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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rise Sunset

오래간만에 블로그를 찾았습니다.

추석 연휴중 당직이었던 날에

한 시간 가량을 끄적거리다가

실수로 딜레이트 키를 잘못 눌러서

몽땅 날려버리는 불운을 겪은 후에는

한동안 블로그라면 꼴도 보기 싫었답니다.

조금 전까지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오래 전 사놓고는 책장 구석에 처박아놓은 채 잊어버렸던

비디오 테입 하나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고는

세운 무릎을 두 팔로 껴안은 채

침대 끄트머리에 오도카니 앉아

100분 가량 멍하니 화면에만 눈을 고정시켜놓고 있었더랬지요.

96년 어느 화창한 봄날의 일요일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요.

병아리빛 봄 햇살이 하도 따사로워 산책을 나섰다가

봄 기운에 들떠 충동적으로 그대로 시내까지 걸어가서는

혼자 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여주인공 셀린느 역을 맡은 줄리 델피의 투명하도록 흰 피부가 인상적이었고

둘이 불어로짤막하게 대화하는 장면에서,

영화관에 있었던 고등학생들 몇 명이 ‘Comment allez- vous?’, ‘Je vais bien’등

고등학교 불어교과서에등장하는 쉬운 문장들이 나오자 큰 소리로 따라하는 바람에

영화관이 웃음바다가 됐었던 기억은 어렴풋이나마 납니다.

영화를 본지 며칠 안 돼 문구점에서

우연히 이 영화 포스터로 만든 엽서를 발견하고는

사들고 와서 책상 앞에 붙여놓았던 기억도 나는군요.

공부가 하기 싫을 때면

이 포스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대학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꿈을 꾸곤 했었지요.

여행중 기차간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관통하는 사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보고는

14시간동안오스트리아 빈이라는낯선 공간을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며 사랑에 빠져들다가 해가 뜨자 기약없이 이별한다는 이 이야기는

당시 입시공부에 찌든고등학생에게뿐만 아니라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렸지만저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인연’이라든가 ‘운명같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포 선라이즈에서처럼"이라고 관용구처럼 말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추석때 만난 사촌오빠도,

얼마 전오래간만에 얼굴을 본 대학 선배도

"비포 선라이즈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영화"라며

"특히나 대사가 마음을 파고든다"고들 하더군요.

이 영화를 두번째로 본 것은 아마도 2000년이었을 겁니다.

우연히 TV를 틀었다가 방영해주는 것을보았는데요,

당시에는’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저렇게 섬세하게도잡아내다니!’하면서

감탄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남녀의 미묘한 눈빛, 표정, 동작, 화제, 말의 뉘앙스 등이

환히 읽혔던 것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보다 제가 많이 자랐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본 비디오 테입은 그 해 겨울에

집앞 비디오 대여점이 문을 닫으면서비디오 테입들을 염가에 내놓았을 때

냉큼 달려가거금 7000원을 주고 샀었던 겁니다.

소장하고싶은 욕심에 사기만 해 놓고

한 번도 틀어보지 않았던 비디오테입을오늘에서야 다시 꺼내본 이유는

‘비포 선라이즈’의 속편이 곧국내 개봉한다는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속편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지난 4월쯤이라

그 때부터 오매불망국내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국내에서도 개봉한다는군요.

일단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부산 국제 영화제가 끝나면 개봉할 모양입니다.

‘비포 선라이즈’가 제작된 게 지난 95년이니

꼭 9년만이네요.

‘비포 선라이즈’의 끝부분에서

두 주인공은 6개월 후 다시 만나기로 하지만

그 약속이 아마도 이루어지지 않나봐요.

속편인 ‘비포 선셋’은 둘의 이야기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남자주인공 제시(에단 호크)가

파리에 소설 홍보차 왔다가 셀린느(줄리 델피)와 재회하게 되면서

1시간 30분을 함께 보내는 동안의 이야기랍니다.

영화가 개봉하면 즉시 보러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잊고 있었던 전편의 이야기를 상기시키기 위해

마음 먹고 세번째로 4년만에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보는 기분은

씁쓸했습니다.

예전에 영화를 보았을 때의 설렘과 가슴떨림,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동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요?

예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영화의 장면장면들,

예전에는 그토록 가슴에 스며들었던 대사의 구절구절들이,

그저 밍숭밍숭하게 눈 앞을 흘러가고,

귓가를 스쳐갈 뿐이었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발견했었지만

그마저도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어요.

