리인간의감정정서에도얼마나많은누수현상이일어날수있을까?첫째는,가족간의포근하고충만된애정의샘이솟아야한다.영ㆍ유아에서부터이상에불타는시절과부모가감싸주고배려하는사랑,끈끈한정과관심의누수는없었는지?매우중요한체크사항이다.둘째는부부간의애정의누수이며,평범하고소박한것을때로는변화를추구하고소탈한일상의패턴이서로간에소흘해지고권태로움때문에느끼는공백의누수는없는지?자신을먼저성찰해보고애정전선을점검해보자.셋째는친구간에쌓아놓은우정에금이가는누수가없는지?나의주위에있는이웃과지인들에게시기하고화합하지못하는문제는없는지?넷째는나의잘못된판단으로이사회에해악을끼치는일은없었는지?다섯째는결혼한딸들과사위와의관계는원만한지?백년손님인사위에게온화하고포용력있게마음을비우고따뜻한인간관계를유지하고있는가?때로는이해관계가상충되어서로의처지를모르고나의기준만을고집하고자신의과오와허물을깨닫지못하고상대방의잘못만을탓하는어리석은행동은없었는지?사람과사람사이에의사소통이되지않으면오해와미움의대상이되는것이다.이런일들에대해서살아가면서예방할수있는지혜가있어야겠다.세대차이에서오는생각과가치관의틀을좁히고,현실에안주하고방심하지않는나를정착해나갈때기존의잘못을불식시킬수있을것이다.

삭막하고황량한현대인에게사랑이라는윤활유가꼭있어야겠다.아끼고위하며,한없이베풀고포옹하고관심을가지며모든것을먼저주어라는포괄적인의미를떠올려본다.

무자년이저무는늦은오후전화벨소리가요란하다.“주인아저씨!”3층아가씨로부터온호출이다.보일러고장은모터와펌프의고장이주축을이룬다.우선은건물주의몫이고기술자의역할인데오늘은제행무상의상념에젖는다.

우주만물은항상돌고변하여잠시도한모양으로머무르지않음을이르는말이라고한다.생활주변에서야기되는갖가지일들을적절히대처하고슬기롭게극복하는지혜는누구나지니고있다.그러나누수,물질,애정이든간에세상에완벽한것은없으며일체를긍정적으로받아들이는마음이있어야한다.우리들인생에누수를막고방수가되는파이프가되고볼트,너트가되어자신의부족하고미흡한것을보완해가는것이모든누수를대비하는최선의방편이아닐는지?

(2009.9.)

떠나는길손들

배기형

이지구상에영원한것은존재하지않고주인공또한없다.너와나모두는영원한안식처로향하는길손이라고생각하니,발걸음또한무겁게느껴짐은나만의센티멘탈리즘이아닐것이다.

영원히안주할수없는숙명을간직한채태어나는것일까?고교동기생이며34산우회멤버인김군의부음을듣고큰충격과인생의허무를새삼스럽게느꼈다.평소에그는등산에대한해박한지식과정의로움에앞장서고,일상생활에도검소하고흐트러짐이없는친구중의친구인데,산우회원들에게는죽음에대한많은여운을남겨두고떠나갔다.그가2년전고혈압에서갑자기신부전증으로전이된것을깜빡잊고있었으며,한사람의의사에게만집중적으로진료받은것이오진되었고,병증세가악화된이후에야알았으니누구의잘못으로돌릴것인가?안타까운일이아닐수없다.자신에게질병이이환(罹患)되었을때는한병원에서만진료받지말고두곳이상의전문의에게진찰을받아확진하는것이타당하다고한다.

자기에게맞는의사를만나는것도좋은인연이라고한다.세상을살아가면서대소사를처리하고지혜롭게그상황을잘극복해나갈때행복한삶을산다고말한다.

또한세상에는유와무의문제와존재와비존재이상의중요한것이있을까?지금이곳에서존재하던것이갑자기사라져무로바뀌어삶이죽음으로변한다는것은너무나놀라운일이라고어느철학자는말하고있다.삶은어떻게보면긍정도아니고부정도아닌삶그자체에비중을크게두어야하지않을까?죽음은숙명이상의것이며,절대적이고예외가없고중단도없다고했다.모든것은하나의관념이며,삶은현실이다.죽음을각오함이없이는참다운삶을차지할수없는것이우리들인생이다.“내아직삶을모르는데죽음을알것인가?”라고말한공자의말을음미해본다.

최근에는노전대통령의자살로인한죽음에는국내외로큰파문을일으켰다.친인척의비리,재벌회장과가족들의검은돈거래와국회의원의수뢰사건등긴꼬리를물고일어났으며,검찰수사과정에서밝혀진것을보면안타깝고답답한심정뿐이다.대통령이바뀌고정권이교체되면매번일어나는연중행사처럼온국민들에게씻을수없는오명을남기고우리곁을떠나갔다.그분도고교졸업자로서대통령이라는정상의자리에올라선입지전적성공신화의인물임은사실이다.얼마전에는김대중전대통령의병환으로인한서거이다.노벨평화상을수상한것은햇볕정책과남북정상회담을성공시킨것에버금가는결과가아닐까?두전직대통령은민주화과정의격동기를살아왔고,국민들이원하는민주주의가무엇인가를알았을것이다.자신의코드에맞추는것만이민주정치는아닐것이다.“국민의정치,국민에의한정치,국민을위한정치는이지구상에서영원히사라지지않는다.”고강조한미국16대링컨대통령의연설이감명깊게떠오른다.

얼마전인도네시아에서해일로인한쓰나미로천명이넘는인명피해와가옥의침수,건물붕괴로수많은사람들이매몰되어구조의손길을기다리는현장뉴스를보았다.아비규환의고통과지옥이따로없다는것이현실로나타나고있었다.지구상의잦은지진과해일등은분명지구온난화가주범이라고과학자들의한결같은주장이다.어제10월7일에는태풍멜로르가일본을강타하여수많은손해를입히고있다.“천지자만물지역여광음자백대지과객(天地者萬物之逆旅光陰者百代之過客)”,“하늘과땅은만물이쉬어가는여관이요,세월은영원히지나가는나그네.”라고옛시인은갈파한바다.죽음은삶의끝인것에는틀림없으나,하나의종말이고새로운출발점이라고한다.

가까운친구들이하나둘여한을남긴채병환으로생을마감하고있으며,친ㆍ인척들도예고없이떠나고있다.전직대통령이든국민의한사람이든거추장스러운이름을달지않고순수한자연인으로흙으로돌아가는것이행복이아닐까?

행복은주어지는것도아니며저절로찾아드는것도아니다.행복은자신의노력에의해만들어지는것이라고하였다.바로내앞에다가오는죽음이라는것에직면하면나는어떻게대처할것인가?생로병사(生老病死)의숙명앞에서그누구가도전장을낼수있을까?긴안목으로보면나는먼길을떠나는길손일뿐이다.

아버지를생각하며

최헌

7년전늦가을,나의아버지는너무도갑작스럽게이세상과이별했다.

새벽이오기에는너무도먼시간,어둠을헤치며도착한병원응급실.사인은심장마비였다.그때나는아직도따스한체온이남아있는아버지의시신을마주하고꿈인지생시인지모를실로어처구니없는현실을받아들일수없어망연자실했다.아버지의죽음은남겨진우리들모두에게전혀준비되지않은갑작스런생이별이었기때문이다.주체할수없는슬픔과통곡속에서문상객들을맞으면서잠시졸았던가.

꿈길에서아버지가병원지하주차장으로보이는곳에서갈길을찾지못해두리번거리는모습이보였다.그순간난아버지가아직살아계시리라는헛된기대를품고상복차림에맨발로황망히병원주차장을찾아달려나갔다.아,꿈에서본지하주차장이영안실옆그곳에있었다.육신을벗은아버지의영혼이주차장입구어스름한새벽빛을따라사라지는모습이환영처럼어른거렸다.

아버지!

그때아무도없는그새벽여명속에서나는신음처럼‘아버지를내뱉으며비로소아버지의죽음을받아들일수있었다.

그러나그짧은이별이아쉬워나는잠이들기전꿈속에서라도아버지를만나려고애를썼었다.이런바람탓이었던지몇번인가아버지와꿈길에서만날수있었다.그럴때면꿈에서깨어난것이아쉬워이른새벽을눈물로맞는날도많았다.

그후로도오랫동안대낮거리를걸어갈때도뜬금없이눈물이흐르고,차창밖생전의아버지나이또래사람만보면그리움이슬픔으로번지곤했다.

유언한마디할겨를없이황망히육신을떠나야했던아버지도아쉬웠던지나의슬픔을달래려초가을바람결로,어둠속한줄기달빛으로가끔씩찾아오셨다.인연의젖은동잇줄을갈가마귀가그토록쪼아대었는데도슬픔은살아있는자의몫으로덩그러니남겨졌다.

그렇게몇해가흐르고나의눈물이마를때쯤,나와아버지는비로소서로를달래며조금씩이별을받아들이고있었다.그리고그낯선이별을맞게한죽음이친숙하게생의한켠에버젓이자리하게됐다.

이세상에태어난존재는누구나맞이해야할죽음.그불가침의영역을더이상외면하지않고환한삶가운데로받아들여야했다.이별이있기에만남이소중하고,죽음을앞에둔삶이아름다운것이라는엄연한현실을무심한세월이가르쳐주었다.

그렇게이별을받아들일즈음,기일을앞두고미루던아버지의사물을정리하던중,우연히빛바랜아버지의일기장을발견했다.

감수성많은사춘기소년에서세속에풍화된초로의모습까지곰팡내나는대학노트몇권속에잊었던아버지의체취가되돌아왔다.

첫사랑을그리던연애시도있고,젊은날남몰래사랑했던여인도빛바랜책갈피속에서동화처럼피어났다.박봉속에서4형제를키우시느라일상을체바퀴돌듯하시면서도,클리프리챠드나비틀즈같은가수의팝송을즐겼던신식낭만파아버지.

자신은경험해보지못한4형제의대학생활에대한자부심과,병영생활을걱정하느라오랜기간밤잠을설쳤을말없는부정(父情)이고스란히배어났다.잊혀진아버지의옛모습에서그아들이숨쉬고,또그아들의아들이살아갈나날들이낡은영상처럼스쳐갔다.

명절날공원묘지에모셔진아버지산소를찾아가는길이면숱한죽은자들사이로삶은꿈속인양아득하기만했다.세상은살아있는자들의몫이지만,이미죽은자들의유언이자또죽어갈후세의유물이리라.애욕과권세와재물,익숙한육신의향연도영원으로이어지는죽음앞에서차라리한줄기불꽃일수밖에없다.

아버지의문패를묘비명에새겨두고언젠가아버지처럼영원저편에서나의아들을불러보리라.

그리고이생에서다시는부를수없는아버지.세상에는삶과죽음만있는것은아니겠지요.아버지의눈물로보았던아픔도,고독도,번민도,가난도,설움도,이별도이세상어느보석보다귀하게빛나겠지요.푸른희망을잃지않고꿈을꾸는젊은이,시련을딛고성공을위해달려가는사람,세속을떠나구도의길을찾아나선이들을만날것입니다.아무런영문도모른채부지깽이처럼사라지는영혼들속에서피어나는무지개빛세상을사랑하며살아갈것입니다.

그리고언젠가영겁의어둠과고요에묻힌우주한켠에서한줄기빛을반복해피워내는이지구를그리워하겠습니다.태양을맴돌며멀미나던지구의오랜비행을즐기던나날들을,그리고붉은노을처럼타올랐던인연의짙은그림자들을….

빈강에젖은노를남겨두고/새벽안개자욱한골목길로/

망각의갈퀴를세우고달려간다./낯익은골목길을돌아서면/

동화같은새벽꿈길을마중나온피붙이가보이고/

허공을오르는황조롱이한마리황토에젖은발톱을세우고꿈속을난다./언땅에묻힌낙엽들을밟으며/남겨진기억들을반추한다./그대가있어따뜻한날들이었다.

(자작시‘아버지중)

신발에대한단상

이해주

신발장을열어구두병원에맡길등산화를찾는다.낡은등산화지만뒤밑창만갈아넣으면아직말짱하다.30년전이등산화를신고,대학원생인젊은이들과함께지리산을등반하던때가어제런듯기억에선명하다.그래서이신발에정이들어아껴온탓도있지만,신발이좀무거워서아침산책이나근교의산행시에는가벼운등산화를신었기때문에아직도새것처럼보일는지모른다.

평소걷기를좋아하여나는신발의유행같은것은아예개의치않고,구두나등산화를새로사게되면그것이떨어져서못신을때까지신는다.아마도이런나의버릇은어린시절의경험때문이었던것같다.

초등학교시절왕복이십리길을걸어다녔는데,어느눈내리는날운동장눈을치우고집으로돌아올때,신이째져서맨발로차가운눈위를뛰어서집으로돌아온적이있었다.그래서그날밤호롱불밑에서서투른솜씨로‘와라지(짚신이라는뜻의일본말)를삼았던기억을지울수가없다.손재주가있고용의주도한친구는와라지를한켤레여분으로가지고다니기도했던것이다.그당시에는‘와라지(草鞋)는일본의전통짚신인줄만알았는데,그뒤알고보니6~7세기백제인들이신었던짚신에서유래된것이라고한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백제의짚신참조)

짚과풀로삼은신에는짚신과미투리가있다.짚신은짚으로삼은신이고미투리는삼으로삼은신이다.짚신은주로농부,상인등서민들이신었고미투리는양반,선비들이신어서양반신이라고도했다.짚신은대부분집에서직접삼았는데먼길을갈때양반들은가마나말을이용했지만,평민들은걸어다녀야했기때문에짚신을여러켤레삼아봇짐뒤에매달고다녔다.

이익은<성호사설>에서이렇게말하고있다.“왕골신과짚신은가난한사람이늘신는것인데,옛사람은그것을부끄럽게생각하지않았다.지금선비들은삼으로삼은미투리조차부끄럽게여기고있으니,하물며짚신이야말해무엇하겠는가.영남지방의풍속은보통때는짚신을신고,미투리는외출할때만신는다하니,그검소함을본받을만하다.”그러나“경기지방선비가만약영남의검소한풍속을본받는다면,사람들이반드시그와혼인하는것을부끄러워할것이다.”라고말하고있으니,당시에도경기양반들의위세와사치풍조가어떠했을까짐작하고도남음이있다.

