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73호/2010.6.
BY sanhasa ON 7. 15, 2015
2010년여름
통권제73호
<머리말>고구려옛터에서/회장姜中九7
<특집>고우암최선호선생을기리며
▸최선호선생약력/박홍길9
▸최선호선생추도문/큰바위얼굴로우뚝하십니다/박홍길10
▸최선호선생대표작
⋅웃으며살수없을까16
⋅어머니의금반지21
⋅어머니24
<회원수필>
이해주나의시(詩)등단기27
朴松竹영혼과육신이분리되는아름다운순간을위하여31
成洛九적전(敵前)참호(塹壕)에서34
장광자식혜같이40
이몽희촛불을켜며44
이원우화투,그영원한안개49블루스의환상(幻像)54
박홍길텔레비전을켜보면59
2010년여름/통권제73호
전희준한편의시를읽으면서63
안태경남의발을씻어주다68어느전시회에다녀와서71
이기태빚더미인생74
박희선부를때와주지78
이병수곶감과우산집(愚山集)83문학의힘88
전정식친구91
허정이유없는무덤95
하창식동래학춤99나쁜버릇104
김상희신들의사과108
姜中九황제의여행111
윤용흠모나리자115
윤옥자작은미나리밭120
황다연메마른세상에감도는그리움의여운124감동의파장129
허현숙해리포터의마법젤리134
손수영억새와갈대138그녀가온다143
허정림빨간구두149
최홍석화왕산진달래꽃밭으로그를보내고154
황원준비밀160
정철규출근길164
정인조봄은중얼거리며가고169
정약수물러나기와벗어나기173
김훈허드슨강변의라과디아공항179
심득순이름182청소187
황선영올레길에서193‘얌생이’의추억196
오기환그겨울의단상201
2010년여름/통권제73호
남기욱잊어버린친구206
강정이눈앞이흐리다211
최헌골목길,그리고새벽달빛215
배기형이사(移徙)가는날222봄의서곡(序曲)227
배병채봄232
<기고>
성종화이가을에내가할일237밧줄에매달린인생241
정은영파랑245식욕249
권춘애살아서천년죽어서천년253못생긴나무256
문경희끝을읽다261게상어가있던풍경266
수필부산문학회회칙/272
회원주소록/275
고구려옛터에서
회장姜中九
지난봄,아홉번째중국여행으로동북3성을다녀왔다.다롄(大連)을시작으로단둥(丹東)과퉁화(通化),지안(集安)을돌아보고,민족의영산인백두산에올랐다가룽징(龍井),옌지(延吉),지린(吉林),창춘(長春)을거쳐서북만주의중심지인하얼빈(哈尔滨)에도착하고보니감개가무량했다.
사방을바라보아도지평선뿐인그넓은대지가바로고구려옛터가아니던가.그로부터천년이지난지금도광개토대왕의치적을새겨놓은비석과대왕의무덤이나그네의발걸음을멈추게했다.
그리고일본제국주의의압박을피해온우리동포들의애국활동흔적도곳곳에남아있어서이범석장군의청산리대첩지와홍범도장군의봉오동전적지를돌아볼때에는가슴이뭉클했다.민족교육의요람이었던대성중학교는지금도동포들의교육을하고있고.
그곳에는우리동포들이많이살고있어서길을걷다보면쉽게만날수있고,오늘도선양고궁에는동포들이모여서고려문인이집(李集)선생을기리는백일장을열고있었다.
창춘에산다는권씨는고국의동포가반갑다며냉면을대접해주었고지안에사는강씨는육갑을짚어보더니내가아저씨뻘된다면서팔던옥수수를집어주는것이었으니,할아버지때만주로이주해갔다는그들의동포애는참으로대단했다.
하기야이국에서나고자란그들의설움을어찌다알수있겠느냐만그들은뿌리를알고우리풍습을지키면서부지런히살아가고있었다.
선양에산다는이씨는할아버지고향인경남합천의묘사까지참석한다고했고,엔지에서초등학교교사로근무한다는양선생은다섯살난딸에게민족혼을일깨워주기위해먼지안까지가족여행을간다는것이었으니말이다.
