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홋카이도의 중심지 삿포로(札幌)

34,홋카이도의중심지삿포로(札幌)

오타루(小樽)에서버스를타고찾아간삿포로(札幌)는홋카이도의도청소재지로옛이름은에조(蝦夷)였으며아이누족이살고있었는데메이지2년(1869년)에홋카이도(北海道)를개척사하면서건설한계획도시이다.

그래서오도리공원(大通公園)을중심으로펼쳐진삿포로시가지는바둑판처럼질서가정연하고1886년도청이설치되면서홋카이도의행정중심지가되었다.시가지중심부를동서로관통하는너비105m의큰길에는화단이이어지고,개척공로자의동상과기념비와텔레비전탑등이있어서오도리공원이라부른다.

삿포로는1972년동계올림픽대회개최를계기로지하철이완공되고세이칸(靑函)터널개통과신지토세(新千歲)공항개항및고속도로의정비등으로교통의요충지가되었다.비속에찾은마루야마공원(円山公園)은시가지서쪽해발226m의둥근산에자리하고있었는데울창한원시림은천연기념물로지정되어있었다.거기에있는1,700그루의벚나무가만발하는봄날이면온천지가꽃동산을이루어서일본에서손꼽히는벚꽃관광지로유명하다고하지만철이지난지금은을씨년스럽기만하다.

100년이넘는화백나무숲속으로난산책로를따라가니홋카이도신궁北海道神宮)이숲속에숨어있었다.홋카이도신궁은메이지천왕의명령으로1869년에세우고홋카이도의수호신과개척신을모시는곳이라고하지만그것은메이지가홋카이도를편입하고개척거점을삿포로로결정한해이고보면일종의영역표시같은것이었다.뿐만아니라이신궁은당시러시아의세력으로부터일본을지킨다는의미에서정문이북동쪽을향하고있으니더욱의미심장한것이아닌가.

신궁입구에는홋카이도개척관이었던시마요시타케(島義勇)의동상이서있었다.그는이마루야마산에올라서동쪽의이시카리평야를바라보면서삿포로건설을구상했다고한다.

신궁에는비가내리는데도결혼사진을촬영하는젊은이들이있었다.일본의전통예복을입은신랑신부가사진을촬영하고있는모습은보는이의마음을흐뭇하게했다.

다음에찾아간곳은홋카이도개척의거점이던삿포로구도청사(北海道廳日本廳舍)였다.1888년에미국의매사츄세츠주의회의사당을모델로지은네오바로크양식의이건물은내부에장관과지사의집무실이있고,북해도역사와문서를모아놓은도립문서관이있었다.

붉은벽돌로건물을지어서‘아까렝가’라는애칭으로불리고있는이건물은홋카이도개척시대의상징적인존재로지금은홋카이도개척기념관으로이용되고있어서홋카이도역사를한눈에볼수있었다.

거기에는120만년전부터현재까지의자료를4,000점이나전시하고있었는데북쪽의대지,아이누문화의성립,옛북해도시절,근대의시작,넓혀져가는대지,불황으로부터전쟁까지,전후의북해도,새로운북해도로나누어전시하고있었다.역대도지사들의사진도하얀벽높은곳에나란히결어놓았고,

홋카이도시계탑(時計臺)은일본의중요한문화재로정식명칭은‘구삿포로농업학교(홋카이도대학전신)연무장(演武場)’으로1878년에세운것이다.홋카이도의개척지도자양성을위해설립한이학교는학생들의심신을단련하는연무장으로1876년에부임한클라크박사가계획했으나그의죽음으로후임교장이지은것인데120년이지난지금까지도한치의오차도없어정확하게시간을가리키고있었다.내부에는자료관으로시계탑의역사와건설당시의사진등을전시하고있고.“소년이여야망을가져라(Bois,beambitious)”는우리에게도널리알려진클라크박사의명언이었다.

저녁식사는즈와이가니(대게)를무제한공급해준다는식당에서했다.하지만먹어보니대게는살도없고맛도없어서제물에지쳐서세번으로끝내고말았지만그래도대게를싫컷먹어본것은사실이었다.오늘의숙소는특급인노보텔삿포로호텔915호실이었다.앞에는나카지마공원이자리하고있고삿포로시가지가한눈에내려다보이는호텔은전망이참으로좋았다.내일아침에는나카지마공원을산책하고오도리공원(大通公園)도돌아보아냐하겠다.

GiovanniMarradi-MyLove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