미투리에얽힌애절한일화한토막은잊을수가없다.4백년전경북안동에살았던이응태(1556~1586)라는분의무덤을1998년이장하던중,발견된한켤레의미투리와한글편지는많은사람들의심금을울렸다.병든남편의쾌유를빌기위해자신의머리카락과삼줄기를한데삼은미투리를편지와함께한지에싸서남편의무덤에같이묻었던것이다.

당신언제나나에게“둘이머리희어지도록살다가함께죽자.”고하셨지요.그런데어찌나를두고당신먼저가십니까.나와어린아이는누구의말을듣고어떻게살라고다버리고당신먼저가십니까.―이편지자세히보시고내꿈에와서당신모습자세히보여주시고또말해주세요.나는꿈에는당신을볼수있다고믿고있습니다.몰래와서보여주세요.하고싶은말끝이없어이만적습니다.

이처럼애절한편지의사연이알려지자,이편지를소재로한국에서는소설두권과다큐멘터리한편이제작되고,무덤자리엔‘원이엄마라는편지를쓴여인의동상이세워지고,수많은한국인과일본인관광객이편지의사본을구입했다고한다.

이처럼그편지에는시공을초월한그녀의사랑이담겨있었던것이다.여기서는신발이단순히발에신고걷는데쓰이는물건이아니라,사람의마음을전하는소중한수단으로까지쓰였다는것을보여주고있다.새삼우리인간에게신발이얼마나소중한것인가를실감하지않을수없다.

요즘은유명브랜드가아니면멀쩡한신발도헌신짝버리듯하는세상인데,그런유행을외면한채구두의밑창을갈아넣고,미투리와짚신얘기를늘어놓는나의회고벽(懷古癖)은그래도어쩔수가없구나.

수난의역사와기록문화의빈곤

이해주

바람처럼스쳐간고난과격동의세월을회상하며옛일기장을뒤적이다가,내나름대로향토사에대하여다큐멘터리형식으로글을한번써보고싶었다.왜냐하면우리세대가정리해두지않으면영영역사의뒤안길로묻혀버리고말것같은큰사건이더러있었는데,지금까지아무도손을대고있지않은것같아안타까울뿐이다.후진들을위해서도우리세대가진실을밝혀기록으로남겨놓지않으면안되겠다는일종의사명감같은것을느꼈기때문이다.

그리하여지난한해동안나는‘내가겪은8ㆍ15와6ㆍ25에대하여향토의고령자를방문하여체험담을듣기도하고때로는녹취를하기도했다.그런데너무오래된일인데다나이탓도있어그분들의기억이정확하지못하여못내아쉬웠다.혹어느정도기억하고있다고할지라도그불신과비극의끔찍끔찍한기억을다시는떠올리고싶지않았기때문에,가슴을활짝열고말하지않았을는지도모를일이다.아득히세월은강물따라흘러갔으나,해마다폭염이내리쬐는여름이오면그전쟁의상흔때문에흉한꿈자리로몸살을앓고있는친구가내주위에도있다.

그러므로이에관한진상을밝히려고당시의신문이나기록물을찾아내딴에는무진애를썼다.하지만이것또한기대했던것만큼성과는신통치않아허탈하기만했다.우선부산시립도서관과국회도서관을찾아마이크로필름을열람해보니,내가찾으려는사건들은중앙지엔거의보도되지않았고,지방지로선당시의<민주중보>가비교적소상하게보도하고있었으나,해방직후의인쇄사정이워낙열악하여판독하기가어려울정도였다.

그래서직접지방신문사몇곳을찾아가서자료를찾아보았는데,파손과결락부분을보충하지못하고있는실정이어서실망스러웠다.그리고몇번이나제호가바뀐어느지방신문사는아예제호만있었지송두리째그제호로발간된신문은구경조차할수가없었다.대학도서관에가서자료를찾아보아도사정은마찬가지였다.정기간행물인경우군데군데결본이많아온전한자료제공은못하고있었고,심지어요긴한곳은면도칼로도려가버리거나낙서를갈겨놓기도했다.이러고서야어찌문화적인선진국에발돋음할수있겠는가.새삼우리들문화수준의후진성을통감하지않을수없었다.

사실우리나라기록물보존기관의보존기록물은양적으로나질적으로도선진국에비해매우뒤떨어져있다.마땅히보존되어야할주요역사기록들이파기되고없는가하면,불필요한기록물들이다량중복보존되고있는실정이다.따라서정작보존되어야할정책관련기록물들은얼마되지않는다.자유당정권때나군사정권시대의난맥상은논외로하더라도,그후1980년무소불위의권력을행사하던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관련기록이현판과관인대장을제외하고는전혀남아있지않다고하니그낙후성을더말해무엇하랴.

그러니이제관심을개인의일기류(日記類)나당시의신문잡지쪽에돌리지않을수없다.개인의일기라면가장먼저떠오르는것은말할것도없이‘난중일기다.‘난중일기는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불후(不朽)의전공(戰功)을세운충무공이순신이전쟁중에기록한일기인데,그가전쟁의와중에서7년동안써왔던일기를200여년뒤에간행하면서누군가가붙인이름이‘난중일기이다.만약이러한기록문화가없었더라면4백여년전의임진왜란의진상을우리들이어떻게알수있겠는가.생각만해도아찔해지면서새삼충무공에게저절로머리가숙여진다.

그런데해방후의개인의일기로서는내가읽어본것중에서는김성칠교수의‘역사앞에서가참감명깊었다.1945년12월부터1951년4월까지좌우의치열한대립상황을중립적시각에서담담하게기록해놓았다.일기에담은‘역사앞에서의부제는‘한학자의6ㆍ25일기이다.전쟁의포화가휩쓸고있는당시좌우의처절한대립속에서도,그는어느한쪽에쏠리지않고묵묵히담담하게살아가려고애썼다.그러면서도겨레의앞날에대해걱정하고고뇌하며,역사학자로서의긍지를잃지않았다.그리하여그의일기는북한군에점령된서울에남아서‘인공치하를살았던체험을가감없이기록으로남겨놓았다.그러니어떤역사책보다당시상황을생생하게편견없이증언하는귀중한사료로평가받고있는것이다.

이러한책을읽고자료수집을하면서도어쩐지나는요즘마음이흔들리고있다.올해들어타계한친구들이부쩍늘어나고,나자신체력이전과같지않다는것을느끼기때문이다.곰곰히생각해보면과연내능력과체력이따라줄지자신이없다.어차피미완성으로끝낼바엔차라리지금그만두는게낫지않을까.‘얼마남지않은인생을좀즐기며살아라.사서고생할게무어냐?는어느친구의말이문득생각난다.

그러나이미시작해놓은일을중도에서접을수는없다.이정표를잃어버린그허탈감을어떻게감당할것인가.어차피인생은미완성품인데미완성으로끝난들어떠랴.시작이반이라고했으니가는데까지가보아야지.이미‘덤으로사는인생이라자부한지오래지않느냐.꿈과열정으로일하다목숨이다한들무슨여한이있으리.나는요즘스스로마음을추스르고있다.

(2009.10.)

미완성의모정

박문자

겨울날씨다운바람이세차게부는날이었다.추위에쫒기는사람들은아무런표정도없이빠른걸음으로목적지를향해가기바쁘다.나도외출에서돌아오면언제나난방이되어있는한의원으로들어간다.“거스럼돈을왜이렇게많이주느냐며,불편한몸으로엉거주춤서서도로세어주는사람을보면서참양심바른사람도있구나하며한참을쳐다보았다.조금안면이있는것같아서그의얼굴에서시선을떼지못하고있을때“아이구형님아인교?”하면서말을건넨다.자세히보니우유배달을하면서도언제나웃음이가득하며활기있고희망차보이던모습이어느새일그러져있다.

고생의주름이나이에비해많은그의얼굴은잘알아볼수없었고,몸을지팡이에의지하며서있어나는너무나깜짝놀랐다.

나는그를볼때마다예사로보지않았다.남편은서울의이름있는학교의법대를나왔지만,매년사법고시의준비로집에서공부하다보니오랜실업자생활을했다.삼남매의공부를위해우유배달과틈틈이노동으로생활했지만,한번도남편에대하여말을나쁘게한적이없어배울점이많은사람이라고생각했다.모르고배달갔던집이여고동창생집이라자존심에반가운척태연한척했지만속울음을운날이많았다고한다.그러나애들이잘자라주어힘이솟았고,몸은힘들었지만하는일들모두그때가좋았다고지난날을전해주었다.

아들이서울법대에입학하던날이세상이온통자기를위해서있는것같았고,그날저녁정말참고아꼈던눈물을실컷흘렸다고했다.지금그아들은아버지가못이룬사법고시에합격하여검사생활을하고있다.나는따끈한차한잔을권하며그의끝없는얘기를듣고있으니,근원을알수없는슬픔들이온몸으로파고들어왔다.그래도내몸생각해주는사람은남편이최고데요.지금은가고없지만…하는말에너무나공감이가둘이서손을잡고웃었다.한참을웃었는데도둘다자꾸만흘러내리는눈물을찍어내고있었다.그리고나는그를보며매일첫새벽부터새끼들을위해먹이를구하려날아다니다날개가부러져서날지못하는‘겨울새같은기분이들었다.

그러면서도더줄사랑이무엇인지,또무엇을더주어야하는지를생각하고있다.너나할것없이부모의마음은꼭같겠지만,아들에대한사랑이유별난것같다.

요즈음유행어처럼하는말중에‘딸은영원한내사랑,아들은영원한짝사랑이라는말이있다.나는더어떤말을해주어야그에게조금이라도위로가될지몰라,그렇게최선을다해지난세월을살았으니,이젠자식걱정그만하고자기몸돌보며편히살라는말을하면서도,그게마음대로잘되지않는것이이세상어머니들의마음임을잘안다.

나는끝없이하소연하는그의말을들으며나훈아의‘사랑이라는노래가사가떠올라웃음이나왔다.아들의약혼식때예비신랑이노래하라는사회자의말에나는속으로걱정이되었다.평소에유행가를부르는것을한번도들어본적도없지만,하는것도보지않아걱정을하며약간은마음을조이고있었다.아들은나오더니나훈아의‘사랑을아주멋진목소리(?)로,“이세상에하나밖에둘도없는내여인아…”하며노래를부르는데,나는너무충격을받았다.그때까지도내가아들에게하나밖에없는여인으로착각하고있었으며,그노래가사도처음들어봤기에더욱그랬을것이다.

나는그때의일을생각하며그를봤다.몇번은겪어야하는서운하고쓰리며아픈마음을….

우유배달로하루에몇십리의길을걸으면서도아들딸훌륭하게키워낸그다리가,이젠보호자도없이지팡이에의지하며저불편한몸을멀리있는아들며느리가한번쯤이라도알아나줄까.

아들은영원한짝사랑이란말이실감난다.하지만영원한짝사랑으로끝날지라도영원한내사랑보다는짝사랑이라는단어처럼,아직도못다준것이무엇인지,더줄것이없는지하며언제나미완성의어머니로살아가는게아닐까?한참을얘기하고있는동안그의딸에게서전화가왔다.“엄마어디예요?엄마보러왔는데….”라는딸의목소리를듣고는그어둡던얼굴이갑자기환해진다.

“큰슬픔도지극히사소한기쁨으로위로된다.”는말이실감난다.그는집에가서약도먹어야한다며지팡이에몸을의지하며나가는뒷모습이그렇게쓸쓸하지만은않은것같다.

바람도어느새그치고겨울햇살이그를따스하게비춰주고있었다.

적(敵)과의야반도주

황원준

한십오년전쯤의일이다.Y동에서볼일을보고귀가하려는도중에그지역에사는초등학교동창을우연히만났다.그는뜻밖의해후를진정으로반가워했다.일을끝내고귀가하는중이라고했더니,다짜고짜인근에있는그의남편이운영하는자전거포로나를이끌었다.그간이미몇차례면식이있었던그의남편도나를알아보고반색을했다.

나중에안일이지만,그들부부가그토록나를반가워한이유는둘이심하게다툰후,닷새동안냉전을이어가고있는중이기때문이었다.다른경우와는달리부부싸움은은근하고끈기있게유지되는것보다짚불처럼화르르붙었다가쉽게꺼져버리는편이훨씬낫다.다행스럽게도그들부부도싸울때는격렬하게한판을벌인모양이나,시간도그쯤흘렀고해서이제나저제나화해를모색하고있던중인것같았다.

이런경우먼저손을내밀기가참어렵다.서푼어치도안되는알량한자존심때문일것이다.어쨌건그런시기의그들에게내가나타난것이다.손님맞이를핑계로데면데면했던그들이자연스럽게한자리에합석을할수있는절호의기회를제공한내가얼마나반가웠으랴.

셋이한자리에모였다.두사람다처음에는어색함을애써누르며손님접대에힘을모으는듯했다.하지만두어순배에술이오르자묻기도전에그들은다툰이유를이실직고하기에이르렀다.싸움의단초를끄집어내다보니화해의필요성은잠시뒷전으로밀려났다.거의꺼져가던울화가다시치솟는듯서로앞을다투어가며입장을내게하소연하기시작했다.그러나그들의설전은그리오래가지않았다.바로턱앞에제삼자가양팔을끼고앉아냉철하게지켜보고있음을새삼감지하고부터는서서히힘을잃었다.그것은‘화해와용서라는대명제를실현하기위해반드시거쳐야하는통과의례와같은것으로,꺼져가는불씨의마지막몸부림에지나지않았다.

그런상황을파악한나는이중재를멋있게마무리할수있다는자신감이생겼다.가깝기로따진다면어린시절,오줌을지린후소쿠리를뒤집어쓰고소금꾸러나섰다가이웃아주머니께혼찌검이나는수모를공유하고있는것에서부터,태연스레‘여보,당신을어른처럼되뇌다가느닷없이볼에입을맞추는소꿉놀이는물론이요,어디가아프냐며촉진을하는척,온몸을짓궂게주물러대던‘병원놀이까지흉허물없이주고받던시절을함께한동창이그의남편보다야우선이다.

