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시작한다.
유리로된티팟아래로한방울씩검은액체가떨어지고있다.
어느새햇빛이환하게퍼져있는집안에맛있는향기가그윽하게퍼진다.
조용하고도넉넉한분위기다.
싱크대안에두개의오목한그릇을놓는다.
한그릇에는손을집어넣고서데지않을정도로뜨거운물을받아놓고
다른한그릇에는찬물을받고그속에아이스큐를몇개넣는다.
먼저뜨거운물에오른손을집어넣고숫자를세기시작한다.
하나둘셋…
일분정도있으라고하니까백까지헤아리면되겠지.
그런다음에다시찬물에오른손을담근다.
찬물에는30초정도있으라고했으니까이번에는오십까지센다.
그렇게10여분동안반복하면서하루에몇번씩해주라고했다.
내오른손목의앞쪽뼈는부러졌었는데
그옆의다른뼈의주변인대가많이상해있는상태였었다.
기브스를4주만에떼어내고서야그런줄알았고
이제물리치료를받으러다닌지꼭한달되었다.
그동안일주일에두번씩물리치료를받으러다녔는데
어저께물리치료사가말했다.
“이제통증이서서히없어지고있으니까
하루에도몇번씩찬물과뜨거운물로번갈아가면서마사지하면많은도움이됩니다.”
왼손으로는머그에들어있는커피를마시면서
오른손을뜨거운물에넣었다다시찬물에담갔다한다.
부엌에서서하니까바로앞의창문을통해서옆집의정원이보인다.
잘손질해놓은잔디가아침햇살에싱그럽다.
노오란색과자주색의팬지,빨간색과보라색의버베나바구니.
이미길게늘어져한껏멋을부리고있는흰색의패투니아.
샛빨간사루비아.
또여러가지색깔의패랭이꽃……
그꽃들이아침햇볕에빤짝빤짝빛나며나에게웃어보인다.
눈은창밖으로향한채연속동작으로손운동을하면서
다시그때일을떠올린다.
내가그렇게말하지않았더라면……
그래서수지가중간에포기하지않았더라면……
그래도나는넘어졌을까?
수지는작년에대학교를졸업하고
지금은초등학교에서교편을잡고있는내둘째딸이다.
우린지난오월말에산악회를쫓아서
3박4일일정으로테네시주에있는스모키마운틴에갔었다.
마지막등반날에일행을두팀으로나누었는데,
처음부터16마일을걸어서정상을가기를원하는A팀과
중간까지버스를타고가서5마일정도만걷고정상까지가는B팀으로갈랐다.
수지는처음부터B팀으로가기를원했지만
내가A팀을원했기때문에나를따라같이걷게되었다.
"애야.우리가뭐관광왔니?한번끝까지걸어보자……”
A팀은모두12명이었고여자는우리둘뿐이었다.
미국의국립공원인스모키마운틴은그자체만으로도제주도보다크고
따라서trail도200개가넘는다고했다.
셀수없는산봉우리와빽빽하게들어선나무들로
굉장한위력을뽐내고있었다.
한시간정도걷고10분정도쉬는식으로해서
거의7시간을걸었었고목표와는2마일을남겨두고있었다.
나무에기대어휴식을하고있었을때,
나는옆일행에게무심히말했었다.
“저는요.나중에죽게되면묻히지않고화장을했으면좋겠어요.
그리고그재를내가다니고있는성당의뒤띁나무숲에뿌려졌으면해요.
내가이곳에사는동안제일많이머무른데가
집과회사를빼면그곳이거든요.
묻혀보았자이다음에제아이들이멀리가서살게됨
오히려짐이될것같기도하구요……”
거기까지이야기를하고고개를돌리다가수지의눈과마주쳤다.
곤혹스러워하던그의눈과붉어진얼굴표정을보는순간아차싶었다.
깊은산속에서불어오던산바람이
내가슴을시원하게몰아붙이고가서그랬나…
땀을닦으며올려보던새파란하늘위에떠돌던구름이무심하게보여서그랬을까.
아니면고요한산속에서인간의존재가하잖게느껴져서였나,
사방에흩뿌려져피어있는
이름도알수없는꽃들의향기에취해서내속내를보이게했을까……
하지만그것은평소의나의바램이기도하고
이미나의아이들에게도알려준바있었다.
언제가는남편으로부터
“그런말을미리해서아이들을슬프게만들필요는없잖은가?”하는말을들었을때
“사고가많은이곳에서내가언제어떻게될지알수없잖아요..
이제어린애들이아닌데알고있을것은알아야지요.”하고대답한적도있었다.
어쨌든그리고나서수지는가버렸다.
마침발에이상이생겨더이상걷기가힘든다른남자대원과같이
도중탈락자를예비해서자동차가뒤따르며기다리는쪽으로가서
B팀과합류를하러갔다.
나의사고는수지가그렇게떠난지30분도안되어서일어났다.
가버린수지의아픈맘을헤아리다가그랬는지
아니면긴산행으로지쳐서다리가풀려서였는지
발을헛디뎌앞으로넘어지는바람에오른손을땅에심하게부딪쳤다.
순식간에부어오르기시작하는오른손목을보고뼈가부러진것같다면서
일행중한명이내목에두르고있었던밴대아나와
마침뒤따르던J일보사진기자의카메라가죽줄로
내가사용하고있던2개의스틱을내오른팔에고정시켜묶어주었다.
나중에알게되었지만이훌륭한응급조치덕분에
부러진손목뼈가엇갈리지않고그대로있어주어서
기브스를한달밖에하지않아도되었다.
병원에서응급조치를끝내고칠흑같이어두운산속을한시간반정도달려서
일행이있는곳으로갔다.
나를병원에데리고가느라고정상을포기한아틀란타에서온대원과
시카고에서같이떠난다른대원에대한미안함때문에
차안에서아무말도할수가없었다.
그들은이만하기를다행이라며오히려날위로했지만
마치커다란잘못을저지른사람처럼난고개를들수가없었다.
자정이넘은시간이었음에도캠프화이어를크게피어놓고
그때까지기다리고있던일행들틈속에서
수지가달려오더니나를꼭껴안았다.
병원을찾아올수도없었고,산속이라전화까지터지지않았으니
그동안얼마나딸애가맘을졸였을까.
간헐적으로찾아오던손목의통증보다도수지의여린마음을더걱정했던터라
나도다치지않은왼손으로딸의등을토닥거려주었다.
“엄마.미안해.엄마가그런말해서속상해서그냥왔던거야……”
어두움속에서도나는수지의눈에번지는물기를보았다.
“아냐.엄마가발을잘못디뎌서넘어진거야.
미안해.수지야.사람들있는데서그런말해서…….”
커피가식었다.
이제손운동도그만하면된것같다.
그래.넘어지려고해서넘어진것뿐이야.
머그에새로운커피를따르면서
수지에게E-mail을보내야겠다고생각한다.
수지는여름방학동안MainState에서썸머캠프를이끌고있어서전화연락이안된다.
노트북은들고가서그동안도몇번소식은주고받았었다.
수지야.사랑해.
엄마가하늘만큼땅만큼너를사랑한단다……하고편지를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