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엊그제는초파일,부처님오신날이다.

나의친정아버님도이날에이세상에오셨다.

아버지는어찌나착하셨던지,아버지의생신이사월초파일이라고하면

아버지를아는모든분들은’그래서그양반이그리착하시구먼…’하셨다.

그러나착하다는것이칭찬만은아닐수도있는것이다.

아버지가돌아가시고나서장례때도와주신아버지친구분을인사차찾아뵈었을때그분은

"그렇게착하기만해서,,장사속을그렇게알려줘도끝내돈을못벌고…"

하시며혀를끌끌차셨다.

그래도아버지는우리식구굶기신적도없으셨고학교등록금을늦게주신적도없으셨다.

가족을위하여최선을다하신분이셨다.

나의초등학교2,3학년때쯤아버지는석산양말공장이라는데를다니셨다고기억된다.

자주대구로출장을다니셨고늦은밤중에기차에서내리셔서는빈손으로오지않으시고

과자나과일같은것을사가지고오셨다.

군것질이라고는모르고엄마가해주는밥만먹고살던우리는늦게까지자지않으면서

아버지가오시기를기다리곤했는데

어느아주추운겨울밤에사오신식빵(그당시에는쇼빵이라고했고윗부분이불룩불룩올라온)이

어찌나맛이있었던지지금까지도그맛을잊지못하겠다.

이때를생각하면젊은아버지가어린자식들을위하여출장비를아껴과자같은것을사오셨겠구나

싶은게어미새가먹이를물어다새끼들먹이는정경이그려지곤한다.

그리고아버지는곧그직장을고만두신것같다.

4학년때담임선생님이

"아버지는무엇하시니?"하고물으셔서

"회사다니셔요"

"무슨회사?"

"몰라요"했던기억이남아있으니말이다.

그이후에아버지의직업에대한기억은없는데학교에내는가정환경조사서에는

항상"회사원"이라고써주셨다.

중학교부터의기억으로는누런봉투에둘둘말은돈뭉치를주머니에서꺼내

장롱바닥깊숙이넣으시며엄마에게

"애껴써"하셨고조금지나서는두분이"그돈이다나갔네…"하고이야기하시던생각이난다.

그이후로도우리집경제는그렇게운영이되었는데내가커서생각하니

아버지는회사를그만두시고중개업같은것을하신것같은데

위에서말한그친구분의말대로너무도착해서장사속을그렇게알려줘도

수수료를많이붙이지도못하고돈도못벌으신것아닌가싶다.

그러면서우리들은쑥쑥자라고등학교로대학교로차례차례진학을하니얼마나많은돈이필요했을것인가?

그래도아버지는우리등록금이나기성회비같은것을꼭날짜맞추어주셨다.

아버지의노고에엎드려절하고싶다.

아버지는그당시로서는부잣집아이들만다닌다는일류국민학교를나오셨지만

가정형편이기우는바람에중학교로진학을하지못하셨다고한다.

그래서국민학교로학력을끝났으나친구분들은내노라하는사회적지위를갖고있는분이많았으니

마음속에서내아이들에게는공부를끝까지시키리라결심하셨을것이다.

내가고3이되었을때,엄마는고등학교졸업하면어디취직해서집안이나도우라고했지만

아버지는대학합격하면보내준다고열심히해보라고하셨다.

그리하여나를’이대나온여자’로만드셨다.

또세째동생이중학입시에1,2차를다실패하고울고불고할때,눈물까지글썽이시면서

3차라도들어가서열심히공부하면좋은

고등학교갈수있다고다독여과외도시키시고학원도보내시더니

정말좋은고등학교에입학시키셨다.

이동생이일찍세상을떠나서모두슬퍼하는가운데동생의맏동서가조시를낭독하였는데

‘이제는그리도그리워하던친정아버님만나보시게…"하여동생잃은슬픔과

아버지의사랑을생각하며많이울었었다.

그러나아버지가베푸신사랑에비하면당신은너무도받으신것이없으셨다.

맏이인내가24살때뇌졸증으로불편한생활을6개월정도하시다

다시재발하여돌아가셨다.

24살부터12살까지의1남4녀가주루룩서있는모습을보고한숨을안쉬는분이없으셨다.

그저주기만하시고가신아버지.

대세받으셔서요셉이되신아버지.

그당시처음개발되던용인천주교묘지에모시었는데,이종사촌오빠가장지를보고다녀와서

"도무지어디가어딘지모르겠는데묘자리는돌아가신분의덕대로자리잡는다고해서

그말만믿고그냥좋아보이는대로정했어요"했었다.

과연아버지는착하시고덕이많으셔서그런지지금가보면참으로좋은자리에계신다.

그곳에아버지를두고산을내려올때에이먼곳에어찌아버지를묻고가나하고

울기도많이울었는데이제는용인이지척이되었다.

이렇게풍요로운세상이되었는데,,,,

딸이나아들이맛있는것사드리는것,좋은곳구경시켜드리는것,좋은옷사드리는것도

못보시고가셨다.

불쌍한아버지!

아버지…고맙고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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