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The called constructor method for WP_Widget is deprecated since version 4.3.0! Use
__construct()
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내 이름은 알리킴. 한국인무슬림으로 30년 - 중동 천일야화
내 이름은 알리킴. 한국인무슬림으로 30년

[내 이름은 알리킴]기사와 기사에선 못다한 주절주절 이야기.

IMG_8908.JPG

기사에선 못다한 이야기▶우주베키스탄 여성이다.소견이지만 많은 우즈벡 여성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정착해 살고 있는 것 같다. 이태원 이슬람 사원에 우즈벡사람이 참 많은데 올해개인적으로 알게 된 여성십여명 모두 한국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하게 됐다. 하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의 미인이고, 가부장적 한국 남성에 순종적인 경향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최소한 내가 만난 한국거주 우즈벡 .여성 모두 한국어, 영어, 아랍어로 대화가 불가능했다. 알리 킴씨를 취재하면서 한국의 우즈벡 여성에 대해 호기심이 많이 생기게 됐다.

또 여담은, 상당히 우즈벡 사람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적이었다는 것.몇 달전 이집트 여대생 사마르(22)와 우즈벡 여자 질랄라(이화대 졸업 후 한국 사업가와 결혼)와 이태원에서 식사를 했다. 질랄라씨는 나보고 "너 무슬림?"이라고 짧은 한국어로 종교를 물어봤다. "아니, 나 크리스천이야" 라고 당연스레 대답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프라블름problem, 유 프라블름" 짧은 영어로 정적을 깨고 짧지만 무거운 말을 내뱉었다. 이런 아랍 국가에서 일년 반동안 살면서 모스크 안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종교차별적 얘기를 듣다니. 옆에 있는 사마르(이집트)가 오히려 질랄라에서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Anyway, 요점은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정착하는 우즈벡 여성이 적지 않다는 것 두번째, 아랍국가보다 원리주의적 색채가 짙은 듯한 우즈벡(중앙아시아)이슬람에 대해 조사해봐야겠다는 것.

IMG_8902.JPG

▲취재를 하는데 한 자리에서 참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2달 전 한국에 왔다는 아프가니스탄 ‘아저씨. 직업을 묻는데. 뭐 몇 번을 물어봐도 무조건 ‘비즈니스’란다. 마침 이 날 하얀옷을 입어 아프칸 아저씨와

사진 궁합이 잘 맞았다. ^^

하단부터는 조선닷컴에 게재된 기사.

너무 바빴다. 인터뷰 하는 동안 수십 차례 할랄고기 주문 전화가 걸려 왔다. 바빠도 마냥 즐겁다는 알리킴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자식 혼삿길 막힐 까봐, 무슬림이라 말도 잘 못했지. TV에서 촬영 와도 얼굴 나갈 까봐 다른 사람 불러 내 대역 시켰어.”

올해로 예순 아홉인 알리 킴(본명 김철)씨는 무슬림이다. 30여 년 전 ‘알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리에겐 무함마드 알리라는 권투선수로 익숙한 이름인 ‘알리’는 이슬람 초기 지도자로, 아랍권에서흔한 무슬림 남자이름이다.

“한 건설회사에 아는 분이 계셨는데, 아랍어를 배워두면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귀뜸을 주더라고.”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부터 일찌감치 출판업계에 몸을 담았던 그는 사업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새 길을 찾다가 이슬람 사원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읽게 됐는데, 기독교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이 많더라고. 이슬람 선교사에게 아랍어와 종교를 3년동안 배우고 나서 무슬림으로 개종했지.”

무슬림이 됐다고 말하지 않고 개종했다고 한 알리킴(69)씨는 이전까지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이었다.

“내겐 고마운 두 분이 계셔. 한 분은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가 됐던 신촌 창광교회 이병규 목사님이고 또 한분은 쿠란을 오랫 동안 가르쳐 주고 지금 정육점도 함께 운영하는 이태원 이슬람사원 라시드 선교사님이야.” 그에게 종교적 편견은 없는 것 같았다.

우즈베키스탄 무슬림에게 할랄 닭고기를 건내는 모습.
◆사우디 건설 노동자로

이슬람 사원 건축 때 공사판에서 일하기도 했고, 이슬람 사원 사무 직원, 출판 영업원 등 이것 저것 안해 본 게 없다는 알리킴씨는 1982년 아내와 아이 셋을 남겨두고 건설 노동자로 열사의 땅 사우디로 떠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우디는 돈만 벌고 빨리 떠나고 싶은 땅이었지만, 그에게 사우디는 쿠란(이슬람 경전)의 역사적 무대요, 요람이었다.

