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74호-2010년 겨울
BY sanhasa ON 7. 15, 2015
2010년겨울
통권제74호
수필부산문학회
<머리말>서울G20정상회의를지켜보면서/회장姜中九7
<특집>고향천최해갑선생을기리며
▸최해갑선생약력9
▸최해갑선생추도문/선비정신에고개숙입니다/이원우10
▸최해갑선생대표작
⋅용두산(龍頭山)18
⋅육십령(六十嶺)마루턱에서22
⋅망향가(望鄕歌)28
<회원수필>
이해주개같이벌어서정승같이쓰자31
박송죽예와서되돌아보니35
성낙구섣달그믐날밤에39
장광자전에는보이지않던것들42
이몽희그눈동자뒤에너를묻어라46화면밖에서흘러가는강물51
이원우엄마의‘해운대엘레지’56
박홍길꼼짝할수있는자유61
전희준단연기(斷煙記)69
2010년겨울/통권제74호
안태경웃음소리75
이기태어제는어제고오늘은오늘78
박희선요전법82
이병수도를넘은언어질서파괴87경술국치100주년역사는말한다91
전정식업(業)93
허정수필부산문학회상98원과각102
하창식이원우선생님의콘서트에다녀와서105
강중구강고집의복어국사랑109우유니(Uyuni)소금평원113
윤용흠거룩한분노117침묵122
윤옥자삼베이불126몽돌밭의물소리131
황다연그리움의길그매화135
허현숙꽃이야기140
손수영티푸아나티푸144
허정림열정기(熱情記)150불꽃처럼154
최홍석공중화장실에서156네가지고통(四苦)161
황원준잊혀진여인166
정철규퇴근길170
정인조여백의문학과인생173부산문협역사의행간읽기176
김훈노란국화꽃앞에서181
황선영사랑의매185
오기환가을이저만치가고190아!대한민국195
남기욱한국의혼199
최헌돌담에피어나는가을햇살204나르키소스의봄208
배기형내가겪은6․25211
2010년겨울/통권제74호
배병채가수최백호216담배220
성종화역지사지(易地思之)224
정은영젓가락(箸)227
권춘애눈물머금은호수232
문경희맛236
<기고>
우아지젊은날의초상241내고향은함양247
<신인상>
강영린어떤탄생252우산씌워드릴라고얘255
윤인숙도돌이표없는인생259영진이의항구262
신인상작품심사평/267
우리모임소식/269
수필부산문학회회칙/274
회원주소록/277
서울G20정상회의를지켜보면서
회장姜中九
2010년11월11일밤,서울G20정상회의가드디어그막을올렸다.오후7시국립중앙박물관종소리가울리자끼리끼리모여서환담을나누던주요20개국정상과국제기구대표들이만찬장으로모여들었다.
먼저서울G20정상회의의장인이명박대통령이인사말을했다.이어서버락오바마미국대통령이발언을하고뒤이어후진타오중국국가주석등앉은순서대로돌아가면서발언을했다.
참으로가슴뿌듯한일이다.100년전경술국치로나라를잃고일제의압박을받아오던우리민족이제2차세계대전종결로해방이되었다.그러나38선이그어지고6·25전쟁이일어나남과북이서로총부리를맞대고싸우다가삼천리금수강산은초토화되었고유엔군의도움으로간신히나라를지켰다.
그당시우리나라는1인당국민소득이57달러에불과해서세계에서가장가난한나라중의하나로외국의원조를받아서나라를지탱해가고있었다.(우리나라는50년동안현재가치로600억달러원조를받고1995년에피원조국을벗어났다.)
하지만우리는좌절하지않고허리띠를졸라매고경제개발을시작하여길을닦고공장을지으면서광부와간호사,건설역군들을해외에보내서외화를벌어왔다.그러기를반세기만에세계11위의경제대국으로발전하여지난해에는세계개발원조위원회(DAC)에가입함으로써원조를받던나라에서유일하게주는나라가되었고,오늘세계60억인류가지켜보는가운데주요20개국정상회의를개최하고있으니얼마나가슴뿌듯한일인가.
그러나그동안경제개발을하면서물질만강조한나머지우리사회는물질만능주의가팽배하게되었다.이제우리가해야할일은경제에비해상대적으로지체되어있는정신문화를일깨우는일이다.그것은우리문인들이앞장서야할것이고더구나우리생활과직결되는글을쓰는수필가들의책임은더욱크다.