하지만이럴땔수록팔이안으로굽는인지상정에서벗어나어느한편에도지우치지않는균형감각이필요하다.서운해하는동창의눈빛을뭉개고오히려그의남편의처지에힘을실었다가적절히동창의손을들어주며서로흉금을털어놓는시간을순조롭게주재하였다.

예상했던바와같이그일은그리어렵지않았다.서로전세가기세등등했던초기의양상이었다면화해의물꼬를트는일이지독히어려운일이었을것이다.하지만이미기가막히도록신통한세월의여과를거친후인지라싸움은이미끝물이었기때문이었다.상대를더배려하는사람이‘나라는선에서이야기가약간길어졌을뿐,결국세사람의건배가끝난후피식터져나오는실소로모든상황은종료되었다.

땅짚고헤엄치기요누워서떡먹기라더니,별한일도없이나의주가(?)는급상승하였다.나는그들에게오랜만에만난반가운손님이기도하면서어느나라에서백마를타고온평화의사절이된셈이었다.그런저런연유로자리를옮겨가며3차에이르는술자리를고스란히무상으로대접을받았다.너무염치가없는듯해서이번계산은내가하겠다고한번쯤자청을해보았으나,어림반푼어치도없는소리에지나지않았다.그때마다정색을한채,자신들이관할하는위수지역(衛戍地域)에온손님은일체자신의지휘(?)에따르라는것이다.참으로유쾌한술자리였다.

마침내술자리가파했다.웃으며인사를나누고집에가는택시를타려는데이게웬일인가.차비까지찔러준다.이것까지야그럴수없다고몸싸움을하듯뿌리치고차를탔는데,어느새운전석옆자리문을열고기사에게냉큼차비를건네고는잘모시라는당부를덧붙였다.

돌아오는동안나는좀미안해졌다.술은그렇다치더라도차비까지얻어오는꼴이되어버렸다.하지만어쩔수없는상황이었으니그들의환대를일단고맙게여기고,좋은날을정해‘이잊혀지지않을원한(?)을반드시갚으리라.얼큰하게오른취기때문인지고마운마음은점차확대재생산이되어결초보은(結草報恩),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는사자성어가감수분열을하는생식세포처럼눈앞에서교차하며아른거렸다.

이윽고집앞에서택시가멈췄다.그런데한참을기다려도제법남은거스름돈을주지않는것이었다.평소같으면그냥넘어갔을일이기도한데,그날따라과하게마신술때문에아무런양해도없는기사의행동이마뜩찮았다.“아니,왜잔돈을거슬러주지않는거죠?”“손님,차비는손님돈이아니잖습니까?거스름돈은기사의팁인데요.”대답을들은나는갑자기짜증이확올랐다.“여보시오,기사양반.당신은그사람이당신을보고돈을주었다는데,그사람이내얼굴을보고돈을줬지,당신얼굴을보고준것은아니잖소?그리고언젠가는그사람에게이빚을갚아야될사람은나란말이요.잔말말고거스름돈을주시오.”“아닙니다.그분은저를보고돈을주었습니다.”

기사는막무가내였다.한참을승강이를벌이다가나는참지못해소리쳤다.“그럼,다시돌아가서그사람에게그돈을나를보고준돈인지기사양반을보고준돈인지확인해봅시다.”기사도쩨쩨해보이는내가얄미웠는지흥분해서소리쳤다.“그럽시다.까짓것.”차를다시돌렸다.가는동안얼마나씩씩거렸는지모른다.그런데그의집이가까워지자괜한일을벌인것같아슬그머니걱정이되었다.

어찌보면여자동창의남편과나는안사돈과바깥사돈처럼피차조심스런사이가아닌가.그렇다고날이면날마다자주만나흉금을털어놓던이문없는사이도아니지않은가.부부싸움중재해서술얻어먹고차비까지얻은형편이아닌가.지금쯤술에취해한잠이들었을사람을깨워얼토당토않은송사를만들어와서도로중재를부탁하는희한한꼴이아닌가.그렇지만여기까지온상황에서차를다시돌릴수도없고,어허그참,진퇴양난이로고….

나는점점절망적인기분이되어갔다.그러나무심한택시는다시원점으로돌아왔다.에라,모르겠다.남아있는술기운이마지막불꽃처럼피어올라나는다시용감해졌다.이미칼을뽑았으니썩은무라도찌르고볼일이다.기사를문앞에세워두고기세좋게문을두드렸다.씩씩거리고서있는나를보고눈이휘둥그레진동창을지나쳐서안으로들어가자고있는그를깨웠다.나는간단히상황을설명하고억울해죽겠다는듯그에게물었다.“J형.그차비를내얼굴을보고준것이오?아니면그기사를보고준것이오?”반쯤눈을감은채내이야기를듣고있던그는갑자기출입구로나가신발한짝을손에쥐더니,“아니이쌔끼가,감히내손님을….뭣이라…이놈을때려직이삐리야되겠다.”며밖으로내달았다.

순간나는당혹스러웠다.아,내가마침내일을키우고말았구나.전형적인다혈질경상도사내인그는무슨일을저지를줄모른다.그러다보면그와나는집단폭행으로고소를당할지도모른다.그가기사의멱살을잡고는손에쥔신발을높이쳐드는순간,나는그를필사적으로가로막고말렸다.그러다가몹시취한상태에서미처깨지못한잠결에그가잠시비틀거리는틈을타서기사의손목을낚아채고내달렸다.모두들고이잠이든평화로운골목길에고래고래소리를지르는그를뒤로하고얼마나달렸을까.우리는낫선거리의계단에걸터앉았다.

그에게담배를권했다.그리고긴파람뿜어내뱉으며사과를했다.“기사양반,미안하오.대수롭지도않은일로이게뭔꼴이오.내가술이많이취했던모양이오.”“아닙니다.오히려제가미안합니다.젊은놈이돈에욕심을내면안되는데,밤늦게까지부지런을떨었는데도사납금조차맞춰지지않다보니욕심을부렸습니다.”순간나는눈물이핑돌았다.고개를숙이고무릎사이로땅끝에시선을고정하고있는그를찬찬히바라보니나보다는열살쯤적어보이는준수하고잘생긴청년이었다.열심히사는젊은이에게격려는못할망정옹색하게이무슨짓인지.“아니오,내가정말미안하오.”궁색해진나는다시담배를피워물었다.

다시그택시를타고집으로돌아오는길에는운전기사옆좌석에앉았다.마치오래사귄친구처럼그가살가워졌다.운전을하는그의손을덮어잡았다.그리고는할말이없었다.그도별할말이없는지앞만바라보며운전을했다.택시는가엾은무지렁이하나내려놓고흔들리는가로등의카드뮴불빛이아련한속으로또다시제갈길만달리고달린다.에고고,나는왜이리사는지….

작은카페이야기

정인조

늦여름햇살은지조가좀없다.옷소매를짧게했다가금방길게했다가질정이없다.이청준생가마당에내린정오의햇살은강렬하고팽팽했다.생가마당한켠텃밭에콩이며들깨사이로봉숭아두어포기에흰꽃이피어있었다.자세히들여다봐도내눈엔흰꽃이었다.붉게핀찔레꽃이없듯이흰봉숭아꽃은첨봤다.왜흰꽃일까?멀리학이날아가는형상의학산이나앉아있고,‘천연학영화를촬영했다는허름한붉은양철지붕과돌담이관광객셔터세례와바닷바람에생기가도는듯하다.

일찍이내가읽은이청준소설은‘이어도와‘당신들의천국이다.그살아숨쉬는서사와기막힌표현력에금방매료되고말았다.이광수,심훈을떠올리며이청준의팬이되어갔다.서점에들락거리며이청준의소설집을무조건집어들었다.그런데그의단편소설중타작도더러있었다.

이청준은참소박한분이었다고한다.군사정권시절장관자리제의가있으면몇달이고행방을감추었다고한다.어느문학동아리에도참여한바가없고,오직작품으로만말한작가였다.한승원소설가와동갑내기같은고향친구로,한승원부인이처녀때이청준과맞선을본인연도있다고하나,두분다친구들이그사실을물으면묵묵부답이었다고한다.이청준은한승원과술을마시는데너댓병마시는동안한마디말이없다가“나가겠네.”하며일어서더란다.고향친구들과소주를마시며한병만더,한병만더하며너댓병씩마시는술꾼이었고,후배가계산할때가만보고있다가그의신작책속에술값봉투를넣어주곤하는인정미가넘쳤다고한다.그는일찍아버지를여의고어머니와어려운어린시절을보냈다고한다.광주친지집에서유학시절,어머니와하루종일바다에나가게를잡아그걸싸들고6시간걸리는털털거리는완행버스를타고광주친지집에줄것이없어그게를주었더니,게가망가졌던지이튿날어머니가싸준그소중한게보자기가쓰레기통에버려져있는걸보고충격을받아,저가크면그러지않겠다고이를깨물었다고한다.그의수많은소설이그동네길을오르내리며어머니와다니던,혹은버스안에서일어나는일들이소설의무대가되었다.

이청준은그의문학과삶이일치하는선비였다.장흥군에서문화관광특구를만들려고생전에그의시비공원이나문학관을지어주려고해도모두거절했다고한다.오직예술가로서그의근본심보는하얗게비어있어후배문인들에게시사하는바가크다.아마그래서생가마당에핀봉숭아꽃이흰색으로피어나는가보다.

카페가곧열릴모양이다.시인수필가다섯사람이카페문을연다.눈이부시다.차창을부수고들어오는햇볕도그렇고,차창을훑고지나가는야산의초록이파리,그리고반듯한들판의논에익어가는나락,뜨끈하게구워진흰구름의표정들,망막을닦아주는하늘몇조각,무엇보다잘익어터진알밤같은카페얼굴들이파도를이룬다.한남자가노래를할모양이다.그는엊저녁에과음한탓으로푸른이끼에물말라버린듯얼굴이푸스스하고심장은부서진자전거바퀴처럼잔뜩녹이슬어작은알약하나를입에넣은상태다.장흥기산리에위치한기양사(岐陽祠,수원백씨白光弘祠堂)에들러가사문학효시관서별곡을지은백광홍(1522-1556)을만날때나여닫지,해변한승원시비산책로에서도부시는햇살에눈을뜨기가힘들었다.큰돌에새긴시가눈에들어오기는커녕큰돌에오석을박았는지그냥시를새겼는지그일에골몰했다.누가바다길섶에핀해당화를부추긴다.산책을마치고점심식사는한술도뜰수없었다.위장을점령하고있는폭탄주의여독때문이다.일행여성한분이밥상에나온꼬마고구마한개를갖고와정성스레껍질을벗겨준다.신통하게조금기분이나아졌다.아마그고구마에사랑이담긴게아닐까.폰에찍힌스냅사진을내폰에옮겨주면서맨입으로안된다고강조해“한달후에뽀뽀한번해주겠다.”고했더니,“한달을어찌기다리느냐?”며당장덥쳐달란다.카페구성원들의박장대소가봉고차를뒤흔든다.“그시절푸르더언이잎/어느덧낙엽지고오/달빛만싸늘히허전한가지/바람도살며시비켜가지만/그얼마나아아아참았던쓰라린상처길래….”그남자의쥐어짜는가락,포도위의차바퀴붙잡는소리,열린창틈바람소리,카페여인들의광적인웃음소리,순간시간도공간도다비껴서서소리들이맴돌다세월을데리고흘러가고있다.두번째,세번째,그들이가진밑천을모두비울모양이다.

깨달음이뭐냐?뜰에선감나무다.부처가뭐냐?똥칠막대기다.네모습은어찌생겼냐?얼굴은연꽃인데다리는당나귀다리다.화두는호랑이,사자굴과같다.들어가면모두잡아먹히고살아나오는자없다.진리만남는다.화두가뭐냐?화두는언어도단,말이안되는소리다.그러나그속에진리가있다.막다른골목에서새길을찾아가려고화두를던진다.반전을잘일으키는소설가가잘쓰는소설가다.시도잘쓰려면역설,확뒤집어야한다.입가지고술못마시는사람이어디사람이냐.술은좃심으로마셔야하고소설도좃심으로써야한다.좃심,우리의모든끈기는성적힘으로부터나온다.작가는광기가있어야한다.미친듯이살아라.미치지않고뭐가나오냐?어느스님이천신만고끝에달을건지는데성공했다.그건진달을들고이제깨달았다고쾌재를부르며암자에달을들고가모시려고가서보니달이없어져버렸다.하도원통해슬피울다그만죽었다.이태백은달을건지려다물에빠져죽었다.광기를가져라.서사가살아나려면표현력이좋아야된다.소설은어쨌던자기이야기다.넘예기썼다가웬수진사람도많다.화가가아무리장미를보고그려도실제장미와그림속의장미는다르다.거기에예술이존재한다.수필은대중앞에옷을홀랑벗고서있는거다.수필은진실을써야독자가감동한다.그러나소설은무대에나갈때치장을하고나간다.소설가의운명은절대고독이다.가족이,친지가많으면뭘하나,소설가만이가지는고독이있다.내소설이수만명의독자에게읽히려고쓰지는않는다.한사람만의독자만있어도족하다.내소설이서점에서많이팔리지않는다고섭섭해할일이아니다.한사람만감동시켜도좋다.그러나자기가감동하지못하는글은쓰지말라.해산토굴한승원소설가의화두는이어지고,카페시인들의유행가도정인조,양은순,김양희,김영옥,빈태영순으로끝없이이어진다.전남문협조수웅교수빵모자가뒷걸음친다.카페문이닫히려면아직까맣다.참좋은전남문협초청문화특구장흥문학기행이었다.

우리말을생각하며

장광자

이즈음의우리말은누더기다.

