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要約) 소현세자에 의하여 천주교가 전래 되었다는 설(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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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約)
소현세자에 의하여 천주교가 전래 되었다는 설(說)

(*필자 주: 지난 번의 글-조선 땅의 천주교 전래(傳來)-에 대한 보충 설명)

소현세자(昭顯世子)에 관한 것은,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소현세자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는
이종(李倧)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본명은 이왕(李汪)이고, 효종(봉림대군)의 친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다.

그가 11살 때인 1623년에, 아버지 李倧이 인조반정에 성공함으로서,
李倧이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仁祖, 1592-1649, 재위기간 1623-1649)가 되었고,
아들인 그는 원자(元子- 임금의 맏아들)가 되었다.
[보통의 경우,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장남을 바로 형식상 元子로 삼았다가 세자(世子) 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 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것은, 1623년 4월11일(음력 3월 12일)에,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李倧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그 때의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이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실리(實利)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인 임해군을 사사(賜死)했으며,
광해군 5년(1613년)에는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바로 이것을 명분 삼아서 서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이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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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 1627년, 인조 5년, 음력 1월 – 그 해 3월 3일)

후금이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로, 3만명의 군대로 침입한 전쟁.
후금은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서 서둘러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합의 내용은 “명나라 연호를 쓰지 말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지낼 것’ 등등 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왕자대신 종실인 원창군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 하였다.

[그후, 후금(後金)이 세력이 커지면서 1632년에는
‘형제의 맹(盟)’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歲幣)를 요구했다.
조선은 경제적인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 나라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君臣의 義’로 전환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에서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고 보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묘호란이 발발(勃發) 한지 10년째인 1636년,
후금은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使臣)을 조선에 보내서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臣事- 신하가 되어서 섬김)를 강조하고 요구 하였다.
결국, 그해 12월에 청나라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후, 59일만에 항복을 결심하고,
정축년 2월 24일에,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것을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한다.

[淸나라 군대는, 그 때, 仁祖에게 항복의식으로 반합(飯哈)을 요구했고,
삼전도에 항복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반합이라는 것은 마치 장례를 치르듯이
‘임금의 두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棺)과 함께 항복 하는 것’ 이다.
결국, 서로간의 타협으로 인하여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였는데,
이것은 세번 절할 때 마다 세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이었다.
다만, 당시 仁祖는 항복(降伏)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성(城)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하성(下城)이라고 표현했기에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은 명나라(1368-1644)에서
청나라(1616-1912)로 바뀌는 과정 중에 있었던 전쟁인 셈인데,
전쟁의 기간은 짧았으나, 조선(朝鮮)에 입힌 피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원래 淸나라는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후금(後金)을 기반으로 한,
즉 만주족 여진족을 주축으로한 국가였기에,
명나라나 조선에서는 오랑캐라고 낮추어 보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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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 때에,
仁祖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릇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강화도가 먼저 함락이 되었다.)
1637년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仁祖와 함께 성밖으로 나왔고,
仁祖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서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게 되자,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로 가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에 억류가 되었다가,
7년이 지난 후인 1644년 11월에 석방되었고,
3개월 후인 1645년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한지 2달이 지난, 5월 21일(음력 4월 26일)에,
갑자기 독살(毒殺)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정식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소현세자는 아버지 仁祖와의 갈등으로 독살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인데…
仁祖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 했고,
仁祖가 죽을 때가지 단 한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없다.

참고 사항:
소현세자의 부인(민회빈 강씨)도,1646년 정월에
무고(誣告)- 仁祖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별당에 유치 되었다가,
그해 4월 30일(음력 3월 15일)에 사약(賜藥)을 내려 죽이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도 모두 처형을 당하였다.
강빈의 죽음 이후,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지는데,
1648년에 첫째 아들 석철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아들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은 작은 아버지인 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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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에,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에게서 서구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받은 서양물품, 성상(聖像), 천주교 서적 등등을 조선으로 가져 오면서,
조선 땅에 천주교가 전래(傳來)되게 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소현세자와 친교를 나누고, 소현세자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아담 샬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서 1623년 북경에 들어왔다.
1627-30년 그가 서안에 파견되었던 시기를 제외한다면, 그는 북경에만 머물렀던 사람이다.

그는 1622년 부터 1658년 까지의 중국 천주교에 관련된 일들을,
회고록(Historica Relatio) 속에 적어 놓았다.

그 회고록 속에 나오는 내용 중에
“만주인들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 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자기는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역법, 서양물품, 聖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한 조선 왕이 서신을 보내
‘천주교의 교리를 널리 알리고 싶으니
선교사를 일행 속에 포함 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잘못된 예식을 할까 두려워 聖像은 그냥 돌려 보낸다고 했다!고 한다.
자기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 왕의 환관 중 세례성사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서
그 聖像을 다시 돌려 보내자,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를 대동시켜 조선에 들여 보내려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아 조선에 들어갈 시기를 놓쳤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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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는 것들-
서양물품, 성상(聖像), 천주교 서적 등등-은 정확하게 확인된 적이 없기에,
“소현세자로 인하여 조선 땅에 천주교가 전래(傳來) 되었다!“는 주장 역시
일종의 설(說)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 들여질 뿐이다.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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