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시골 고등학교의 우승컵

6,25는나에게무엇인가?

이런질문을나에게묻는다면나는서슴치않고대답하는말이있다.

"6,25는내일생에지워질수없는그림자를남긴전젱이다"라고.

625가일어나기전에태어나초등학교2학년에재학중이던때에터진6.25전쟁은나와우리형제들의삶의틀을

바꾸어놓은사건이기때문이다.

6,25전쟁은동해안의조용하고평범한시골인강릉에서백부님댁에있는라디오를통해서듣고이어서신작로를

분주히오가는차량에청년대들이죽창을들고타고가던일,이어서멀리서들리는포탄소리들이나의최초기

억으로생생하다.

이어서머리속은6,25몇일후의피난과,1,4후퇴로인한피난,아버님의사망,어머님의봇짐장사,찰떡장사,신문

(조선일보)배달,휴학,복학,등으로점철되다가마침내군에몸담아호국의전선에있다가전역을하였으니가히

내인생의전부가그그늘속에있었고아직그속에있다고해서조금도과장이아니다.

6.25전쟁60주년을하루지난이아침,평소와다름없는일상을맞아나의인생에서가장영향을많이준모교

(지난3월1일"강릉중앙고등학교"로개칭된구강릉농공고)의홈페이지를찾았는데"모교와6,25"의비사가소

개되어읽어보았다.그것이바로6,25그날에서울운동장에서있은학도호국단체육대회의축구결승전이야기

와거기에소개된이야기다.비화또는비사라고도해야겠지만이글을보면서그시절을그사건속에서견디어

낸선배들의모습을보는것같아뭉클한감동을받았다.

이글을읽고난후6,25이후의나의역정을되돌아보았다,그것은모교에다닐때어쩔수없이나의기질속에

는나도모르게일제강점기시절의동맹휴학이나만세사건등을거처,6,25후의북괴치하에서도지하운동을

벌리던애국애족의정신(주:강릉시의남산에는당시지하운동을하다학살된애국학도들의무덤이있다.)이내

재되어있었고그영향으로자연스럽게군을나의보금자리로선택할수있었고기꺼이군생활을평생직업으

로선택할수있었다는생각이그것이다.

이에그시절그때의이야기를후에라도간직하고싶은마음에서아래에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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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강릉농고의우승컵]

최종업데이트2011-06-2610:05

1950년6월25일은일요일이었다.한반도는휴일을맞아달콤한잠에빠져있었다.그런데동이틀무렵동족상잔의

비극은시작됐다.북한군이탱크와화포를앞세워서기습적으로남침을했기때문이다.우리가너무나잘알고있는

6.25전쟁은이렇게시작됐다.잊어서는안되고잊을수도없는비극적인역사의시작이었다.


강릉농공고축구부는오랜역사와전통을자랑한다.(사진=연합뉴스)

재창단된강릉농고축구부와최재하교사

강릉농고축구부는1941년창단됐다.하지만이듬해축구부선수중일부가일반성인팀소속으로대회에나간게

발각돼해체되고말았다.학교내부에서도축구부존폐를놓고말이많았지만결국오랜회의끝에해체라는최후

의수단을사용할수밖에없었다.그리고시간이흘러광복을맞자학교측에서는새출발하는의미로다시한번

축구부를창단했다.1945년의일이었다.

하지만재창단한당시강릉농고축구부는오합지졸이었다.워낙낙후된곳이었기때문에체계적인훈련은물론

제대로된지도자도갖추지못했다.한차례해체를겪으며학교측의눈밖에난것도이유였다.선수들은밤이

되면오징어잡이배를타고나가용돈을벌정도였다.그런데이곳에부임한최재하체육교사가모든걸바꿔놓

았다.전문적인축구감독은아니었지만그는책을보고전술을공부하며선수들을지도했다.

