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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닦으면서

새 팀에 와서 일주일, 좀 긴장도 되고 신경도 쓰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구두를 꺼내 닦았다. 델리케이트 크림과 왁스만 쓰는 간단한 작업이다. 그래도 구두 코를 헝겊으로 문지르며 광택이 돌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구두를 닦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닌 모양인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을 종종 본다. 우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76년작 ‘택시 드라이버’가 생각난다. 처음엔 이 영화가 패션의 관점에서 언급된다면 필드재킷 ‘M65’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지금 더 생각나는 건 ‘사회의 쓰레기’를 쓸어버리기에 앞서 트래비스가 정성껏 부츠를 닦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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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의 심경에 결정적 변화가 오는 건 벳시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갔다가 퇴짜를 맞으면서부터다. 이때부터 트래비스는 밀매상에게서 총을 사들이고 운동을 하며 체력을 키운다.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직전 보여주는 몇 가지 행동이 있는데, 마른 꽃(아마도 벳시에게 주려던)을 세면대에 버리기, 부츠 닦기 등등이다.

그의 결심을 보여주는 마지막 모습은 머리를 모히칸 스타일로 밀어버린 것이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도 연합군 병사들이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머리를 이렇게 깎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머리 스타일이 용기를 북돋워준다고 믿는 어떤 공통의 코드가 있는 모양이다. 백인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던 모히칸 족의 머리 모양이라서 그런 것인지? A특공대에서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B.A.가 마지막에 보여준 반전 역시 이 모히칸 헤어스타일이었다.

Band of Brothers 'D Day' 에피소드에서 리브갓이 동료들의 머리를 모히칸 스타일로 깎아주는 모습.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는 리브갓 등이 1명당 15센트씩 받고 머리를 깎아 준 것으로 나온다. 오른쪽은 모히칸 머리를 한 트래비스.

Band of Brothers ‘D Day’ 에피소드에서 리브갓이 동료들의 머리를 모히칸 스타일로 깎아주는 모습.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는 리브갓 등이 1명당 15센트씩 받고 머리를 깎아 준 것으로 나온다. 오른쪽은 모히칸 머리를 한 트래비스.

다시 구두 얘기로 돌아와 보면, 트래비스는 오른손에 헝겊을 말아 쥐고 구두약에 불을 붙여 녹여가며 신발을 닦는다. 영화에서 트래비스는 옷에 가상의 부대인 ‘King Kong Company’ 패치가 붙어있을 뿐 어느 군별(軍別)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이 장면을 보고 트래비스가 해병대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외국에는 있는 모양이다. 헝겊을 말아 쥐는 방식이나 구두약을 불로 녹이는 방법이 해병대 스타일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덕중의 덕이 양덕이라고는 해도 그걸 보고 진짜 알 수 있는지 약간 의심스럽긴 하다.

부츠는 그냥 신발이 아니고 대검을 꽂는 중요한 도구다. ‘거사’에 나서기 전 정성스레 부츠를 닦는 트래비스의 마음은 전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무기를 손질하는 병사와도 같았을 것이다.

얼마전 올레TV에 무료로 나와 보기 시작했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도 주인공이 구두를 닦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장면이 나온다. 데이빗 핀처와 케빈 스페이시의 만남으로 시작 전부터 화제였던 이 드라마는 미 의회의 실력자 프랜시스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워싱턴 정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오바마 대통령도 팬이라니 리얼리티가 매우 뛰어난 모양이다.

프랜시스는 교육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교사 노조의 지도자인 친구와 등을 돌리게 된다. 둘은 TV 토론에도 나서는데, 노련한 달변가인 프랜시스는 승리를 자신하다가 한 방 먹고 만다.

낙심해 집으로 돌아온 프랜시스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리 좀 식히겠다며 자리를 뜨는데, 이어지는 장면이 무릎에 구두를 끼고 열심히 닦는 모습이었다. 프랜시스는 평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총싸움 게임도 하고, 아내가 사다준 요상한 운동기구에서 땀도 흘리지만 그 순간에 택한 방법은 구두 닦기였다.

유력 정치인인 프랜시스는 의회에 드나드는 구두닦이 아저씨(진짜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는 물론 모른다)에게 구두 손질을 맡길 정도의 금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저 순간에는 직접 구두를 닦았다. 이 장면에서 프랜시스는 검은 구두가 가득 꽂힌 신발장 앞에 앉아 있는데, 몇 켤레 꺼내서 한참 문지르는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구두 닦기에는 왜 이런 효과가 있을까? 나름대로 생각해본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구두 닦기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운동이나 집안 일로 몸을 움직이면서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요리며 이런저런 DIY, 정원 가꾸기처럼 요즘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많이 한다는 활동들도 따지고 보면 사무실 책상에서 잠시 떠나 몸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구두 닦기는 저런 일들과 달리 같은 동작의 일정한 반복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 동작도 안 하거나, 불규칙한 동작을 하는 것에 비해 잡념을 쫓기에 유리하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작더라도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비슷하게 구두 손질하는 장면이 나오는 다른 영화가 있었는지 떠올려보려는데 잘 생각이 안난다. 주말에는 오랜만에 구두를 다 꺼내서 끈을 풀고 닦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