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장모님(7부)

다급해진 장모님이 작은 아들에게는 체면이 서지 않고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문경에 있는 큰아들에게‘나 좀 데려가 다오! 이젠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겠다’는 식으로 SOS타전을 했던 모양이다.

이 썰을 시작하며 언급 했지만….큰처남, 나 보단 두 살 위인 이 인간. 젊은 시절부터 정말 개구신 같은 인간이었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허우대 멀쩡한 이 인간 생긴 대로 팔 난봉꾼이었다. 대저 그런 인간들이 그러하듯 악독하진 않지만, 대체적으로 사기성이 농후하고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색잡기에 능한 인간들이다. 이상 열거한 표현 그대로 인생을 살아 온 위인이다. 계집과 바람피우다가 신상이 어려워지면 형제자매들에게 손 벌리기, 내일 틀림없이 갚을 테니 돈 빌려 달라기, 누구로부터 고소를 당했는데 돈 없으면 감방 간다며 형제자매 괴롭혀 돈 뜯기. 아무튼 정말 인생 더럽고 지저분하게 사는 인사였다.

큰처남이 문경에서 살게 된 동기도 워낙 개 같은 생활을 하며 형제자매를 괴롭히기에, 당시 필자가 문경 땅에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마련한 부지의 조경공사를 하며 그곳을 감독하라며 알바로 채용하며 머물게 되었는데, 얼마간 생활하며 그곳이 오미자 농사의 본산지이며 농사를 지어 보겠다기에 3천여 평의 수확 가능한 오미자 농장을 임대해 주며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경공사 감독을 하라고 했더니 업자와 작당을 하여 기천 만원 삥땅까지 쳐 간 사실이 나중 밝혀졌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 정도로 인간 이하의 개 구신이 큰처남이라는 인사다.

그런 큰처남에게 장모님은 전화로 SOS를 치며‘나 좀 데려가라!’고 하셨는데, 절대 제 어미와 함께 할 수 없는 큰처남이 선뜻 장모님을 모신다고 만방에 선포하고 장모님을 모시고 간 것은 작년 11월 12일이었다. 그렇게 장모님은 큰아들 집에 노후를 의탁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흘이나 나흘이 지났을까? 아내에게 장모님으로부터 하루에 십여 차례 이상의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번엔‘나 여기(문경) 살 수 없으니 나 좀 데려가 다오!’

한적한 산골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내 눈치를 보며 당혹해 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통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 우리가 모시겠다고 장담 했잖아, 그러니 모시고 오자!’ 아내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 결정은 오로지 나만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큰처남 내외에게 있었다. 다름 아니라 큰처남 내외는 장모님 수중에 남은 사글세 보증금 1500만 원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이 문제도 이미 산골일기에서 피력한 적이 있음)솔직히 그 돈은 장모님 돌아가시면 장례비로 이용하겠다고 했던 것인데 그걸 탐하는 큰처남이 정말 미웠던 것이다.

썰의 순서가 잠시 바뀌었지만, 큰처남 집으로 내려간 장모님 여전히 큰아들은 물론이고 며느리 되는 사람에게 여전히‘대가리에 똥밖에…’의 타박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아내에게‘나 좀 데려가 다오!’를 외쳤는데 아내는 아내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나의 통 큰 결정이 아내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큰처남이 장모님이 남겨 둔 사글세 보증금 1500만 원을 작은처남과 합의(장모님 모시는 조건)를 봤다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러시다면 그 돈 두 형제가 나눠 쓰되 장모님 저희가 못 모시겠습니다.’라는 한마디에 찔끔하여 긴 얘기 않고 그 돈을 돌려받았다. 그만큼 처남 형제가 장모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처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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