승학산들어가는길목에‘등산로목재데크설치공사라고쓴가로막이걸려있다.‘데크라는말이정확히무슨뜻인지알수가없다.그밑에는‘그린로드라는말도쓰여있다.외래어를쓰면옆에다영어표기를하든지아니면우리말로된용어를쓸일이다.며칠을오며가며보다가하루는구청에전화를했다.산림계를찾아서연유를물었다.인턴이전화를받으며직원들이모두외근을나가고없다고했다.‘데크가뭐냐고물었더니,나무로바닥을어쩌고하며어물거린다.대학생이냐고했더니대학을나왔다고했다.그러면서상용되는말이아니냐고되묻는다.상용이라니,인턴에게할말은아니지만,우리나라사람들이다니는산에무슨공사를하는지우리말로쓰지않고외래어를쓰는이유가뭐냐고물었다.대뜸국문과를나왔느냐고묻는다.어디를나왔건그걸상관할일이아니다.그러더니다른말을쓰면다른민원이들어온다고엉뚱한소리를했다.우리말로썼는데도민원이들어오면,알아들을수있게설명하고못알아보는사람에게문제가있다고자신있게말하면되지,공무원이되어서정신나간짓을하고있다고했더니,“정신나갔다.”는말은심하지않느냐고한다.계장이름과핸드폰번호를대라고했더니,없다던계장을바꾸어준다.전화내용을듣고있었음이분명해서간단히설명을했다.자기도외래어쓰는걸싫어하는사람인데,무심히결제를하게되어잘못했다고한다.앞으로유념해달라고말하고전화를끊었다.외래어를싫어하고좋아하는차원의문제가아니라,당연히우리말로써야되는일이라는말을왜못했는지다시전화를하고싶어졌다.

우리나라사람이읽으라고써놓은글인데뜻을모른다면무슨의미가있는가.공무원이앞장서서우리말과글을쓰기위한노력을해야무심한백성이따라가지,쉬운양남의나라말을가져다쓰면외래어를쓰는악순환을계속할수밖에없지않은가.내나라말과글을빼앗기고남의나라지배를받았던날이그리멀지않다.이름까지남의나라말로바꿔야했던굴욕을어찌그리쉽게잊는단말인가.

중국연변에갔을때놀랐던것은간판이었다.남의나라에서한글을보게되어반갑기도했지만,간판위쪽에한글을쓰고밑에는한자를써놓았던것이다.소수민족을위한정책을폄에있어그들의문화를존중한다는기조를깔고있다는것이었다.

달맞이길같이아름다운우리말을‘문텐로드라하지않나,한심한일을말하자면끝이없다.이글을쓰다생각하니,이건나라의우두머리에게해야될말이지말단공무원을잡고할일은아니라는생각이든다.

올해개막된부산영화제에참석했던인도의유명한감독야쉬초프라는“기술은서양것을받아들이더라도영혼은항상자신의문화에뿌리를두어야한다.”는따끔한조언을했다고한다.어찌영화에만국한된이야기일까.

머리를감을때마다나는고생을한다.머리카락에서물은줄줄흘러내리는데,샴프와린스라는글자를찾고있노라면부아가치미는게한두번이아니다.우리나라사람이쓰는물건인데,어쩌자고영어는크게쓰고한글은조그맣게써져있는지글자를찾느라고눈을찌푸리면짜증이난다.명색이학교를다녔다는나도이모양인데,복지관에한글을배우러오는할머니들의불편은어찌말로다할까.영어광풍이불어서유치원아이들까지영어학원에다닌다는얘기를들은것이어제오늘의일이아니다.좋은대학에가고좋은직장을얻기위한경쟁이어린아이때부터시작되고있으니누구를말릴것인가.내나라말을익혀야할나이에그렇듯남의나라말에경도되면어떻게될까.모국어는어렸을때부터생각하고읽고씀으로써익혀지는것이고,그말과글속에영혼이깃드는것이아닌가.

어느대학캠퍼스에서본일이다.유모차를끌고온젊은엄마가대여섯살난아들과놀면서소곤소곤하는정경이다정해보여서눈여겨보고있었는데,그들이내가까이오자놀랍게도영어로얘기를나누고있었다.내귀를의심하고바싹귀를갖다대도역시우리말이아니었다.외국에서살다온가족일수도있었을것이다.그러나나에게는충격이었다.간혹외모는우리나라사람인데영어로밖에말하지못하는사람을볼때의생소함이랄까,낯선느낌이랄까,그런느낌을받았을때의충격보다더한놀라움으로그모자를바라보았다.

대학을마치고외국에나가사는큰딸은한국에오면,경어사용에어려움이느껴진다고했다.지도교수를찾아뵙고인사를하노라면단어가금방생각이나지않아애를먹는다고했다.외국어를내나라말처럼해야된다고착각하는사람들을어떻게바로잡을수있을지고민을하게된다.

신문을보다가새로발간되는책을소개하는기사에‘비하인드스토리라는말이있어서옆에있는남편한테무슨뜻인지물은적이있다.알려지지않은이야기라든지,뒷이야기라고우리말로쓰면될일을굳이외래어로쓰는진의가무엇일까.말을다루는사람들이앞서서우리말을가꾸어가야할텐데,세태에편승해서더날뛰는꼴이다.내가나를사랑하지않으면남이나를업신여긴다는사실은만고의진리가아닌가.자기것을잃은민족처럼대접받지못하는민족이어디있으랴.

실락원의작가밀턴은라틴어로된작품이영어로된작품보다읽는독자층이두껍다는사실을알면서도,그시대의변방이었던자기조국영국의언어로글을쓰는용기를실천했던사람이었다고한다.오늘날영어가세계의공용어가된데는이런숨은노력들이발판이되었다고하니,우리나라도의식있는작가들에게나기대를걸어봐야할는지모르겠다.

아파트이름이듣도보도못한영어로쓰여지는것도어제오늘의일이아니다.양복에갓을쓰도유분수지,한국사람이사는세상에왜영어가넘쳐야하는지한심한데,그사실을부끄러워할줄모른다는사실이더부끄럽다.

나라를다스리는사람들이줏대가있어도이런꼴로변하지는않을것이다.

아름다운민속문화

허정

며칠있으면한가위추석이닥쳐온다.고장마다윷놀이,그네뛰기,널뛰기,소싸움등은물론특유의전통놀이를통하여이웃간에유대를강화하고고장의전통을계승발전시키며새로운문화를창조해나갈것이다.그런데외래종교에심취한어떤부류들이우리의이순수한문화를폄하하는발언을서슴지않고해대는모습이미디어를통해여과없이발표되기도한다.

반만년을이어오는우리민속문화의뿌리는천손(天孫)인우리겨레가추원보본(追源報本)하는제천(祭天)의식에서부터비롯된것이므로,우리의소중한유산으로조상을소중히여기는민족정서이고혼의계승이라할것이다.

불교신자가화랑의다섯가지생활지침인화랑오계를세속오계(世俗五戒)라하여폄하했는데,이를우리는비판없이사용하고있음은불교의계율인법계(法戒)보다는한차원아래임을강조한말이다.

법계가속계보다성스럽다고말할뿐만아니라,핏줄을이은본성을속성(俗姓)이라하여쓰지않고본성대신인도의샤카족을뜻하는석(釋)이라는한문자를자기의성으로쓰기도한다.

중국문화에심취한이들은공맹(孔孟)사상이나주자(주희:朱子)의학설만이진리라믿어그에비판적인말을했을경우에는사문란적(斯文亂賊)으로몰아혹독한핍박을했던것이다.

기독교문화를믿는사람은불교와유교가이미격하시켜놓은우리의미풍양속을하층민의의식이라며핍박한다.

기독교신장게에조상신에대해제사를지내면죽어서지옥에간다고한다.

나는외래문화에대하여거부할생각은없었고그럴필요또한없다고본다.다만역사적지리적으로우리와다르게형성된외래문화이기에우리전통과풍토에맞게조화시켜수용하는자세가되어야하리라믿는다.

우리의전통문화,민속문화를미신적문화,저속한문화라고핏대를세우며부르짖는어떤종교사상가의말같지않는말을듣고나는이런말을했다.

금강산하나에80,009암자를짖고수많은승려들이주야로목탁을쳤던고려말의그역사가국리민복에얼마쯤의도움을주었으며,조선조의유생들이공맹의가르침만이정도로여기며생산인을멸시하고천대하며제례의식만을강조하다나라마저잃어버린역사를어떻게표현해야하며,오늘날불살생계율을지키려고전국의어민과축산업자들이생업을그만두고목탁만친다면나라꼴이어떻게될것인가.

감정이격해지면서한말이지만사실원론적으로말한다면틀린말은아닌것이다.

기독교에서믿는하나님은천지창조를했다는오직하나뿐인신인데사실은여호와(yehovah)를일컫는다.이여호와신은유태민족이자기들만을도와주기로약속한계약을돌에새겼으므로유태인의수호신이다.구약성서에따르면이세상에는여호와신이외에는어떠한신도없다.만약에있다면그것은사탄밖에없다고했다.그런데유태인이아닌다른민족이라도여호와신만진실된마음으로믿으면구원받을수있다고설파한인물이예수그리스도이다.이것이세계전인류의보편종교인기독교(catholic)이다.

예수는인류의평등을주창했다.그러나지금이나옛날이나변함없이교세가확장됨에따라서그교세만큼비례하여종교지도자들은인류의평등을핑계로인류위에군림해왔다.그것은어느종교나예외없이같은현상이다.

세계의모든민족은모두다그들의신을모시고있다.우리는하늘의천제이신환인천제(桓因天帝)를,이웃일본은아미다레스오미까미(天祖大神)를,중국은옥황상제(玉皇上帝)를,인도는힌두교,불교,라마교의뿌리인바라문사상을창출한수호신을,이슬람은세계7억인구가신봉하는알라신을,그밖에수많은민족이하나없이그들의신을믿고있다.그렇다면이들모든민족은기독교적입장에서보면모두사탄인셈이다.

하지만아무도맞대놓고다른종교를사탄이라하지않는다.않는것이아니라못하는것이다.만약했다가는또한번의종교전쟁을치러야하기때문이다.인류역사에수많은전쟁이있었는데,그대종을차지하는것은종교전쟁과영토확장전쟁이다.인류구제를목적으로창시된종교가가장큰살상을일으키는행위인전쟁유발의가장핵심요소가되었다는역사가아이러니컬한것이다.

불교의법구경에악생여심(惡生於心)환자괴형(還自壞形)여철생구(如鐵生垢)반식기신(反食其身),즉악은사람에게서태어나사람을도로망치게하고,철에서생겨난녹이바로그쇠를먹는다는말이있다.종교가선을구하기위해만들어진것이지만도리어화를일으키는경우와같은말이다.

완전한선인도완전한악인도없고오로지교육과수양에의해훌륭한인격체가형성되듯,우리전통문화도가꾸고사랑하다보면더깊은향기가우러날것이다.

전통적으로내려오는민속문화야말로생활속에서의선과악이선조들의혜지에녹아들어우리풍토에가장알맞게융합된문화인것이다.그러기에어떤종교적의식보다도훌륭하고가슴에와닫는문화인것이다.

편지

정약수

아내에게서편지를받았다.모처럼만의편지다.내가장기간외국에나가있을때아내로부터온편지는나에게많은위안을주었다.평소집에있을때도아내는가끔내게편지를써서책상위에살짝올려놓곤했다.하얗게정갈한종이위에육필로정성껏쓴편지는편지그자체만으로도특별한정감으로다가오는것같았다.하지만아내는말로써보다글로써자기마음을더잘표현하는사람이라때로는아내의그런편지가고맙기도하고,내심마음에잔잔한감동의파문을던져줄때도더러있었다.

근래에와서는아내의편지를받은지도기억이까마득하다.아내도역시요즘의세태에따라핸드폰으로지인에게문자도보내고,이메일도주고받고하더니,편지쓰는일은잊어버렸는가싶었는데,뜻밖에도아내의편지가책상위에놓여져있는게아닌가.반가운마음에얼른알맹이를열어보았다.내가현직교수로서대학에재직하는마지막해의생일을특별히축하한다는뜻을담은생일축하편지였다.

글머리에는언제나써오던방식대로“사랑하는당신에게”로시작하여,이번의내생일이나에게뿐아니라자기에게도특별한의미로다가온다고적었다.그러면서그동안내가대학교수로서열심히살아온지난삶에대해서한참공치사를늘어놓은뒤,앞으로정년후의나의새로운삶이현직에있을때못지않은활기차고보람있는삶으로이어지기를바라고,또그리될것으로믿는다면서,이제아이들도다자라서각기자기길을찾아집을떠나고부부만외로이남은터에,이번생일은밖에나가외식을하는대신집에서자신이정성껏차린생일상을준비하겠노라고적혀있었다.아내의그런마음이말로써보다편지로전해지니,마음에일으키는파장이한결더큰것같았다.다같은언어라도그것이한통의편지에담겨져서전해질때와그렇지않을때와그일으키는느낌의파장에는상당한차이가있는것같다.

과거에우리들은참많은편지를쓰고또주고받았다.짧은엽서한장에서부터라이너마리아릴케의말마따나밤을새워썼던‘길고긴편지들도있었다.‘부모님전상서나‘국군아저씨께썼던의례적이고형식적인편지도있었지만,사랑하는친구와연인에게정말마음을다하고정성을다바쳐썼던절절한편지들도있었다.외국을여행하면서현지에서구입한그림엽서에다새롭고도신기한그곳풍물의인상을담아정다운이에게전했는가하면,이역만리에서혼자외로움에젖어잠못드는밤그리운이들의얼굴을떠올리며그들에게써서보냈던울긋불긋한항공봉투속의눈물젖은사연들도있었다.

이와같이과거에는편지가사람들간의가장중요한통신수단이었을뿐만아니라,자신의내면의진실을알리거나고백하는중요한수단이되기도했다.그리하여한편의편지가쓰여지고전해지는방식이나과정도여러가지였지만,그것이수신인의마음에일으키는느낌의파장도가지가지였다.오죽하면소설이나수필같은문학작품이편지형식으로쓰여지기까지했겠는가.

사실근대소설의효시라고하는18세기영국새뮤얼리차드슨(SamuelRichardson)의‘파밀라(Pamela)를비롯한여러소설들이편지형식으로쓰여졌는데,그중에는대문호괴테의너무나도유명한소설‘젊은벨텔의슬픔도포함되어있다.작품의형식으로서가아니라아예유명인의편지글을모은책들도많이있는데,그중에서도내가젊은시절특히애독했던것은릴케의‘젊은시인에게보내는편지였다.이책은릴케가카푸스라는시인을지망하는한젊은이에게써서보내었던편지글을엮은것이었다.나역시당시는문학을지망하는젊은청년이었던지라,대학시절릴케의이책을어렵사리구해서무슨보물이나되는듯이책가방에넣고다니면서읽고또읽었다.

