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72호
BY sanhasa ON 7. 15, 2015
수필제72호
차례
머리말이결실의계절에회장姜中九/7
황다연사랑의힘/9
순연한마음속엔지혜의빛이있다/14
심득순비파나무/19
태풍사라호/25
이원우세상을향해던지는편지/29
과거를묻지마세요/34
하창식전면주차/39
토끼와거북이/43
안태경골목벽화/46
사람의온기/50
이병수가족묘원조성기(記)/54
맥아더장군동상앞에서/59
윤용흠게곤노타기(華嚴瀧)/63
도슈궁(東照宮)/68
손수영군청색두루마기/73
관광버스춤/79
허정림그녀의망부가(望夫歌)/84
내마음의노래/89
오기환겨울방학과독서/91
영혼의보약설날의추억/97
김상희주롱의펭귄은지금도그자리서있을까/101
밤,칼을가는바다/105
최홍석유년의여름/109
여정(旅情)/113
황선영스트레스(stress)는내친구/116
姜中九오,부처님이시여/120
섬마을선생님/124
박희선짬/128
이경자추억을찾아서/133
전정식예불하는토끼/139
지옥이야기/143
이기태승강기에서겪는일들/148
머리염색을그만둔까닭/152
남기욱간절곶풍경/156
동창회/159
이몽희나의장타령/163
두번째눈/167
박송죽내젊은날의꿈이살아숨쉬는거리/172
배병채달걀/175
디지털과아날로그/179
배기형누수(漏水)/183
떠나는길손들/188
최헌아버지를생각하며/191
이해주신발에대한단상/195
수난의역사와기록문화의빈곤/199
박문자미완성의모정/203
황원준적(敵)과의야반도주/207
정인조작은카페이야기/214
장광자우리말을생각하며/219
허정아름다운민속문화/224
정약수편지/228
박우야전서로이해하는마음으로/233
젊은이와늙은이/236
박홍길덤으로가는여행/238
전희준퇴직후10년/242
김훈세계의명곡아리랑/247
정철규버리기연습/250
버스가왔다/254
成洛九알[卵]과벽(壁)/258
가정을지키자/264
윤옥자쓰레기장에서줍는큰꿈들(2)/270
허현숙명품/274
우리모임소식/278,
수필부산문학회회칙/281,
회원주소록/286.
편집후기/290
이결실의계절에
회장姜中九
가을이다.여름내내초록빛으로물들어있던산과들이붉게물들어가는모습이참으로아름답다.커다란느티나무한그루가서있는마을앞길가에는희고붉은코스모스가바람결에하늘하늘춤을추고,황금빛으로물들어가는넓은들판은보기만해도풍성하다.
맨드라미꽃이발갛게피어있는골목길을들어서면삽살개가달려나와누구를찾아왔느냐고멍멍멍짖어대고,돌담위에는호박이누렇게익어가는데,초가지붕에널린빨간고추는가을햇살을받아더욱붉다.
학교를다녀온아이들은꽁보리밥을된장찌개로맛있게비벼먹고,산으로소를치러가서는알밤을주워먹는것도재미가있었지만,콩서리를하는것은더재미가있었다.산에서따먹는머루랑다래는그야말로꿀맛이었고.
밤이면호롱불당겨놓고책을읽었다.그러면귀뚜라미도따라서귀뚤귀뚤책을읽고,기러기도기럭기럭울면서밤하늘을날아갔다.하늘에는별들이초롱초롱빛났고.어릴때우리고향마을의가을풍경이다.
가을은수필의계절이다.피천득선생은‘수필은서른여섯살중년고개를넘어선사람의글이며,정열이나심오한지성을내포한문학이아니요,그저수필가가쓴단순한글’이라고했지만,나는그렇게생각하지않는다.
수필은원고지15장에불과한비교적짧은글이기는하지만,거기에는글을쓰는사람의정성과혼이담겨져있어야한다.뿐만아니라재미가있어야하고,감동을줄수있는글이어야하며,해학과위트가있어야한다.거기에다교양이담겨있으면더욱좋고.
그리고수필은선(禪)과같은것이어서단순한말의기교나너절한신변잡기로서는좋은수필이될수없다.그러므로작자는진지한태도로인생을관조하면서,수준높은자기경험을토대로하여진솔하게써야좋은수필이될수있을것이다.
올해도수확의계절인가을이다가왔다.농부들이새움이돋아나는봄날에씨를뿌려서무덥고비바람치는여름내내땀흘려가꾸어오던오곡을결실의계절인가을에수확을하듯이,우리수필부산문학회회원들도‘隨筆’이이나라최장수동인지라는자부심을가지고정성들여써온작품을모아서이가을에활짝웃으면서제72호를펴낸다.
끝없이펼쳐진갈대밭속에조각배한척이떠있는표지그림은부산의명소인을숙도의가을을풍경화의대가인이동수화백이그린것이다.표지화를그려준이동수화백에게감사를드리면서우리수필부산문학회의무궁한발전을기원해본다.
사랑의힘
황다연
맑은자연수는살아있는물이라서의식기능이있다는것에착안하여,물이가진감정의결정을사진으로찍어낸‘에모토마사루’란놀라운인물이있다.세계평화를기원하는도구역할을하는그의저서<물은답을알고있다>는그내용은바로요약된경전해설서였다.
물의길정보가내재된물의다양한결정모습을통해알게된대자연순환운동은한마디로그는‘사랑과감사’라고한다.대자연의생명현상의근본원리가‘사랑과감사’라는말은붓다의‘자비’사상,그리스도의‘사랑,박애’사상과일치한다.
자연의섭리속에캐낸언어의보석이곧그성자들의말씀이었다.
이런관점에서나는,운명을좋은쪽으로전환시키는탁월한치료법은‘독서’라고본다.그중자연섭리가순도높게무르녹은불가사의한에너지로가득채워진경전,즉고전공부요법이제일이다.사람들이틈만나면누가부르는듯이산이나바다의품안을파고드는것도,늘대지의모성을그리워하는일종의잠재의식작용이다.대자연의사랑의흡인력은이처럼불가사의한힘을갖고있다.
