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의 힘 – 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해밀턴 시계들

얼마전 제87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시각효과상 하나를 받는 데 그쳤다. 미국 잔치라곤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데 ‘그쳤다’는 표현이 심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개봉 전부터 불러일으킨 관심에 비하면 평범한 성적표다.

물리학자 킵 손과의 협업, 각본에 참여한 감독 동생이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일화, 과학을 정교하게 시각화한 블랙홀,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스토리…. 얘깃거리가 너무 많아 다른 것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인터스텔라는 리얼리티를 위해 소품과 장치에도 공들이고 신경쓴 영화다. 흙먼지 구름을 컴퓨터그래픽 없이 톱밥가루를 날려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여러 기사에 소개됐다. 이 외에 패션, 특히 시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등장한 두 개의 시계에 주목했을 것이다.

시계는 영화에서 간접광고(PPL)하기 좋은 아이템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촌극을 다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나 ‘째깍째깍 시계 소리에 속이 타들어가는 순간’은 나오기 마련이고, 이 때 주인공이 들여다보는 시계를 클로즈업하면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007시리즈의 오메가, 본 시리즈의 태그호이어 링크, 트랜스포터 시리즈의 파네라이, 그리고 최근 킹스맨의 BREMONT 같은 시계들이 그런 경우다. 인터스텔라는 약간 다른데, 시계가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소품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묻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결정적 장치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시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쿠퍼(매튜 매커너히)의 시계, 다른 하나는 쿠퍼가 우주로 떠나면서 딸 머피(매킨지 포이/제시카 차스테인)에게 남긴 시계다. 두 시계 모두 해밀턴(Hamilton)이 만들었다. 쿠퍼의 시계는 시판중인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Khaki Pilot Day-Date)’, 머피의 시계는 영화를 위해 별도 제작한 제품이다.

우선, 왜 해밀턴이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의 소품을 담당했던 리치 크레머(Ritchie Kremer)의 인터뷰에 힌트가 나온다. “농부이면서 엔지니어, 파일럿이기도 한 쿠퍼는 전형적인(classic) 미국인이다. 그런 그에게 딱 맞는 브랜드가 해밀턴”이었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스위스가 장악한 기계식 시계 시장의 이름있는 브랜드들 중에서 거의 유일한 ‘미제’다. 호화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무뚝뚝하되 실용적인 군용(軍用) 시계를 주력으로 한다는 점도 미국 브랜드답고, 실제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시계를 공급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미국의 정신에 스위스의 시계 기술을 결합했다”는 것이 해밀턴이 스스로 설명하는 정체성이다.

우주·항공 장르로 분류되는 시계는 많지만 쿠퍼라는 캐릭터에 어울릴 시계는 이것이더라는 얘기다. 시골에서 픽업트럭 타고 다니는 쿠퍼가 서랍에서 IWC나 브라이틀링을 꺼내 차고 우주로 떠나는 장면은 확실히 상상이 잘 안 된다.

약간 아쉽다고 해야 하나, 의아한 부분은 쿠퍼가 찬 시계가 자동(automatic) 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쿠퍼가 우주에 갈 때도 시계를 찼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우주에서 저 시계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기억나지 않는데, 우주를 배경으로 한데다 ‘중력’에 따라 변하는 ‘시간’을 소재로 삼은 영화인 만큼 수동(manual) 시계가 나왔다면 좀더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주로 다시 떠나야 한다고 머피를 설득하는 쿠퍼(왼쪽). 쿠퍼가 차고 있는 시계는 해밀턴의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 모델이다.

우주로  떠나야 한다고 머피를 설득하는 쿠퍼(왼쪽). 쿠퍼가 차고 있는 시계는 해밀턴의 ‘카키 파일럿 데이데이트’ 모델이다.

(블로그는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지가 신문처럼 명확하지 않은데… 시계에 대해 별로 관심가지지 않은 분들도 계실 터이니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차는 시계는 크게 전지를 사용하는 쿼츠, 전지 없이 태엽을 감는 기계식으로 나뉜다. 기계식은 다시 용두를 돌려서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수동/manual과, 손목에 차고 움직이면 중력에 의해 시계 안의 ‘로터’라는 추가 돌면서 태엽이 감기는 자동/automatic으로 분류한다. 자동 시계는 중력의 힘으로 태엽을 감기 때문에 지구와 중력이 다른 곳에 가면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버즈 올드린이 달에 차고 갔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시계는 손으로 용두를 돌려야 하는 수동식이었다.)

해밀턴에서 특별 제작한 Murph Watch.

해밀턴에서 특별 제작한 Murph Watch.

머피의 시계는 내용상 쿠퍼의 시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쿠퍼가 시공을 초월해 우주 공간에서 보낸 메시지의 수신기 역할을 이 시계가 담당한다. 베젤은 유광으로 만들고 케이스의 나머지 부분은 브러시로 무광 처리하는 등 커스텀 시계만의 디테일이 있지만 카키를 베이스로 해 해밀턴 특유의 약간 레트로한 분위기도 살아 있다.

이 시계 역시 자동(automatic)이어서, 쿠퍼가 우주로 떠난 뒤 머피가 차고 다니지 않아 이내 멈춰버린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Interstellar Special Edition’ 같은 이름을 달아서 판매해도 될 것 같은데(오메가의 경우 007에디션을 적극적으로 발매하고 있다), 해밀턴이 원래 한정판 발매에 소극적인 것인지 인터스텔라가 아카데미에서 기대만큼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판매를 하고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존 제품군에 없는 시계를 왜 별도 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행 해밀턴의 카키 시리즈는 날짜창이 있는 제품들만 판매되고 있는데, 수신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날짜창 같은 ‘방해요소’를 다이얼에서 제외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바늘이 모르스 부호를 표현하면서 움직이는 장면 역시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않고 시계 안에 작은 모터를 넣어서 구현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시계의 부품 구성과 내부 장치가 다른 만큼 시/분/초침뿐인 다이얼 구성이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Murph Watch' 제작을 위한 스케치(왼쪽)와 영화에 등장한 머피의 시계.

‘Murph Watch’ 제작을 위한 스케치(왼쪽)와 영화에 등장한 머피의 시계.

극장 예매 앱을 들여다보니 인터스텔라를 관람한 게 작년 11월7일, 개봉 다음날이었다. 분명 훌륭한 영화지만 떠들썩한(한국에서 유독 심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야심작’에는 아무래도 높은 잣대를 들이대게 되는 것인지, 일반적인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한 놀라움은 ‘인셉션’이 나았고 영화적 연출의 힘에서는 ‘다크 나이트’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물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건 러닝타임이 중간쯤 지났을 때 이미 포기했고…

그래도 인터스텔라가 몰고 온 ‘과학 붐’에 반발한 일부 관람객들처럼 “과학 어쩌고 하더니 결국 질질짜는 가족 얘기”라고만 해버리는 건 너무 가혹하다. 인터스텔라는 디테일이 강한 영화다. 아무도 실제로 못 본 블랙홀이라고 해서 대충 그리지 않고 물리학 이론의 토대 위에서 재현하려는 노력 못지않게, 주인공이 차는 손목시계 하나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는 세심함도 중요하다. 아이디어가 갑자기 작품이 되진 않는다.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이런 디테일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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