그들은하나같이조국애가대단했고통일될조국을그리면서살아가고있었다.그런데도고국에있는우리는갑론을박에다정치싸움만하고있으니….
이제부터는우리수필부산문학회회원들만이라도조국애를일깨우는수필,나라를사랑하는수필,우리민족의정서와긍지를높일수있는수필을많이써야겠다.그리하여사람들이우리<수필>을읽고나라를사랑하게된다면얼마나흐뭇하고보람있는일인가.
아름다운남해를표지화로그려준이기홍(李基洪)화백에게감사를드리고새로입회한성종화,정은영,권춘애,문경희,네분의회원님에게도환영의박수를보낸다.
∙∙∙고우암최선호선생을기리며
<약력>
1929.8.경남고성군출생
1942.3.고성초등학교졸업
1946.7.마산중학교졸업
1948.3.부산대학교예과수료
1953.3.서울대학교법과대학졸업
1956.2.7회고등고시사법과,행정과합격
1956.7.체신부수습행정관
1957.7.체신부우정국사무관
1957.12.사법관시보
1959.5.전주지방법원판사
1960.3.부산지방법원진주지원판사
1963.4.2군사령부감찰부장
1963.10.5군단법무참모
1964.5.부산지방법원마산지원판사
1967.1.대구지방법원판사
1969.1.대구고등법원판사
1973.4.부산지방법원부장판사
1973.10.부산지방법원수석부장판사
1973.10.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1979.5.대구고등법원부장판사
1980.7.변호사개업
1987.2.부산지방변호사회회장,대한변호사협회부회장
◎재부마산중․고동창회,재부고성향우회회장등
◎부산문인협회,부산수필문인협회,수필부산동인회(문학회),수필부산작가회회원
◎수필집<어머니의금반지>(1993),<포샤판사와정선군수>(1997),<아침산행을하면서>(2000)등
◎2009.10.81세로영면(경남진해천자봉공원묘지안장)
<최선호선생추도문>
큰바위얼굴로우뚝하십니다
우암(愚巖)선생님,선생님은결코‘어리석은바위’가아니십니다.온몸에겸손이가득배어있어남의눈엔그렇게보일뿐,진정으로우리들가슴에영원히새겨져우뚝한법관큰바위얼굴이십니다.법조계가우왕좌왕하여나라의기틀이흔들리고,따라서우리민초들의시선이흐려지는요즘이라,더욱선생님의그요지부동한자세야말로미래를이끌어주는미륵불인양,끄떡없는바위로든든한지표가되고있습니다.낮은자세로앉아비바람눈보라에도흔들리지않고,양심으로살고남을위해일하라는가르침을늘줄것만같아존경스럽습니다.
우리수필부산문학회,1963년여름부터시작하여2010년여름오늘,47년풍상에도춘풍추우끊임없이73권의회지를꽃피워낸역사위엔,선생님같이한결같은정성으로가꿔주신보람이있었기에가능했던것입니다.
선생님은1978년여름,우리<수필>제19호에폭설이내린날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올라가뉴욕시내의눈내리는야경을본감회를적은‘눈’을발표하신후,2005년1월제64호에큰병은없으나무언가생각대로움직여주지않는육신,고독을짤막하게술회하신‘나이들면서’를끝으로모두57편의글을발표해주셨습니다.제34호,43호에만빠졌을뿐27년동안1호에평균2편씩써주셨으니,참으로우리모임을사랑해주신성실의회원이셨습니다.2006년3월24일에건강상의이유로변호사사무실문을닫고문학활동도접는다고선언하셨는데,그동안이라도문안한번변변히못한허물무어라사뢰어변명할수없습니다.
제가선생님을처음뵌것은1988년3월이었으니까,선생님보다만10년늦게입회한셈입니다.처음뵌인상은솔직히좀무서운모습이었습니다.키가크고건장하신체구에역팔자(逆八字)의짙은눈썹이더욱위압적이었습니다.그러나바로인사를드리는순간저의오해는곧사라졌습니다.조용한음성,잔잔한미소가제마음을누그러지게했습니다.
