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要約) 정하상(丁夏祥) + 천당은 있어야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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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約)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 (*천당은 있어야 되겠어…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조선 천주교에서 ‘신앙의 선구자’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벽(李蘗, 1754-1786)인데,
그는 1783년(정조 8년)에 북경에 갈 기회가 생긴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
“十字架등 천주교 상징물과 천주교 서적등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여,
이승훈이 1784년에 북경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神父에게서
천주교 영세(領洗)를 받고,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십자가, 교리서, 묵주,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가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대세(代洗)를 주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다.
소위 ‘신부(神父)없는 전례- 천주교 사제(司祭)가 없는 상태에서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에서 평신도로서 ‘학문의 선구자요, 실질적인 지도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이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

정하상은, 아버지 정약종과 어머니 유소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丁若鍾)은 주교요지라는 책을 저술한 사람인데,
천주교를 믿음으로 해서 1801년(신유박해)에
그의 아들 정철상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정약종은 조선 실학자인 茶山 정약용(1762-1836)의 형(兄)이기에,
정약용은 정하상의 삼촌이 된다. 정약용에게는 3명의 형이 있는데,
그의 형 중의 하나인 정약전은 자산어보(물고기 생태에 관한 책)의 저자다.]

정하상이, 6살 때인 1801년에,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丁哲祥)이 함께 참수형을 받았고
모든 재산은 몰수 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정약용의 집으로 가서 살아야만 되었다.

그 후, 그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헌신(獻身)하기로 결심을 하고…
천주교리와 학문을 익히기 위하여,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귀양 가 있는 조동섬(趙東暹)을 찾아가
수년간 학덕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는,
신앙의 박해를 받아서 여기 저기 흩어진 천주교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조직화 하는 한편
평신도로서 ‘학문의 선구자요, 실질적인 종교 지도자’로 살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천주교 성직자(聖職者)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서,
성직자의 파견을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무려 9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쓴 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자청하여,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 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을 하였다.

정하상은 조선 천주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密使)로 하여,
북경 천주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하지만, 北京 천주교 주교를 상대로 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는 교황(敎皇)에게 직접 청원하기로 그 방법을 바꾸게 되었으니…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대 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작성하여 올리게 된다.

“저희들은 교황 성하께 2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 하옵는데,
이 2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 하나이다.
이 2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신부님을 파견 하시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

청원문의 내용 자체는 매우 짧은 것이었으나,
성직자의 파견 뿐만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원하는 함축적인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 청원문(請願文)은 북경 主敎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소재 교황청 포교성 동양경리부로 접수가 되었고,
포교성의 움피에레스(Umpierres) 神父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傳敎 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 전교 지원이 있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 자(字)로,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하여,
조선 교구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게 된다.

이러한 일을 해낸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선 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것이다.
[그만치, 그는 매우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다.]

둘째, 정하상은 조선 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Maubant(모방)신부, 1836년에 Chastan(샤스탕)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Imbert(엥베르) 주교를 영입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천주교회가 주교와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셋째, 그는 엥베르 주교로 부터 속성 신학교육(神學校育)을 받았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信德)에
탄복한 엥베르 주교가 수난과 박해 하에 놓여 있는 조선 천주교회에
필요한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 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엥베르 주교도 순교하게 되었고,
또한 정하상도 순교하게 되면서, 그러한 희망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넷째,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에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자의 단문의 글이지만, 주장이 아주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소책자다.]

다섯째, 정하상은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천주(天主)에 대한 신앙을 실증하였다.
정하상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
그 때의 그의 나이 44세 였다.

그리고,
꼭 첨부해 놓아야만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 유소사(세실리아, 1761-1839)도 그해 11월 23일에 순교하였고,
그의 누이 동생인 정정혜(엘리사벳, 1797-1839) 도 그해 12월 29일에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덧붙인 말이 있었으니,

“나는 천당(天堂)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순교한 사람들이 들어가서
위로(慰勞)와 보상(補償)을 받고 또한 영생(永生)을 살 수 있다!는
‘그런 天堂’ 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

“자기 스스로만 가지고 있다!는 믿음,
단지 입으로만 떠드는 그런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된 시련(試鍊)이나 시험(試驗)을 받아보지 못한 믿음은
사실상 믿음이 아닙니다!”
“…???”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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