거기에다<수필>은수필동인지로서우리나라에서가장오랜역사를지니고있으니우리수필부산문학회회원들은긍지를가지고백의민족의혼이담긴글과우리의미풍양속을지켜가는글,올바른국민정신을일깨우는글을많이써서우리민족의정신문화를높여나가는데힘써야할것이다.
푸른바다에하얀파도가밀려오는동해바다를표지화로그려주신부산미술계의원로김봉진(金奉鎭)화백님에게감사를드리고새로입회한우아지님과신인상을받은강영린,윤인숙님에게도환영의박수를보낸다.
∙∙∙고향천최해갑선생을기리며
<약력>
∙1924년부산시북구화명동출생
∙1936년구포초등학교2학년입학(만12세)
∙1940년동래중학교(현동래고등학교)입학
∙1945년동교졸업,초등학교교사자격고시검정시험합격
∙1945년화명초등학교교사
∙1948년금정중학교교사
∙1951년동래세무서서기,주사
∙1954년고등학교국어교원자격고시검정시험합격
∙1955년부산상업고등학교교사
∙1962년김해농업고등학교교사
∙1965년혜화여자고등학교교사
∙1968년첫수필집<꿈과구름과의대화>출판
∙1970년동래고등학교교사
∙1973년박문하선생추천으로<수필>부산동인회가입
∙1975년부산진고등학교교사
∙1976년제2수필집<곡예인생>출판
∙1980년중앙여자고등학교교사
∙1984년제3수필집<六十嶺고개>출판
∙1985년동래고등학교교사
∙1989년동교에퇴임과동시에이사벨여자고등학교교사
∙1991년양산외국어학교교사
∙1992년교직사임후모라우신아파트에서은거
∙1993년대덕여자고등학교교사2년근무
∙2009년별세
<사회및문단활동>
*부산문인협회회원*수필부산동인*낙동문화원고문
*낙동문화예술인협회고문*우봉문학상수상(1997년)
<최해갑선생추도문>
선비정신에고개숙입니다
이원우
향천최해갑선생님!
저는‘대천리’라는마을을결코잊을수없습니다.제가교감끝자락2년동안을,그마을을끼고있는신설(新設)대천리초등학교에서보냈기때문입니다.그시절이그리워가끔씩마을을한바퀴도는게버릇이었습니다.지금도그럴때가드문드문있습니다.대천리,다시말해대천(실제는대청이라고불려지고있습니다만)부락은향천선생님의고향입니다.
부임하고보니‘대천리초등학교’라는학교이름때문에,우여곡절을겪었다는소문이파다했습니다.대천리(大川里),이21세기에마을리(里)자가학교이름에들어가다니당치도않은일이라는거지요.교육위원들까지가세하여다르게짓자고했으나,대대로이어서마을을지키며살아오신어른들의호통에결국촌스러운(?)이이름으로학교가문을열었습니다.
그런데저는그학교가참좋았습니다.출퇴근하는길목에정‘우’자‘상’자를쓰시는분과윤‘희’자‘수’자를쓰시는분의자택이있었지요,가끔거리에서뵙고허리를굽히거나,자택으로찾아큰절을드리면두어른이어찌나반가워하시는지….무심결에던지시는한마디말씀에서저는학교를경영하는교장을보좌하는지혜를얻기도했습니다.너무세속적인표현입니다만,학교안팎에서약간불미스러운일이생겨도,두어른께서수습혹은무마시켜주셨지요.
그러나대천리라고하면누구보다향천선생님이머리에떠올랐지요.거기서자라학업을마치신교육계원로,일찍이전국최초의동인지를내면서출범한<수필>부산에서자주뵈었던문단선배님,그리고북구문화예술인협회를이끌어주신정신적기둥이셨기때문입니다.
향천선생님!저승에서도이일만은기억하시리라믿습니다.
제가파평윤씨가대천리마을에정착한지14대쯤된다는이야기를듣고고집을하나피웠지요.400년이넘는다는얘기아니겠습니까?아무리새로아파트단지가들어서도,뿌리와전통이살아숨쉬는그런분위기가학교교육의덕목중하나가되어야한다.거기에일조를하자!