우리나라문사들중에는‘편지라고하면가장먼저떠오르는사람이청마유치환이다.그와당대모여류시인과의관계는세상이다아는일이었고,그가그여류시인에게쓴사랑의편지를부쳐보냈던통영의그우체국을나도지난여름가본적이있다.

“사랑하는것은/사랑을받느니보다행복하나니라./오늘도나는/에메랄드빛하늘이환히내다뵈는/우체국창문앞에와서너에게편지를쓴다.”로시작하여,“그리운이여,그러면안녕!/설령이것이이세상마지막인사가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나는진정행복하였네라.”로끝마치는그의시‘행복은편지를소재로씌어진더할수없는시의절구(絶句)가아닐까싶다.

1970년대에등장했던인기보컬그룹어니언스의‘편지라는노래도그가사가사랑의진실을고백하는편지의매력을적절히잘표현해주고있는것같다.

말없이건네주고달아난차가운손

가슴속울려주는눈물젖은편지

하이얀종이위에곱게써내려간

너의진실알아내곤난그만울어버렸네.

멍뚫린내가슴에서러움이물흐르면

떠나버린너에게사랑노래보낸다.

위의노래가사에서보듯,편지는말보다더진실한,말로써는제대로표현할수없는마음의진실을담아전하던통신수단이었다.그러므로편지의진실이울리는공명(共鳴)의파장도그만큼컸던것같다.

그러던것이어느새우리들은편지가사라진시대를살고있다.편지가글자그대로‘종이위에써서다른사람에게전하는글로정의한다면그렇다.그런의미에서오늘날의이메일이나핸드폰의문자메시지같은전자통신은엄밀한의미에서편지라고할수없다.편지의변형된형태라고할수는있을지몰라도.전자통신은그신속성과효율성의장점에도불구하고아무래도편지가지니고있는정감이나진정성을대신할수는없는것같다.

그러나어이하리.나역시편지대신에언제부턴가이메일이나문자메시지로통신을대신하고있는것을.문자메시지는지금까지받는것만받고보낼줄은모른채,아니그런식의통신방법자체에대한거부감으로굳이그사용방법을알려고하지않은채버텨오다가지난추석에집에온딸아이에게부탁해서드디어그사용법을배우게되었다.그리하여지금은서투르게나마메시지를보낼수있다.나도별수없이세태에따라그필요성과효용성에영합을하고만셈이다.이렇게나도디지털시대,디지털문명에느리고굼뜨게나마적응해가고있는셈이다.

그러나디지털기술문명이추방해버린편지에대해서는아무래도향수와아쉬움을떨쳐버릴수없다.변화하는현실사정을따라가다보니,무언가소중한것을잃어버린기분이다.그러던차에이번에보내온아내의편지는그잃어버린소중한것을되찾아서보내준것같아새삼더정겹고고맙게느껴지는건지도모르겠다.편리한외식대신에집에서손수정성껏생일상을준비하겠다는아내의그마음씨도편지를닮았다.그것은아무래도아날로그적마음씨이다.그런마음을디지털통신으로대신할수는없을것같다.

서로이해하는마음으로

박우야전

부모의인격은대체로자녀들에게그대로계승된다.그들의기질과취미,그들의정신적ㆍ도덕적성벽은다소차이가있을지는몰라도자녀들에게재생된다.

건강한몸과건강한정신과고상한품성의선물은자녀들에게남겨줄수있는가장좋은유산이될것이다.무엇이인생의진정한성공이되는지를이해하는사람들은때를잃기전에주의할것이다.부모의목적이고상하면할수록,도덕적ㆍ영적능력이크면클수록,체력이발달하면할수록자녀들에게더욱좋은여건이마련될것이다.부모들은자기들에게있는최선의것을개발함으로사회를꼴짓고후대를향상시키는일에영향을주게된다.

아버지와어머니들은그들의책임을이해해야한다.세상은젊은이들의발길을노리고있는올무들로가득차있다.수많은사람들이이기적이요관능적인쾌락에속한생활에매혹되어있다.그들은행복한길처럼보이는그길앞에숨겨있는위험과무서운종말을보지못한다.

특별히어머니들에게무거운책임이지워져있다.자기의생명력으로자녀를양육하고,자녀의육체적조작을형성시켜주는어머니는마음과품성을꼴지어주는정신적ㆍ영적감화력또한나누어주게된다.

아버지는가족들에게끈기,성실,정직,인내,용기,근면,실제적유용성(流用性)등과같은엄격한미덕들을강조해야한다.그리고그가자녀에게요구하는것은자신이몸소실천하고,씩씩한태도로써본을보여주어야한다.

그러나아버지들이여,그대들의자녀를낙심케하지말라.권위에애정을,확고한제재에친절과동정을연합시켜라.그들과친해져라.그들의활동과운동에동참하여신임을얻어라.그들의친구가되되,특별히그대들의아들과친구가되라.

아버지와어머니들이여,그대들의일이아무리과중할지라도가족들을주님의제대앞에모으는일에실패하지말라.거룩한천사들이그대들의가정을지켜주도록기도하라.매일괴로운일들이젊은이들과노년층들의길을에워싸고있다.인내가사랑과기쁨으로생애에하기원하는사람들은기도하지않으면안된다.오직주님께로부터끊임없이도움을받을때에만자아를이길수있다.

남편과아내는피차간의행복을연구하고,생활을즐겁고맑게해주는작은예의와친절한행동의실천을등한시하지말라.남편과아내사이에는완전한신뢰가있어야한다.그들은그들의책임을함께생각해야한다.그들은자녀들의최선의일을위하여함께도와야한다.

부모와자녀사이에는냉랭하고은폐하는장벽이있어서는안된다.부모들은자녀들과친숙해지고,그들의취미와기질을이해하고,그들의감정에공평하고,그들의마음속에있는것들을알아내야한다.

자녀들은부모와마찬가지로가정에서중요한의무를가지고있다.그들은가정이라는협동체의일원임을배워야한다.그들은먹고사랑을받고보호를받는다.그러므로그들은가정에서의무를감당하고,그들이속해있는가정에할수있는대로최선을다함으로써온갖행복을가져오게하고은혜에보답해야한다.

아이들은때때로제재받는일을원망하고불평한다.그러나훗날에가서그들은경험없던어린시절에그들을지켜준그성실한보호와엄격한감독에대하여부모에게감사하게될것이다.

젊은이와늙은이

박우야전

세대간에도언제나의견의차이와다툼이있습니다.소크라테스까지도,옛날그리스에서어른들에게대해불평을했습니다.그의말은현대사회학적관찰에따른비판같습니다.

요즘젊은이들은사치를좋아합니다.그것은못된버릇입니다.권위를무시하고어른을공경할줄모르며일하기보다는한가하게잡담으로시간을보냅니다.어른이방에들어와도이제는일어서지도않습니다.그들은부모님의뜻과는반대로하고직장에서는큰소리나탕탕치고,식탁에앉으면맛있는음식이나게걸스럽게먹고,다리를꼬고앉으며,자기선생님을학대합니다.

겉으로드러나는모든것을보면,사람들은결국언제나그러했고,아마앞으로도언제나그러할것같습니다.젊은이들은늙은이들에대하여불평을하고,늙은이들은젊은이들을꾸짖습니다.아마이것이사람이되는과정의한부분이요,성장하고성숙하는한과정인가봅니다.

젊은이란정녕무엇을의미하는지,솔직하고꾸밈없이생각해봅시다.이질문에무엇이라고대답할수있겠습니까?그것은,젊은이들이어렸을때에물가에서,세상에서제일큰여객선을타고있는척하듯성숙한이들의세계에사는척하던것을말합니까?아니면그것은바다와대륙을가로질러여행하기를바라고,머나먼대륙의흙내음을꿈꾸는것을뜻합니까?

젊다는것은그보다도훨씬더훌륭하다는것이지요.성인이된다는것이사람마다다른의미를갖고다른면을갖듯이,아마젊다는것은젊은이에따라서로다른것을뜻하고,특히각사람의사정에따라다를것입니다.그러나젊다는것이어른에게반기를드는것은확실히아닙니다.젊다는것은인생의한부분에국한된것이아닙니다.

주님,당신의아드님은어렸을때에이미성숙했습니다.그리고아직도영원히젊습니다.그것은모든사람에게언제나마음을열어놓고계시기때문입니다.왜냐고요?그분은사랑하시기때문이지요.

자기도모르는자기

“선생님이바라시는사람은어떤사람입니까?”

“본색이하나인사람이지.”

“본색은어떻게알아봅니까?”

“그사람이흥분하면알지.자기도모르는본래의자기가나오거든.”

덤으로가는여행

박홍길

사람이여행을하는것은도착하기위해서가아니고,여행하는과정그자체를즐기기위해서다.그러니까어떤목적의식을갖고여행을하게되면그목적자체가무거운짐이되고,그짐에짓눌려즐거운시간을누릴수가없게된다.여행의최대목적은완전한자유그것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작든크든간에대개의경우어떤일거리가늘따라붙게된다.

나는비교적여행을적게하는편이다.그럴시간도없지만,그비용을감당하기도쉽지않기때문이다.그러나모임이많다보니자의든타의든먼거리나들이를가끔하게된다.

나라안은물론어쩌다복에없는외국여행도하게된다.꿈에그리던비행기도타보는행운도몇번이나누렸다.

그러나내가겪었던여행치고완전한자유,즐거운해방감으로만끽한경험은거의없다.메모를하거나밑줄을쳐가면서열심히학술세미나를들어야하고,문화탐방,역사기행등의이름이붙은답사에는그지방의유적이나박물관,기념관의형태나내용을살펴가며기록하거나해서,간략한기행문이라도몇줄써둬야만하는의무감에억눌리기십상이다.사진기를메고다니면서굳이몇몇장면을찍어두는것도문학회지나잡지등에쓰임직하기때문이다.그러니까여행자체가작업의연장선인셈이다.

그런데요즘내가자주따라다니는여행에는이런부담감이따르지않는순수한관광여행이더러있다.직장을떠난노인네들의남아도는시간을메운다는취지인것이다.향우회나동창회,또는취미중심으로모인순수친목단체들에서갖는행사다.회원가운데두어명의자가용에나눠타고1박2일정도가까운곳에다녀오는여행이다.시간에거리낌받지않는데다가부인들이솜씨맞춰장만해오는여러가지음식들을나눠먹을수있어즐겁기그지없다.

그런데이런모임의여행에도인원이많고,며칠동안에다녀오는먼거리여행일경우여행사에의탁하게되는데,대형관광버스로단체행동을강요당하는대신그비용이매우싸다는장점이있다.‘싼비지떡이란이런경우쓸만한말이다.이런여행에어쩌다휩싸이게되면참으로죽을맛이다.

십수년전중국여행에서겪은얘기다.제약회사,비단상점,백화점등지를억지로들르게하고는엽차한잔먹여가며물건팔기에정신이없다.날마다따라다녀야하는이곳저곳,그뜨거운여름날귀찮아서겨우돌아가는에어컨버스에그냥주저앉아있다가당한곤욕은잊을수없는추억이다.지방정부당간부의명령에좇아움직이는버스기사의눈에는내꼴이가시였을터,에어컨을끄고문을잠근채어디론지사라지고없다.그뜨거운차안에서겪은30분간의고통,‘싼비지떡을배터지게먹을수밖에없는형벌이었다.

나라안여행도마찬가지다.툭하면어느허름한창고같은곳에버스를갖다대고는,모조리좁은방안에몰아넣고약선전이다.인삼,동충하초,녹용,버섯….슬쩍빠져나와바람이라도쐬려들면그입구에버티고선여행사안내원이나기사의눈초리가살기를띤다.

나는여태이런데서그런물건을사본적이거의없다.집거실서랍이나시렁에는이와비슷한물건들이그렇잖아도많이쌓여있다.손님들이가져왔거나선물받은것들이다.용도나용법을모른다.읽기조차싫다.별로도움이안된다는것을나는잘알기때문이다.밥,국,반찬에다가끔과실한접시,모임때는고기안주에술한잔이면그만이다.그런데관광버스가떠날즈음이면,약선전방에몰려있던동료여행객들이거의빠짐없이그약꾸러미들을들고차를탄다는사실이다.맞다.이고마운동행들때문에내가값싼여행을할수가있는것이다.여행사직원의매서운눈초리가아프긴하나,미쳘동안의낯선곳탐방은그런대로내기억속의밑천이되지않았는가.

외로움과싸워가며정처없이떠돌아다니는김삿갓의여행도있을수있겠지만,이밝은세상에그것은마음의사치일뿐,덤으로따라다니는나와같은여행도괜찮다는것을고백한다.“세계는한권의책,여행하는사람은한페이지(쪽)의글밖에못읽는다.”고현인아우구스티누스는약간비꼬았지만,‘한쪽의글이나마남의덕에덤으로읽을수있다면나름대로의얻음이아니겠는가.여행이많을수록그분량만큼인생의분량도늘어간다고했다.어차피우리인생이란남의덕에편승한덤으로가는여행이아닐까싶다.

퇴직후10년

借文메들리-

전희준

3년당겨진정년을시행첫번째로퇴직해10년이되었다.강산이변한다는세월의퇴직후생활에도나름의패턴이생겨자리가잡혔다.

한민족5천년에춘궁기가없어진것은우리세대가처음이다.5ㆍ16혁명이일어난1961년우리의1인당국민총생산은89불이었고,세계125개국중101번째로가난한나라였다.1인당소득100불을달성한것이1964년이었다.주한미국대사스티븐스(한국명:심은경)가평화봉사단원으로충남예산여중영어교사로왔던1975년의우리나라국민1인당소득이500불이었다고그녀는기억하고있었다.서울올림픽이개최되었던1988년의우리국민1인당소득은3천불이었다.

나는중ㆍ일전쟁이시작된전정축(前丁丑)생이니그온갖시대의풍상을고스란히겪으며살아왔다.국민소득1인당2만불시대에노후를살고있다.“웃어보라.세상이너와함께웃을것이요,울어보라.너혼자울고있겠지.이넓고서글픈세상에서환희는빌려야하고고통은너무많으니까.”영화‘TheHours의마지막대사이다.50년대의미국영화‘TheYearing(춘하추동),가뭄으로말라버린옥수수밭에서개구쟁이아들에게농부인아버지가말한다.“기아(飢餓)는곰보다무서운거란다.”머리위파란하늘에는하얀뭉게구름이떠있었다.