성공한사람은자연의정기를받고태어났다거나,대단한여성이그곁에있었다는사실도위대한그사랑의모성영향이다.
‘에모토마사루’는삶이흐르는길공명의원리파동을이렇게설명한다.
“…사람과사람이서로를끌어당기는‘사랑’이란현상을파동적으로해석할때,예를들면자신의능력이파동적으로10의수준이라한다면,자신과똑같은10의파동을가진상대와공명하든지그보다높은파동을가진사람을동경하게된다.그런형태로사랑할때인간이가지고있는능력은최대한발휘한다.10의능력을갖고있으면서5의힘밖에발휘하지못하는사람이라도10의능력을가진사람을사랑하면그에맞게10의능력을발휘하게되고,상대가12,20의파동을가지고있으면자신의능력도자연스럽게높아진다.따라서사람은사랑하고있을때일의능률이올라간다.…물론여기서말하는사랑이란연애에한정되어있지않다.…사랑은주파수를올리고인간을연마하는기폭제다.…”
종교가내세운진리에대한사랑의실현도물론이와같은현상을나타낸다.
만해의주장처럼,긔루는(또는그리운)사랑의대상은다‘님’이기때문이다.
아무리쓸어버려도가득차는고독의공기
당신의부탁인듯음악같은물소리흘러
혼자서걷기아까운절창의계절즐깁니다.
허공의깊은가슴에제울음묻고싶은듯
바람스칠때마다풍경(風磬)의아픔하얗게날아
목숨이지닌비애도아름답게느껴집니다.
(山寺에서만난아름다운비애)
살아있는동안은한없이사랑해야할창작활동이발전지향적인독한갈등을유발할때마다뭉텅뭉텅피로엉키는목숨이지닌비애란.
인연의바람이끄는대로내발길닿는곳마다임의눈길안쓰럽게따라다니며,어느땐그냥흐르는물과바람에게나를사랑하는당신부탁실어놓고임은삼매에든다.물리학적극미진블랙홀속으로들어가보면사물의근본본성이없는‘空’임이드러나‘있는그대로신뢰한다’는의미인‘哲’字를파자하면‘입을다무는학문’이된다던가.이런데도문득애상의정감이나를휘감으면나는속수무책으로환상이만든그애상속에도취한다.
나그대를생각함은항상그대가앉아있는배경에서/해가지고바람이부는일처럼사소한일일것이나/언젠가그대가한없이괴로움속에헤멜때/오랫동안전해오던그사소함으로그대를불러보리라.…
(황동규의‘즐거운편지’에서)
어느날영화‘편지’를소개한영화속의한장면이순박한사랑의향기뿌리며나를끌어당긴다.먹은것없어도,함께있는것만으로도배부르고평온하게하는사랑의힘.인간의종속본능속에가정을만드려는욕구가저장된배경도,사랑이란불가사의한파워에얼마씩부족한서로가의지하며살기위함이리라.
이영화는두청춘이사소한일로서로의외로움을감싸안으면서결혼으로발전하였으나,소박한행복이넘쳐흐르는이들사랑은운명이시샘하여오래가지않는다.한사람이먼저‘암’이란질병을이겨내지못해저세상으로떠난다.참을수없는아픔이드리워진방안에그리움의촛불켜놓고한없는사랑의실타레아무리풀어내도,이미결정된일에대해선운명은눈길한번주지않는다.
‘굶는사람양식을사준다.’든지,‘가난한학생등록금을내준다.’든지하는적선은에너지의순환운동으로서자기통장불리는또다른방식의저축임이분명하지만,이런선행은몇전생부터습관이되어있어야했다.대부분의적선습관은금방만들어지는게아니다.삶의행복지수올리기엔이우주가장예민한센서를가진인간의아름다운감정역할이크다.
춘원은그의대표작‘사랑’에서인간의순수순도를혈액으로분석측정하는광경을그렸는데,이해타산을떠난자연발생적인순수한감정으로남을도울줄아는사람은진리와교감이빨라,자기를이끌어올릴수있는많은힘을갖고있다했다.이런사람은꾸준히발전하여결국뜻을이룬다.어떻든현재의지와상관없이윤회라는자연순환구조속에서과거로부터상속받은우리삶은언제나다양한문제로부터자유로울수없다.크게발전해야할사람에게도타당성있는역경이주어지듯,허물어질사람에게도타당성있는역경이주어진다.역경은무연의시험대가아니라삶의연속선상에서잘됐거나혹은잘못된감정이지은결과를향한필연의시험대다.
이래서그지없는자비로움으로가득채워진대지와같은마음으로살라고대자연은‘사랑과감사’를존재의근본원리로삼았으리라.
순연한마음속엔지혜의빛이있다
황다연
가만히물속에서있는물풀을바람이흔든다.물풀만바람이흔드는게아니라나무잎도나뭇가지도흔든다.꿈이아른대는창가에서조용히책읽는소녀의마음까지흔든다.
성인들은살면서흔들리지말라고삶의뿌리키우는마음공부를많이시키지만,마음다스리는솜씨가명곡을감동적으로연주하는연주자같아지려면땀냄새나는인내로하염없는훈련을쌓아야한다.
어떻든신의언어로도설명할수없는운명에휘둘리는인간의무력함이있어,밤은늘무섭도록깊고또낮은너무나미안할정도로밝다.
장자와혜시는둘도없는친구사이인데혜시는변론가였다.
어느날장자와혜시가물속에서고기들이노는것을보고,장자가먼저말하기를“물속의고기들이굉장히즐겁게논다.”고했다.그러니까혜시가“자네가고기가아닌데고기가즐겁게노는줄을어떻게아느냐?”고장자를몰아붙였다.장자가답변하기를“자네가내가아니고내가고기가아니라면내가알고모르는것을어떻게아느냐?”고했다.…
견해의차이가없다면다양한문화와문명은없었으리라.물이그릇에따라모양새가다르고차별이나는것은,물자체는분별하는생각이없으나사람마음그릇이다르기때문이라지않던가.습관에종속된운명의시각은어느세계에서나차별이있다.모든생명들은자기업(業,습관차원)대로보고자기업대로살아간다.서로다른업을가져서로다른환경갖고서로다른시각으로사는그것이당연한현실임을받아들이면,어떤혼란도가볍게넘겨버릴수있다.
