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화단에 지난주만 해도 없던 개나리와 목련꽃이 거짓말처럼 활짝 피었습니다.
이성부 시인은 ‘봄’이란 시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는 말로 겨울 동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을 반갑게 맞습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고 했을까요. 봄꽃을 보는 제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내친김에 시인들이 포착한 봄의 표정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황동규 시인은 ‘봄 나이테’에서 시어를 붓 삼아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봄의 풍경화를 그립니다. ‘짐승처럼 사방에서 다가오는 푸른 언덕들/ 나비들 새들 바람자락들이/ 여기 날고 저기 뛰어내린다/ …/ 나이테들이 터지네/ 몸속에서 몸들이 터지고 있다.’ 정희성 시인의 ‘봄날’은 겨울과는 다른 봄 햇살을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 놓은 듯’이라 했습니다. 한분순 시인에게 봄에 피어나는 새싹은 ‘달려온 봄바람 앞/ 멀미하는 무늬’입니다.
이재무 시인은 봄비에 혀가 있다고 합니다. 좀 야합니다.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 초록을 충동질한다/’더니, 봄비의 혀가 몸을 핥으면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고 관능적으로 썼습니다.
신석정·장만영 시인은 동서지간입니다. 제 대학 친구 중에 두 시인의 처손녀가 있는데 황해도 살던 장 시인이 전북 부안에 사는 신 시인과 동서가 된 사연을 노래한 ‘전라도 길’이란 시를 보여줬습니다. 시인은 봄에 이 길을 걸었군요. 달고 쓰고 애틋한 삶의 꽃향기가 그윽한 작품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읽어 드리고 싶어 전문을 싣습니다.
‘이 길은 내 나이 젊었을 때/ 존경하는 시인 한 분을 뵈우러/ 난생 처음으로 찾아 왔던 길이다.// 이 길은 그 시인의 처제되는/ 아리따운 한 처녀를 아내 삼고 싶어/ 천리길 주름잡아 오가던 길이다.// 이 길은 머리에 보따리 이고/ 올망이 졸망이 어린것들 손 끌며/ 빗발 치는 포탄 속을 아내가 피란 내려오던 길이다.// 이 길은 살아 있다는 그들을 만나러/ 추풍령 저쪽 경상도 땅에서/ 헐레벌떡 내가 뒤쫓아 왔던 길이다.// 오늘 오랜만에 이 길을 간다./ 오월 훈풍에 흰 머리카락 날리며 간다./ 솔바람 소리 들으며 간다.// 나의 반생과 같이 긴, 그리고/ 눈물겹도록 정 깊은 길이다,/ 이 전라도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