그뒤우리회지의편집․교정을보아오는동안,꼼꼼한원고지글씨에배어나는선생님의글에는동시대에살았던온갖수난이생생하게그려졌고,부모님에대한효심,고향에대한그리움,그리고법관으로서의정의와양심이늘짙게풍겨났습니다.특히,동서양의문학작품은물론법관으로서갖춰야할철학,윤리를위해엄청난독서를끊임없이하고있었음을엿볼수있었습니다.
제가창원출생이고진해고교출신이기에이웃고성과마산고교관계사람들과는비교적많이알고지내는터인데,선생님에대해서는모두들칭찬과존경으로얘기해주어서,선생님과가까이하고있다는사실이큰영광이요자랑이었습니다.
한때우리회지의뒤에붙은회원명단에는회원들의태어난연도를적은적이있었습니다.형제같은우의를다지고친목을북돋우며,술자리의인사나건배제의,또술권하는순서를어림한다는제나름대로의속셈이있어서였습니다.그러나언제나꽃이고싶어하는여성회원들의강력한반대,호적이잘못됐다고다투시는(?)몇몇회원들때문에몇년만에중단했습니다.
그래서선생님의출생연도가1929년임을알았습니다.글에서보면,선생님의자당께서부처님앞100일기도로태어나셨고,기사(己巳)년그해는지독한흉년이었다하셨습니다.역사책에서보면,바깥으론2월에교황청이바티간시국(市國)으로되고,10월엔미국등경제대공황이일어났으며,안으로는11월에광주학생사건이일어났고,김좌진장군등이중국연안현에서항일운동을조직적으로펼쳐나갔던해였습니다.
1929년,지독한흉년과일제탄압때문이었던가!저희집안제적부엔분명‘소화4년(1929년)’출생으로돼있는저의맏형이있는데,한살젖먹이로이승을떠난것입니다.그래서선생님을바라보면늘부러움이있었습니다.제고교3학년말겨울에25살나이로장가도못가보고눈감은둘째형과함께이형들이살아있다면얼마나좋을까생각하면서공손히술잔을올렸습니다만,선생님께서는늘잔잔한미소로사양하고일찍술자리를뜨셨습니다.
1993년2학기개강때,제가학장으로발령받아한창자리를정돈하고있을때쯤이었습니다.전화로미리확인하신후얼마안있어,엄광산그높은산골짜기까지차를타고큰보따리하나를들고직접찾아오셨습니다.바로첫수필집<어머니의금반지>원고였습니다.그때싸우다시피기어코두고가신두둑한봉투는여태수없이교정봐주고받은사례비치곤너무많은액수였습니다.그날퍼뜩떠올린생각이바로‘겸손’이었습니다.‘익은벼이삭’의자세가무엇인가를느꼈습니다.그래서그뒤모임때마다술한잔대접하려고무척애썼으나번번이허사였습니다.
그뒤로이어진수필집<포샤판사와정선군수>,<아침산책을하면서>등선생님의글을비교적많이읽은저로서특별한감회가있습니다.
<어머니의금반지>서평으로우리<수필>회원이셨던고현석(玄石)김병규선생님께서는선생님의글을다음과같이간단히정리하셨습니다.더욱요약해봅니다.
‘효성이지극하다.가식이없고진솔하다.소박․쇄탈하다.유머가스며있다.문명비평을비롯하여법조인으로서의곧은자세가잘나타나있다.’등입니다.
선생님은세인이부러워하는서울대학교법과대학을졸업하여만인이우러러보는고등고시사법,행정양과를두루합격하셨습니다.그리하여전주지법판사를거쳐육군검찰부장,법무참모로군무를마쳤으며,진주․마산․대구등지의지원․지법판사,부장판사를지내고,대구고등법원부장판사를거친후법관생활을마무리하고1980년에변호사사무소를개업했습니다.그리고는이후부산변호사회회장,대한변호사회부회장을역임하셨으며,그동안여러문학단체에가입,끊임없이수필창작활동을해오셨습니다.세권의수필집에실린글만도모두189편이나됩니다.
