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17우에노공원(上野公園)

와세다(早稻田)대학과함께우리나라유학생들을통해서널리알려진우에노공원(上野公園)을찾고보니공원의유래는내가생각하고있었던낭만과는거리가멀었다.옛날에이곳에서도쿠가와(德川)막부군과왕군과의치열한전투가있었고왕군이승리함으로써막부시대가막을내리고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단행되었던곳이었다.

그후전투에서폐허된이곳을우에노부흥계획에따라도쿄국립박물관,국립과학관,국립서양미술관,우에노동물원이들어서서현재의모습을갖추게되었다.

그런데거기에개를몰고서있는동상하나가있었으니,그가바로1868년메이지유신에서주도적인역할을하여성공시킨세사람중한사람인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그러나그는그후조선을정벌해야한다는정한론(征韓論)을주장하다가정부와대립하여1877년반란을일으켜구마모토성에서싸우다가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패배한후고향인가고시마로돌아가서자살하고말았지만메이지유신을주도한인물이라동상을세워놓은것이다.

그리고거기에는왕인(王仁)박사추모비가있었다.왕인박사는백제근수구왕때학자로일본에한자를전래해준인물이다.당시일왕이백제에사신을보내학덕높은학자를보내줄것을간청하자왕인이발탁되어논어와천자문을가지고일본에건너가일본왕의태자토도치랑자(兎道稚郎子)의스승이되었는데비문의내용은이랬다.

‘박사왕인은백제인으로당시백제에서여러거유와현인들의존경을받은문장도덕의군자였다.백제근구수왕때일본국응신천황은왕인을초대했다.왕인은천자문과논어등을가지고일본에건너와일본황태자의스승이되었다.…(중략).한국인왕인에대하여일본인은거국적으로경앙존중하지않는자가없거니와하물며한국인으로서그를경모하지않는다면누가한국의선현군자로써유림에낄수있으리요.공자는춘추시대에태어나만고불후의인륜도덕을밝혀서천하만세에유림의시조가되었고,박사왕인은공자돌아가신후760여년만에한국에태어나일본국태자에게충․신․효․제의도를가르쳐널리나라안에전수해1653년을계승하여왔다.천고에빛나는왕인박사의위업이야말로유구유대하며끝이없다.’

이비는1937년당시내선일체(內鮮一體)를부르짖던고노에(近衛)수상을비롯한황족과고관,문학자,승려,정치가등각계를망라한230여명이참여하여세웠다.이비가세워진것이태평양전쟁발발직전임을고려한다면내선일체를부르짖던불순한의도가있었던것으로보인다.

공원을거닐다가숲속에있는간에이지(寬永寺)를찾는다.이절은공원이생기기이전부터여기에있었는데부처님의가호로치열한전투에서도파괴되지않았으며우뚝솟은고주노도(五重塔)가유난히돋보였다.

석등이서있는뜰에는히로시마와나가사키의원자폭탄피해사진을전시해놓고반핵운동을전개하고있었다.절에다사진을전시해놓은것이어쩐지어색해보였지만2차대전이끝난지반세기가지났는데아직도전쟁의상처는가시지않았음을느낄수있었다.

우에노공원에는또하나의예상하지못했던것이있었으니,수없이많은노숙자들이었다.부랑자와거지들이공원숲속곳곳에다텐트를쳐놓고살고있었는데어떤사람은개까지기르고있었으니기가찰노릇이었다.

세계제2의경제대국임을자랑하는나라일본,그나라의수도인도쿄를돌아보면서자본주의경제의우월성에질투심마저느끼다가우에노공원에서수많은노숙자들을보니자본주의의맹점을보는것같아서씁쓰레한기분이들었다.세계제2위의경제대국이라는일본도거지문제는해결하지못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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