곰이사라진시대,내노후의생활에生의찬미자니체가떠오른다.“니체는꿈같고환상같고물거품같고그림자같은生이또얼마나아름다움으로충만한지를꿰뚫은철학자였습니다.그는물처럼흘러가고바람처럼사라지는유한한生을너무너무사랑해서무한한神을버렸습니다.神을죽었다고선언한거지요.”대학에서철학을강의하는어느여교수의글이다.“人生은생각하는자에게는희극이요,느끼는자에게는비극.”이라고했던그의말과는사뭇이율배반인것같으면서도,“늙어가는사람만큼人生을사랑하는사람도없다.”기원전소포클레스가말한것을지금의나도공감하고있어수긍이된다.

지금살고있는집을30년전에우연히사두어서퇴직후에옮겨와살고있다.부산과경남의경계에서7km거리의얼안넓은시골집,뒷비탈대밭이야원래있었으나,이사들어심은지10년된나무들이집을에워싸숲속의집처럼되었다.“새는봄에울고우레는여름에울고,벌레는가을에울고바람은겨울에운다.”당나라한유(韓愈)의詩句에나오는소리들을계절따라들으며살고있다.거기에윤선도의五友도물(낙동강)이반km남짓떨어져있을뿐四友는더불어함께하고있다.도연명의‘庭蘭籬菊의범주에서도벗어나지않았지싶다.蘭이야분에심어뜰에내놓았지만국화는이제막제철이라뜰에서피기시작했다.꽃말이‘그리움이고원산지가히말라야라는나팔꽃은,한여름새벽마다피었던대울타리에마른씨앗주머니만넝쿨에매달려있다.

늙은내외둘만사는,얼안이훤히들여다보이는엉성한대울타리집을덩치큰세마리개가충실히지켜주나,그것들뒤치다꺼리는내몫이다.1남2녀,멀리떨어져사는큰딸아이가족들에게는미안할정도로,백리안에살고있는남매가족들은주말마다몰려온다.손자들이어릴수록오면반갑고가면더반갑다던가?넓은뜰한쪽에옛날부터있던목욕솥을화덕삼아피운장작숯불에,두껍게썰어사온삼겹살을구워서먹는다.유붕자원방래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不亦悅乎),반가운친구대접도그렇게한다.

“‘운명에는우연이없다.인간은어떤운명을만나기전에벌써제스스로그것을만들고있는것이다.”윌슨의말이다.곁눈질할여유없이살아왔다.공무원연금,우연히?운좋게?30년전에마련해둔집,탈없이자라고살아가는아이들,주중하루,나는먼산을타고,지공도사(지하철을공짜로타는65세이상늙은이)할멈도사이클동호회원들과먼길을둘러오는,두늙은내외의건강,그것이지금내가누리고있는생활의바탕들이다.“갑자기닥친부귀영화를지혜로운사람은누리지않는다.”중국속담이라고한다.꿈이좋았을때복권을두번산일이있었다.주식을적은돈으로잠깐해본적이있었다.

“기억은기록이아니라해석.”이라고한다.젊은날세상살이의힘들었던일들과사람들에대해이제미소로받아들여도좋은나이일것이다.“어떠한사물이라도적절한장소에놓이면아름답지않은것이없다.반대로적절한시간과장소를떠나면아름다운것은하나도없다.”밀레의말이다.화가로서의안목을말한것이겠으나,내게는이마을이집에어울리는늙은이로살라는뜻으로새겨진다.

(첫연생략)

건강한아이를낳아기르든

한뙈기의땅을가꾸든

사회환경을개선하든

내가한때이곳에살았으므로해서

단한사람의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것.

내가태어나기전보다

이세상을조금이라도살기좋은곳으로

만들어놓고가는것.

이것이진정한성공이다.

랄프왈도에머슨의‘무엇이성공인가라는詩이다.

“인간이밤하늘을보았을때비로소별자리가생긴다.”고한다.심안(心眼)의방향이그사람을만들어갈것이다.“다른사람이보지못하는것,느끼지못하는것을더많이보고느끼는것이행복지수가높은인생이라고생각한다.”은행원출신미술평론가강효주의말이다.

“나도한때맺지못할사랑에울던그런행복한서러움의젊은날이있었던가?”국졸출신대통령후보였던백기완의詩句이다.

“사람은언제부터늙는줄아는가?그것은호기심이없어질때부터야.”미국의저명한경영학자피터드리커가한말이다.

원고마감일이닥친촉박한시간에며칠을끙끙대도글이되지않아,깊어가는가을의나이와계절에남의글들을인용해내마음속의풍경을그려보았다.

(2009.11.)

세계의명곡아리랑

김훈

독일베를린과포츠담을남서쪽사이로경계(境界)하여흐르는하벨강위에그리니케교(橋)(다리길이72m.폭37m)가놓여있다.제2차세계대전때큰파손을입었지만,역사적가치를지닌다른중요한건물들은대부분그대로보존되거나복구되었다.체칠리엔호프궁전은1945.7.17.~8.2.에연합국지도자들(미국의해리S.트루먼대통령,영국의클레멘트애틀리총리,소련의요시프스탈린공산당서기장)이포츠담회담을열었던곳.국제정상들이남한과북한으로38선을그은운명의회의장이었던곳이다.

이반제호수(湖水)는세계제1의휴양지로유명한곳이다.그림처럼아름다운그리케궁전이굽어보이는숲과정원,음악과아름다운백조가어우러진반제호수가에는항상많은휴양객이운집하기로유명하다.매년국경일에는이곳반제호수가그린공원잔디밭에한국인들이모여든다.특별히만들어온김밥,오이무침,김치,잡채등의각자가만들어온짐꾸러미는아무렇게나던져두고,먼저태극기를걸어둔앞에정중한마음가짐으로조국대한민국을향한일념에서애국가에이어아리랑을합창한다.

그진한감동은함께모인당시한국인간호사,광부,유학생,선교사,주독공관직원할것없이함께우리들의위안이요기쁨이었다.그날8ㆍ15행사에모였던한국인이면비장한각오와나라사랑의마음으로똘똘뭉쳐마음속에고여오는눈물을머금고있었다.지금도그면면은이어지고있다는소식이다.그때반제호수가에서부르던아리랑은지금도그감흥을잊을수가없다.

아리랑을함께불렀던사람들은다어느곳에어떻게들사는지?손잡고따라온꼬마들은지금쯤청년이됐을것이고,그날주역이었던파독간호사와광부출신들은모두6~70세로건재하길빈다.

그날에불렀던아리랑은아마누대로내려온우리조상의애족가요오늘의애국가라자부한다.아리랑은이제부터서러운노래가아닌세계의명곡으로승화된것이다.

한국고유의전통음악인우리‘아리랑이세계에서가장아름다운곡1위에선정됐다는반가운소식이다.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작곡가들로이루어진‘세계아름다운곡선정대회에서지지율82%라는엄청난지지를받고아리랑이선정됐다고한다.

선정과정에서단한명의한국인도없었다기에이들선정위원들은놀라는눈치였다고외신은전했다.아리랑은음악을사랑하는세계인들에게대한민국이라는나라를깨우쳐줬다해도과언은아닌듯싶다.한국에있을땐몰라도외국에서부르면왠지코끝이찡해지는아리랑!그이유가무엇일까?

이처럼아리랑은한국인의정서를가장잘나타내준음악이다.이번세계명곡으로선정된것은대표문화아이콘으로서아리랑의가치를세계에알리는‘위대한우리문화세계화사업의일환으로자부심을느끼게한다.

너무자주듣게되는노래라그런지아리랑이이렇게아름다운노래인줄은나도잊고있었다가,해외에서들어본아리랑은사실심금을울려주는애국가이었다.지난번북경올림픽대회기간중우리나라응원단이있는그곳엔아리랑이흘러나왔다.그러한아리랑이너무슬픈거아냐하는생각들을많이하는듯했다.그런데외국사람들이더잘부르고더많은사랑을보낸다는사실에놀랄뿐이다.우리는흔히‘아리랑이라하면(이하경기아리랑)노래첫부분에‘아리랑고개의이름이자고개를넘어갈때의고단함이토로된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아리랑고개를넘어간다.”그러기에우리민족의애환과환희가세계명곡으로선정된배경일지도모른다.아리랑,세계의명곡에박수를보내자.우리조상대대로불러진아리랑이우리에게힘과용기의원천이기때문이다.

버리기연습

정철규

가을바람이제법차다.옷은계절이눈치를보이기전에바꾸어야하는데아직도옷장엔여름옷일색이다.아내의동작은늘굼뜨다.

일요일,늦은아침을먹고나서밀린일처리도할겸회사에가려고옷장문을열었다.간편하게입을만한면바지를찾았지만마땅한게보이지않는다.작년가을에산바지가있을텐데하며아내를불렀지만늘등산복만입던사람이새삼스럽게웬면바지냐며건성건성찾는시늉을한다.하는수없이등산용바지를입었다.잠깐사이곁눈질로바라본옷장은제대로정리가되어있지않았다.아이의옷과내옷이많이섞여있었으며계절의구분조차되어있지않은것같다.집을나서는내뒤에다이거아니냐는아내에게그건군에가있는아이것이라며핀잔을준다.아이옷이내옷모아둔곳에들어와있었나보다.제대를앞둔아이가입대한이후로는한번도밖을보지못했던옷들이다.아내의다른손에는벌써부터버려야지했던아주오래된바지가들려있었다.아내의눈썰미가야속하다.

집을돌아와저녁을준비하는아내의등뒤에서보란듯이옷장속을여행하기로했다.이게정말내옷인가싶을정도의옷들이즐비했다.색이바란셔츠는물론십년도훨씬전에입었던등산복도보인다.지퍼고장은관두고라도골반을넣기도힘들정도의청바지가둘이나되며시장에서싸게산것으로기억되는봄점퍼도있다.엉덩이부분이반질반질한아이의교복바지도보인다.입었던기억이희미한옷들이다.그동안유행에맞춰옷을챙겨입은적은없는것같다.유행이세월이두어바퀴더돌고나면재현된다고는해도도저히입을수있는옷은아닌것같다.

위쪽에는양복윗도리들만줄을서있다.바지가먼저낡아버리고나니짝잃은윗도리들만남았다.걸려있는모습은홀로되신지이십여년이나지난어머니모습같다.

그사이어머니가들어오셨다.하고싶은대로하라며못본척저녁을준비하고있는아내와는달리한참을찬찬이들여다본다.먼지난다고저리가시라해도막무가내다.

한참을머뭇거리다가버릴목적으로던져둔옷들을개기시작했다.어머니답지않다는생각에잠깐갸웃했지만나의이런버리는행동에동조한다는암시를준것으로이해했다.그러나잠시,내우려는현실로드러났다.멀쩡한걸왜버리느냐고개다가몇개의옷을도로펼친다.짝없는양복윗도리를기어코입으신다.거울앞으로다가가서는이리저리돌아보는모습이귀엽기까지하다.

어차피못입을옷이라며벗겨서버리기로한옷속으로다시던졌다.제발제가하는대로가만히두라며어머니의귀에대고짜증을부렸다.그리고는개다만옷들과함께들고는현관문을나섰다.신발도신지않고따라나서는어머니를뿌리치며재활용상자로향했다.등뒤로어머니의일그러진표정이보인다.

직장을다니기시작하고한참이지났는데도양복한벌없던시절이있었다.야간대학을다니면서도꼭양복을입어야할자리였는데낭패였다.궁하면통한다고추석때인사하러오신자형의양복윗도리를빌렸다.바지는고등학교시절의까만교복바지.헐렁한드레스셔츠는아버지걸로대신했다.축제의행사가저녁이었으며무대위에서있었기때문에아무도알아채지못했으리라.어머닌얼마지나지않아양복한벌을사주셨다.

가끔어머니의옷장을열어보면묵은냄새가많이난다.오래된옷,입지도않는옷은제발좀버리자고해도고개만가로로젓는어머니다.언젠가소풍에서찍은빛바랜사진속의한복이아직옷장에있다.그한복을입고노래를불렀는데제목이찔레꽃이었던가?동전은이미누렇게변색되었지만옷깃에는멋진소절마다아스라한어머니의음성이들리는듯하다.

의류쪽의일을하는누이가가끔옷을사다줘도기미에맞지않는다며내친다.어머니의감각은움직이고까다로워언제나애타게했다.가만히생각해보니난옷한벌제대로사드린적이없는것같다.묵은냄새나는옷장이날더부끄럽게한다.어머니손을잡고한복집으로달려가그리비싸지않으면서어머니맘에꼭드는걸로한벌해드려야겠다.어느생신날길거리에서단돈만원에사다드린시계는아직도어머니의팔뚝에걸려있다.내가사드리는건세상에서가장소중하다고여기는어머니의마음이새삼다가온다.

가을이깊어지면서유명을달리하는분들이많다.마지막가는길엔꼭한벌의옷만챙긴다.그건유난히좋아했고가장아끼던옷이리라.차마보낼수없어눈물로범벅이되도록가족의채취를담은옷이리라.그옷은망자와함께길을떠난다.이승에서입었던마지막옷이며저승으로들어서면서입을처음의옷이리라.그런데저옷장의산더미같은옷들은다어쩌랴.

한줌의흙으로돌아가기전어차피다버리고가야할것들이다.내게도버려야할것들이너무많은데끊임없이버려도또쌓여만가는게일상이다.돌아서면또버려야할것이보인다.하나를얻을때마다둘은버려야하는데정말쉽지않다.연습도없이갑자기많은걸버려야할시간이되면어쩌지하는기우가앞선다.세상에왔다가간나의흔적을남기지않고내손으로다버릴수있는시간은얼마나남았을까?

그래서더연습이필요하리라.

버스가왔다

정철규

버스가왔다.

늦은시간까지기다리는사람이많으면곧버스가온다는조짐이다.요즘은몇분후도착한다는정보까지알려준다.시간을버리기위해서는버스가제일이다.하지만난더많은걸얻기위해버스를탄다.

지하철로구포까지와서택시의유혹을뿌리치고맞이한버스다.지친사람들이버스로달려든다.‘환승입니다.똑같은말을계속하는기계가웃긴다.아예지금까지모두환승입니다하면될텐데한사람한사람기생점고하듯똑같은인사를한다.그래도가끔은‘감사합니다.라는말도할줄안다.