그래교가를만드는데우리민요가락,그러니까6/8박자로작곡하도록직원들에게공모를했습니다.그무렵낙동문화예술인협회에서향천선생님을만나뵙고그개요를말씀드렸더니,제등을두드리시며좋은일하셨다고칭찬하셨습니다.교가를부르며덩실덩실춤을추는기상천외의조회도그래서생겼지요.
그로부터제법많은세월이흘렀습니다.
지금도대천리마을입구에가면향천선생님께서손수비문을지으신대천리마을비석이서있습니다.그걸훑어보기만해도마을의연혁정도는알수있습니다.400년넘게터를잡고파평윤(尹)씨,창원정(丁)씨,경주최(崔)씨,안동권(權)씨등의후손들이살아오고있다는자체만해도경의를표할만합니다.서로내외척사이라는이들네성씨가그야말로수백년미풍양속을지키고상부상조하며지내온보기드문마을,대천리야말로전통이살아숨쉬고있었습니다.훌륭한분들도많이배출되었지않습니까?
그래제가그대천리를끼고있는대천리초등학교에근무했다는게영광이라는생각을지울수가없습니다.
그제저는정우상(丁宇相)선생님을모시고점심식사를하였습니다.그자리에서저는향천선생님의이모저모에대해여쭈어보았습니다.제머릿속에남아있는선생님의모습은여태껏한교육자+문인정도이셨는데,정우상선생님의말씀이끝나고나서죄인인양고개를들수없었습니다.선생님께서이세상에남기신흔적이너무나크다는것을몰라왔다는자괴지심(自愧之心)때문이지요.내친김에저희에게감동을주기에충분한몇가지를여기일화식으로적어봅니다.
선생님께서는겸손하기이를데없는일생을보내셨습니다.한번도자기자랑을하신적이없다고정우상선생님께서말씀하셨습니다.나이일흔이가까워도,교만이줄어들기미가보이지않는제일상을빗대어던지시는말씀같아서아찔했습니다.제게는충격이기도했습니다.
정우상선생님께서는어려운역경을딛고일어서서서울대학교를졸업하고자수성가하신분이아니십니까?그분은향천선생님의칭찬을입에침이마르도록하셨습니다.어린시절부터명석한두뇌로공부를워낙잘하여줄곧반장을맡았으며,특히3학년때일본사람인여자담임선생님으로부터큰사랑을받으셨다는말씀도하셨습니다.나쁜일이라곤손에도대지않는습관은한의사이신할아버지의영향을많이받으셨다고요.
그래서였을까요?선생님께선담배나술을입에대지않으셨고,오직학업에만전념하셨습니다.당시대구사범이영남에서유일한정식교원양성학교였으나,지방에서는입학이하늘의별따기라동래중학교에진학하셨습니다.졸업후선생님께서는무보수로공민학교에서학생들을가르치셨고,그뒤에세무서에잠시근무하신걸제외하면일생을공․사립중등학교교사로지내셨습니다.
여기서빠뜨릴수없고저희가교훈으로삼아야할게바로선생님의개척정신입니다.당시만해도엄두를제대로못낼영어공부에매진,그것도독학으로쌓은실력이웬만한공문서따위는번역이가능한수준에까지다다르시게됩니다.그러나선생님께선그영어를팽개치고(?),고등학교국어과교사자격검정고시에도전,합격의영예를누리셨습니다.
정우상선생님께서이윽고,이런기회가아니면영원히묻힐뻔한비밀(?)하나를들먹이신겁니다.여기에그여담(?)을그대로적습니다.향천선생님의일생을좌우한바로대중가요가사에대한연구입니다.
청년시절선생님께선당시유행하던대중가요,목포의눈물,눈물젖은두만강,연락선은떠난다,감격시대,꽃마차,귀국선,대지의항구,복지만리,맹꽁이타령,무명초항구,바다의교향시,백마야가자,번지없는주막,비내리는고모령,사의찬미,선창,어머님전상서,울고넘는박달재,짝사랑,잘있거라항구야,항구의무명초,해조곡등의가사를깨알처럼적어서외곤하셨습니다.
거짓말같지만거기에서쌓은우리말실력이,선생님으로하여금중등학교국어과교사자격검정고시장으로발길을돌리게하셨다면?그사실에저는선생님의열정에그저탄사와박수를보낼따름입니다.물론이중에는지금도친일가요로분류되는곡대지의항구,복지만리등이있습니다만….