재판정에서근엄한법복을입고재판을진행하실모습을생각하면,어딘지어울리지않을듯한소박한내용의수필들이대부분입니다.그만큼인간적이고유머가넘칩니다.실제로우리수필회원들의단체여행에어쩌다참가하실때,그관광버스안에서나누던걸쭉한성담,굳이성스러운얘기라며문득문득던지시는한마디로파안대소케했습니다.
대학재학중이었던6․25사변1주일전에복막염수술을받고치료중이었다했습니다.인민군이쳐들어와아픈몸을이끌고고향고성을향해23일동안의피란길,‘어머니의금반지’덕분에겨우생명을건질수있었던얘기,그리고국군패잔병으로몰려인민군한테총살당할뻔한아슬아슬했던순간,또거꾸로인민군으로오인받아미군전투기의기총사격을받았던일들,이모두가‘곡예인생’그것이었습니다.그러기에죽음을초탈한‘웃으며살수없을까’를늘생각하며살아왔고,‘변호사사다’해도얼마든지웃으며감내할수있었습니다.
선생님,80년의인생은결코짧은것이아닙니다.선생님같이훌륭하신분이라면오래오래사셔서우리국가사회에더많이공헌해주셨으면얼마나좋으랴는바람이지만,어디만사가그렇게되는것입니까.
그동안법관으로서의공명정대함이우리나라민주주의기틀을다지는데크게도와주셨으며,변호사로서억울한서민을대변해주신보람컸었습니다.그리고동창회,향우회등의중임을맡아오시는동안부드럽고화목한인간관계를원활하게접목시키는일에크게이바지해오셨습니다.그리고수필인으로서끼쳐놓으신아름다운향기는오랫동안우리들의가슴을적셔주실것입니다.
선생님,이제기쁜마음으로웃으면서떠나십시오.그래야만사모님께서도마음편히여생을가벼이보내실것이며,경기도의회의원으로있는큰아드님을비롯한자녀분들,언제나선생님의고결하신뜻받들어행복한삶을누릴수있을것입니다.
선생님,이제더는사양마시고저희가올리는술한잔기쁜마음으로받아,향불향긋한냄새맡으면서들어주십시오.저승에서의복락길이길이누리소서.
2010년4월30일
삼가먼재박홍길큰절올립니다.
<최선호선생대표작>
웃으며살수없을까
최선호
웃으며살수없을까?
며칠전인가,신문보도에의하면미국의어떤교수가웃는것은건강에매우좋다는학설을발표하였다고한다.
그이유는잘모르지만,웃는행동이건강에좋다는것은결론적으로수긍이간다.사람이울고태어나서상당한기간이경과한후에방긋웃기시작하고,소리내어웃기에는또한상당한시일이걸린다.그렇다면사람이어떤즐거움을느끼면서좋아하고,만족이절정에다다랐을때에순간적으로나타나는환희의표정과소리가웃음이아닌가하고내나름대로생각하여본다.
만일태아가깔깔웃으면서어머니의뱃속에서나온다면어머니는좋아하기보다기절할것이요,웃을만한때에웃지아니하면귀여운줄모를것이고모성애도줄어들것이다.어린애가방긋방긋웃을때의어머니의기쁨과즐거움은더할나위없다.그렇다면어린애의웃음이모성애의근원이된다고도말할수있다.
웃는다는것은인간존재의양식에서볼때자유의한표현이라고할수있다.억지로거짓웃음을하는경우를제외하고는웃음이란인간자유의실존으로서가장행복한상태가아닌가싶다.
이렇게보면웃음이란사람에게가장가치있는것인데도불구하고,우리의전통적인윤리감정은웃음을인륜도덕에반하는것처럼여기는풍조가다분히있다는것을부정할수없다.이것은엄격한유교사상에서,아랫사람이윗사람에대하여웃는다는것은상하질서유지에금이가서사회기강을문란하게하지나않을까하는우려심에서나온것이아닐까생각할수도있다.그렇다면세상사람들이격의없이웃고지낼때사람과사람과의자유는완전히보장되는것이아닐까하는소박한관념에젖어보기도한다.