아이들이자라면서교육을핑계로다시부산으로이사를하는사람들이많았지만나는꿋꿋하게김해에산다.공기좋고회사가깝고차가밀리지않는다는등의김해자랑도가끔한다.다시부산으로이사를가고싶은생각은결단코없다.하지만집으로가는길은항상멀다.터널을지나거나돌아야하며강을둘씩이나건너야한다.

구포에서타면아예자리에앉을생각을하지않는다.늘다니는길이지만또새롭다.구청앞의구도로로접어들기위한유턴외에는손잡이를그리강하게잡지않아도된다.버스는똑같은흔들림으로똑같은속도로거침없이달리는한마리의종마가된다.

지하철에서의삼십분정도는눈을둘곳이없어감아야만했다.실눈을잠깐씩뜨면사람만보인다.붐비기라도하면내앞에선사람의얼굴이나배만보인다.아주작은세상으로건너온사람들의무표정한숨소리가부담스럽다.불빛은늦은시간일수록더밝게느껴진다.그래서어떤땐서면에서부터버스를타기도한다.며칠사이바뀐거리의모습이새롭다.

구포시장까지는주로33번을탄다.이쪽종점과저쪽종점의지명이그대로이니삼십삼년전에다니던곳을그대로다니는모양이다.종점에서종점까지가보지않아서확인할수는없지만지하철이생기고거리가넓어진것보다훨씬더차가늘어났는데도여전히노선은변하지않았다.

처음부산에와서는동전을내고버스를탔다.하루는전포동에있는학교에서가야의집까지걸어가기로했다.전학온지얼마되지않은난길을갈모른다고했더니자기네들도다가야라며걱정말라고했다.아침에받은차비50원에서25원을아낄수있어속으로쾌재를불렀다.하지만아이들은부전시장에서병목을깨뜨리는차력에눈이멀어집에갈생각을하지않았다.조금만더있다가가자는아이들을뿌리치고혼자걸었다.서면로터리의오거리.두바퀴를돌아도어느방향인지알수가없었다.하는수없이육교위에쪼그리고앉아아침에탔던삼십삼번버스가가는길을보고서야따라걸었다.버스는나의나침반이었다.회수권을내던시절,보통의아이들은열장한줄로열한장만들기를밥먹듯이했다.단풍이절정이며바닷바람이귓가를간질이던어느가을날,여학생들과송도로미팅갔다가피같은회수권열장을빼앗기고하염없이걸었던기억이실소를흘리게한다.토큰에이어교통카드,최근의후불카드까지버스를타는수단은많이변했다.

버스를타면거리의풍경이보이고사람들이보인다.남자아이는몇번을망설이다가여자친구를버스에태운다.그래도아쉬운지뒤로가서자리를잡을때까지도걸음을맞추며눈을떼지않는다.전화하라는목소리는정류소에남았으나손가락둘을귀와입으로갖다대는모습은버스꼬리에달렸다.한무리의아주머니들이탄다.내려야할곳을서로얘기하다가갑자기아이들자랑이다.어설픈화장조차밉지않게보이는건그들의애씀으로세상이움직인다는걸알기때문이다.그들의이야기를들을수있는시간은길지않았다.한사람씩그들만의보금자리로돌아가기위해서둘러하차벨을누른다.가까이다가온풋풋한향내도잠시곧나보다더꼬들꼬들한냄새가오른다.세상의중심에서세상의억눌림으로부터벗어나려는아릿한몸부림이옆자리로오기도한다.나의냄새보다더역겨워도세상의더아릿한부분을휘젓다온사람이려니생각하니가슴이따뜻해진다.트림을했는지막걸리냄새가진동한다.고상한척하던모양이들킨것같아괜히창문을연다.세상에남겨둔바람이버스를탄다.거리의바람은내맘을안다.

거침없이달려가는버스안에서가장많이볼수있는건내모습이다.밖의어둠탓에차창은거울이된다.차장에비친내모습은어쩔수없는중년이다.김해벌판을가로지르다만나는풍경이그립다.달이뜨면물을댄논은바다가되고그위에뜬달은쪽배가되는데……,지금은달도없을뿐더러길가엔논도없다.길한가운데로위용을드러낸경전철철로가무섭다.지친얼굴하나가노려보고있다.눈을감았다.수십개의정류소에대한안내방송은쉬지않는다.‘이번정류소에는내릴손님이없으므로그냥지나가겠습니다.

하루의생각을정리하기위해서는다시눈을감았다.버스라는공동의공간안에서난꿈을꿀수있다.그리고혼자서바보처럼웃기도한다.나를내려다보는위치에선사람은아마도내가아주행복한꿈을꾸고있다고생각할테지.

내리는사람이갑자기많다.거의종점에다다른모양이다.버스는내가내릴정류소를향해다시출발했다.

알[卵]과벽(壁)

-허구(虛構)속에진실을찾는문학-

成洛九

나는몇달전부터병고에시달리다가,서울아산병원과부산대학병원을오가며대장(大腸)을15cm나끊어내는수술을받고입원가료중일때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인생공도(公道)가전개되는병실이었다.같은병실의한환자가수술실로옮긴뒤다른병실로옮겼다하나나중들으니수술후마취가깨어나지않고그대로먼길을떠났다는후문이었다.

병상창밖의창공에눈을돌리며하늘의흰구름이피어났다사라지는양을보며,내가지금한발은이승을디디고,한발은저승에발을디디고있다는자신에서많은것을생각하게되었다.

언젠가친구들과리비아사막을여행했던생각이홀연히떠올랐다.넓은땅을경비행기로날던그밤은유달리별이빛났고,생택쥐폐리가황홀한어린왕자의꿈에도취했다던것을떠올렸던것이다.불시착비행사에게별나라여행담을얘기해주는그동심의얘기들과함께,수많은별중의한별에서좋아하던꽃한송이를찾았다는순진한얘기도함께연상되던것이었다.

불빛하나없는사막의지평선은그밤따라유난히가깝고별은총총하여하나의파노라마였다.물한방울나지않는50의열사의땅에,자랑스럽게도한국의근로자들이기어이완성한지하수로가열려,거리마다가로수가우거지고,황량한모래‘바람들판에는대단위산업단지가들어서서신천지를이룬신화를창조했던우리민족이자랑스러웠음을회상하였다.

사람은지위나명예의고하를막론하고가족의삶과생업의수레바퀴에서벗어나서야비로소자신의꿈많던젊은날의이상으로돌아가는가보다.영국의수상처칠경도공직에서물러나서야그가좋아했다던그림그리기에몰두하여세계의명소곳곳에그의화실을마련하고그림에심취하였으며,케네디의‘용기있는사람들,스탕달의‘연애론등도모두정계나외교관으로저명한인사였지만,그직을그만둔만년에저술한명저들이었다.내선배인김준성은한때재무부총리였으나그직을떠난뒤에야비로소쓰고싶은문학에몰두하여소설과수필을써서유명해졌다.그가36세때<현대문학>에등단했으면서도공직에있을때글한편못쓴것을후회하였다.그가타계하기전에남긴“나를글쓰는사람으로기억해달라.”는말을지금도잊을수가없다.

나는문학에그러한정열도애착도없는위인이다.다만현실의삶에서진실(眞實)과허구(虛構)가마주칠때,내나름의문학에대한소신을가지고있을뿐이다.생각하면세상이거짓의광장처럼여길때가있었다.정치가도외교관도공무원이나군인이나상업자를막론하고거짓말을다반사로여기는현실이다.그러나소설가를비롯한문학(文學)의거짓말[虛言]은이들의거짓말과다른점이있다는것으로위안을삼는다.

그것은이들문학도의거짓말이도덕적으로비난을덜받는데는상당한의미가있기때문이다.곧소설을비롯한문학이교묘(巧妙)한거짓말[虛言]을하여진실(眞實)인것처럼허구(虛構)를창출(創出)하여,거기에별도(別途)의빛을발산했을때세인으로부터찬사(讚辭)를받고오히려높은평가를받을수있었기때문이다.

다시말하면문학도(文學徒)는진실을유괴(誘拐)하여허구(虛構)의장소(場所)로이동시켜거기서진실의꼬리를포착(捕捉)하는것이다.고금을막론하고세계의정치인들은권력쟁취를위한선거나정당활동은,압도적으로우위의군사력이나경제력을지닌국가들이더많은횡포와국민탄압을한적이많았고,이들이지지하는국가가부국강병(富國强兵)을구실로더많고더크게국민위에군림했던것이기억된다.

여기서문학도는어떤정치세력이나역풍(逆風)에도곡학(曲學)아세(阿世)하는세류에흔들림없이옳고,바른글을위해완고(頑固)하고강직(剛直)한글로세론을바로잡아나갈의무가있음을각성하게되는것이다.

원래국가는정치권력이란강력한힘을바탕으로국가를통치하는것이다.이러한견고한힘은곧제도이며,그제도는법이라는범할수없는강력한구속력을가져국민을억압지배하는벽(壁)과도같은것이다.이것은마치국가수호를위하여어떤무기에도견디는강력한방어진지를구축한보루에비유되고,여기에맞서는시민은하나의연약한알[卵]에불과할따름이었다.

따라서우리는크고작은하나의알[卵]에불과한존재다.우리가가지는단하나의혼(魂)과그것을에워싼연약하고위험한껍질을지닌알[卵]인것이다.우리각자는견고하고큰벽(壁)에직면하고있는힘없고연약한알[卵]의존재인것이다.흔히이벽을우리는곧잘시스템(system)이라부르는제도요조직체였다.이는본래우리를지켜줄것이었다.그러나이것이언제부터인가독자적(獨自的)인처지에서우리를냉혹하고효율적으로구속하고얽매어앞을가로막는장벽의존재가되고만것이다.

이러한장벽을앞에한나에게수개월전부터병고에신음하는불행을맞게되었다.곧시대의공포인암(癌)의발병으로앞날이없는처지가되고말았다.곧타오르는불꽃속에한줌의재가되거나,깜깜한땅속에영원한침묵의심연으로혼자외로이묻히고말것만같았다.이러한절망에서천우신조로생명을가진알[卵]이부화하듯초기의암을뿌리치고소생의길을맞이하게된것이다.푸른하늘을다시바라보게되었고친구와만나우정을나누게되었으니,진정생의환희를이렇게절실하게만끽한것은난생처음이었다.

여기서글쓰는일개학도로서인간혼의존엄함과신선함도처음으로체험하게된것이다.이러한인간의혼에새로운빛을발산하는글을써야만하겠다는임무와긍지를새기는계기가된것을통감하게된것이다.

곧우리가시스템이라는벽에영혼이차단되고학대(虐待)되는일이없도록,항상거기에빛을비춰세인에게경종을울려주는역할을하는임무에보람을느끼는자세로글을써야하겠다고각성(覺醒)하게된것이다.

생(生)과사(死)의옛전문(傳聞),애증의설화등으로사람을웃기고울리더라도,우리가지닌개개의영혼에대신할수없음을밝히는시도(試圖)를계속하는것이문학도의사명으로생각하게되는것이다.

몇해전일본여행에서,오랜만에옛일본의동창친구이며중일전쟁의전우로중국어의통역장교인86세동갑의친구를만났었다.그가아침식사때묵념을울리는것을보고그이유를물어보았다.그는대답하기를“내때문에전사한옛중국인과조선인전우에게드리는기도.”라하였다.여기서느끼는바가있었다.그후나도월초나가족의기념일이나생일또는명절이면중국전쟁에서전사한전우가나를대신해죽고나만살아남은것같은생각이곧잘들어그전우들에게기도하는버릇에익숙해졌다.

우리는국적인종종교를초월하여한사람한사람의인간이다.시스템(system)이란견고한벽을앞에한하나하나의알[卵]이다.우리는도저히승산이없는너무높고쌀쌀하고견고한벽에직면(直面)하고있는알[卵]인것이다.그러나우리는사람마다손에잡힐듯생생하게살아있는혼(魂)이있다.이것이없는제도라는벽에우리가이용당해서는안될것을뒤늦게깨닫는것이다.

제도의벽을만든것은우리들인간이었다.우리는이것을잊고제도의벽이인간을구사하고여기에허덕이는일이있어서는안될것이다.그제도를우리의삶에맞춰야하는것을명심해야하겠다.인간이만든제도에인간이묶임을당하는자승자박(自繩自縛)이되어서는안될것이다.

이것이곧우리가허구(虛構)속에진실을향하는행로(行路)인동시에생명을가진알[卵]의존재를확인하며살아가는진정한인생나그네의자세일것이다.

(기축만추에)

가정을지키자

-가정붕괴현상에부쳐-

成洛九

역사오랜민족이언제고순탄한번영만이아니고때로는역경과고난의삶으로점철된것이인간역사였다.이것을극복한우리기에이제는세계경제의10위권에드는국가로부상하게되었다.

그러나세계공황과다름없는국제불황을맞아세계인과함께우리의삶도어려움을당하고있다.가난이문턱으로부터들어오니행복은창문으로하여사라진다는경제격언그대로의궁핍한사회현상이되고말았다.세계적불황여파로기업이곳곳에도산되고,친구도직장동료도부채에시달리는사회에는의리도우의도사라지고,반목과무질서와불화의분쟁이사회의현실이되었다.

이런비극은가장가까운부모와자식사이에도예외가아니었다.이근년에일어난참담한우리사회의현상은실로입에담기조차싫은일들이었다.미국에유학보낸자식이돌아와아비에게돈을강요하는것을그어미가만류하자,그아들은부모를모두살해한사건이나,의과대학(醫科大學)을보낸자식이요구하는돈을,집이팔리는대로곧주겠다는아비를“몇번을더속일작정이냐?”며살해하고,그시신을토막내어몇개의자루에넣어하수구에버린끔직한사건들,이런얘기도뉴스가되지않을정도로흔한사건들이라니,정말모골이송연한세태다.지난추석에도혼자사는어머니를방문한딸이시신으로변한모친을안고울었다는얘기가화제가됐다.한편에는10대의소년이그어머니가바람을피운다고집에불을질러8살되는동생이불에타죽는사건까지발생하였다니,실로황량한세상이아닐수없다.

실직파산에사기당하고돈떼여가정이엉망되어버린그가장(家長)이나주부가가정을팽개치는사례들이많다는현실이다.남자는노숙자로떠돌거나폐인이되고,여자는식당일을하다가대부분윤락으로전락되고,그자녀들도비슷한길에빠져든다는것이다.