그러나확연히트인심신통일이룬이런경지까지도달하려면온갖슬픔을통해많은상처를경험해야한다.가혹한시련을주는겨울끝꽃샘바람이느닷없이봄짓눈깨비를뿌리기도하는오슬오슬추운대지며,허공을고운향기로사로잡는매화의인욕쯤지니면그어떤고통도동반자쯤으로여기지싶다.
아득히딛고오르는고독의층층계단
단단한정신이다스린한벌열정은
처음본수정보다맑은
사랑을풀어낸다.
세상다가진듯한결고운설렘으로
바람속에애틋한꿈의궁전지어놓고
간절한시간안에서
그리움의파도를탄다.
(‘매화,그리움의파도’전문)
조선관기두향은시문에능숙하여퇴계선생연인이되었는데,후일퇴계선생이단양군수직을마치고떠날때귀한매화를선물했고,선생은평생그매화를정성껏키우며두향을잊지않았다고한다.
매화에관한시를100여수지은만큼스스로매화를혹애한다했다는데,오늘날까지많은후학들의섬김을받을수있는것은그어른매화기질덕분이리라.그러니까두향은단양군수이퇴계를사모한게아니고고매한인품가진자연인이퇴계를사모했던만큼,그녀존재의향기도남달랐을것이다.
현대에서불치병을근절시키는대체의학요법으로통하는‘유교의중용’,‘불교의중도’부근까지간사람몸에선퇴계선생이지극히사랑한인욕의매화향내가나지싶다.
진리의3대원칙중첫째정리(正理)인‘자연의순리’대로살면나쁜병에걸리지않는다고한다.참된삶은곧그만큼아름다운습관[業]을가져이세상소금역할하는보살(菩薩)그릇으로사는사람인데,나쁜병이근접할리없단다.
항상다양한질병에걸릴가능성의범주가인간세상이지만,전생에서가져온질병도순리대로살면자연치유된다고한다.
인생은입으로사는게아니라지혜로살아가야하기에,인간은미완의존재라는환경조건을직시할줄알면,복덕의온상인겸손의미덕을잊고사는후회병을예방할수있다.
오래전부터불교경전맛에길들여져사는것을축복으로여기는나의최대곤란점은,특별한질병은없지만신체조직모두조금씩약하다보니항상부족한체력이문제였다.작은밥상다리를세워책상삼고얇은방석깔고앉아저녁두시간을공부해야하는건언젠가부터내겐무리였다.오묘한경전공부그자력에끌려구도회법당까지가서도두시간을버텨낼체력이없어되돌아올땐체력의한계가뼈저린아픔으로움직인다.
세상을한결같이가슴으로살아야만물을사랑할수있다는것,죽음보다높은고독으로그렇게묵연히살아야무한시공을향해여울지는그리움의파장을만들수있다는것….
안목이좁으면사물전체를볼줄몰라부분만보며왜곡하기일쑤여서,죄를쌓는다고깊은안목키우는마음공부,고전공부를꾸준히하는사람도제법있다.자기삶을키운다는고집,또는집착이약이될때보다병일때가더많은인간세상은그저자신에게온고통을달게참고견딜때그아픔에서벗어나는길이보인다.
우리가희구하는평화는어떻든현란한문명이만든갈애의숲에둥지튼외눈박이새가아니고,밝게갠마음속에자란아름다운지혜의빛이었지않던가.
삶을물리적잣대로재며살수록혼란은가중되고,그혼란만큼거꾸로흐르는역사가생기면서사회가침체되고퇴화되므로정신세계를주도한옛선비들은정신차원문제인마음공부를최상의덕목으로꼽았다.어디로부터온것인지알수없는단장(斷腸)의괴로움이명멸하는곳,아울러그만한기쁨이명멸하는이곳이다마음속에있다는데,지금마음을찾아도마음이없다.
나는나를사랑한임의자비로운가르침에이끌려그윽한안심입명의경지에머물고있는것일까.
비파나무
심득순
한송이국화꽃을피우기위해
봄부터소쩍새는그렇게울었나보다.
한아름의비파나무열매를양손가득받아쥐기위해나는지난해여름부터올봄까지그렇게가슴설레며기다려왔노라고.서정주시인이국화한송이를위해절절히노래한것처럼나는빛나는햇살속에푸릇푸릇한비파가어서빨리노랗게익어주기만을고대했다.
여름을향해불타오르는6월중순어느날,마침내오랫동안기다려왔던보람이찾아왔다.밤늦은때,집근처범일성당에서성가연습을마치고나온나에게딸과사위가찾아왔다.남천동사돈댁에는넓은정원한켠에한그루큰비파나무가있다.노랗게잘익은열매를손수따당신아들며느리손에들려비닐봉지가득안사돈인나에게로보내왔다.어느해부터나의혀는비파맛에길들여졌고,비파가익어가는계절을기다리게되었다.그마음을아들내외로부터전해들은사돈내외는달고새콤한수분이가득찬비파가익자마자나에게가장먼저선보이신것이다.오리알노른자만한크기의비파를한입물고향에취하고맛에취하고초여름의산란한밤향기에취한다.향기로운시간에깊이빠져들게해준사돈내외분의따뜻한배려에우선감사를전하고,나의비파사랑이시작된싯점을풀어놓을까싶다.
중국과일본이원산지로장미과에속하는아열대산교목인비파나무는다자란키가10m정도며,일년내내잎을볼수있는상록수로공원과정원에많이심는다.우리가알고있는비파라고부르는국악기는몸통이비파나무의잎모양과닮았다해서붙여졌다고한다.6월에과일이익으며건강에좋은독특한효능이있어,이과일에관심을기울이는사람이날로늘어가고있는것같다.내가비파나무에기린처럼목을길게빼고관심을가지고바라보게된두해전,그날의그광경들을떠올리자또다시가슴이벅차오른다.고단한삶의더께가더덕더덕떨어져나가는소리가들린다.마치물이몸속으로스며들듯나에게자양분이되어준좋은비타민같은시간들,그시간은나를마법의세계로인도한다.