“모든게 신기했지. 버스를 탔는데 남녀칸이 완전 분리돼 있는 거야. 칸 사이에 손 하나 겨우 들어갈 구멍 하나만 뚫려 있더라고. 여성 승객들은 차비를 그 구멍으로 건내고 말야.”

콩나물 시루같은 서울의 만원버스를 타던 그에게 여자 옷깃도 닿을 수 없는 사우디 버스는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사우디 이야기의 첫번째 보따리다.

“사막 위에 우리가 잠실구장 같은 스타디움을 지었지. 아랍출신 노동자 10명에 한국노동자 3명 비율로 한 조가 이뤄졌는데, 말도 안되고 문화도 다르니까 서로 엄청 싸웠어. 능률도 안 오르고 문제가 많았지. 근데 그게 오히려 나한테 좋은 기회가 됐어.”

알리 킴씨는 이슬람 문화를 알고 있는 덕에 공구를 내려 놓고 대신 임시 현장감독관 일을 했다. 한국과 아랍 노동자간의 다툼을 말리고 통역 일을 했다는 알리 킴씨. 한국 땅에서는 정육점을 운영하며 이슬람과 한국 사회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육점을 찾는 무슬림 사람들에게 한국사람으로서 최대한 친절을 베풀지, 반대로 이슬람 사원을 찾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이슬람의 오해와 편견에 대해 설명해주고 말야. 그렇게 한 30년 살아 온 것 같아.”

◆한국 최초 할랄 정육점

2년 뒤 사우디에서 돌아 온 알리킴씨는 이태원 이슬람 사원을 찾았고, 태국인 라시드 이슬람 선교사의 제안으로 망해가는 할랄 정육점을 넘겨 받아 새로 시작했다. 할랄 고기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시킨 동물의 고기를 말한다.

“86년 아시안게임 때 무슬림 참가 선수들을 위해 소500마리를 잡았지. 당시 살람이라는 선교사가 주도해서 소뿐만 아니라 닭도 잡았는데, 고생 많이 했지. 나름대로 우리나라 아시안게임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 없었으면 참가한 무슬림 선수들, 다 난리쳤을 걸. 하하하”

우리나라 대부분의 할랄 고기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직수입된다. 세계 할랄 음식 시장 규모는 550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호주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할랄음식 사업을 적극 확대하는 방안을추진했다.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양고기의 95%는 모두 할랄 고기로, 각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데 알록달록한 히잡을 쓴 우즈베키스탄 무슬림이 정육점에 들어 왔다. “앗살라무 알레이쿰”이라고 알리 킴씨가 자연스레 아랍어로 인사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라고 무슬림 손님은 한국어 인사를 했다. 이어 “닭고기 2개 주세요”라며 손가락으로 브이(V)를 만들었다. 알리 킴씨는 냉동고에서 꽁꽁 언 닭고기를 꺼내 건넸다.

◆한국사회 속 무슬림

“솔직히 적지 않은 한국무슬림들이 이슬람에서 금기시 하는 술, 돼지고기를 먹어. 나도 알아.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술 한 잔, 삼겹살 한 점 안먹기 쉽지 않지.” 그는 한국에서 무슬림으로 살기가 녹록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 밖에도 하루 다섯번의 기도, 일 년 중 한달간의 금식(라마단)등을 지켜야 하는데 한국 사회의 특성상 힘들어. 나처럼 종일 이슬람 사원 옆에 사는 사람한테도 금식은 어려워.”

한국인 무슬림의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많은 경우가 취업이나 일을 위해서, 또는 학업-유학이 목적인 이름만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고정적으로 금요일에 이태원 사원 예배에 오는 한국사람은 40여명 밖에 안돼. 공식적으로는 4만명의 한국 무슬림이 있다고하는데 말야.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을 경제적 이익을 얻을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리킴씨는 현재 한국이슬람중앙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이슬람을 이익의 도구로 일삼는 몇몇 한국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비대위를 결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슬람도 불우한 사람을 돕거나 하는 사회봉사 사업을 펼치면서 한국 사회와 더욱 가까워야 된다고 생각해. 이슬람을 이해해 달라고 한국 사회에 일방적으로 고함만 쳐서는 안되겠지.”

알리 킴씨는 인터뷰를 마치자 “마앗 살라마(평화가 당신에게 깃들기를)”이라는 인사를 마치고 기도를 위해 이슬람 사원으로 향했다.

Leave a Reply