오늘의 영화감상은 단지 한 마디로 요약되더군요.

‘그런거지, 뭐.’

조금의 경이감도 포함되어있지 않은,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문장인가요.

4년전 영화를 보았을 때는

4년전보다 자랐다는 걸 느끼고 의기양양했었는데

오늘 영화를 보고 나서는

4년 전보다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마음을 촉촉히 적신 채 잠자리에 들어 아름다운 꿈을 꾸겠다는,

영화를 보기 전에 했었던 기대가

몽땅 물 건너가 버린 밤에,

삭막해졌음을 서글퍼하면서

이렇게 끄적이고 있습니다.

9년만에 재회하는 두 연인이

예전 못지 않게 신선하고 인상적인 이야기로

메말라빠진 제 감성에 다시 불을 지펴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비포 선셋’의 한 장면이랍니다.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이 둘의 얼굴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깊게 느껴집니다.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sophiaram로 이사합니다.

11 Comments

  1. 김재은

    2004년 10월 3일 at 4:18 오후

    나도 줄리델피랑 에단 호크의 유치한 전화놀이(?)를 따라하던 풋풋한 시절이 있었는데..-.-;; 비포선셋..기대되는 영화..   

  2. 동동

    2004년 10월 3일 at 10:06 오후

    난 인연이라거나 운명같은 만남을 말하라면 첨밀밀같은이라고 생각하는데, ‘해뜨기 전’은 안 봐서.. 함 봐야겠군..    

  3. Hansa

    2004년 10월 3일 at 11:09 오후

    글 잘 읽었습니다.
    글에 마음이 실려있습니다.   

  4. 김상호

    2004년 10월 4일 at 12:02 오전

    보그에서 쥴리 델피 사진을 오려 고딩 교과서를 포장했었는데, 그때는 모델사진으로 교과서 포장하는게 유행이었어요. 이제는 아줌마 티도 보이는 것 같군요. 그래도 뭐 여전히 하얀 피부는 매력적이네요. 에단 호크의 턱선도 여전히 섹시하고….기대된다. 이 영화 개봉하는 줄 몰랐어요.   

  5. 곽아람

    2004년 10월 4일 at 11:09 오전

    재은씨 나도 그 전화놀이 정말 기억에 남아요. 상호씨. 저도 한 때 모델 사진으로 교과서 포장하곤 했었더랬지요. 동동, 한사님, 댓글 감사합니다. 영화 꼭 보세요^^   

  6. 벙어리

    2004년 10월 4일 at 4:53 오후

    30대 중반이라고 자부(?)하는데, 세월의 흔적이 안느껴지는 건…. 아마도 철이 덜 들었나 봅니다.
       

  7. 이자연

    2004년 10월 6일 at 3:21 오전

    해뜨기 전(Before Sunrise)에는 서로의 주름살도, 흉허물도 잘 안 보이고
    그저 모든 게 설레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한낮의 태양 아래선 관념보다 현실이 두드러지는 법..
    그런 의미에서 10년 세월을 지나보내고도 사랑을 이어가는(if ever)
    이 욕심많은 속편의 제목은 ‘After Sunrise’가 더 적확하지 않을까?
    줄리 델피 독특해서 매력있는 얼굴이었는데 쌍커풀수술했다는 설이 있더군. -_-
    그럼에도 보고 싶은 작품..   

  8. Cato

    2004년 10월 6일 at 2:16 오후

    저는 Before Sunset의 잔잔한 감동이 좋더군요. 끌부분에서 줄리 델피가 약간 주접 떠는 모습도 (스포일러로 곽 기자, 이 기자께서 속편을 보실 때 느낄 감응을 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놓치지 마시길 바라고요. 전 편도 그랬지만 뜨거운(?) 장면 하나 없이 어찌 그렇게 사랑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신기하기도 했구요.   

  9. 곽아람

    2004년 10월 6일 at 11:47 오후

    벙어리님, 아직도 마음이 젊으셔서 그래요.^^ 자연선배^^ 쌍꺼풀 수술 해도 줄리델피는 아름답더라구요. Cato님. 눈여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10. Eric Kim

    2004년 10월 7일 at 7:02 오전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한번 보고 싶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화를 비디오로 볼 수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건강하세요   

  11. 곽아람

    2004년 10월 7일 at 2:30 오후

    Eric님, 아마도, 어딘가에, 비디오는 있을 겁니다. 역시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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