쾌청한봄날,네덜란드항공에몸을맡기고지구반대편을향해빠르게날아갔다.네덜란드를경유하고독일뒤셀도르프공항에내려청사밖을나오니독일에서작곡가로활동하며살고있는동생이환한얼굴로기다리고있었다.창문가에온갖예쁜꽃들로치장한독일의고풍스런집들과마치수목원을방불케하는거리풍경에한동안압도됐다.유럽의정취를한몸에느끼며독일중부도이스부르그에있는동생본가로갔다.동생을따라음악공연장과미술전람회장으로품위있고격조높은분위기에젖은시간도갖고,독일의상징이라는라인강을배경으로기념촬영도하는멋진몇날을보낸후,다시동생과함께그리스크레타섬을향해비행기를타고날아갔다.
지중해한가운데,세계적인휴양지의한곳이라고불리는크레타섬공항에도착하니밤바람이후덥지근하게불어왔다.내가떠나온낯선이국의섬크레타공항은문명을떠난원시자연의형태가아직그대로남아있는곳이었다.우리네어느소도시버스터미널을연상케하는낡고작은국제공항을보고잠깐어리둥절했다.세계각국에서몰려오는수많은관광객들을볼품없는이작은공항에서다수용한다는것이그저놀라울따름이다.
그러나크레타는희랍신화에나오는제우스신,엘그레꼬라는유명한화가,소설그리스인조르바로명성을떨친카잔짜키스의출생지이며,또헬레니즘문화이전에전성한미노안문화의발생지이자,고대지중해를교차하는여러민족과문화들이남긴다양한문화유적지이기도하다.
공항앞렌트카대여점에서,터무니없이무리하게요구하는차량가격을놓고실랑이를벌이는바람에시간이지체되어우리는호텔에서하룻밤을묵기로했다.다음날아침,기후특성상봄여름에는비가잘내리지않는다는크레타섬에이른아침부터비가내렸다.촉촉이젖어드는창밖아래빈도로가에고양이두마리가울고있었다.엊저녁먹다남은빵과치즈를꺼내어던져주었더니입에물고골목안으로줄행랑친다.이방인이던져준먹이에오늘하루든든한요기가되었으면하는내심정을아는지모르는지,반대편창문아래골목을내려다보니꾸역꾸역먹는데만정신이팔려있었다.
호텔을나와전날빌린렌트카를타고남부해안가에있는마리우라는마을언덕위에음악작업을하기위해서마련해둔동생집으로갔다.산중턱에양떼들이삼삼오오짝을지어풀을뜯어먹는광경이한가롭고아름답게보였다.그날로부터7일동안한송이들꽃같은마음으로나를버리고나를찾는시간을반복했다.그리고그곳에서비파의매력에푹빠져들게되었다.일상의번거로움을내려놓고머나먼곳으로떠나온길.동생이짜놓은여행일정표에맞추어신비의섬크레타에추억이라는이름의풍경들을가슴에차곡차곡채웠다.
미르티오스라는마을의플라티아식당에서우리는지중해를바라보며점심을맛있게먹었다.통밀로구운달콤하고고소한식빵을올리브기름에흠뻑찍어먹던맛은지금도군침을돌게한다.아시아인인나의왜소한체구와얼굴에호감을가진듯식당주인이‘야사스’라며고개를옆으로젖히고인사하는이색적인모습이매우인상적이었다.이다음에또만나게될것을기대한다는그의친절한말을뒤로남긴채,우리는낡고오래된이국적인회백색집들사이투명한햇볕이전율하는좁은도로위를걸어갔다.
머리위로하늘이열리고이웃간의분쟁도범죄도일어날것같지않은한적한마을에과히없어도좋을한가한경찰서가눈에띄었다.경찰서문앞에시원한그늘을드리운키큰아름드리나무한그루가서있었다.크레타의거대한자연풍광을닮은코큰그리스남자가나무에매달려열심히열매를따는모습이눈에들어왔다.
멀찌감치쳐다보니꼭승리의상징인금메달같은노란열매들이조랑조랑매달려있기에퍽신기했다.호기심이동한나도달려가양해를구하고몇개를땄다.동생이다가와비파나무열매라며지중해에서는흔한과실수이며,그리스말로는무스물라라고가르쳐주었다.대도시에서한뼘의땅도없이자라난우리는이나무가한국에서도자생하고있음을전혀몰랐다.우리는길가에서아이들마냥새콤달콤한맛을내는비파에얼굴가득웃음을매달고속속까먹는재미에푹빠졌다.주체할수없는행복감이밀려왔다.하얀낮달이내안에찾아들고생애가장기분좋은시간,비로소비파나무와의인연이시작된순간이다.
열매는지구반대편에서온낯선여행자의삭막한감정에기름칠하고일상에쪼들린나를위무하며,마음을풍선처럼부풀게했다.꽉막힌숨통을틔우며잃어버린감각을찾아주었다.동생과함께한아름다운시간의열매를그곳에서발견한까닭이며말없는조언자가되고,삶에대한절절한희구가되었다.
인생에쉼표가되는여행,만나고헤어지는여행,만나고헤어지는그리움,일탈그이상의감동과함께했던보름동안의여정도끝나고집으로돌아왔다.짧은만남이너무길게뇌리에선명한자국을남긴다.많고도많은여행지에서마주쳤던사물들속에서왜하필비파나무에유독심취하는지?예전에사돈집을방문할때정원을몇번이나둘러보았는데도눈에띄지않던그나무,이제는필연으로각인된것존재의정체성이확인되는만남에놀란다.
소중한추억이고그리움이고,내마음의고백이며확신이자사랑이된비파에심장이들끓는다.세월은흐르고기억은날이갈수록희미해지고,어둠속으로사라지는석양에시시각각요동치는내마음에안정된바람이들어오는소리를놓치지않기위하여,나는오늘도비파와소통하고,비파에열애한다.
(2009.6.20.)