그러므로윗사람이나아랫사람,있는사람이나없는사람이한자리에모여서웃고지낸다는것은그웃는순간에는모두완전히평등한것이고자유스러운것이다.
물론사람이웃는다는것은웃을수있는여건이되어있어야한다.웃을일이있어도,그사람에게무슨큰걱정이있다든가불안과공포에싸여있다면잘웃지못할것이다.이러한어려운상태에있으면서도잘웃는다는것은여간훌륭한사람이아니다.
아들이구속되어있는어머니의얼굴도여러갈래다.어떤이는눈물을머금고울고오는사람,어떤이는약간미소진얼굴로오는사람가지가지다.물론좋은일이아닐바에야좋은얼굴을할필요는없지만,그래도우는얼굴보다웃는얼굴이더좋아보인다.자연은있는그대로를우리에게나타낸다.자연은그대로있는것이아름답다.그러나사람은아무말없이그대로있는것보다웃는얼굴이더아름다워보인다.
사람의실존의대부분은다른사람과관계하는데있다.가깝게는가족과의관계,직장에서는상하동료관계,사회에서의동창선후배관계,아는사람과의만남,모르는사람과의만남,여러가지로다른사람과접촉하며살고있다.여행을하게되면우연히모르는사람과한자리에앉게된다.하잘것없는일에도남과시비하게되고다투게되는일도있다.그리고현대사회는심한경쟁속에서살고있다.
그리고우리들은하루라도돈을쓰지않고는살수없다.즉여러가지종류의계약을체결하여계약내용에따라살고있는것이다.
이와같이사람의생활은다른사람과의관계와연관속에서이루어지고있는데,웃으면서다른사람을대한다는것은사람과사람과의관계를가깝게하고부드럽게하고따뜻하게할것이다.우리가가게에물건을사러가도손님을보고웃는가게주인은손님을다시오게할것이다.
근대사회는기계가움직이는대로사람도움직인다.거대한기계속에서사람도기계의일부분이되고기계의부속품으로전락하고있다.이것이인간소외의원인이되고있다.심지어는기계자체가우리의많은생명을앗아가고있다.참으로놀라운일이다.초밥집에서로보트가아무리맛있는초밥을공급하더라도사람이만들어주는초밥의맛에비할수없을것이다.로보트는사람이아니고웃음이없기때문이다.사람이동물과다른것은여러가지점이있겠지만동물에게는웃음이없다는점이다.
아무리근엄한법정이라도재판장이가끔미소를띠어준다면그법정의분위기는달라질것이다.신부,목사의엄숙한설교에도가끔미소를교인들에게준다면하나님을더욱가까이할수있을것이다.
우리보다생활수준이높은선진국가를보면많이웃는것이생활화되어있다고할수있다.우리가보기에는별것아닌것을가지고파안대소한다.
텔레비전프로에도웃는시간이많이할애되고있다.그래서코미디언의인기는대단하다.코미디언은단순한연예인이아니라국민의건강을증진시키는의사에못지않은역할을하고있는것이다.
요사이은행이나식당에서는스마일운동이전개되고있다.얼굴을활짝펴고웃고있는스마일그림을가슴에달고있다.참으로좋은착상이다.웃는데무슨시설과돈이필요하겠는가.즐거운마음과봉사하는마음을가지게되면얼마든지웃을수있다.
그러나웃는것도하루아침에되는것이아니다.오랫동안어릴때부터생활화하여야한다.우리나라가세계미인대회에서진,선,미에들어가지못하는것은다른나라에비하여웃음이뒤떨어지기때문이다.어릴때부터웃는얼굴을생활화하여자연스럽게아름답게웃어야한다.점수를따기위하여갑자기웃으려니좋은점수가나올수없다.
살다가보면사이가안좋은사람도있고,보기싫은사람,만나기싫은사람,인상이좋지않은사람도있다.그러나만나서웃으면다풀리고좋아진다.사람은웃음으로써기분이좋아지기때문에크고작은감정은모두해소할수있는것이다.
우리들은어떤모임에자주나갈기회가있다.특히,계모임에는누구나자주나가서모이게된다.이럴때우리들은가장웃을기회가많다.