양심과체면,사랑과생활의지의마지막보루인가정(家庭)이이렇게무너지는오늘이다.이가정붕괴는개인의일에그치는것이아니라사회전반의붕괴로이어지는것이다.우리의전통의식과윤리의근원은가정이었다.아무리어려운일이있어도가정과가문을생각하고모든노력의근거지(根據地)를가정에두었다.가정과가문,부모와가족을위해서라면그개인이몇번을죽고희생되더라도달게받고참을수있었던우리민족이었다.이것이사회의보편적인덕목이요윤리의기본이었다.빈한한가정과가족의행복을위하여그집딸이남의첩실이나기생이되더라도남동생이대학을나와그가정을다시재기(再起)하여부모와가족이행복해진다면어떤수모와고통도겪었던여인들이얼마나많았던가?아들또한가문과가족을다시일어서기를바라며만리타향의눈보라속에서우유배달과신문배달을해가며고학(苦學)하여기어이초지일관(初志一貫)끝에금의환향했던장한장부(丈夫)들이얼마나많았던가?

그러나오늘날은역경에이르면가정과가족부터버리니문제가아닐수없다.이렇게버려진가족은사회밑바닥의처절한체험을경험한습성이,그사람의오염된인생인자로그의한평생몸의한부분으로몸에배어살아간다하였다.오늘의사회학은,일단불행한밑바닥을체엄한경험은무의식속에잠재했다가무시로행동면에나타난다하였다.그리고그것이반복되면오염되지않았던예전의품성으로완전회복하기가매우어렵다하였다.

사회의기초단위인가정이무너지면사회건국가이건온전할수없다.정부는물론이고종교교육사회시민단체들이합심하여공동(共同)선(善)을지향하는공동체유지에힘써야하겠다.이는사회의안전과평화정착에연관되는일임을명심하고,지도층은이의시정과개선에최선을다해야할것이다.

며칠전경찰청국정감사장에서한국회의원(이인기의원)이시위대가죽창(竹槍)으로경찰을공격하는사회불안을재현하며,그해소방안검토를시사했다는보도였다.죽창(竹槍)이란대로만든창이겠으나.이날공개된죽창은지난5월화물연대시위때등장한것으로날카로운대창끝을철사로엮은것이었다.이를휘두르면경찰관의헬멧을능히관통한다는것이다.이살벌한현장을상기시킨장면에서경찰관헬멧앞창을파고들어눈을찌르면실명되고얼굴에찔리면얼굴이망가지는큰상처를입어남앞에설수없는불구의얼굴이된다는것이다.지난시위때경찰관100여명도이러한것에의한부상이라한다.

이렇게한국사회는불법폭력시위에시달렸다.용산시위만해도,시위농성자의대형고무새총을쏘는등극단적인행동이큰참사를불러왔다한다.또1989년5월동의대사건도시위대에의하여경찰관7명이숨졌다.2002년김대중당시,대통령은농성학생들은민주화운동으로인정하여보상금을주었고,반면공무를집행하다순직한경찰관은보상금은고사하고추도비도못세우고,20년이지나고난며칠전에야겨우그추모비제막을보게된것이다.

현이명박대통령은나라의위상을높여야한다고근자에몇번이나강조하였다.지난9월말G20정상회의에서우리나라가다음G20정상회의장소로유치했다는얘기들이만발하였다.그리고“우리는아시아의변방이아닌세계의중심국에서게된것이다.”라며귀국의기내서수행원과함께만세3창을했다니,혹해외토픽뉴스에오를까조마조마했던심정이었다.우리의역량과나라품격과삶의질이높아진다면국민누구라도기뻐할일이다.나라의기강이바로서고우리가저88올림픽때처럼민족적결속이모아진다면국민모두가기뻐할일이다.이것은나라의지도상층부터진심으로긍지와자부심을가지고수범하는자세가선행되어야민족적결속도가능할것이다.

우리나라가요즘처럼국회에서싸움이나하고폭력을휘두르며,노조의투쟁에치명적인무기나기재가등장하여사람이죽어가는나라에는나라의위상이설자리가없다.폭력과무법과무질서가횡행할때이것을다스릴공권력이뒷걸음질치고,법이있어도이를집행할능력과의지가없는나라는나라의위상을말할자격도없고,정부도없는나라이며나라위상을아예논할수없는나라다.나라의기강과질서와윤리가무너진나라에국제회의하나를유치했다하여나라의위상이높아졌다고생각한다면그것은위선이고위장이며자기기만일수밖에없을것이다.

우리사회의현상에는,걸핏하면붉은머리띠에화염병을들고나서며치고받는난투극이낯설지않다.이런나라에무슨국가의위상을논하겠는가?명색이국회의원이란사람들이의사당안에서플레키드를들고시위하며,전기톱과망치로국가기관인의사당의문과벽을부수는시정잡배와다름없다면나라의어디에서국가위상을찾겠는가?지도층이노블레스오블리주의정신을실천하지못하는나라는결코문화국이라고할수없을것이다.나라의중심축역할을하겠다는사람들이위장전입이나하고,탈세며뇌물이나받는나라가제대로된나라일수없다.나라의최고위층인사들이이핑계저핑계로병력을기피하고위정자의자리에오르는나라가그기강도제대로서있을수없다.

이명박대통령은요즘국민의지지율이높다는기쁜보도를들었다.차제에나라의체통을세우고법과질서를지키는일에추상같이나서주었으면하는마음간절하다.국민의뜻을헤아리는언로를더넓혀서여러사람의말에귀를기울여주었으면한다.

그리하여법질서를지켜기강을바로세워주었으면한다.국면모두가사회의기초조직인가정에서예대로오순도순즐거운대화로행복을누릴수있도록안정된가정을되찾아주시기를간절히바라는마음이다.

(기축만추에)

쓰레기장에서줍는큰꿈들(2)

윤옥자

14년째쓰레기를주워소년소녀가장다섯을돕는이가있다.

전씨는10분간점심을먹자마자누런포대두장을들고쓰레기매립장비탈길을오른다.

3m높이로쌓인넓은매립장의악취가코를찌른다.

한여름땡볕,그늘한곳없는5,400여평의넓은들판같은쓰레기장지열은금새땀으로옷을적신다.

다른직원들은쉬는점심시간을쪼개서전씨는부지런히쓰레기밭을뒤진다.

까맣게그을린그의얼굴에서연신땀방울이뚝뚝떨어진다.산더미처럼쌓인쓰레기봉투를하나하나뜯어서빈병과헌옷,신문지와수저같은폐품을골라낸다.

그냥버리면쓰레기지만주워서고물상에가져가면돈으로바뀐다.30여분만에포대두개가꽉차면전씨만의작업장으로옮긴다.작업장에는유리병,장바구니,자동차베터리,전선,플라스틱호스등이어른키만큼쌓여있다.

이렇게해서그의손에들어오는돈월30여만원을14년째소년소녀가장들을위해쓴다.

올해로3년째돕고있는정양은일찍아버지를병으로여의고,어머니는가출하여,식당에서허드렛일을하는할머니와월10만원짜리단칸방에서산다.

예전에도운남자아이는고등학교를졸업하고한국전력공사에취직했고,또다른학생은축협에취직했으며,시집가서잘사는여인도있단다.이들은전씨를‘매립장아저씨라부른다.

전씨가이렇게소년소녀가장을돕게됨은전씨도도움을받았기때문이란다.

전씨어머니는전씨를낳자마자세상을떠났고아버지와둘이살았는데,아버지마저그가12살때폐렴과천식으로세상을떠났다.

그는농장의쪽방에서매일밤“아빠!아빠!”하고울며자던어느날,낯선분이찾아왔다.

돈5만원이든흰봉투를주면서“힘들겠지만포기하면안된다.”는쪽지를전했다.

그때그는얼마나고마웠던지표현할수가없었단다.그는그쪽지의힘으로용기를냈단다.조그마한슈퍼를하는그분의고마움을못잊어‘나도크면남을돕겠다.는결심을했단다.그리고아버지가돈이없어고생만하다돌아가셔서눈에불을켜고돈을모았단다.

‘내집에서가족과함께쌀밥먹으며살이야지.하는일념이꿈이었다니,부모님의사랑이얼마나그리웠으며,가난의서러움이얼마나컸는지짐작이되어울컥내가슴이아려온다.그래도그꿈으로양계장일을해고등학교를다니면서도월20만원씩주택부금을부어24살에방세칸짜리아파트를마련했단다.월몇백만원을받아도집한채마련하기가힘이드는데,참으로장하고기특한한국의아들이라하늘만큼땅만큼칭찬하고싶다.

21살에교회에서만난2급장애우와결혼을했다.비록소아마비로두다리는불편해도,모든교인들의생일을수첩에적어손수건,티셔츠등을선물하며축하하는그배려심에반했단다.아내역시대단해안아주고싶다.

고교은사님이취직까지시켰으니그의성실과근실함이얼마만큼인지도짐작이간다.

수입은월200만원정도인데도,먹고살만해서그어려운일을힘겹게하며소년소녀가장들을평생돌본단다.

전씨부부는매월마지막주말엔후원한학생들을불러통닭과피자를함께먹는가족이되어“힘들어도포기하면안된다.”며어깨를두드려준단다.

그의딸마저“쓰레기를주워어려운이웃을돕는우리아버지가세상에서제일자랑스럽다.”며활짝웃는다.

아내역시,남편의도움을받은학생들로부터고맙다는인사를받을때가뿌듯하고가장행복하다니,천생연분그남편그아내그딸인것같아덩달아행복해져방실웃음이슬슬번져나간다.그가정에더많은축복이내리고날마다웃음꽃이활짝피길기도해야겠다.

명품

허현숙

복도에있는분필털이상자에한지를붙였다.학교에손님이온다고하기에오랜세월분필가루를털어주느라볼품없이되어버린나무상자에한지를입힌것이다.연두빛한지에알록달록동그라미를오려붙이고‘우리는행복해요.라는글도붙였다.아이들이지나가며뭐하느냐고묻기에“분필털이가새옷을입고싶대.한복을입혀주는중이야.”낡아서헐어버린것에새옷을입히니명품이되었다며모두가예쁘다고,마음이행복해진다고하였다.

마음이가득찬사람은겉을꾸미는일은하지않아도된다고가르쳐왔다.소박하고근면한모습으로도멋진삶을살아갈수있음을알려주면서겉치레를소중하게여기지말것을일러왔다.그런데요즘은어찌된일인지자꾸거울을보며겉모습에마음이쓰인다.아무렇게나입고다녀도젊음이옷인때가있었다.그때는싼옷도입기만하면명품이되었다.나이가들면서왜이렇게없어보이는지거울을보기가두려워진다.낡아가는것,시들어가는것이하루하루가다르다.

언젠가학년을마치면서가방을선물로받은적이있다.나는그저한아이의어머니가시장에서샀다하기에,그리고비싼건아니지만고마워서주는것이라기에거절을못하였다.그런데멋모르고이것저것불룩하게넣어다녔는데,하루는친구가“너명품가방들었네.”한다.애들준다고군고구마도사넣어다니고바쁜땐찬거리도넣어다녀너덜해지고냄새나는가방더러명품이란다.내그런줄알았으면처음부터받지도않았을터인데,몇푼안준내가방이나별반차이도없거니와명품인줄몰랐을땐마음편히썼는데도알고나니들기가불편해졌다.

백화점에만가면주눅이든다.무슨옷들이그리비싼지,이렇게비싼것들은누가다소비하는것인지,그래도다들부러워하는직업인데도도무지한달월급으로괜찮은옷한두벌사면남는게없다.그래서비싸보이는매장은아예눈도들지않고지나간다.그리고누운옷들만본다.계절지나이월하는상품이나하나씩건져오다가어느순간,나는왜이렇게나한테가난한지참가여운생각이들었다.아이들이필요하다면무어라도다사다주면서,왜나는내가입고싶은것하나마음놓고사지못하는지,소박하게살아도정갈하면되고마음이부유로우면된다고하는이론은이제내게위로가되지않는다.

거울을보면서남부럽지않게주름제거수술이라도해볼까한다.그리고이것저것큰맘먹고옷도사고구두도사서멋을좀내어볼까도한다.그러면좀젊어보이고예뻐보일까.남들이부잣집마나님이라고더쳐줄까.하지만분필털이에한지붙인다고보석상자되는것도아니고,겉을꾸민다고속까지바뀌는것은더더욱아닐터이니,모든게부질없는생각이다.

아는이가눈가에주름을다제거하였는데어찌그리낯설고무서운지.주름도있어야할때에있어야사람다워보이고,주름과주름사이에살아온흔적들이눅눅히배어있을때정겨움이있다.또어떤이는백화점을통째로사다시피명품만걸치고다니지만,왜그렇게그이만보면슬퍼보이고외로워보이는지.그런걸보면내살아온모습이그렇게초라한것만은아닌모양이다.평온해보이고환해보이는표정하나만으로도충분히명품이다.

무엇이,어떤것이명품인지모르고살지만,나하고인연하여사는내모든것들이다명품이라고생각한다.내가좋아하는나의낡은마티즈,내가좋아하는작은우리집,내가좋아하는우리강아지,내가좋아하는나의착한사람들,이보다더명품은없다.볼때마다좋고,보고또보아도질리지않는다.두고두고값을매길수없는것들이고무엇과도바꿀수없는것들이다.나를행복하게만드는것들이고내평화를지켜주는것들이다.나는명품을많이지닌부자이므로이다음에백화점에가면어깨를좀펴고다닐생각이다.그리고마네킹이폼나게입고있는기백만원짜리옷들도마음껏눈을뜨고쳐다보아도좋다고생각한다.나는나의품위를좀높이고거만하게점원을바라볼작정이다.

오래쓰고낡았어도그빛을잃지않고,많은세월지났어도더욱귀하여지는그런손때묻은것들이명품이다.언제든지쳐다보면많은이야기들을담고있어좋고,오랜시간지났으나그때그시절의웃음과향기를그대로지니고있어더좋다.이진한가을내음도바스락거리며흘러내리는낙엽비도모두가다나를풍요롭게하는명품들이다.결코값을매길수도흉내낼수도없는포즈를지닌것들이우리주위에는수없이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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