축구에대한열정하나로오전에는수업을받고오후에는공을차고밤늦게까지일을했던학생들은최재하교사

가부임하자체계적인훈련을받으며강팀으로변모했다.그리고1949년대한체육대회에서감격적인우승을차지

하며고교축구최강팀자리에우뚝섰다.아픔을겪기도했던강릉농고축구부의우승에학교동문들과학부형들

도무척이나기뻐했다.최재하교사는여기에서멈추지않았다.“안주하지말고앞으로나가자.다음목표는학도

호국단체육대회우승이다.”


6.25전쟁으로서울시내건물이불타고있는모습.(사진=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우승을위해서울로향하다

학도호국단체육대회는학교체육의진흥을위해열렸던학생들의전국체육대회였다.비록지금은학도호국단체육

대회가사라졌지만전국소년체전을그전신으로보기도한다.학도호국단체육대회는최고권위의전국대회였다.

이대회에서우승하는것이곧최고의팀이라고인정받는길이었다.최재하교사는강릉농고를이끌고이대회우승

을위해합숙을하는등혼신의힘을다했다.그리고는대회가열리는서울로올라갔다.트럭에가마니를깔고11시

간이나걸린고생길이었지만고향으로향할때는우승컵을들고돌아갈수있을것이란희망에피곤한줄도몰랐다.

대회에나선강릉농고는목표를향해순항했다.1950년6월23일열린준결승전에서승리해다음날열리는결승전에

안착했다.강릉농고의결승전상대는한양공고를꺾고올라온대구고였다.강릉농고선수들은우승을할것이라는

자신감에차있었다.그런데결승전이열리기로한1950년6월24일이되자조직위원회측에서강릉농고와대구고에

이러한통보를내렸다.“비가너무많이오는관계로경기일정을하루미루도록하겠습니다.”

가뜩이나체력적으로고민이많던양팀은경기가하루미뤄지자환영하는분위기였다.그리고는다음날열릴결승

전을기대하며일찌감치잠이들었다.동이틀무렵북한군이탱크를앞세워3·8선을넘을것이라고는아무도생각

하지못한채말이다.지금처럼통신수단이발달한것도아니어서전쟁이일어났다는소식을실시간으로접할수

도없었을때다.강릉농고는오로지이대회에서우승하고우승컵을단채고향으로돌아가겠다는일념밖에없었다.


“총알을요리조리잘피해서어예든동살아오이라.”“어무이걱정꽉붙들어매이소.어무이아들아잉기요.

내는꼭살아돌아올깁니다.”(사진=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북괴군이남침했습니다”

1950년6월25일오전서울운동장.예상대로강릉농고는시종일관대구고를몰아친끝에감격적인우승컵을들어

올렸다.선수들이그라운드에서부둥켜안고기쁨을나눴고이어벌어질고려대와동국대의대학부결승전을위해

그라운드에서물러나라커룸으로향했다.“사실경기시작전에는긴장돼죽는줄알았다”며서로이야기꽃을피

우면서우승의기쁨을만끽하고있었다.직접강릉에서서울까지응원을온강릉농고이규영교장과학무과직원

등11명도우승의감격을함께했다.

그런데이때문교부김태식체육과장의연락을받은이유형대회진행위원이급하게본부석으로뛰어올라와헐

떡이며마이크를잡았다.“북괴군이남침했습니다.대회를중단합니다.”서울운동장을꽉채운관중들은비명을

질렀다.그리고는순식간에모두관중석을빠져나가피난준비를위해집으로향했다.감격적인우승을차지한

강릉농고선수들은이충격적인소식을듣고어안이벙벙했다.더걱정인건강릉까지가는방법이마땅치않다

는것이다.이유영교장은“인원이많으면이동하는데어려움이있을테니따로움직이자”고했고서둘러자리를

떴다.