태풍사라호
심득순
여름철이면꼭한번씩연례행사처럼찾아오는물난리다.신문지상이나TV화면에연일기상특보가전해지고,엄청난재해를당한사람들의안타까운모습들이비쳐진다.수마가할퀴고지나간자리에남아있는참담한현실앞에인간은너무나미약한존재이다.오래전사라호태풍을겪은적이있다.내나이네살무렵,해안가인영도남항동에서살던때다.
지금은모두고인이되신부모님께서는추석날차릴차례상을준비하시느라바빴다.마당한가운데에서제기를닦으시던아버지모습이눈에선하다.놋그릇에낀때를마른짚에재를묻혀쓱싹쓱싹문질러서반짝반짝윤이나도록닦으셨다.머리에하얀무명수건을덮어쓰고부엌에서전을부치시는어머니도정겨웠다.정지된평온함이어린내눈에들어왔다.잔잔했다.
한더위도물러가고가을철로가는한가위대보름전날.천마산너머로해가가고나는붉은노을을보러갔다.자박자박짧은발걸음으로바쁘게갔다.옹골차게혼자걸어갔다.골목에서나와길만건너면바로해변이었다.붉은융단을깔고산너머지는해가신기해서가끔엄마손을이끌고가고,오빠들을따라나서기도했다.언덕을이룬자갈돌위에서서천마산붉은해를좇아갔다.저녁하늘이어쩐일인지낯설었다.나를반기던하늘이아니었다.골이잔뜩난칙칙한하늘이다.바람이크게울었다.파도가심란하게몰려왔다.해가종적을감췄다.후두두빗방울이쳤다.누군가엄마한테어서가라고했다.파도가내발아래까지왔다가갔다.종종걸음으로집으로돌아갔다.
해일이일어바닷물이넘치고우리동네에물이밀려들었다.봉창으로번쩍이는섬광이나타나고아버지얼굴이어두웠다.한나절동안공들인차례음식이걱정이신어머니,갑자기뒤죽박죽된현실이불안했다.동네구장이집집마다쫓아다니면서빨리대피하라고고함을질러댔다.옆집용이엄마가어서나오라고재촉했다.폭우가쏟아졌다.무섭고두려운밤이었다.집근처동네에서제일큰건물이던통조림제조공장으로갔다.공장건물안에는태풍을피해온사람들로발디딜틈도없었다.어른들의긴한숨내쉬는소리를들으며나는탁자위에서잠을잤다.
다급한아버지목소리를듣고잠이깼다.아침이었다.공장안에물이가득찼다.물난리였다.초등학교3학년이던큰오빠는헤엄을치고,작은오빠와나는아버지등에업혔다.엊그제첫돌이지난동생은엄마등에서새근새근잠이든채구호소를찾아갔다.한순간에모두이재민이되어임시구호소인남항초등학교로올라갔다.추석날조상님께올릴과일들이물위에둥둥떠다녔다.귀하고맛있는배와사과가여기저기떠다녔다.한꺼번에두아이를등에업고허리위로차오른물속을헤쳐나가는아버지의힘든상황에도아랑곳없이나는생떼를썼다.아버지께사과를주워달라고억지를부렸다.두아이를업은채과일을줍기란불가능한일이다.물에젖은몸만큼이나아버지마음도젖었을것이다.
태풍사라호는기나긴고통만안겨주고떠나버렸다.집도절도아무것도없다.8ㆍ15해방통에겨우찾은보금자리였다.용이엄마도울고우리엄마도목놓아우셨다.나도옆에서덩달아울음을터뜨렸다.낯익은된장독이흙더미속에서우리집터였다고알려주었다.묵은된장독이주인을기다렸다.누런된장이고스란히담긴장독은엄마의근심을덜었다.
태풍이올때마다어머니가말씀하셨다.폐허가된집채속에서용하게살아남은된장독이하도기특해서된장맛이더좋았노라고.물속에잠겨있던장독에한방울의물도들어가지않은게신기하고놀라울뿐이다.집과가재도구,모든것을잃고도된장독하나건진게고마운어머니였다.
아버지절친한친구덕분에영주동에있는방두칸짜리집을얻어옮겨갔다.마당넓은집에여러가구가옹기종기모여살았다.수심이가득하던부모님얼굴에화색이돌았다.엄마를따라중앙동40계단을오르내리며구호품을타러다니기도했다.그시절배급받아먹던강냉이죽에는아련한향수가들어있다.정많은이웃들과따뜻하고아름다운날을보냈다.옛부산역근처철길옆마당넓은집에서는기적소리때문에밤잠을설치기는했어도,이별의부산정거장이라는노래는늘내머릿속에감돈다.우리형제들이태어나고자란영도에서의삶은사라호탓으로일시중단되고,영주동에서새롭게시작된날들은넉넉하고단맛나는생활로기억된다.차돌같이단단한가족애가넘쳤다.
해마다여름철태풍으로인한물난리소식이들려오면느낀다.그때우리를업고허리까지차오른물속을힘겹게헤쳐나가시던아버지등이얼마나따뜻하였던지,얼마나그리운지.고된삶의한가운데서맛본아버지사랑이었노라고.
(2008.7.20.)
세상을향해던지는편지
-‘역대대통령의애창곡’악보(樂譜)묶음을들고-
이원우
방학이다,모든노인학교가.천주교성당이나개신교교회,일반노인회노인대학다마찬가지다.돌이켜보면지난1학기도나자신너무바빴다.25년동안줄곧그래왔다.자나깨나교재연구등을해야한다.1,420여회,그숫자도큰의미가없다.
어쩌다보니천주교부산교구은빛사목지원단장을맡게되었다.부산교구에있는성당노인대학에강사를지원하는그런업무가부여된것이다.그러나정작나자신부터바빠서공적(公的)인본연의임무에소홀했다.뉘우쳐진다.