참으로안타깝습니다.만약선생님께서생존해계시다면,지금잊혀져가는옛노래의가사를재현할수있을것이기때문입니다.대중가요에대해편린이나마주워담는게제취미인데,그런의미에서선생님생전에매달리지못한게한입니다.
선생님께서는평생돈과는담을쌓으셨습니다.단한번도부정한재물에손을대지않으셨으니,요즘같으면촌지로부터자유로운,진정한교육자로사셨습니다.부끄럽지만저는43년동안교직생활을하면서돈에깨끗했노라하는자부심을갖지못합니다.제가선생님을그런면에서1/10이라도본받을수있었으면얼마나좋겠습니까?돌이켜보면꼭정신득선생님과같으신분을가까이모시고있으면서모르고있었다는후회가앞섭니다.
선생님의청백리정신은다른곳에서도나타났습니다.‘세무서원이바로세무서장’이던시절,선생님께서는서민이교통비로호주머니에넣어주는돈을마다하셨습니다.대신떼돈을버는사람에게는중과세,법규와엄격한공적인잣대를갖다대어세금을매기셨으니,세월을거꾸로돌릴수있다면,오늘날세무공무원들의귀감내지사표(덕행만으로도)가되셨을겁니다.
향천선생님!
선생님의호주머니는항상비어있었지요?그러면서도결코궁색하게보이지않으셨던것은그꼿꼿한신체와마음의자세때문이었습니다.술,담배도안하셨습니다.그런점에서보면또정신득선생님을떠올리게됩니다.향천선생님의약주는소주몇잔정도이셨지만,그것도드물었습니다.다만바둑을유달리좋아하셔서기원에는자주드나드셨지요.저는그것마저못하니말씀드릴자격이없지만,그‘보루(堡壘)’가올곧게세상을사신선비에게주는하늘의은혜였습니다.
여기서빠뜨릴수없는게있습니다.선생님께서남기신가장큰흔적인지도모를우리수필부산문학회의<수필>에옥고를싣기시작하신일입니다.1963년에전국에서처음으로출범한<수필>,그17호(75년11월5일)에‘가리회,삼천포로가다’라는옥고를주시기시작하여,42호(90년12월24일)까지햇수로치면장장15년세월을우리동인회에몸담으셨습니다.26권동인지가발행되는동안선생님께서는거의빠짐없이필자이셨지요.그대표작을별도로싣습니다만,선생님의인품이그대로드러나는향기높은글들이었습니다.
수필의특징중하나가미학(美學)이라면,선생님이야말로삶자체가아름다움이었음에저희는작품과의사이에등호를긋습니다.거기에다진솔을더하셨으니저희는옷깃을여밉니다.수필의향기는글재주가풍기는게아님도절감합니다.
그리운향천선생님!앞서정우상선생님의말씀그대로향천선생님이야말로일생을선비정신으로일관하셨습니다.
다시한번외람되게말씀드립니다.선생님께선저같은장삼이사는일시적으로라도지닐수없는겸손을안고,일생을보내셨습니다.비록높은벼슬과는담을쌓으셨지만,일상을품격으로보내셨습니다.
교직에서후학을가르치면서학업이나인격도야를당신의가슴으로가르치셨습니다.오늘날‘욱대기는가르침’이마치교육의진수인듯한풍토,저는개탄할자격도없지만만약선생님께서생존해계시다면몇마디귀기울여들었을것입니다.
선생님께선돈을탐내지않으면서도궁하다는표시도내지않으셨습니다.남에게폐를끼치는일도없으셨습니다.
무엇보다우리나라수필문학의모태라할수있는<수필>에오랫동안머무르고계셨다는데거듭경의를표해올립니다.저같은아둔패기는문재도부족하여선생님의진정한모습을그려내기가무척이나버겁습니다.
생전에조식(粗食)한그릇제대로대접해올리지못한점송구스럽습니다.저승에가서우리동인들을뵙게되면선생님께서기억하시는‘목포의눈물’3절이나불러올리겠습니다.
깊은밤조각달은흘러가는데/어찌타옛상처가새로워진다/못오실임이면마음마저떠날것을…
<최해갑선생대표작>
용두산(龍頭山)
최해갑
용두산,옛날에는‘부산(釜山)’이라고하면어느시골에가더라도영도(影島)다리가올라가는것과함께모르는사람이없을정도로유명했을뿐만아니라,그네들의부산에대한확고한이미지인동시에부산구경의자랑거리로삼았다.