별것아닌것을화제에올려웃는다.다른사람의좀바보스러운태도에도웃기까지한다.웃는소재는여러가지가있다.우리들은웃기위하여남들과만나고있는지모른다.친근한동창끼리모이면웃으면서만나고웃으면서헤어진다.그래서기분이좋고심신이가벼워진다.우리의생활주변에웃을만한소재는얼마든지있다.만나서웃으면다가까워지고친해진다.
현대사회는인간소외의시대라고도하여웃음이없는시대라고한다.이런속에서인간본래의본성을되찾아야하고인간의주체성을회복하여야하는의미에서도건전한웃음이생활화되어야할것이다.
(1982.11.)
어머니의금반지
최선호
어머님은평소에늘금반지를끼고계셨다.나는무슨치레로끼는줄알았다.“어머니,집에계실때에는금반지를빼고계시지요.”라고말씀한적도있었다.그러나어머님은“위급할때에는금이제일이다.돈이나마찬가지다.돈은늘가지고다닐수없지만금반지는끼고만있으면되지않느냐.”고말씀하셨다.
나는어머니의이말씀이그때에는무슨말인지몰랐고예사로받아들였다.그러나6․25사변이터지자어머니의말씀이옳다는것이실증되었다.
나는6․25사변이나기1주일전에복막염으로서울명륜동소재수도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지금의고려대학교의과대학부속병원)에입원하였다.전보를받고어머님은별로준비없이훌쩍올라오셨다.
인민군이서울에쳐들어오기전날밤에들것에들려서어머니와함께명륜동하숙집으로옮겼다.하숙집에서인근병원의치료를받고있었는데고향으로내려갈기회만보고있었다.
인민군치하에있었으나,우리나라의화폐는여전히통용되고있었다.나는서울에서굶어죽는줄만알고있었다.하숙집에서1개월가량요양했는데,어머님은며칠후에내려가자고하셨다.여기에서앉아죽으나살려고바둥거리다가죽으나마찬가지가아니냐,죽더라도발버둥이라도쳐봐야되지않겠느냐는말씀이었다.
“어머니,돈이있어야움직일게아닙니까.돈없이어찌움직인단말씀입니까?”라고하자,어머님은“여기반지가있잖아.며칠있으면곧팔릴것이다.”라고말씀하셨다.
어머니의말씀이적중되어다음날아침에마대를어깨에걸친젊은이가불쑥들이닥쳤다.나는쌀을사러온줄알았으나금을사들이는사람이었고,그푸대안에는돈이잔뜩들어있었다.
어머님은금반지를풀어주고얼마를받았다.이돈으로노자를하여우리모자는23일만에고향땅을밟게되었다.어머님은당신께서끼고있는반지가어느때인가큰역할을할것이라고믿고계셨을것이다.어머님은배운것은없었으나,앞으로어떤급한일에부딪힐때에는끼고있는반지에의지하려고한예지(豫知)에감탄하지아니할수없다.
내가취직을한후에어머니에게금반지를해드렸다.어머님은옛날의금반지를회상하면서몹시기뻐하셨다.그러나6․25때서울에서팔아넘긴금반지와같은일은다시없을것이라고믿었던지,허술하게간수하여금반지를분실하셨다.어머님은6․25당시의어머님은아니었다.기억이흐려서어디에풀어놓았는지모르겠다는것이었다.
그뒤에나는어머니에게새금반지를해드렸는지알수없다.아마무관심속에서잊어버리고지나왔을것이다.
어머님은1년간의병고끝에금년4월에세상을떠나셨다.어머님이남기신유품은시계하나와돈7만원,반지하나였다.반지는금반지가아니었다.
며칠전나는35년전에복막염으로입원하였던그병원에갈기회가있었다.내가입원한4층병실은어느건물인가얼른알아차릴수가없었다.그러나문득어머님의금반지가머리를스쳐갔다.생전에금반지를하나더못해드린것이한이된다.그리고금반지를마련하여관에못넣어드린것이몹시후회스럽다.
(1985.12.)
어머니
최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