그러면서도2학기개학이후의여러가지전망을쏟아놓는다.정말다양한프로그램을어떤방법으로든제공하고싶다,천주교성당이라는외연(外延)의벽을더허무는것도중요하다.여담이다.1학기말나는진영과김해에하루에몇시간씩머물러있었다.그곳노인회에서운영하는두군데노인대학강의때문이었다.노무현대통령이서거하기며칠전에시작한노인학교수업이,국민장이끝나고나서도한참이나거기서계속되었던것이다.그게내가부르짖는외연운운의예다.
나는거기서노무현대통령의애창곡‘허공’과‘외나무다리’등을불렀다.누가그두곡외에‘상록수’와‘부산갈매기’등이있다고했다.‘상록수’는나자신잘모르는곡인데다악보마저얼른구할수없어,노인학생들앞에내놓을수없었다.노인들도낯설긴마찬가지고.
그얘길<조선일보>에소상하게썼다.마지막에자기자신이라도생명은절대스스로버릴수없다고강조하였다.나도그와비슷한상황직전에서돌아선일이있어설득력이있다고자부했다.사설형식의이졸고에댓글도상당히올라와있었다.내의견에대한찬성폭이반대보다훨씬넓었다.나는무릎을쳤다.
그런데두달이안되어서다시인터넷앞에서나는놀랐다.내눈을의심할정도였다.앞서들먹인몇곡이사라져버린것이다.대신그자리를다른노래들이차지하고있었다.우리같이나이좀든보통사람들은어쩐지가까이할수없는….나는적이실망하였다.나는그가노래를통해서라도서민(庶民)냄새가물씬풍기는그런봉하마을촌로(村老)로남아있길바라고있었는데.60일이채못되어그는타의(?)에의해변모되어있었다.
그의애창곡과나는추억이있다.00년도7월중순,강서노인학교1학기종업식에대표로초청을받아갔다.여당부총재였었던그와,그지역에서출마한H위원장,B구청장등과함께였다.H위원장은날깍듯이선배로대접하였고,당시만해도노인들한테인기가정점(頂點)에있던나에게노무현부총재는의아스런시선을던졌다.현직교장이일과시간에노인학교에나온것자체가기이한(?)일이라여겼으리라.게다가화제가,‘둔치도마을’의노인들과의고스톱에까지미쳤으니….
마침내내빈중노무현부총재와나둘만남았다.내노래에맞춰노인들과그가디스코인지뭔지모를춤을췄다.이윽고내가반주도없이허공에날린곡이이거다.지금흔적도찾아볼수없는,제목조차모르는,머리와꼴마저잘린옛노래.‘…화투장에점을치며맺은날짜애태우고맺은날짜애태우며기다리는여자라오.…’노인학생들은열광하였다.그가이어받은노래제목은신문에썼으니생략하자.그가김상국씨처럼나를괴짜로여겼으리라는환상에빠져10년을허우적거렸다.
이야기가엉뚱한방향으로흘러갔나?
참,내2학기노인학교수업준비를한다고했었지.으뜸가는프로그램은역시노래다.내가취입한‘부산노래’19곡과역시내가콘서트를열어호소한,화합을위한영호남가요등말이다.거기다가하나더보탠다.‘역대대통령의애창곡’!노인학생들에게아주매력적이겠다.생사를기준으로삼을필요가없다.노무현대통령이불행하게도서거함으로써애창곡자체가‘둔갑’을했다는그서글픔따위도차치한다.
적어도대통령의애창곡이라면말이다.최고공인(公人)으로서의자기시대에대한자존심의발로일수도있다.물론단순한개인으로서의정서일따름일지도모르지만.어쨌든내친김에욕심을다시한번여기적어본다.부산과영남의경계를벗어나서‘역대대통령의기분’을내고싶다.
어쨌든대통령이라는거추장스러운직함을벗기고얘기하자.
초대이승만,그는‘희망가’와‘타향살이’라고되어있더라.4대윤보선은‘유정천리’⋅‘눈물젖은두만강’,5-9대박정희는‘짝사랑‘⋅’전우야잘자라‘⋅‘황성옛터’와짝짓기를할수있다.10대최규하는애창곡이없다지만,‘울고넘는박달재’와‘비내리는고모령’은가끔불렀다더라.11-12대전두환은‘삼팔선의봄’과‘방랑시인김삿갓’,노태우는‘베사메무쵸’다.민주화의두기수대통령김영삼과김대중은가각‘아침이슬’⋅‘선구자’⋅‘메기의추억’과‘선구자’⋅‘목포의눈물’이라나?노무현은중언부언말고생략하자.
꽤재미있는유추(類推)를할수있어서좋다.애조(哀調)를띠며불러야할곡이너무많다.말이‘희망가’지나중에는오히려’절망가’처럼여겨졌다는이승만의애창곡부터그렇다.‘타향살이’인들어찌예외일수있으랴.‘유정천리’⋅‘눈물젖은두만강’⋅‘짝사랑’⋅‘황성옛터’⋅‘삼팔선의봄’⋅‘방랑시인김삿갓’⋅‘울고넘는박달재’⋅‘목포의눈물’등등.진중(陣中)군가라할수있는‘전우야잘자라’는씩씩한곡이지만가사는역시슬프다.
노태우가‘베사메무쵸’를좋아했다는것은그럴싸하다.박정희가‘새마을노래’에노랫말을쓰고곡을붙였다는사실이대단하듯이,노태우가직접사단가를만들었다는일화도있을만큼그도음악에조예가있었다.따라서멕시코산(産)인세계적인‘베사메무쵸’는그와어울리는‘근사치(近似値)’라는답을매겨도괜찮겠다.미국민요‘메기의추억’역시우리국적이아니라는점에서‘베사메무쵸’와동격이다.
김영삼과김대중이같이‘선구자’라는가곡(歌曲)을가까이했다는것은의미가깊다.다만노래만든사람중하나가친일인사에포함되느니어쩌니하여가슴아프지만.그런가하면‘황성옛터’니‘눈물젖은두만강’,‘목포의눈물’등은일제강점기의민족노래라고주장하며,내가대중들앞에서꽤나부른곡이다.해서친근감이상의무엇이가슴에와닿는다,찡하게!다만‘아침이슬’은대통령의목소리를빌기엔너무강한메시지를지닌것같다.아깝다.