그래서시골사람들이부산에내려온다면맨먼저찾는곳이바로그괴물같은다리드는것을구경하고다음에용두산에올라가바다쪽을구경하는순서로되어있었다.그러나지금은그영도다리가고정되어올라가지않으니그네들의부산에대한이미지가흐리게된대신에,용두산에는더괴물같은‘부산탑(釜山塔)’이새로생겨시골사람들에게부산의대명사로안겨주게되어다행한일이라할수있다.
부산탑에올라가서는부산시가를한눈에볼수있고또멀리부산교외까지도전망할수있을뿐만아니라건축기술이고도로발달한현대기술로보면아무렇지도않게생각될는지는모르겠지마는건축기술에문외한이볼때는아무래도신기하고괴물같이보이지않을수없다.밑에서올려쳐다볼때나그기둥같은좁은속에있는엘리베이터(승강기)를타고있으면절로꼭대기까지실어다주는것이나또는상상외에로넓은상층의전망대에서밑을내려다볼때등골이오싹해지고길에다니는사람들이마치기어다니는개미같이보이고자동차들은어린애들이방에서굴리는장난감같이보이니이것으로그없어진영도다리에못지않게부산에대한인상이깊게남을것이다.
어느나라없이큰도시에는공원이없는나라는없다.오히려큰도시일수록거기에는유명한공원들이반드시있는것같다.우리부산에만해도용두산공원을비롯하여금강공원,성지공원,해운대동백섬,영도태종대등몇개있지마는우리서민들에게가장효용가치가있는것은용두산공원이다.
그것은첫째도시한복판에위치하고있다는입지조건은말할것도없지마는특히다른공원보다깨끗하고조용해서좋고,또복잡한광복동남포동을거닐다가몸이피로하면손쉽게가까운이공원에올라가서먼저그교묘하게돌고있는꽃시계에다내가20여년동안차고있는이제게으름을피워하루한번씩꼭다른시계에맞추어야안심할수있는골동품같은헌시계를맞추어놓을수있어좋고,발걸음을옮겨바다쪽으로눈을돌려멀리오륙도너머수평선을바라보고크고작은배들이드나드는광경을보고있으면피곤한몸을잊을수있어더욱좋다.
오대양(五大洋)육대주(六大州)로뻗는저수평선으로각박한현세를잠시잊어버리고갈매기처럼자유의몸이되어가볍게훨훨날아멀리멀리미지(未知)의세계,돌아오지않는세계로떠나버렸으면하는생각에잠기어마음만이라도저검은연기를토하면서사라져가는외항선에담아보기도해서좋다.
이런상념에사로잡혀있다가무심결에옆의벤치에젊은남녀가다정스럽게붙어앉아밀어(密語)를속삭이는것을보고서야비로소내혼자의몰골을처량하게생각해보기도한다.이젊은이들의낭만과대조적으로저건너나무숲그늘에는이제여생이얼마남지않은늙은노인네들의군상이눈에비쳐올때얼핏어느잡지에서본미국어느공원을연상하게한다.미국은노인들의지옥이라고한다는데,그지옥속에서도공원만은유일한낙원이라고하지않는가!
이래서공원은평화의상징인비둘기와더불어어린이들의즐거운놀이터가되고,청춘남녀의아베크장소가되어주고또늙은이들에게는죽음을기다리는대기소로공존(共存)지대이기도하다.
이렇게우리부산사람들뿐만아니라시골사람,아니온국민들에게유명한공원으로다알고있는이용두산이한때는수난(受難)을당한적도있었다.저이승만독재자가이용두산을개인소유화하려고이름까지바꾸어자기의호(號)인‘우남(雩南)’을따서‘우남공원’이라부르게하여독재정치를모르는순진한어린아이들에게까지강제로애칭하게했는데,다행히등기하기직전에독재의아성이무너져서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다시‘용두산’으로부르게된것은글자그대로용왕(龍王)님의덕택이라고생각한다.
제살고있는고장을자랑하지않는사람이없겠지마는우리부산은서울처럼그렇게춥지도않고또대구(大邱)처럼산사람을찔듯이덥지도않는좋은기후에다가자갈치의생선회에소주한잔걸치는맛이또한우리부산의명물이니살기좋은우리부산의자랑을글로쓰지않을수없다.
(제2수필집<곡예인생(曲藝人生)>중에서)
육십령(六十嶺)마루턱에서
최해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