최재하교사는걱정이었다.일단숙소로잡은낙원동여관으로선수들을돌려보낸뒤강릉행차편을수소문했지만

전쟁으로이미모든교통편은끊긴후였다.도무지강릉까지갈방법이없었다.꿈에그리던우승컵을품었지만이

우승컵을고향까지가지고갈방법은사실상없었다.그러던중최재하교사는학교측으로부터급한연락한통을

받았다.그내용은충격적이었다.“이유영교장선생님을비롯한11명전원이경기도마석고개에서인민군에붙잡

혀총살됐습니다.”


6.25전쟁이터지자아버지를등에업고강을건너피난을가는이는모습.(사진=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죽을각오로고향을향해

믿을수없는일이었다.그누구보다간절히우승을바랐고또그영광을함께했던이들이강릉으로돌아가는길

에운명을달리한것이다.어쩔수없이최재하교사를비롯한강릉농고선수들은여관지하실에숨어일주일동

안지내야했다.우승트로피를들고고향으로가환영을받겠다던꿈은모두수포로돌아갔다.잠시지하실에서

올라와살펴본서울은이미사람들이모두떠난폐허였다.하루하루지날수록인민군의포성은점점가까이들

렸다.

그러던중여관할머니는“딱한사정은알지만이제그만식량이떨어졌으니나가달라”고했다.“북괴군이서울로

들어왔다”는말도덧붙였다.결국최재하교사를비롯한강릉농고선수들은목숨을내놓고걷기시작했다.우승트

로피를가슴에품고기약없이고향을향해걸었다.죽을각오로산을넘고강을건넜다.이미강릉은인민군이점

령했지만그들은고향을두고갈곳이없었다.무작정그렇게걸었다.

“손들라우.”경기도의한산길에서였다.결국인민군에게발각되고만것이다.총으로무장한인민군은무리지어

산속을헤매는건장한남성들에게극도의경계심을보였다.강릉농고선수들은체념했다.‘이대로죽는구나.이

우승컵을어머니에게보여드리고싶었는데이대로죽는구나.’그때한인민군이말했다.“거가슴속에품은그것

좀꺼내보라우.”우승컵을지목하는것이었다.최재하교사는우승컵을품에서꺼냈다.“저희는강릉농고축구부

입니다.전국대회에서우승하고고향으로돌아가는길입니다.”

다시는이런비극은없어야한다.(사진=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6·25,슬프지만잊지말자

인민군이술렁였다.이미강릉농고의축구실력을잘알고있던인민군들은이들을어떻게해야할지고민했다.

한동안자기들끼리이야기를나누더니의외의말을내뱉었다.“조심히가라우.내래우승컵아니었으면다쏴

죽일라고했소.”하늘이도왔을까.강릉농고선수들은우승컵으로목숨을가까스로구했다.그리고두번이나

더인민군과마주쳤지만그때마다우승컵을본인민군은강릉농고선수들을순순히보내줬다.만약우승컵이

아니었다면그들은인민군의총에의해희생되고말았을것이다.그리고1950년7월12일.그들은서울을출발

한지꼭열흘만에단한명도죽지않고모두고향으로돌아왔다.

이후강릉농고선수들은대거학도병으로자원해최전방에서나라를지키기위해싸웠고최재하교사는강릉농고

교장을마지막으로정년퇴직할때까지학교를지켰다.국민훈장동백장을수상하기도했다.강릉농고가학도호

국단체육대회에서따낸우승컵은월드컵우승에비하면보잘것없는초라한성적이지만그들의이우승컵은그

어떤것과도바꿀수없는소중한존재다.우승컵으로목숨을구한이절절한이야기는우리의슬픈역사를대변해

주는대목이기도하다.

오늘은6·25전쟁발발61주년이되는날이다.오늘하루쯤은우리가이땅에서편하게살수있도록나라에목숨

을바친이들을생각해봤으면한다.그리고다시는이런슬픈역사가되풀이되지않기를바란다.

footballavenue@nate.com

김현회
前스포츠서울닷컴기자
前풋볼위클리축구기자 [출처: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625n02881?mid=s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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