매듭을짓는다.역대대통령의애창곡들에담긴눈물,그건국민들의가슴을적시는게아니라되레건조(乾燥)하게만들었다.안타깝다.만약에9월이후에말이다.내게어디서든얽히고설킨그것들에대해이야기할기회가있다치자.더낱낱이분석하여펼쳐보여야하지않겠는가?내손의제법두꺼운악보뭉치에제법무게가실려있다.단서가있다.노무현의애창곡은그가스스로목숨을끊은이전의것들만취하련다.참그의애창곡에다‘울고넘는박달재’를추가하더라.최규하와짝이된셈이다.관련서적,대중가요집이나가요사등도여남은권책꽂이에서내손길을기다린다.
과거를묻지마세요
이원우
대과거(大過去)란말이있다.중고등학교때영어공부를하면서많이접했었던기억이난다.과거의어느시점보다더앞선기준(시점)에서,과거의시점까지계속되는시제(時制)를일컫는것으로기억한다.당장예문을하나쓰면좋겠지만,그건영문학자들의몫이지내겐어울리지않는다.그만두자.
나는내대과거를20대중반으로잡는다.그로부터현재이순간까지의지난시제가내게는‘과거’다.논리적으로는안맞지만….어쨌든대과거나과거나모두내게는중요한의미가있다.
대과거를되새기기위해오늘나는화두(話頭)를‘과거를묻지마세요’로던진다.나애심이부른가요말이다.자연스레타임머신을타고근50년전으로거슬러올라간다.1966년?아니면67년이었으리라.그해6월9일,그러니까내생일을이틀넘긴날,큰사건과맞닥뜨리게된다.군대에서가수나애심을만난것이다.
그얘기를좀해보련다.나는당시8171부대(보병사단)사령부부관참모부에서근무하고있었다.상벌계,사단장M장군의표창장을붓으로쓰는게주업무였다.시인(詩人)이기도한그는워낙표창장주는걸좋아해서,나는항상비상대기해야할형편이었다.그날도그랬었다.가수나애심이위문공연단을이끌고오니,만반의준비를하라는K참모의지시였다.
나는낮에원안을대강잡고부관참모K중령에게내밀었더니오케이사인을보냈다.나는붓을잡았다.감사장,주소(지금기억이나지않는다.)다음에가수나애심이란이름을본문보다약간큰글씨로일필휘지(?)했다.귀하는바쁜중에서도위문공연단을이끌고본부대를방문하여,장병들에게노래와무용등을선사함으로써장병들의사기를크게진작시켜주셨으므로,감사의뜻을표합니다.날짜다음에보병제2×사단장육군소장문×섭이라고붓으로옮기는데20분이채안걸렸던것이다.
나는사무실에서빵으로저녁을때우고,이제나저제나하고연락이오길기다렸다.열시를넘겼을까?참모실전화벨이울렸다.사단장실당번병J병장이었다.나는표창함을들고부리나케장교식당으로뛰어올라갔다.
나는눈이휘둥그레졌다.대위에서대령까지의장교들이밴드에맞춰공연단과어울리고있었다.아니정확하게기억해내자.사교춤을추고있었다.계급의벽이무너져버린것같기도하였다.운전교육대장L대위의모습이보이는걸로봐서그렇게짐작했다는뜻이다.정훈참모(스님)P대위는안보였다.
이윽고부관참모K중령의사인으로연주가멈춰졌다.그리고참모장H대령이감사장을들고섰고K중령이대신읽어나갔다.감사장어쩌고저쩌고….불무리모양이새겨진별두개짜리사단장라이터는아마도스무남은개소요되는것같았다.물론감사장은나애심가수만받았고.
돌아나오려는데K중령이뜬금없이나를부르는게아닌가!노래를한곡하라는것이었다.그때만해도지금같지않아미성(美聲)이란얘길예사롭게듣던터였다.참모들도워낙내가사단장실을자주드나들어안면이있어서그런지반대하지않았다.훤칠한키의나애심이동의(同意)의박수를보냈다.
나는호흡을가다듬고,그의히트곡‘과거를묻지마세요’를불러나갔다.
장벽은무너지고강물은풀려/어둡고괴로웠던세월도흘러/끝없는대지위에꽃이피었네./아꿈에도잊지못할그리던내사랑아/한많고설움많은과거를묻지마세요.
노래는물론2절까지였다.우레와같은박수소리가터질정도로반응이괜찮았다.H대령으로부터술한잔까지대접받았다.
그감격이내가평생노래와더불어살게하는계기가되었으리라.나아가대과거와과거를결정짓는경계선으로탈바꿈했고.지금나는운명의끈을지금도가끔느낀다.‘월하빙인(月下氷人)’,사람은태어나자말자말이다.부부의연이닿을사람끼리보이지않는기운이이승과저승까지넘나든다던가?
대신무뢰한처럼행동한나를L상사가가만두지않았다.그가야전곡괭이자루를내게‘안죽을만큼’휘두른것이다.그러나그정도야뭐참을만했다.
그로부터50년가까운세월이흘렀다.나는지금도줄기차게노래를부른다.어디서든,겁이아예사라져버졌다.월하빙인같은사연을안고,때로는저승문턱까지갔다왔다,그것도여러번.그런데감추어져있는곡이있었다.‘과거를묻지마세요’.노인학교도학교라면어찌그런걸드러내겠느냐는노파심에묶여있었기때문이다.
그런데성당노인학교에가서보니그게아니더라.그시절의영화가멜로물이었다는,단순한현재의선입견에내가마냥지배당할수만은없다는신념을얻게되었던것이다.6월중순경어느개방적(開放的)인성당노인학교에서나는그동안숨겨왔었던‘과거를묻지마세요’2절을끄집어냈다.
구름은흘러가도설움은풀려/애달픈가슴마다햇빛이솟아/고요한저성당에종이울린다./아아흘러간추억마다그립던내사랑아/얄궂은운명이여과거를묻지마세요.
아,반응이예상외였다.하기야과거가없는사람이어디있는가?나도‘대과거’든‘과거’든‘과거’는있었다.부산문단의걸출한스타J교수,그는만약이글을읽고있으면미소를지을게다.누가정말묻지않았으면좋을,그런가슴앓이의과거를그가재생해낼수있을지모른다.그런데나애심의‘과거는묻지마세요’는일관되게과거를묻지말라한다.
아무튼좋다.내게주어진시간이앞으로얼마일지모르지만,나는노인학생,특히천주교성당노인대학에서‘과거를묻지마세요’를고집한다.주님도말씀하셨지.진정으로회개(悔改)하면구원을받는다고.한걸음더나아간다,어찌쩨쩨하게교우들앞에서만서랴.내일찍이무당(巫堂)제자가넷이있었지.그들중누가이승에발을딛고서있다치자.그가다니는노인학교에서인들왜목청을못돋우랴.
참,나애심에게가수인딸이있었다고했었지.오후엔어떻게든알아봐야할것같다.나보다12살연장인나애심,그리고1966년의그감격,그의딸의나이등에오차가있다면이졸고(拙稿)는픽션이될지모르기때문이다.아무튼다시한번부르짖노라,과거를묻지마세요!
전면주차
하창식
‘전면(前面)주차’.아파트에살다보면지상주차장에서자주볼수있는입간판글귀들중의하나이다.비단아파트뿐만아니다.학교나공공장소의화단이조성된곳에서는거의예외없이볼수있다.조성된화단의나무나꽃들을자동차매연으로부터보호하기위하여,화단쪽으로차량의앞부분을대어주차하라는의미이다.다른차들이주차되어있는좁은공간을비집고주차하려면전면주차보다는후면주차가훨씬쉽다.자동차운전을해본사람들이라면누구나경험할수있다.때문에,아파트나공공장소에서전면주차를꼭해야만하는지에대해불만을가진사람들도적지않다.
실제로,주차의편리함뿐만아니라,주차한차량을움직여야할때,후진시발생할수도있는안전사고,특히뒤에서놀고있는아이들이보이지않을위험때문에후면주차시스템으로바꾸어야한다는주장도있다.수목(樹木)들의보호보다인간의생명이더중요하다는논리이다.맞는말이다.하지만,오랜정차후자동차의시동을걸때코를찌르는배기가스의역한냄새를맡아본사람이라면,전면주차의필요성에동감할것으로생각한다.수목들도생명체인만큼,배기가스가수목의생명에도나쁜영향을미칠것임엔틀림없다.비단자연보호관점에서가아니더라도,사람이맡아도머리가지끈거리고불쾌해지는배기가스냄새를꽃이나나무인들결코좋아할리만무할것같다.환경론자는아니지만,나자신도전면주차가바람직하다고생각하는편이다.
차량의전면주차는물론,자동차에서뿜는배기가스로부터수목을보호하고자하는목적이가장클것이다.
하지만,전면주차란용어자체가가지는의미는그리녹록하지만은않은것같다.초보운전자에게‘전면주차’라는말은쉽게이해할수없는용어이기도하다.전면주차라는말이우리어법에맞는말인지도확실치않다.아무튼요즘들어아파트화단근처에전면주차를할때면가끔씩머릿속에떠오르는두어가지느낌이있다.
하나는,주차장에차량이많지않을때는아무런생각없이입간판이지시하는대로전면주차를하게되지만,주차된차량사이로전면주차를하기어려워,어쩔수없이후면주차를하게될때,무언가모르게마음속에남는찜찜함이다.또하나는,전면주차란용어자체에서‘전면’이란용어가갖는시사적(時事的)의미에기인하는것이다.찜찜한마음은물론,나의후면주차로인해잠깐이나마내차가뿜어내는배기가스에신음할수목들에게너무미안하기때문이다.아파트입주민이라면누구나지켜야할불문율같은규칙을어겼다는자책감또한그렇다.주차가어려워어쩔수없었다고강변해보긴하지만,화단보호를위해만들어진규칙이라면반드시지켜야명색이문화시민으로부끄럽지않을것아닌가.
그런데‘전면주차’란입간판을볼때마다,‘전면’이란단어에서요즈음우리사회를생각하게된다.전면은즉앞쪽면이란뜻일진대,대한민국의오늘을보면,앞은보지않고뒤만되돌아보며살아가는사람들이적지않다.특히,정치적현실을보면더욱그런것같다.여당은여당대로,야당은야당대로,건설적인대안이나앞으로의대한민국의발전을염두에두기보다는,몸은뒤를향하여서있으면서목소리만“앞으로.”를외친다.폭력이허용되는난장판국회,대화보다는선동과투쟁에집착하는야당,표의논리를앞세운여당의정치적정책결정,지역이기주의적정치에목매다는국회의원님들….국민들은안중에도없는답답한정치현실을보면서가진느낌이다.왜이럴까.모두들대한민국의앞날은생각하지않고눈으로는자신들의뒤만쳐다보면서몸은앞으로기울인채로걷는기묘한걸음걸이를하고있다.우리정치현실이언제쯤선진화되어우리백성들의얼굴에자그마하나마기쁨과행복의미소를짓게할수있을것인지….
진실보다거짓의목소리가더큰,비상식적인사회현실을보면서전면주차를생각해본다.뒤에서놀고있을지도모를아이들의생명을위해전면주차를반대한다며,그럴듯하게큰목소리로외치는분들에게도,목소리를낼수없기에자동차의독한배기가스를그대로들여마실수밖에없는가련한수목들도생각하는아량이필요하지않을까.전면주차나후면주차나근처에있는사람들의안전은당연히최우선적으로고려되어야한다.그것이전면주차니까더위험하다는것은어찌보면억지주장에불과하다.안전이가장중요하지만,그에못지않게인간들에게아름다움과여유를선사하는수목들의생명또한보호될필요가있다.그것이자연과더불어살아가야할인간의최소한의도리일것이다.
돌아온길이가시덤불이든포장도로이든뒤돌아보지말고앞으로만달리는모습,진정으로국민들의행복을위해여야가함께손잡고앞으로달리는정치인들의모습을보는것은과연불가능한것일까.2009년대한민국에서는….
(2009.6.24.)
토끼와거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